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자신을 쫓아낸 서진에게 이를 갈며 확 망해버리길 바라는 심산으로, 과연 어떻게 하는지 보기나 하자며 찾아온 것이었는데….
슬쩍 발걸음해 본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아아….”
어째서 그토록 경거망동했을까.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더라면…. 저 모든 깨달음과 영광이 전부 제 것이 되었을 텐데.
식견이 짧아 보는 것만으로 배움이 차오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한 단계 넘게 해 줄 만한 어떤 깨달음이.
그 모든 것을 놓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저 안에서 함께했더라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배워갈 수 있었을 텐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제는 저 역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무대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 * *
지연의 연주와 K-오케의 연주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이었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서진은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들의 공연을 보러 왔다.
지연은 뉴욕필과 협연을 하기로 했다. 당당히 솔리스트로 무대에 선 지연의 모습에 서진은 괜히 제가 다 뿌듯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64.
지극히 아름다운 선율이 고고하게 흐른다.
잔잔한 반주를 배경으로 시작된 바이올린 솔로가 점점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오케스트라가 가세하며 주제를 반복한다.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감미로움을 지닌 곡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별칭 그대로를 구현해내는 지연의 연주가 곡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낭랑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율이 쉬지 않고 노래하며 관객들을 매혹의 세계로 인도한다.
가히 최고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음악.
서진은 아직 이 곡을 공연 레퍼토리에 올려본 적이 없어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서진이라도 이것만큼은 지연을 못 이길 것 같다고.
그만큼 지연의 바이올린 음색이 몹시 “예뻤다.”
관용구처럼 쓰이는 단순히 ‘아름답다’라는 느낌이 아니라, 딱 그녀처럼 예뻤다.
작은 새가 지저귀듯, 맑은 계곡물이 흐르듯 투명하고 맑은 선율. 충격적일 정도로 예쁘고 또 예쁜 소리가 났다.
마치 녹음된 음반을 듣는 듯 또렷하고 정직한 연주는, 회귀 전 한때 ‘얼음 공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지연의 연주 특징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정석적’이라는 말이 빠질 수 없으니까.
거기에 그녀 특유의 섬세한 컨트롤이 더해지며 멘델스존을 완성시켰다.
이렇게 엄청난 재능을 가진 지연이, 자신이 곁에 없던 회귀 전의 생에서는 음악을 도중에 그만두었다니…. 생각해보면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지금은 자신이라는 변수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어 버린 상황. 부디 그녀의 인생에 더 나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면 좋겠는데….
“넌 꽃도 안 사 오니!?”
…다른 영향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로 인해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
공연이 끝나고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무대 뒤로 찾아간 서진은 빈손으로 왔다며 대놓고 구박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지연에게는 제법 여러 번 꽃을 받았었지.
“…아, 미안. 생각을 못 했어.”
지연은 ‘흥’하고 삐진 척을 하면서도 서진이 와 준 게 기뻤는지 입가를 씰룩였다.
“됐어. 나중에 근사한 데서 밥이나 사. 파인 다이닝으로.”
“당연하지. 만회할 기회만 주신다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서지연 양.”
“치. 그나저나, 어제의 네 무대 정말 대단하더라.”
“내 무대는 무슨. 그냥 원래 잘하는 애들을 약간 손봐서 내보낸 게 전부인데.”
“으이구, 적당히 겸손하시고. 기사나 봐봐. 난리더라.”
“기사? 벌써?”
벌써는 무슨. 어제 일이면 이미 시끌벅적 난리가 나고도 남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한서진’이라는 키워드에 얽힌 일인데.
[한서진의 새로운 음악적 도전! 초연 때보다도 충격으로 다가온 ‘봄의 제전’. 한서진이 도전한 ‘지휘자 없는 봄의 제전’은 과연…,] [한서진이 시도한 ‘지휘자 없는’ 연주는 불과 19~20세기경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지휘자’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한 혁신적인 시도로…,]“그러게. 벌써네. 아니 근데 이게 뭐 그리 새로운 일이라고…? 이게 내가 한 게 처음도 아닐뿐더러, 나 역시 여기서가 처음도 아닌데. 한국에서도 이미 해본 일이었는걸.”
“하지만 여긴 한국이 아니잖아? 미국 사람은 원래 남의 나라 일 모른다고.”
“그런가….”
“‘한서진’ 이름 석 자만 들어가면 일단 난리인 것도 있지만, 확실히 대단하긴 했어. 같은 ‘한서진’ 키워드가 들어있는 우리 K-오케가 걱정될 만큼. 하필이면 바로 오늘이라….”
“에헤이, 지금 우리 K-오케 무시하는 거?”
“됐고, 얼른 가보기나 하자.”
지연은 서진의 어설픈 농담을 못 들은 척 등을 돌렸다.
* * *
이제 드디어 K-오케의 차례였다.
과연, 줄리어드 오케스트라와 K-오케스트라, 어느 쪽이 더 인상 깊은 무대를 보여줄지.
자신이 나름대로 관계되어 있는 악단이 두 개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어쩌다 이렇게 문어발처럼 온갖 곳에 관련이 되어서는….
그러한 생각도 잠시, 연주가 시작되자 서진은 모든 잡생각을 잊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연주였다.
말러의 교향곡 No.5. C♯ Minor.
지휘자는 링컨 실내악 협회의 터줏대감이자 피아니스트 출신인 유명인사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난 지휘에 오케스트라가 비장함을 토해냈다.
역시 말러. 웅장하다.
이 교향곡 5번은 말러의 사연 있는 곡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악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었다.
말러가 아내가 되는 알마 쉰들러를 만났을 때 작곡한 곡으로. 그 아름답기로 유명한 악장 ‘Adagietto’가 연애편지의 구조를 가지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곡을 완성해 놓고는 오케스트레이션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뜯어고치게 되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끝없이 수정했을 만큼. 그래서 수정에 따라 몇 가지나 되는 버전이 존재했다.
이중 지금 연주되는 버전은 1964년 국제 말러 협회에서 출판한 유니버설 에디션.
…세상엔 정말이지 아름다운 곡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서진으로서도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곡들도 아직 수두룩 많았고, 심지어는 아직 존재조차 모를 명곡들도 있을 터였다.
앞으로 펼쳐질 긴 미래에, 그러한 명곡들에 하나씩 도전해 볼 생각을 하니 새삼스레 심장이 뛰었다.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명곡을 연주하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 역시 언젠가 저러한 명곡의 주인이 될 수도 있는 일. 작곡가로서의 도전 역시 아직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었다.
또한 자신이 만든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마음 맞는 악단과 함께 연주해 내는 것 역시 심장이 뛰는 일이었다.
아직 이렇게나 할 게 많다는 사실이 어찌나 기쁜지. 음악가로서 이보다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러한 감상을 하며 서진은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친구들의 연주는 서진이 온 마음을 열고 흠뻑 빠져들 만큼 훌륭했다.
함께 연주하는 저쪽 악단과의 호흡 역시 좋았다. 저쪽에서 한국으로 원정 온 게 한 번, 그리고 K-오케가 이쪽으로 넘어온 게 고작 얼마 전으로, 시간적으로 빠듯했을 텐데도 무척이나 조화로운 소리를 자랑했다.
그만큼 K-오케의 연주 수준이 성숙해졌다는 뜻일 터. 서진은 흐뭇함에 연신 미소를 지었다.
4악장 Adagietto에 이르자 서정성은 극에 이르렀다.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 사용된 음악이기도 한 4악장은 어딘지 모르게 광활한 바다 가운데에 편안히 침잠하는 느낌을 주었다.
저 까마득한 우주 너머로 영혼이 유영하는 듯한 이 기분. 유체이탈한 영혼이 두둥실 떠올라 멀리 날아간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긴 여행을 떠나는 듯 너무나 구슬픈 바이올린의 선율, 그리고 영롱한 하프의 소리.
과연 4악장이 연가인가, 혹은 삶의 비애에 대한 성찰을 노래하는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 연주가 말러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그러한 수준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성장했을 줄이야….’
한때 윤수에겐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어찌 보면 돌고 돌아 더 잘 된 것 같다.
윤수는 비올리스트이기에, 바이올리니스트만큼 솔로 공연이 많지 않았다. 리처드 닐의 경우처럼 비올리스트도 솔리스트로 충분히 공연을 열 수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이올리니스트에 비할까.
그런 윤수에게 있어 호흡이 맞는 악단은 매우 중요할 터. 비올리스트로서의 솔로 활동과, 오케스트라 활동을 병행하기에 더없이 든든한 무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 * *
“와, 이거 어워드가 정말로 박빙이겠는데?”
“최고의 무대, 어느 공연이 뽑힐까?” “봄의 제전도 충격적이었는데, 말러 완전 대박!”
“나는 그 K-오케인가가 한 한서진 곡도 좋았어.”
“아, 그 바로크 음악이 한서진 곡이야?”
엄밀히 말해 바로크 음악은 아니었다. 바로크 고악기로 연주한 현대음악에 가까운 곡이었으니까. 아무튼 원곡이 한서진이라는 말에 새삼스레 주목을 받았다.
“어. 한서진 걸 베이스로 편곡해서 연주한 거라더라.”
“어쩐지… 한서진 느낌 나더라. 신기하네. 분명 현대곡인데 어떻게 편곡한 거지? 고악기가 찰떡이던데….”
삼삼오오 떠들던 관객들은 역시 한서진이라며 엄지를 척 세웠다. 이번 예술제가 유독 여기저기 ‘한서진’ 묻지 않은 게 없는 듯하다. 그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너무 황홀할 지경이랄까.
“역시 한서진. 현대음악의 아버지! 분명 똑같은 말러인데, 번스타인이 지휘한 베를린 필 공연보다 어딘지 모르게 현대적인 느낌 나더라.”
“읭? 이 연주가 한서진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고 나이가 몇인데 벌써 아버지야….”
“저거 한서진 오케잖아.”
“뭔 소리야. 한서진은 정작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야, 누가 보면 한서진이 지휘라도 한 줄 알겠다.”
“그래도 영향력이 남아있지. 색채라든가….”
그렇게 예술제를 보러온 이들은 하나같이 한서진의 이름을 담았다.
한서진이 예술감독을 맡았다는 줄리어드 오케스트라의 ‘봄의 제전’도 충격적이었고, K-오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한서진과 함께 활동하던 ‘서지연’이라는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도 엄청난 기량을 선보였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으니….
“뭐!? 한서진이 내일 크로스오버 공연한다고?”
“어? 진짜? 프로그램 안내에 전혀 없던 건데?”
“다비트랑 같이 공연한대!”
“대박!”
한 마디로 서프라이즈 등장이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