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막상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저들이 누구에게 어떤 점수를 주든지 그걸 간섭할 권리는 없었으니까.
말로는 없던 일로 하기로 하고는, 이미 저들끼리 암묵적으로 동의한 대로 적당히 점수를 조절하면 그만이니까.
“듣고 보니 매우 옳은 말이군요. 이건 아니죠. 그럼 원칙대로 각자 알아서, 소신대로 심사하기로 하죠.”
그런다 해도 어차피 담합의 증거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말로는 ‘원칙대로’ 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내부고발을 하려 해도 입증해 낼 수 없을 터였다.
비록 이들이 저들끼리 우승자를 결정한 후 그에 맞춰 점수를 줬다지만, 결과적으로 남는 서류만 보면 심사위원이 각자 자기 소신대로 매긴 점수일 뿐이니까.
‘녹음이라도 해놓지 않은 한 말이지.’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핸드폰을 꺼놨었기에, 녹음을 할 타이밍은 진즉에 놓친 상황.
아니, 핸드폰이 있었다 하더라도 미리 이런 일이 있었을 걸 알았던 게 아닌 이상, 그렇게 재빨리 행동할 수 없었을 터. 말을 바꾸기 직전 오갔던 대화는 순식간이었으니까.
물론 방법이 전혀 없진 않다. 다만, 조금 신중히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째… 참가자로서 콩쿨의 비리에 저항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어렵네.’
…이럴 거면 자신을 왜 굳이 심사위원으로 초청한 걸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서진은 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구나. 저들은 딱 이름만 필요한 거구나.
‘한서진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국제 콩쿨.’
바로 그 타이틀이.
그들로서는 한서진이라는 존재를 적극적으로 밀어줘야, 그걸 이용해 대한민국 음악계의 콧대를 높일 수 있을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서진은 일단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로 돌아가 꿋꿋이 소신대로 점수 매겼다.
그렇다 한들 고작 한 명의 변수로 우승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옳지 않은 건 옳지 않은 것이다.
* * *
“아들~ 고생했어!”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서진을 선희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 우리 아들, 표정이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어머니한테는 얼버무렸지만, 콩쿨에서의 일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웬만해서는 콩쿨 심사 따위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아야지.
서진 역시 이미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지라, 저만 부정한 방법으로 뒷배경을 쓰지 않으면 그만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그보다 어머니, 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응?”
잠시 망설이던 서진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에 관해… 여쭈어도 될까요?”
선희의 얼굴에 살짝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어릴 때는 아빠에 대해 문득문득 물어보곤 했는데, 어느 날 실수로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눈물을 내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후로는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아들이 아닌가.
분명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자신을 배려한 건지 서진은 제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필시 갑자기 궁금해진 이유가 있을 터.
“물론이지. 네가 묻지 않아도 내가 먼저 이야기 해주었어야 했는데… 엄마가 배려가 너무 없었구나.”
서진이라고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 어머니와 결혼을 약속했었다가, 유복자를 두고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것. 예전에 군인이셨다는 것과, 대충 어떤 성격의 분이셨는지 등등….
사진 역시 상당히 많이 남아있었기에, 아버지의 얼굴 자체는 친숙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자신과 무척 닮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는 거라고는 빛바랜 사진 속 모습과 단편적 정보들.
가장 중요한 것. 정확히 어떤 사고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와, 유전병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아는 바 없었다.
“아니에요. 실은… 아버지도 저와 같은 병이 있었는지 해서요.”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지만, 격세유전의 경우도 있으니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다. 이 유전병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게 아니므로. 유전이라는 건 아직 인간이 그 메커니즘을 100퍼센트 알 수 없는 영역이니까.
“사실… 나도 그건 잘 모른단다.”
“…아.”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짚이는 바가 있어.”
그렇게 운을 뗀 선희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고졸이었던 선희와 그녀의 약혼자는 이십 대 초중반의 나이로 일찌감치 결혼을 약속했다.
아직 밀레니엄이 되기 전의 시기. 그때까지만 해도 혼인 연령이 그리 높지 않았고, 특히 고졸에 바로 취업을 한 경우라면, 굳이 천천히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
서진의 아버지는 군대에 일찌감치 말뚝을 박았다. 그 당시에도 직업군인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특히나 집에서 넉넉히 지원받을 형편이 아니라면.
“…군용 차량을 운전하던 중, 사고가 있었다고 했어.”
“아….”
사고를 조사해 본 결과, 차량 결함은 아니었다고 한다. 운전 과실이 뚜렷하다고.
졸음운전을 한 건지, 아니면 부주의했던 건지 산비탈 코너에서 핸들을 제때 꺾지 않았다고.
군부대 사이로 난 산속 비포장도로는 워낙에 좁고 가파르기에, 차량 조작에 조금만 실수를 해도 한순간에 차가 구를 수 있다. 방향 조절에 실패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해도, 아차 하는 순간 언덕배기 아래로 처박히며 사고가 나는 것이다.
“그 말 그대로를 믿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결론지어졌는데….”
“혹시, 그거….”
갑자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던 건가. 그렇다면 아버지 역시….
“그래.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구나.”
당시엔 전혀 짐작도 못 했다. 그전부터 손끝 발끝이 자주 저리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군대 일로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불규칙한 교대근무로 피로해서 그렇겠거니.
한데 아들의 경우를 보니, 그게 조짐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랬던 거였군요….”
회귀 전 서진의 경우는 교통사고로 손을 다치며 급성으로 발병했지만, 사고가 없는 지금은 천천히 진행되는 중이 아니던가.
만약 아버지의 경우도 특별한 사고 없이는 진행이 더뎌 눈치를 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서진은 바이올리니스트인만큼 손가락을 섬세하게 쓰는 직업이라 그렇지, 그냥 단순한 일상 업무로는 잘 느끼지 못할 정도의 불편함이었으니까.
그래서 병이 진행되어감에도 몰랐을 확률이 높다.
그러다 갑자기 급성으로 발현되어, 순간적으로 근육이 경직되며 핸들을 돌리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비록 갑자기 병이 발병된 이유까지는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장례까지 다 치른 후였지.”
그때만 해도 혼전임신이 지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선희는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지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낳은 후 다른 이와 새로 결혼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미혼모가 되어버린 것.
“그래서 네 병에 대해 말해줄 만한 사람이 없어. 그이 가족 쪽으로는 딱히 왕래를 하지 않거든.”
서진의 아버지는 원래 일찍이 조실부모했기에 남은 건 형제자매 정도였는데, 남편도 시부모도 없는 마당에 왕래가 잦았을 리 없다.
그리고 서진은 외가 쪽도 조부모님이 한 분도 살아계시지 않았다. 잘 기억나지도 않은 어릴 적 이미 다 돌아가신 것.
“아버지 본인도 모르고 계셨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아무도 몰랐던 유전병이라니.
어쩌면 그 윗대에서도 발병된 경우가 있었겠지만, 그때는 의학이 지금만큼 발전하지 않아 아마 무슨 병인지도 몰랐을 터였다.
“어머니, 혹시… 그, 사고가 정확히 몇 년도에 있었던 일인가요?”
아버지가 사망했던 당시의 나이를 에둘러 묻는 것이었다.
“그게… 지금의 너보다 몇 살쯤 많았을 거야.”
“….”
서진은 말문이 콱 막혔다. 상상 속의 아버지라 해서 막연히 중년의 어른을 상상했는데, 고작해야 제 또래의 젊은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아버지의 병이 갑자기 진행될 만한 원인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저 유전적 요인이 발현될 나이가 그때쯤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 역시….
* * *
거의 매년 빠짐없이 SIMF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초청받은 바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송희란은 현재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녀는 모 명문 여대의 교수였고, 서울대 음대를 비롯하여 누구나 인정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으며, 국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필하모닉의 제2 바이올린 수석이자, 여기저기 관련 단체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 역시 상당한 원로 기성이었다.
물론 연주 능력이나 국제적 인지도만으로 따지자면 서진과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그녀에게는 오랜 연륜과 인맥이 있었다.
한 마디로 음악적 실력 그 차제보다는, 음악계에서의 영향력과 정치적 입지가 상당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런 만큼 음악제 측에서 굽신거리며 자신을 초빙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거니와, 그녀의 은근한 기쁨 중 하나였다. 매년 빠지지 않는 연례행사랄까.
비록 그렇다고 그녀가 이 오케스트라의 고정 단원인 것은 아니지만, 그냥 거기에 당연히 제 자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참여해 주는 것만으로도 음악제 측에서는 무척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한데… 뭐?
심사? 심사…!?
‘…하,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지…?’
올해는 지원자가 많아 별도의 선발을 통해 참가자를 뽑겠다니, 송희란은 세상이 말세라 느꼈다.
‘그 새파란 애송이가 뭐 그리 잘났다고!’
보나 마나 다 허명일 터. 안 봐도 뻔하다.
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걸 꼭 들어봐야 알겠는가?
그래. 비유하자면 허니버터칩 같은 거다.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공급을 조절하는 짓거리. 수요자 측을 항상 아쉽게 만들기 위해, 별로 특별할 것도 없으면서 비싼 척 희소한 척 구는 행위.
팔팔한 젊은이가 코로나 어쩌고 핑계로 일부러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그 속셈이 뻔히 보였다. 분명 몇 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가 그간의 과장된 명성이 다 들통날까 봐, 되도 않는 변명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겠지.
‘어린 것이 버릇없이 선배 어려운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 날뛰다니. 마땅히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공손히 부탁이든 양해의 말씀이든 올리지는 못할지언정, 뭐? 심사?’
원래는 기가 차 이 자리에 아예 오지도 않으려 했지만, 저 시건방진 녀석을 단단히 혼내주기 위해 부러 발걸음을 한 차. 보아하니 불만을 품은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닌데, 조금 여론을 주물러 볼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장내에 자리하고 있는 지원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