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응? 뭘?”
넌 이미 역사책에 예약되어 있다고.
“…아냐.”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지연은 속으로만 말했다.
* * *
카네기 독주회부터 시작해 뉴욕 예술제까지 이어진 한서진 레전드 시리즈. 뉴욕을 온통 열광케 했던 한여름 밤의 축제. 그 한바탕 꿈결 같은 시간이 끝났다.
다른 일정이 있어 예술제를 보지 못하고 먼저 돌아간 찬윤을 비롯해 지연과 하윤, 윤수까지 이제 전부 귀국했다.
이제야 정말로 혼자 뉴욕으로 건너왔다는 게 실감이 나서, 서진은 왠지 조금 쓸쓸해졌다.
“아들, 고생 많았어.”
그래도 어머니가 곁에 함께 있어 참 다행이었다. 회귀 전까지 합치면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서진이었지만, 그래도 향수병이란 나이에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는 법이었으니까.
“엄마. 오자마자 한바탕 정신없으셨죠?”
정신없긴… 오히려 무척 즐거웠다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선희 역시 당연히 예술제를 보러왔다. 그녀가 특히나 좋아했던 건 당연하게도, 아들이 직접 등장한 크로스오버 공연이었다.
선희는 의외로 크로스오버에 푹 빠져버렸다. 엄마는 역시 우아한 클래식보다는 이쪽이 좋다며.
그나저나 코로나가 터지면 기껏 어머니까지 불러 정착한 게 무색하게도 금세 돌아가야 할 텐데…. 하지만 아직 모르는 일인데, 오시겠다는 어머니를 말릴 수도 없어 일단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금 평화로워진 일상.
서진은 줄리어드 생활에 본격적으로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유학이라 해봤자 실은 별것 없었다.
수업을 듣는다기보다는, 이자크와 주로 함께 연주하며 기탄없이 의견을 나누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서로 조언도 건네는 식으로 배워나가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렇게 한편으로는 이자크의 가르침에 매진함과 동시에, 쉴 새 없이 찬 공연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바빴다.
콩쿨을 끝낸 후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다시 바삐 스케쥴을 채울 시간. 서진의 일정은 가을에 열릴 카네기 홀에서의 우승자 공식 콘서트를 비롯해, 하반기 내내 해외 투어로 꽉 차 있었다.
덕분에 기껏 줄리어드에 온 게 무색해진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한국을 거점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뉴욕을 베이스로 주로 유럽과 북미 무대를 도는 일정이었기에, 비행시간이나 항공 스케쥴을 고려하면 한국보다는 이곳이 훨씬 편했다.
* * *
“오… 바로크?”
“네. 괜찮을까요, 이자크?”
한편으로는 영화 음악 제작으로도 바빴다. 원래는 진즉 끝마쳤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했고 영화 촬영도 지연되었다고 해서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생긴 차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뭔가?”
“그냥…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어린 주인공인데, 바로크 음악은 조금 안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요.”
“흠.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바로크 음악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게… 아무래도 어린 소년이 생각해 내기엔 어려운 일 아닐까요?”
영화 OST 의뢰를 받고 서진이 작곡한 곡은 다름 아닌 바로크 스타일을 가미한 작품이었다. 서진으로서도 처음 도전해 보는 종류의 것.
일의 계기는 얼마 전 예술제에서, 윤수와의 대화 도중 불현듯 머리에 스친 것으로부터였다.
‘…잠깐, 바로크? 이거 괜찮겠는데?’
바로크나 르네상스. 혹은 그 너머 중세까지. 즉 고음악의 현대적 해석. 제법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글쎄. 그건 편견이 아닐까? 바로크 음악이라면 크로스오버에도 얼마든지 사용되니 나는 이상할 것 없다 보는데.”
“음….”
크로스오버에 바로크를 섞은 현대음악.
설명만으로는 무척 기괴하지만, 바로크적 요소 자체는 별반 새로운 게 아니었다.
바네사 메이가 연주하는 ‘토카타 & 푸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원래는 바흐의 고전음악인 것을, 크로스오버 무대에서 아주 멋들어지게 연주해냈으니까.
“바로크 음악에는 바로크만의 매력이 있으니, 어린 주인공이 푹 빠진 모양이지. 그나저나 서진이 자네는 왜 바로크를 택한 건가?”
“…그러고 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네요. 푹 빠졌거든요.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어요.”
윤수가 자신의 곡을 바로크 고악기 버전으로 편곡했던 일도 계기가 되었지만,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의 영향도 컸다.
개봉한 지 십여 년 정도 된 한국 영화가 하나 있었다. 개봉 당시엔 어린 나이였기에 보지 못했던 것을,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된 영화.
그 영화로 인해 유명해진 비발디의 곡이 있다.
비발디의 칸타타. Cessate, omai cessate. RV 684.
카톨릭 신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발디. 그는 상당히 많은 곡을 남긴 작곡가였지만 안타깝게도 한순간 몰락하여 사망 후에 빠르게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까지 200여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바흐가 비발디의 곡을 편곡한 악보가 20세기 초 즈음 발견되면서 뒤늦게 주목받게 된 것이다.
당시 바흐의 선배 음악가 격이었던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 12곡 중 6곡을 건반 악기 등으로 편곡한 악보집. 그 유명세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비발디를 다시금 발굴해낸 것.
한데 사후 빠르게 잊혔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일 정도로 비발디는 당대 잘 나가던, 그리고 굉장히 많은 곡을 만든 작곡가였다. 비록 그 곡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비판이 있으나, 그거야 바로크 시대의 곡들 대부분이 가지는 공통성으로 별반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꼭 비발디가 아니더라도 바로크 곡은 특유의 양식으로 인해 들으면 누구나 ‘아, 바로크 시대 곡이구나’ 할 만큼 공통된 분위기가 있으니까.
한 장르 내에서 워낙 많은 곡을 만들었던 탓에 다 비슷비슷하게 들리긴 하지만, 제대로 분석해 보면 자가복제에 가깝게 정형화된 작법 속에서도 다양한 음악 양식과 악기, 주법 등을 사용하려 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비발디는 결코 금세 잊혀지는 게 당연할 만큼 별 볼 일 없는 작곡가가 아니라,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바흐를 비롯해 상당히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니.
긴 시간의 흐름 속, 현재로서는 가장 끝에 서 있는 현대음악.
그리고 그 시초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바로크 음악.
옛것과, 최신의 조화랄까.
물론 더 오래된 음악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 그 앞의 중세 그레고리안 성가까지…. 더 오랜 원류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지만, 적어도 중세의 교회 음악은 모든 서양 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의 현대 악보와는 기보법도 전혀 다르고, 조성 체계도 생기기 전이었지만.
그러니까 바로크 음악은, 현재 사람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음악 체계’의 틀 안에서, 고전이나 낭만 음악에 비해 한층 복고적인 분위기를 내는 그런 것이었다.
바로 그런 바로크 음악과 현대음악의 조화를 이루어 보려는 것.
“그렇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게나. 영감은 언제나 옳은 법.”
서진에게 깊은 영감을 준 비발디의 ‘Cessate, omai cessate’
비록 영화에서 그 곡은 원곡 그대로 쓰였지만, 서진은 작곡을 의뢰받은 입장에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지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일단 초안을 감독에게 보내볼까요?”
이러쿵저러쿵 걱정하면서도 이미 초안은 뽑아놓은 상태였다. 이자크에게도 들려주었고.
“아, 이미 내가 보냈네.”
“네? 벌써요?”
“이런 걸 혼자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얼마 전 이메일로 초안을 전했는데 그가 별다른 반응이 없기에 영 아닌가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였나 보다.
* * *
서진과 이자크가 음악을 맡기로 한 영화 ‘그 겨울’의 감독인 프랭크. L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음악 파일을 열어보았다.
작곡가 한서진을 강력히 원한 건 그였으니, 그의 걱정은 결과물의 퀄리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 늦어지며 전체 일정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던 것뿐.
보통 이런 작업은 한 번에 오케이가 떨어지는 게 아니고 수차례 수정작업을 거치게 마련이니까.
한데,
작업의 결과물을 들어본 그는 그 순간, 모든 시름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거다!
바로 이거다!
분명 아직 초안이라 했는데, 곡은 더없이 완벽했다.
“오… 역시…!”
으하하하! 그라면 자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다.
“크하하하하! 흐허하하하!”
“감독님…?”
“내, 내 이럴 줄 알았어! 하하하하!”
“감독님, 왜 그러세요? 곡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곁에 있던 조감독이 조심스레 물었다.
“바로 이거야!”
“예?”
“들어보게나!”
무슨 일인가 싶어 귀에 헤드폰을 꽂아본 조감독 역시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의뢰한 곡이라네!”
와…
조감독에 이어 스태프들까지 줄줄이. 다들 너무 좋다며 화색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저, 그런데… 감독님.”
“음?”
“저기, 주인공 소년이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우연히 클래식 곡 하나를 듣고 빠져 들어서잖아요.”
“음. 그렇지?”
“근데 그 곡이… 제가 알기로 드보르작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주인공이 맨 처음 클래식을 듣고 음악에 눈을 뜬 장면에서 나온 곡.
“그렇지?”
“바로크 스타일이랑은… 너무 안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은데….”
“흐음?”
그랬다. 문제는 그거였다.
물론 주인공 소년이 영감을 받았다는 그 곡이 정확히 어떤 곡인지 특정되어 있던 건 아니었다. 감독이 저 혼자 내심으로 정해두었던 곡으로, 대본에도 안 쓰여 있었으니까.
드보르작에 영감을 받은 소년.
그걸 음악팀에 언질 주는 걸 깜빡했기에, 서진이 감독으로부터 받은 요청은 단지 ‘구체적인 요소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가장 아름답게만 뽑아달라’였다.
하지만 이미 영화는 은연중에 감독이 의도한 분위기에 맞춰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랑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덕분에 이런 희대의 역작을 얻을 수 있었으니!
물론 한서진이라면 어떤 컨셉으로 작곡했어도 명품을 뽑아냈을 테지만, 지금 이 곡이 너무 마음에 드는 탓에 다른 곡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거… 괜찮을까요?”
“괜찮다마다!”
“….”
“바꾸면 되지!”
“네? 바꾸다니, 뭐… 뭐를요?”
불안한 표정으로 조감독이 물었다.
“영화를!”
“네, 네에?”
“싹 들어내!”
전체의 분위기를 싹 바꾸라며, 이 곡에 어울리게 방향을 바꾸라는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기존의 촬영을 죄다 뒤집어엎는 한이 있더라도, 이 곡은 반드시 살려야 했다.
아마 서진이 알았다면 얼마든지 분위기를 바꾸어 다시 작곡해 주겠다 할 터였지만, 감독은 이미 이 곡에 꽂혔다. 너무너무 꽂혀버렸다.
그렇게 영화 하나를 통째로 바꿔버린 서진의 영향력이었다.
* * *
“…네?”
“그렇게 되었다고 하네.”
“개봉이 지연되었다니, 왜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