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그 후로는 별일 없이 진행되었다.
이자크와 다비트 정도 되는 기성이 잠자코 따르는데, 감히 불만을 터트릴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조금 전에 쫓겨나다시피 한 김유정 꼴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거장들의 등장으로 인한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더 이상의 해프닝은 없었다.
덕분에 서진은 장내가 진정된 후 수월히 안내사항을 전달할 수 있었다. 심사는 블라인드로 진행되며, 랜덤으로 앙상블을 구성해 제시곡의 일부를 연주하는 방식이고…,
물론 연주 자체는 앙상블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평가는 파트 전체로 점수가 매겨지는 것은 아니고, 합주 능력을 보되 각자의 역량을 개별적으로 판단하려는 것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확인하고 있는 사이, 서진은 이자크와 다비트에게 살짝 감사의 뜻으로 눈인사 겸 아는 척을 하며 미소지었다.
이자크와 다비트의 등장은 다른 의미로도 좋은 효과를 발휘해 냈다. 김유정과 같은 이유, 혹은 다른 모종의 이유로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던 이들이, 되려 엉덩이를 붙이고 눌러앉게 된 것이다.
안될 거라는 생각에 차라리 포기하고 기권하는 게 날까 고민이 될 법도 하지만, 이건 다른 의미로는 굉장한 기회이기도 했다. 비록 심사 과정으로써기는 하나, 세계적 거장과 함께 소리를 맞춰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충분한 가치를 둘 법한 일. 글자 그대로 참가 자체에 의의가 생기는 것이다.
비록 심사하는 입장에서는 딱히 이득이 되거나 편해질 것 없는 일이었지만, 서울 국제음악제 차원에서 보면 분명히 플러스가 되는 일이었다.
일단 지원해 보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으면 거장들과 앙상블을 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 더욱 많은 연주가들이 이 행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서진으로서는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준 이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마리아랑 페르디난트…, 세르겐도 있네.’
지연을 비롯한 K-오케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간 국제 사회에서 안면을 익혀온 또래들도 한가득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까 들은 대로 마에스트로 휴를 비롯한 익숙한 얼굴까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정작 그 원인 제공자이자 당사자인 서진이 그럴진대, 다른 지원자들의 충격과 놀람은 말할 것도 없는 일. 여전히 은근한 술렁거림으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덤덤해 보이는 건 오직 지연뿐이었다.
* * *
심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따로 연주를 듣는 게 아니라, 각 파트의 주자를 모아서 앙상블의 형식으로 제시곡의 일부를 연주하는 방식 덕분이었다.
5명에서 10명 정도씩 묶어서, 십여 분 정도의 곡을 들어보면 되는 간단한 과정이었으니 넉넉잡아도 두어 시간이면 끝나는 것이다.
심사는 장명훈을 비롯한 주최 측 모두와 함께 했다. 아무리 서진이 SIMF 오케스트라를 맡았다고는 하나, 혼자 결정했다간 분명 말이 나올까 봐 결정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결과가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이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통일된 덕분이었다.
‘…뭐지. 이 정직할 정도로 곧이곧대로 나온 결과는.’
블라인드 테스트 덕분인지, 진짜로 딱 실력 그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즉, 서진이 아는 얼굴들은 다 통과되었다는 뜻.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유례없는 초호화 단원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는 것이었다.
“이거 괜찮을까요…?”
“왜?”
“기존에 와주시던 분들이 대부분 밀려나셔서….”
괜히 죄송한 마음이랄까. 이 정도로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시작 전에 항의도 있고 했고…, 괜히 친분 어쩌고 소리가 나올까 봐요.”
물론 모두가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선발된 이들 중에는 기존 초빙 객원 중 한 명인 송희란도 있었다. 서진은 전혀 모르는 존재지만, 그녀 쪽에서는 서진에게 퍽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글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이자크 펄과 다비트 등등을 두고, 친분 때문에 밀려났느니 운운할 모자란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건 그렇지만, 그런 거장분들 말고 K-오케도 있잖아요.”
“그래서 블라인드로 했잖아.”
“하긴. 그러네요.”
할 말이 없었다. 장명훈의 말대로 누구나 깔끔히 승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렇게 된 게 오히려 서울 국제음악제 측으로서는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블라인드 심사 결과 저 정도 급의 거장들이 떨어졌다면….
그 누구도 그들의 명성이 헛것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되려 주최 측이 동태눈깔이라며 욕을 바가지로 처먹었겠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주최 측은 결과에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나저나 콩쿨도 이렇게 했으면 잡음이 없었을 텐데….’
새삼스레 드는 생각에 아쉬운 서진이었다.
“참, 널 보겠다며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던데.”
“저요?”
보나 마나 이자크나 다비트겠지 생각했던 서진은 들려오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린튼 휴. 퀸엘리자베스 콩쿨의 심사위원이었던 그가 널 만나고 싶어 한다는군.”
“아.”
그러고 보니 아까도 들었던 이름이다.
서진은 괜스레 찔끔했다. 예전에 퀸엘 콩쿨에서, 보란 듯 수상을 거부했던 전적이 있기에 그를 보는 게 조금 곤혹스러운 기분인 것이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그런 파란을 일으켰는데 당연하게도 좋게 여기고 있을 리는 없겠지.
“참, 그리고 협연자분도 마침 같이 와 계신다더군. 간신히 구한 소프라노라지.”
“네. 겸사겸사 다 같이 만나보는 게 좋겠군요.”
차라리 잘 됐다.
부예술감독으로서 어렵사리 구한 협연자를 만나보지 않을 수 없는 일. 껄끄러운 마당에 만날 사람이 차라리 여러 명인 게 낫겠지.
* * *
“반갑습니다, 미스터 한. 정말로 뵙고 싶었어요.”
“미스 주크먼, 이렇게 초청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행인지(?) 린튼 휴는 안 보이고 사무실 안쪽에는 협연자로 보이는 이들만 있었다.
어렵게 구한 소프라노의 이름은 서진도 익히 아는 존재였다.
물론 그녀를 직접 아는 건 아니었다. 그녀와 똑같은 성을 가진 누군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빠한테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미스터 한과 진심으로 꼭 한 번 함께해보고 싶어서 냉큼 달려왔답니다.”
“하하.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을지 무서운데요? 그나저나 덕분에 살았습니다. 자칫 음악제 프로그램의 기획 방향을 바꿀 뻔했거든요.”
주최 측에서는 정 안 되면 아예 기악 쪽으로 협연곡을 바꾸려 했었던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소프라노를 구할 수 있었다. 건너 건너 연이 닿았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바로 한때 서진과 교류한 적 있었던 주크먼의 딸이었다.
아드리아나 주크먼.
음악가 부모의 영향을 받은 그녀 역시 일찍이 같은 길을 걸었는데, 그녀는 바이올린과 플롯을 전공한 부모와 조금 달리 성악을 전공했다.
그에 한국은 조수민의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눈앞의 젊은 청년 덕에 평생 가장 존경해 마지않던 조수민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같은 길을 걷는 입장으로는 조수민을 가장 완벽한 롤모델로 꼽는 그녀였지만, 눈앞의 이 한서진이라는 청년 역시 만만치 않게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였다.
비록 전공하는 악기는 다르지만 음악의 끝은 통한다고,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들어본 그의 연주는 그야말로 전율적이었다.
그의 아버지 주크먼이 어디 아무나 칭찬하는 성격이던가. 특히 그녀도 인정하는바, 동양인에게는 유난히 인색한 부분이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서진을 칭송했다.
“참, 이쪽은 어머니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유즈 주크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제법 유명한 플루티스트이자 주크먼의 아내였다. 지금은 이혼했지만.
“반가워요. 내 비록 그이랑은 안 맞는 구석이 많았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눈만큼은 잘 통했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말에 서진은 적당히 웃었다.
“아, 혹시 부인께서도 오케스트라에 지원하신 건… 아니시지요?”
“왜 아니겠어요.”
“…예?”
서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블라인드였으니 연주할 때는 얼굴을 못 본 탓에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합격자 명단에서는 없었던 것 같은데….
“농담이에요, 호호. 저는 딸의 협연도 볼 겸, 음악제를 구경 왔어요. 다들 하도 성화라 궁금해서 말이죠.”
“어머니는 이미 은퇴하셨거든요. 함께 한국 관광도 할 겸 조금 미리 왔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나저나… 이왕 온 김에 한 번 둘러보고, 리허설도 해봤으면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아직 오케스트라가 구성되지 않아서요.”
“아뇨. 제가 음악제 일정보다 훨씬 일찍 온 것을요. 말씀드렸다시피, 겸사겸사 놀러 왔답니다. 쭉 체류할 예정이니 리허설은 천천히 해봐도 상관없어요.”
“예. 오늘 심사를 마쳤으니 금세 오케스트라가 구성될 겁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나저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너무나 쟁쟁한 분들이 와주셨다는데… 제가 다 부담스럽네요. 어째 배보다 배꼽이 큰 느낌이랄까요.”
서진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아드리아나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협연자인 자신보다 훨씬 유명한 거장급들이 득시글거리는 오케스트라라니.
음악제 측에서 당초 기획했던 프로그램이 성악곡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차라리 그들을 협연자로 내세우는 게 모양새가 나을 상황이었다.
물론 주크먼의 이름도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친의 명성에 기댄 것일 뿐 그녀 정도는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어머니는 플루티스트로 제법 이름이 알려진 편이었으나, 그녀 역시 본인보다는 남편인 주크먼 쪽이 더 유명했다.
‘지원자들 중에는 놀랄 만큼 유명한 기성들도 있었으니까.’
아드리아나는 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던 두 인물을 떠올렸다.
이자크 펄과 다비트라니.
“아, 이왕 오셨으니 괜찮으시다면 정식 리허설까지는 아니지만 한 번 맞춰보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 고정 멤버들이 있거든요. 전체 편성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큰 맥락을 짚어보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어머 그래요? 저야 물론 좋지요. 한데, 혹시…,”
“…?”
“마에스트로께서도 오케스트라에 함께해주시는 건가 해서요.”
그녀의 물음에 서진은 자신의 지휘 여부를 묻는 줄 알고 대답했다.
“예. 원래 저는 부예술감독일 뿐 지휘까지 겸하지는 않으려 했는데, 다른 곡은 몰라도 협연곡은 지휘가 필요할 것 같아 제가 직접 맡기로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예. 그렇군요.”
무언가 다시 물으려다 얼버무리려는 그녀의 말에 서진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