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8
18화
바이올린은 피아노와 달리 평균율 악기가 아니라는 것.
한 옥타브를 12개의 음으로 일정하게 쪼개 계명을 만들어 놓은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은 음의 비례로 조율하는 순정률 악기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두 악기의 음정은 미묘하게 다르다. 피아노가 내는 낮은 솔과, 바이올린 개방현이 내는 낮은 솔의 음이 미묘하게 다른 것이다.
귀가 엄청나게 예민한 서진은 그 차이가 거슬렸다. 그래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연주할 때는 그 미묘한 음의 차이를 조절하기 위해 개방현으로 소리를 내는 대신 평균율 음정에 맞춰 음정을 짚는 걸 선호했다.
“이번에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했으니까, 친구랑 듀엣을 했을 때와 달리 피아노에 맞추고 싶었어요.”
“….”
다비트는 할 말을 잃었다. 현악끼리 할 때와, 피아노와 맞출 때의 차이를 고의적으로 두려 했다니….
보아하니 거의 본능적으로 한 행동인 것 같은데,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눈으로 보고도, 직접 대답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한 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완벽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일까.
단순히 뛰어난 기교와 감각을 가진 특별한 재능의 아이, 정도가 아니었다.
바이올린에 영혼이 있다면, 분명 이 아이의 심장과 함께 존재할 거라고 그렇게 다비트는 생각했다.
“내가… 다른 것보다는 음… 그래,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네.”
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 게 도움이 될까, 고민하던 다비트는 이내 방향을 잡았다.
서진은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지겹게 들으며 자라왔지. 성인이 되기 한참 전부터 작품활동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엄격한 부모님으로 인해 오직 바이올린만 연습하던 어린 시절이었다고. 연습뿐 아니라 빽빽한 공연 일정에 음반 녹음까지. 친구들과 노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덕분에 자연히 따돌림을 당했지. 그러다 진학하게 되며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지게 되자, 완전히 엇나가게 되었지 뭐야. 술, 여자…, 음. 거기까지만. 아무튼 결국 학교에서도 퇴학당했지.”
서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부모님과 의절하게 되었어. 덕분에 음악을 하기 위해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굴러야 했지. 이벤트 연주 아르바이트는 당연하고 그 외에도 온갖 잡일, 청소, 빨래방, 심지어는 똥 변기까지 닦아봤다고.”
어쩐지 공감되는 이야기에 서진은 쓰게 웃었다. 자신 역시 아르바이트라면 이골이 나도록 해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때부터 오히려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아. 정말로 지독하게 고생했지. 에어컨도 없는 뉴욕의 골방에서… 오죽하면 냉장고에 머리를 처박아가며 땀을 식혔을까.”
“…푸흣.”
이 대목에서는 서진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렇게 졸업했는데, 내 앞을 기다리고 있는 건 차가운 현실이었어. 나는 고작해야 해마다 우르르 쏟아지는 줄리어드 졸업생 중 한 명에 불과했으니까.”
…이게 바이올린 전공자의 현실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줄리어드 졸업생이, 먹고 살길이 없어서 막막했다는.
“….”
서진 역시 회귀 전 생에서 똑같은 고민을 했기에 현실을 알고 있었다.
음악을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그 불투명한 미래.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 돈은 있는 대로 드는데, 다시 회수가 거의 불가능한.
웬만큼 잘나도 음악가로서 이름을 알리기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한예종, 서울대, 해외 명문대 유학… 아무리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름 이 바닥에서는 이름을 날린다 한들, 대중들 입장에서는 이름 모를 바이올리니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가 되기란 요원한 일.
그러니 돈을 벌기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공연 한 번 하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지출되는데, 아무리 레슨으로 수입을 얻는다 한들 택도 없는 것이 현실.
이력에 ‘한서진 귀국 독주회’라는 글귀 한 마디 넣으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무대를 열어야 할까.
뭉뚱그려 ‘솔로, 챔버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연주 활동’이라는 경력 한 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각고의 노력들. 소위 말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자비를 쏟아부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워낙 발에 채고 채는 게 전공자이기에, 웬만한 이력으로는 큰 의미도 없었지만.
“….”
“….”
이미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한 나이 좀 있는 학생들은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그러고 있는데, 돌연 다비트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더니 아무렇게나 음을 그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굳은 분위기 속에 다비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정답은 소리에, 내 마음에 있었더라고.”
“….”
“별 건 없었지. 그냥, 그 후로도 그때까지와 마찬가지로 살았다고 해야 할까. 죽을힘을 다해. 계속 청소도 하고, 길거리에서 연주도 하고. 연주 아르바이트도 뛰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지. 언젠가 내게도 기회라는 게 찾아올 거라고 믿고. 그래서인지 정말로 기회가 찾아왔고, 결국 꿈을 이뤘지.”
···아.
상황은 달랐지만, 서진은 그 열망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회귀 전 그때, 마지막이 되었던 그 콩쿨 무대에 서기 위해 얼마나 죽을힘을 다했던가.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붙들고 바이올린을 연습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텨 냈다.
만약 그때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시시각각 몸이 나빠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
그건 바이올린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래서 이런 기회를 다시 얻은 게 아닐까.
“바로 그 갈망이, 지금 네게 보여, 소년.”
“….”
“그러니까 아무것도 보지 말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리라고.”
다비트가 덧붙였다.
분명 전공을 계속하다 보면 현실의 한계가 올 거라고. 저 바깥의 현실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지만 포기하지 말라고. 절대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끝까지 가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네게는 그런 재능이 있다고.
“….”
서진은 묘한 감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회귀의 기적에 힘입어 뒤도 안 돌아보고 온통 음악에 빠져 있지만, 언젠가 현실의 순간이 닥쳐오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 나는 지병의 문제도 있고 하니까….’
불과 몇 년만 지나도 쉽지 않은 현실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
다비트의 말은 그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매우 귀중한 조언이었다.
“…감사합니다.”
서진은 다비트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그의 말대로, 노력의 결과 그는 현재 거장이라 불릴 만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있다.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내가 그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던 딱 한 가지. 그건 나만의 소리를 잃지 않는 거였어. 흔히들 학생들은 소위 거장이라고 하는 이들의 음반을 들으며 소리를 모방하려 하지.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소리를, 고유의 색깔을 찾아내야 해. 사람은 모두가 각기 다 다른 음색을 지녔으니까…,”
아니, 나도 반드시 해내야지. 이런 기회를,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얻었는데, 반드시 성공해 내야지.
열망과 갈망이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건 내가 직접 겪어본 경험을 바탕으로 해줄 수 있는 말로….”
이 부분은 특히 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주가일수록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골방에 처박혀 악기만 붙잡고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
“학교생활도 즐겁게 하고, 친구도 만나 놀고, 여행도 가고…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결국 자신의 음악 세계가 되어줄 테니까.”
다비트는 이 아이를 아주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었다. 얼마나 찬란히 피어날지, 어떤 보석으로 피어날지 그 미래가 기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 아직 어린 서진이 자칫 천재라는 재능의 감옥에 갇힐까 우려되는 것.
자신을 향한 조언에 서진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역시 거장다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중한 조언들이었다.
짝짝짝짝짝!
수업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둘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서로를 깊이 새기게 한 채 기대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다.
* * *
강윤수는 생긴 것과 달리 엄청난 사고뭉치였다.
초등 고학년의 혈기왕성한 나이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현악기를 전공하는데 손가락을 조심하기는커녕 이리저리 날고 뛰고 난리다. 도무지 걸어 다니는 꼴은 본 적이 없는 것이, 항상 뜀박질이 디폴트인 수준.
‘나도 저 나이 땐 저랬지….’
신체나이는 같은데, 정신연령의 문제인가. 예전처럼 호르몬이 날뛰지 않는다. 바이올린을 하는 입장에서 다행이랄까.
어휴,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야! 빨리 안 튀어와!? 너네 빼고 한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입에서는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이런 애들을 데리고 연습을 하려니 하아….
그나마 나이답지 않게 철든 지연 덕에 한결 수월했다. 혼자 애 둘을 보는 것보다야 당연히 둘이 하나를 보는 게 쉬우니까.
“또오!? 아까도 연습했잖아!”
“알았어. 너희는 뺀다.”
“앗 아냐아냐! 가, 갈게! 바로 갈게!”
마스터 클래스는 끝났지만 여전히 다양한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그중 서진이 가장 신경 써 준비하고 있는 건 바로 실내악 수업이었다.
실내악 수업은 연주자들 간에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한 수업으로, 바이올린 외에 다른 과 사람들과도 만나볼 수 있어 다양한 음악적 경험뿐 아니라 인맥을 맺기에도 좋은 기회였다.
독주와 합주는 또 다른 이야기.
꼭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호흡을 맞출 줄 알아야 실내악이나 협주곡 등의 무대에서 설 수 있다.
윤수와 지연, 그리고 서진. 셋은 어느덧 자연스레 같이 다니고 있었다.
이 음악제가 끝나면 방학 마지막 무렵에는 한예종의 행사인 자선 공연이 있는 상황. 지연이나 자신이나 피차 따로 시간을 내긴 어려우니 이왕 여기서 만난 거 틈틈이 듀엣곡을 맞춰보기로 하다 보니 자연스레 팀을 이루게 되었고, 거기에 친화력 좋은 윤수가 끼다 보니 얼떨결에 트리오가 결정된 것.
거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악기도 더 끌어들인 결과 사람이 더 늘어 어느새 콰르텟이 된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 작은 홀.
라~~
짧은 조율이 끝나고 곧바로 곡이 시작되었다. 과제곡은 자유곡이었다.
슈베르트의 송어.
합창대회에 워낙 자주 쓰여 익숙한 노래로, 정확히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퀸텟, A장조. D.667의 4악장에 해당하는 곡이었다.
대부분의 현악 4중주처럼 바이올린 두 대가 아닌, 바이올린 한 대와 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 곡이었지만, 파트를 전부 구하지 못한 네 명은 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서진과 지연의 바이올린 두 대와, 이번 합주팀을 꾸리며 알게 된 첼로 한 명. 그리고 윤수가 하기로 한 비올라.
이번 GMMFS에 비올라 지원자가 한 명도 없기에, 비올라도 배운 적 있던 윤수가 바이올린 대신 비올라를 맡기로 한 것이다.
익히 아는 그 선율. 라장조의 4악장이 시작되었다.
서진은 슈베르트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 송어만큼은 달랐다.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화음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슈베르트 특유의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선율. 유려하고 감미로운 소리가 너울너울 울려 퍼졌다.
합주는 서진이 다른 의미로도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었다. 한예종에서도 관련 수업이 없진 않았지만, 뭐든 경험은 많을수록 좋은 법.
다른 이와 소리를 맞추는 훈련도 그렇지만, 합주에 있어서도 자신 특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함께 어우러지는 다른 소리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등등이 궁금한 것이다.
‘아직은 이 능력 자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