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아, 장경화 선배님이 제안을 주셨거든.”
그러고 보니 아까 언뜻 본 것 같은데….
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관령 음악제나 서울시향 같은 단체들도 뭔가 상을 받았는데, 그 일환인지 아니면 원로 음악인의 자격으로서인지 그녀 역시 초빙받은 모양이다.
“선배님도 함께 공연하시는 거야?”
“어. 원래는 굳이 할 생각 없으셨다는데, 나한테 기회 주려고 일부러 같이 듀엣 하자고 하신 것 같아.”
“아. 예전부터 알고 지냈었다고 했지.”
“응. 집안 백 덕분이지만. 그래서 이것도 원래 안 하려 했어.”
확실히 자기 집안 그룹 재단에 소속되어 있으니 뒷말이 나올 법한 상황이긴 했다.
“그런데 선배님이 간곡히 설득하시더라. 지금 내가 무대를 가릴 때가 아니라고. 2년을 놀고만 있을 거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
지연이 그런 고민을 겪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서진이야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기에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무대가 싹 사라진 상황. 그렇게 2~3년을 유야무야 보내고 나면 어떻게 될지.
“내가 아무리 이성의 이름을 달고 있다지만, 세계 무대에서 그런 건 아무런 소용 없으니까.”
장경화는 욕을 먹을까 망설이는 지연에게 딱 이렇게 말했다.
막말로 한서진은 틀어박혀 음반이나 내고, 혼자 작곡만 하다가 나와도 세상이 잊지 않고 기다릴 테지만, 지연이 너는 다르다고.
“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냐는데, 진짜 할 말이 없어서….”
“….”
서진은 지연에게 무척 미안했다. 명색이 친구인데 너무 남의 일처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서.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성 그룹 핏줄인 거 어차피 세상이 다 아는데, 아닌 척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냐 하시더라고. 자기네 재단 소속이라 행사에 참여한 게 뭔 문제라고.”
“그러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여기서 굳이 발 뺀다고 사람들이 너를 언급할 때 그 타이틀을 빼고 말해 줄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이성 그룹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참으로 계륵 같은 수식어였다. 세계 무대에서는 어차피 아무런 효용도 없는 타이틀인데, 한국에서는 재벌 버프라는 선입견만 만들어주는.
자신이 아무리 죽어라 노력해 잘해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 돈 처발라 평생 그것만 하고 살면 누가 못하겠냐고.
지연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억울했다. 재벌가 출신인 덕분에 돈 걱정 없이 투자할 수 있는 건 맞았지만, 자신의 노력까지 저절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는데….
돈만 바른다고 해서 없는 실력이 생길 리가.
피나는 연습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그저 재벌가 금지옥엽의 고상한 취미 짓거리로만 여겨질 때,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이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어 기껏 우승한 콩쿨 이력도 흐지부지 사라질까 하는 걱정도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다. 넌 어차피 그거 망해도 먹고 살 걱정 없는데 뭐 그렇게 난리냐고 핀잔만 들을 게 뻔하기에.
“그래서, 어차피 그런 마당에 뭐라도 활용해 주기로 했어. 흥!”
“잘 생각했어!”
“선배님도 콩쿨 우승 후에 한 2년쯤 지나니 딱 그런 문제를 겪으신 적 있나 봐. 더는 무대가 없어 다시 콩쿨에 나가야 하나 고민까지 하셨다고. 그래서 남 일 같지 않았는지…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하더라.”
“…미안.”
“네가 뭘. 그런 말 들으려고 이야기한 거 아냐.”
“…그냥…. 아무튼 오늘 잘하자. 이거 녹화방송되는 거 알지?”
원래는 제대로 관객까지 갖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무관중 녹화 방송으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장소 역시 음향을 고려해 행사가 열린 호텔이 아닌 명동성당에서 하기로 바뀌었다. 어차피 관중 없이 하는 것이니, 객석보다는 사운드가 중요하니까.
“어. ‘TV 예술무대’에 특별기획으로 내보낸다고.”
“너튜브로도 올라가나?”
“글쎄. 사이트에서 자체 스트리밍이면 모를까, 아직 그 프로그램에서 너튜브에 콘텐츠를 올리지는 않는 모양이야.”
“조금 아쉽네.”
너튜브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만큼, 국내에서만 방송되는 것보다 훨씬 영상을 알리기 유리한 것이다.
서진의 기억으로, 회귀 전 언젠가 어느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너튜브에 올린 클래식 연주 영상이 엄청나게 유명해진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정확히 이 프로그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TV 예술무대’ 역시 분명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은 그 시점이 안 된 모양이었다.
“어쨋든 최선을 다해 잘해보자고.”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이게 레전드로 남을 영상이 될지도 모르니까.
* * *
장소를 이동하니, 아는 얼굴이 몇몇 더 보였다.
“선배니이임!”
그중 얼굴뿐 아니라 이름도 잘 알고 있는 후배, 이준이 반가이 서진을 불렀다. 이준 역시 이성 재단 소속으로 이번 공연에 발탁된 모양이었다.
“어, 이준아. 잘 지냈어?”
그 외에도 모르는 얼굴들이 몇몇 더 보였는데, 딱 봐도 풋풋한 나이인 게 신예들이 이름을 알리도록 부러 기회를 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연주자 리스트는 원로급인 장경화부터 어린 영재 학생들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중 서진과 지연은 딱 중간 정도의 포지션이었다. 이제 신예라 부르기엔 너무 커버린 그들이었으니까. 특히 서진은 나이만 빼면 거의 거장 반열로 대우받는 존재였고.
“선배님, 귀국하셨는지도 몰랐어요!”
“하하. 막 오자마자 여기 오게 되었거든.”
“격리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잠시 회포를 푼 일행은 천천히 연주 준비에 나섰다. 어차피 관객이 없는 터라 정식 콘서트처럼 시간에 딱 맞춰 할 필요는 없어 여유로웠다. TV로 방영된다고는 하지만, 생중계는 아니었으니까.
관객은 없다지만 연주자들은 모두 마스크로 무장하고 있었다. 각자의 얼굴을 가린 까맣고 하얀 마스크를 바라보며 일행은 서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왜 이렇게 웃긴지….
하지만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서자, 웃음기는 자취를 감췄다.
첫 차례는 정경화랑 지연의 듀엣이었다.
바흐의 샤콘느.
둘 모두 이 곡을 바이올린 두 대로 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묘한 울림.
높디높은 천장의 성당을 꽉 채우는 바이올린 소리에 전율이 일었다.
방송 장비 따위에 결코 온전히 담기지 않는 깊은 사운드.
지금 이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고작 여기 있는 이들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연주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빗겨 들어온 늦은 오후의 햇살이 둘의 모습을 은은히 빛냈다.
신의 호흡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리.
‘회장님이 보셨더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손녀딸의 연주에 얼마나 감동하셨을까.
하지만 코로나 확산 우려로 무관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확고한 방침이었기에, 수상과 관련된 고위 관계자들조차 자리에 앉아있지 못했다.
철저히 연주자와 카메라만이 존재하는 공간.
공기 중을 메우고 있는 것은 오직 꽉 찬 소리와 깊은 영혼의 울림뿐이었다.
그것은 고귀한 소리였다.
서진은 60여 년 인생을 오로지 바이올린에 바쳐온 인생에 대한 깊은 존경을 느꼈다.
한 사람의 생이 담긴 연주랄까.
연륜이 만들어 낸 강렬한 원숙미는, 함께하고 있는 지연이 뿜어내는 젊음의 역동과 어우러지며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움을 내뿜었다.
그것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주는 소리였다.
‘과연 50년 후라고 내가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녀 역시 젊었을 때는 날카롭고 힘 있는 연주로 유명했는데, 인생의 황혼기인 지금의 연주는 마치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의 잔잔한 환희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 연주 차례를 기다리며, 서진은 이 순간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저런 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라져야겠구나. 인생을 보는 눈, 감정의 깊이부터가 다르다.
“….”
“….”
활이 멈추었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송용 카메라를 잡고 있는 스태프들조차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
“….”
관객이 없어 박수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바이올린을 내린 두 여성은 아무도 없는 객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뒤로 돌아 들어갔다.
짝짝짝짝…!
뒤늦게 터져 나온 박수 소리.
스태프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중간중간 연결 부분은 편집을 거칠 예정이기에, 잡음이 들어가도 상관없는 것이다.
무대 뒤에서 그 소리를 들은 지연은 만족스레 입가를 끌어올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지연아, 정말 잘했어.”
자신이 감히 그녀에게 훌륭한 연주였네 어쩌네 할 주제는 아니기에, 서진은 긴말 대신 꾸벅 인사로 대신했다. 지연에게는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고.
“고마워, 서진아. 선배님. 덕분에 정말 좋은 기회 가졌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나야말로. 새로운 자극이었어. 역시 우리 후배님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지연은 조금 전 연주의 흥분과 긴장이 채 가시지 않는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녀의 칭찬에 더욱 쑥스러운 얼굴이 된 채 서진을 향해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다음은 서진의 차례.
서진이 연주할 곡은 사라방드였다.
정확한 이름은 Sarabande from Bach Violin Partita No. 2 in D Minor, BWV 1004.
천천히 움직이는 활이 화음을 긋는다.
이번에는 장경화가 감탄을 보낼 차례였다.
한 음, 한 음이 꽉 찬 느낌.
이렇게 어리디어린 젊은 청년이, 어떻게 이런 연륜 가득한 소리를 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나만의 소리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은데, 저 아이는 벌써 소리를 깨우쳤구나.
이유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의 의미, 그 자체를 생각해 보게 되는 연주라고.
그녀의 촉은 정확했다.
서진이 내는 소리는, 죽음의 순간의 얻은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었으니까.
득음이라는 단어 외에는 본인 스스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능력.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몸에 녹아들어 딱히 의식하지도 않고 있는 특유의 능력을 오늘만큼은 특별히 신경 쓰며, 서진은 소리에 혼을 싣는 기분으로 희망의 감정을 담았다.
그랬다. 딱 그렇게 표현하면 될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연주했으니까.
앞으로 긴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할 이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이 곡을 듣고 기운을 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죽음 끝에 얻게 된 삶의 희망을 담아 노래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