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축하해, 서진아!”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는 인파를 헤치며 간신히 조용한 곳으로 피신하니, 어디선가 지연이 나타나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네가 뛰어봤자 내 손바닥 위지. 안 받아?”
눈이 둥그레진 서진을 향해 지연이 꽃다발을 슬쩍 흔들었다.
“…고, 고마워.”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감회가 남다르다. 오늘의 공연이 특별했던 탓일까…?
별 감흥 없으리라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서진 역시 오늘의 공연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흥분감에, 지금도 몸이 잘게 떨리고 있을 정도로.
“정말, 너무 좋았어. 모든 게 정말 완벽하더라. 아니 그냥 완벽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래. 딱 모든 게 서진이 너다웠어.”
“칭찬이지?”
“물론이지. 어머님도 무척이나 감동하셨던데… 기자들이 몰려들길래 내가 뒷문을 안내해 드렸어.”
아. 어느덧 어머니마저 얼굴이 알려져 기자들의 타깃이 된 모양이었다. 지연의 재빠른 판단에 서진은 새삼 감사를 표했다.
“넌? 넌 괜찮아?”
“나? 희한하게 못 알아보더라? 다행이지.”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공동우승자로서도, 서진의 오랜 파트너로 유명한 ‘서지연’으로서도.
“….”
서진은 괜히 미안해져 고개를 떨궜다.
“난 괜찮아. 우리 중 네가 첫 스타트일 뿐인 거니까. 카네기 홀 독주회라니… 정말 자랑스럽다.”
어디까지나 공동 우승인데, 가을에 예정된 차이코프스키 주최 측에서 여는 콘서트 외에는 아직 따로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이 잡혀 있지 않은 지연이었다.
물론 다른 공연은 엄청나게 많이 잡혀 있었다. 지연 역시 만만치 않게 러브콜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예술제에서의 솔리스트도 상당히 의미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카네기 홀 독주회만 할까.
지연은 무려 올해의 차이코프스키 콩쿨 우승자다. 아이작 스턴 홀에서의 독주회를 여는 것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지만, 그 정도 스펙이면 얼마든지 가능한 무대인데….
그런데 하필이면 서진과 ‘공동’ 우승을 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존재가 희미해진 게 문제였다.
처음에 서진은 우리가 공동 우승을 했으니 연주회 역시 공동으로 열자 제의했지만, 지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절했다.
애초에 카네기 측에서 독주회 제안을 한 건 자신이 아닌 서진이었으니까. 거기에 끼워 팔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둘의 케미 너무 좋더라. 찬윤 선배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줘.”
찬윤 역시 일찌감치 기자들을 피해 도망갔다. 공식 인터뷰는 어차피 따로 잡혀 있으니, 사적으로 시달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응. 꼭 전해줄게.”
“그나저나 우리 서진이, 오오. 착한 일 좀 했던데?”
“응?”
“장학금 기사 봤어.”
아니, 그게 벌써 기사가 났담…?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한 일인데,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는….
“아, 으응. 왠지 부끄럽네.”
“부끄럽긴. 정말 멋져.”
글쎄. 멋진 일이랄 것까지야.
서진은 그저 소외계층 출신이었던 자신처럼 돈이 없어 음악을 하지 못하는 이가 없도록, 물질적으로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한데 과거 서진의 가정형편이 알려지며, 그 미담이 유난히 크게 알려진 것이다.
원래 서진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제 가정형편을 대외적으로 최대한 밝히지 않으려 했다. 자식을 가난하게 키운 것에 늘 죄책감을 가지는 그녀였으니까.
괜히 자수성가네 하며 잘난 척한답시고 어린 시절에 대해 밝히면, 어머니가 더욱 상처받을까 봐.
한데, 오히려 선희가 적극 권했다. 좋은 뜻이니 널리 알려야 혜택받는 학생들이 생기지 않겠냐며, 어차피 숨기려 든다고 완벽히 숨겨지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공공연하게 알리라고. 그래서 기부를 하며 자신의 어려웠던 형편을 살짝 털어놓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이번 기부 건이랑 맞물리며 대외적으로 좋게 알려진 듯했다.
“하하. 돈 많아지니까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좋네.”
“그거 알아? 너 정말 멋진 거.”
“어? 야, 어색하게 왜 그래….”
서진이 장난스레 넘기려 했지만, 지연은 가만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몰라. 네가 돈까지 많아지니까, 내가 진짜 내세울 게 하나도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지연이 네가 얼마나 대단한데.”
“흥, 한서진 앞에서… 됐거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도 정도가 있지. 아무튼, 공연 성공 축하해. 이번 수익도 다 기부한다며?”
지연의 말대로 서진은 이제 제법 부자가 되었다.
서진 정도의 네임 밸류면 공연 한 번에 티켓값만 수십억 단위가 오간다. 평균 티켓값을 십몇만 원만 잡아도, 2천몇백 석이면 그것만으로도 몇억 원. 고작 하루 치 티켓값이 저 만큼이니, 그렇게 일주일 공연이면 이미 수십억인 것이다.
물론 그게 다 연주자에게 돌아오는 건 아니고, 공연장 및 매니지먼트, 함께 무대에 선 이들과도 분배해야 하니 떨어지는 몫은 확 줄어들지만, 어쨌든 작정하고 돈을 벌고자 하면 며칠 간의 공연으로 몇억 정도는 기본인 것이다.
게다가 서진 정도의 존재면, 하고자 한다면 일 년 내내 스케쥴을 꽉 채울 수도 있으니 돈 버는 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뜻. 거기에 더해 각종 저작권 수입, 너튜브 조회수, 강연 수입 등등…
좀만 더 벌면 어쩌면 지연보다도 재산이 많아질지도 모를 수준. 물론 지연이 아직 상속을 마치기 전이라 그런 것이지만, 어쨌든 서진은 이제 최소한 경제적으로 부족할 일은 영원히 없을 터였다.
“응. 이번에 만든 재단에 전부 기부하기로 했어. 돈이야 앞으로 또 벌면 되니까.”
그만큼 자신이 있는 서진이었다.
이 모든 것들에 서진은 그저, 이제 어머니를 제대로 호강시켜 드릴 수 있겠다며 기쁠 따름이었지만…, 지연은 어쩐지 조금 쓸쓸한 표정이었다.
이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구나… 싶어서.
저 멀리 혼자 나아가는 서진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죽어라 쫓아가는 것뿐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길이 멀게 느껴지는 걸까.
* * *
독주회에 이어 뉴욕 예술제도 코앞으로 훅 다가왔다.
카네기 홀의 독주회도 독주회지만, 서진으로서는 예술제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오케스트라 학생들을 맡기로 한 일도 그렇고, 한국에서 올 K-오케를 맞이하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그야말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최선을 다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이자크에게 흔쾌히 하겠노라 말한 영화음악 쪽으로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 그만큼 열정을 불살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후….’
일단, 악장이 문제였다.
지난번 요시모토인가 하시모토인가 하는 악장을 쫓아낸 후, 그사이 새로 악장을 뽑아놨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악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래도 일단 큰 문제는 없기에 서진은 일단 연습을 진행했다. 바로 다음 주가 공연이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요시모토를 쫓아낸 서진이 폭탄 선언을 한 것이었다.
-저는 지휘자로서 여러분 앞에 설 생각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서두로 꺼낸, 이번 공연에서 하고자 한다는 새로운 도전.
바로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바로 이걸 위해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지휘를 하는 대신 천천히 밑밥을 깔았던 것.
서진의 현재 정확한 포지션은 ‘지휘자’가 아닌 ‘예술감독’이었다. 비록 이번 음악제에 한정해 주어진 자리였지만, 어쨌든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예술제에 참여하는 것을 총괄하는 역할이지, 반드시 지휘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명분으로 서진은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들을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서진은 분명 이들을 지도하고 있긴 하지만, ‘지휘자’로서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스스로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을 뿐이니까.
단원들은 처음에는 지휘자 없는 연주에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어느덧 익숙해진 건지 무리없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
저들도 느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지휘자만을 바라보고 하던 때와는 또 다른 효과가 난다는 것을.
…한데,
“잠깐.”
시작은 좋았는데, 진도가 영 더디다.
‘무리였나… 아니면 호흡의 문제인 건가.’
또다시 소리가 안 맞는다. 꼭 이 부분에서 문제였다.
서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며 다시금 강조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를 보고 의지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중앙의 지휘자를 바라보는 대신 다른 모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마치 앙상블을 하는 것과 같이.
누누이 언급한 부분이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편성이 크지 않은 챔버 오케스트라에서는 종종 이러한 시도가 있어 왔다지만, 지금처럼 70명에 육박하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서는 해외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박자와 화음이 잘 맞아 떨어지는 고전음악도 아닌, 불협화음과 난해한 리듬으로 유명한 현대음악으로.
하필이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다.
솔직히 말해 듣는 것만으로도 난해한데, 지휘자도 없이 서로의 소리를 듣고 맞추려니 이게 지금 안 맞아서 이런 요상한 소리가 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건지 헷갈릴 만도 했다. 특히나 자신의 파트를 연주하고 있을 때면 가만히 감상하고 있을 때만큼 객관적으로 다른 소리를 듣기 어려운 법이니까.
모두에게 총보를 보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파트의 진행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물론 제 파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수도 없이 많은 다른 파트들을 전부 파악하는 건 웬만한 이들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서진도 거기까지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현재 자신의 파트가 내고 있는 소리와 긴밀히 엮여 있는 일부 다른 파트. 적어도 그 정도만 고려해도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거시적인 시각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것.
“…잠시 쉬었다 다시 하지요.”
서진은 찌푸린 기색 없이 담담히 고했다. 누군가는 우려를 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이 정도도 충분히 괜찮게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줄리어드 학생들이니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가능한 것이겠지.’
지금 상황은 한국에서 했던 것과는 또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저 안에 서진이 직접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나서서 지휘를 하거나, 아니면 악장으로서 함께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나갔다면 모를까, 둘 모두 아닌 역할로서 연습을 시키자니 한계가 있는 것이다.
* * *
쉬는 시간,
결국 몇몇 이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근데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이러다 괜히 망하는 거 아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