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한서진 제발 미국 좀 와주라….
-베를린에 온다더니… 온다더니… 온다더니…
└베를린? 그런 일이 있었어?
└ㅇㅇ 녹음하러 오기로 했었어…
└맞음. 원래 지멘스 빌라에서 레코딩 일정 있었는데, 코로나로 취소되었데….
-녹음하고 음반 낸 다음에 그 프로그램으로 월드 투어 일정도 있었다는데….
└헐….
└찾아보니 하노버, 뒤셀도르프, 함부르크, 도르트문트, 런던, 밀라노… 쫙 도는 거였네. 나 밀라노 코앞인데… 엉엉… 외않와….
└원래는 다 돌고 한국 찍는 거였다는데…, 앞에 다 날리고 한국에서만 공연하는 거야?
└아니, 이번에 하는 건 아예 다른 공연. 뭐더라, 누구꺼 무반주 전곡 연주한다는데….
└대박 ㄷㄷ… 그 어려운 걸 도전하다니!
서진이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입장인지라 원성이 자자했다. 예전 같았으면 직접 비행기 타고 날아와서라도 공연을 봤을 팬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직 어려운 일이었다.
백신을 맞은 경우라면 지금도 출국할 수야 있었지만, 아직 해외여행이 정상화되기 전이라 항공편이 무척 적은 상황이었다. 가격 또한 상당했고.
즉 웬만한 팬이라도 쉽게 보러오기는 힘든 것이다. 애초에 연주자 한 명이 해외로 공연을 떠나는 것과, 거꾸로 관객들 전부가 원정을 오는 것은 비교가 안 되는 일이니까.
서진은 여전히 발이 묶인 상황이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재개되기 시작한 공연 덕분에 지연은 예기치 않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내실을 다져왔더니, 장경화의 조언 그대로 기회가 온 것이다.
* * *
“대타? 장경화 선배님의?”
“응. 희한하게도 일이 그렇게 됐네.”
“그러게. 이걸 예견하고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건 아니었을 테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녀가 코로나에 걸린 탓이었다.
요즘은 확진자와 접촉한 정도로는 강제로 격리하는 등의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기에, 예전과 달리 주위에서 확진자 한두 명 나왔다고 벌벌 떨 필요는 없었다.
지연 역시 얼마 전에도 그녀를 만나고 돌아온 참이긴 했지만, 확인 결과 음성이 떠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에 더해 그녀의 대타 자리 제안까지 받은 상황.
“선배님 건강은 괜찮으시대?”
“응. 양성만 떴지, 거의 무증상에 가까우시다고.”
“그나마 다행이다…. 참, 어느 나라로 가는데?”
“런던.”
“런던 심포니?”
“응.”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응.”
“와, 진짜 우연도 이 정도면 운명 같은데?”
“그러게….”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의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 바로 22살의 장경화가 이자크의 대타 연주로 단숨에 월드 스타로 부상하게 된 무대가 아닌가.
“…와. 벌써 보이는 것 같다. 너한테 붙을 수식어가.”
서진의 말을 예상한 지연이 쿡쿡 웃었다.
보나 마나 ‘제2의 장경화’라는 별명이 생기겠지.
“아마도 ‘제2의 장경화’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는가. 심지어 그때의 장경화와 나이까지 똑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리 각오해 둬. 그런 별명 은근히 신경 쓰이거든. 나야 성별이 다른 덕에 별로 오래 불리지는 않았지만.”
“한때 ‘제2의 사라 정’이었던가?”
“…어. 내가 여자였다면 여전히 불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지도는 확실히 다졌다는 뜻이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고. 그렇다고 그런 별명을 너무 의식하면 또 안 되겠지만.”
먼저 겪어본 자의 조언이었다.
“아무튼 잘 됐다. 이참에 아예 확실히 여제 계보를 잇는 셈 치고.”
“아직 발끝도 못 따라가는데 뭐.”
“괜찮아. 너도 앞으로 한 50년쯤 묵어서 할머니가 되면…,”
“거기까지.”
“죄송합니다.”
찌릿 노려보는 눈빛을 매서웠지만, 지연은 은근히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하긴. 장경화가 누구던가.
클래식계에서 비서구권 인물이 세계무대에 진출한 경우가 거의 없던 시절. 오직 본고장인 서구권 사람만이, 조금 많이 봐줘야 북미 출신 백인 정도까지만 제대로 된 클래식을 할 수 있다는 편견이 가득하던 시절에, 남자도 아닌 여자가 당당히 월드 클래스에 올랐다.
까마득한 그 시절, 장경화는 오직 자신의 걸음으로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어린 동양인 여자에게 쏟아지는 온갖 편견을 극복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레코딩 기록과, 혼과 열정을 불태운 공연들.
그녀의 그런 노력은 이후 여성 연주가들이 세계무대에 진출할 발판이 되어준 귀한 족적이었다.
그러니 같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 뒤를 이어나간다는 건 건 남다른 감회의 일일 터.
“잘하고 와.”
“응. 너도 잘해. 전국 투어지?”
“어. 한 바퀴 쫙 돌면서 전곡 연주하려고. 전부터 바흐 이걸 꼭 해보고 싶었거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연주.
레코딩도 아니고 공연에서 전곡 연주라니, 상당한 도전이었다.
이자이의 바이올린 소나타 6곡과 함께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소나타로 꼽히는 바흐의 이 작품들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있어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감을 가진 곡이었다. 커다랗고 막막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그런 산.
곡의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긴 연주인 만큼 체력과 집중력까지 요하는 그런 곡이기에.
게다가 무반주는 원래도 그 자체로 까다로웠다. 반주가 없으니 독주자의 선율만이 오롯이 들리기에 작은 실수도 유독 눈에 띄는 데다, 음정에도 까다로운 주의를 요구했다. 자칫 정신을 놓고 연주하다 보면, 음정이 저도 모르게 무너져 있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진에게는 어차피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끝나고는 바로 내 곡으로 공연도 또 하려고. 찬윤이 형이랑 하윤이랑 할 삼중 협주곡도 있고, 이지영 선배님이랑 듀엣으로 협연도 있거든.”
“발도 넓으셔…. 퀸엘 역대 한국인 우승자 둘의 듀엣이라, 티케팅 실패한 네 팬들 못 와서 앓아눕는 소리가 벌써 들리네.”
“하하… 실은 나도 처음부터 선배님이랑 듀엣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윤수 녀석이 안 오잖아. 그러던 와중에 선배님이 먼저 제안 주셔서….”
코로나고 뭐고 윤수 녀석은 유럽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요즘 바로크 음악에 푹 빠진 덕에, 본고장에서 제대로 배우고 있다나.
바로크 바이올린으로 하는 연주는 물론이거니와, 비올라 다 감바, 비올라 다모레 등의 고악기까지.
비올라 다모레는 지금의 바이올린과 비슷하게 생겼다지만, 비올라 다 감바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첼로의 전신인 악기다.
즉, 바이올린족인 비올라를 메인으로 하는 윤수에게는 꽤 어려운 악기일 텐데, 침식을 잊을 듯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의 곡들을 발굴하여 녹음하는 것에도 진심이라고. 벌써 두 장의 레코딩을 완료해 곧 발매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기회가 없어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지만, 서진 역시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기에 언젠가 배워보고 싶었다.
“적당히 욕심부려라. 그러다 탈 난다. 코로나 걸려.”
서진의 말에 지연이 징하다는 듯 만류했다. 대체 저 끝없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얘는 정말 지치지도 않는 걸까 싶었다.
“아니, 뭐 당장 다 하겠다는 건 아니고….”
연습벌레로 유명한 지연의 눈에도 자신이 너무 과해 보인다니… 제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거의 음악 중독 수준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게 너무 즐겁고 행복한데.
* * *
이번 서진의 독주회 티케팅은 유난히, 정말로 역대급으로 전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도 미친 듯한 경쟁으로 몇 초면 티켓이 동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코로나 예방 거리두기를 이유로 한 칸씩 띄어 앉는 것이 지침이었기에, 객석 수가 그대로 반토막이 난 것이다.
-…이걸 어쩌죠.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그러게요. 생각보다 사람들이 문화예술 공연에 오랫동안 목말랐나 보네요.”
단순히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한서진’이라는 존재 때문이었지만, 매니지먼트 담당자는 그걸 새삼스레 언급하는 대신 조심스러운 말을 꺼냈다.
-한서진 씨.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혹시 공연 횟수를 늘려주실 수 있을까요?
“공연 횟수를요? 더 추가할 공연장이 있나요? 주요 거점은 다 돌기로 한 걸로 아는데요.”
-아뇨, 지역 추가라기보다는 현재 한 공연장에서 한 번씩만 하기로 되어있는 연주를, 인구가 큰 도시에 한해 횟수를 늘리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아….”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무 아쉬워하는 모양이라서요. 지금도 회사에 계속 전화가 걸려옵니다. 공연 좀 늘려달라고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
고민이 되었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빡빡한 일정인데, 여기서 더 늘리면….
아마 서울, 부산 정도만 횟수를 한 차례씩 늘리는 정도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부담이 커진다.
“그런데, 제 의사는 둘째 치고 갑자기 그게 가능한가요? 공연장 스케쥴도 있을 텐데.”
-현재 공연장들이 아직 스케쥴이 꽉 차 있는 편이 아니라 한서진 씨만 괜찮으시다면 그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슬슬 공연이 재개되기 시작한 편이긴 하지만, 아직 한창때만큼의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고민 좀 해볼게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선희와 간단히 상의한 끝에 서진은 부랴부랴 공연 횟수를 늘리기로 했다. 어차피 해외에 나가는 부담에 비하면, 국내에서의 공연은 피로도가 확연히 낮은 편이니까. 장시간의 비행에 시차, 물갈이나 음식 문제 등등… 월드 투어는 비교도 이것과 안 되는 난이도다.
그런 월드 투어도 해내는 마당에, 국내 공연에서의 횟수 몇 번 추가 정도야.
추가된 공연 티켓 역시 순식간에 팔려, 전례 없는 독주회가 예정되었다.
그렇게 드디어 다가온 공연 날.
늘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첫날은 으레 떨리기 마련이다.
‘바흐라….’
전공생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기이자, 연주자와 함께 기량과 함께 악기의 소리를 평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연주되는 곡이었다.
즉, 정말로 정직하게 평가받는 곡.
연습은 충분했다. 사실 원래는 바흐가 아닌 베토벤을 할 생각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원래 작년에 코로나가 터지지 않았다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를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터진 코로나로 인해 작년의 모든 계획이 무산되며 날아갔지만.
그 계획을 다시 살려 올해 해볼까 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바흐로 바꾸었던 것.
무반주 독주라면, 혹시 다른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겨도 결원이 발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코로나가 한창일 때, 여기저기서 확진자가 나오는 현 상황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연주자 본인에게만 문제가 없다면, 이외의 다른 변수가 없을 테니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