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눈물을 살짝 훔친 그녀가 프로그램이 안내되어 있는 팸플릿을 살폈다.
무슨 곡을 연주한다고 했더라… 생상스 어쩌고였는데.
-아, 생상스. 죽음의 무도. 엄마도 저번에 티비에서 들어봤어.
지난번 통화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아들의 말에 나름대로 아는 체를 해 보긴 했으나, 알고 보니 다른 곡이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실 클래식에 관심 없는 사람의 경우, 생상이라고 하면 보통 ‘죽음의 무도’밖에 몰랐다. 혹은 학교 음악수업에서 배운 기억으로 거기에 ‘동물의 사육제’가 추가되는 정도.
-네. 근데 그 곡은 아니고요…
-하하. 엄마는 김연아 덕에 그것밖에 몰라서….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 덕에 생상스 하면 가장 유명한 곡은 역시 죽음의 무도였다.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전공생들에게도 그 인기가 상당했으니.
김연아가 그 프로그램을 선보인 후, 온 음대 연습실에서 죽음의 무도를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니, 선희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생상의 뭐라더라…?’
비록 자신이 아는 그 곡은 아니지만 멋진 곡이라고 했다. 선희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긴장되는 마음으로 서진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연주를 제대로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못난 어미가 먹고살기 바빠, 그토록 잘한다는 아들의 무대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 쟤 알아. 엄청 잘한대. 완전 신동이래. 배운지 1년도 안 됐는데 완전 다 씹어먹는대.”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점검하는 사이, 바로 옆의 관객이 옆 사람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들린 건지 주변의 몇몇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무대 위로 던진다.
보기에는 그냥 앳된 소년인데…. 약간의 기대와 궁금함. 조카의 학예회를 보는 느낌으로 관객들은 큰 기대 없이 감상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잘게 떨리는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 반주.
잔물결 같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배경으로 강렬한 포르테의 음이 펼쳐졌다.
“…!”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그중에 가장 놀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선희였다.
‘우리 아들… 어쩜 이렇게….’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큰소리를 낼 것만 같아 선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심금을 울리는 선율도 그렇지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혼자 훌쩍 성장해 버린 아들에 대한 미안함,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에 드는 안타까움과 대견함 등등의 마음이 어우러져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그 탓인지 그녀는 남들처럼 그저 잘한다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마음과 달리, 무대에 올라있는 서진의 표정에는 오로지 열정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서진은 지금 어머니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오직 음악만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음악에 오롯이 몰입된 순간.
정말로 즐겁다.
자신이 만들어 낸 음이 넓디넓은 장내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감정이 다양한 색으로 차오르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들이 느끼는 감동이 제게도 다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즐기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신들린 듯한 서진의 연주가 이어졌다.
“….”
길다면 긴 약 10분의 시간이 찰나처럼 흘렀다.
악장과 악장 사이, 서진은 어머니를 향해 짧게 웃어 보였다.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미소.
그제야 선희는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던 긴장을 내려놓았다.
아들이 행복하다면야.
저렇게 좋아하니 무엇이든 괜찮았다.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 어떤 고생도 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을 어루만져주듯 2악장의 부드러운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들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바이올린의 소리는 어쩐지 그동안의 힘겨웠던 세월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도 주었다. 아니 정말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살아오며 겪은 많은 일들, 그 안에서 울고 웃었던 많은 감정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바이올린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우아하게 퍼져나오는 선율. 부드럽게 몸을 감싸오는 듯한 달콤한 멜로디가 공연장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이제 관객들은 처음의 놀람을 진정시키고 어느덧 편안한 기분으로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역시나 찰나와 같은 느낌으로 2악장이 지나가고,
마지막 3악장.
‘적당히, 너무 빠르지 않게 장엄하게’라고 표기가 붙은 만큼 3악장은 깊고 장중한 선율로 시작했다.
약간 긴장감 어린 듯한 오케스트라의 반주 위에, 조금은 애절한 듯하기도 한 바이올린 소리가 덧칠된다.
서진이 자아내는 선율에 풍덩 빠져들 듯 몰입한 관객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넋 놓고 있다가, 드디어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음을 일제히 빰, 빰 두 번 연주하는 순간,
짝짝짝짝짝짝짝짝!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의 환호가 온 공연장을 휩쓸었다.
공연장의 모두는 지금 비슷한 생각이었다. 단연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색다른 경험. 이걸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온몸이 음악이라는 것에 흠뻑 적셔지고 물들었다 빠져나온 느낌.
곡이 끝났음에도 아직도 그 여운이 잔잔히 남아 있었다. 잔뜩 고양된 감정으로 인해 여전히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으니.
‘우리 서진이….’
선희는 다시금 눈물을 터트렸다.
아들의 무대를 처음 본 이 순간을, 이 감동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단상에서 내려온 지휘자는 서진을 향해 정중히 악수를 건넸다.
악장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인사를 한 서진은 이어 객석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연주뿐 아니라 무대 매너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우아했다.
서진과 지휘자가 함께 인사 후 무대 뒤로 들어갈 때까지 박수갈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공연장이 떠나갈 기세로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땀범벅이 된 앳된 얼굴, 혼을 다해 연주한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의 모습에 관객들은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였다.
“앵콜! 앵콜!”
심지어는 벌써부터 앵콜을 외치는 관객들도 있었다. 이 뒤는 인터미션, 2부를 앞둔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었다.
그 소리를 온몸으로 들으며 한선희는 기쁨의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 * *
2부에는 찬윤의 무대가 있었다.
그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장본인, 서진은 정작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관객 모드로 바꾸어 찬윤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한 태세에 돌입했다.
물론 그렇다고 객석에 앉은 건 아니었다. 괜히 제 존재로 인해 다른 연주자에게 방해가 될까 봐 무대 뒤에서 조용히 감상할 생각이었다.
“서진아!”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찬윤이 기뻐 마지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찬윤이 형!”
“서진아, 정말 대단했어! 나 진짜 감동받았어!”
쏟아지는 찬사에도 시종일관 겸손한 표정을 유지할 뿐이던 서진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다른 이도 아닌 그 임찬윤이 제게 이런 엄청난 칭찬을 건네다니….
회귀 전부터 찬윤의 엄청난 팬이었던 서진은 다른 누구의 칭찬보다 그의 한 마디가 더 기뻤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정말로 행운아다. 저 엄청난 피아니스트의 성장을 곁에서 함께 지켜볼 수 있다니,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행운이란 말인가.
그러는 찬윤이야말로 자신을 괴물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서진은 오늘도 남몰래 흐뭇하니 이 상황을 즐겼다.
이후로도 간간이 오가는 사람의 칭찬이 쏟아졌다.
“안녕, 네가 한서진이지? 축하해! 정말 대단했어!”
“와, 이름 기억해야겠다. 내가 지금 실시간으로 거장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는 거 맞지?”
“아직 어린데 전 악장 연주라니… 나중에 유명해지면 꼭 사인해줘! 아니다, 지금 받아놔야겠다. 하하.”
그나마 지금은 잦아진 것이지, 연주를 끝내고 돌아간 직후에는 무대 뒤에서 어찌나 시달렸는지….
심지어 음악제의 총 예술 감독이자 근래에 서진을 지도해준 장경화도 따로 찾아와 거듭 칭찬을 남기고 갔을 정도였다.
모두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뭐든지 너무 과해도 곤란한 법. 그 후로 줄줄이 보는 사람마다 서진을 붙잡고 호들갑을 떨며 난리인데….
다른 것도 아니고 첫 무대 데뷔 성공의 축하를 건네는 것이니 지친 티를 낼 수도 없고, 그저 넙죽넙죽 고개를 숙이며 과찬이라며 감사하다 답할 수밖에.
그나마 대기실에는 관계자 외의 사람이 찾아올 수 없어 안도할 따름이었다.
‘아직 앵콜 공연도 남았으니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면 안 되지.’
다비트와 약속한 앵콜 공연 건에 관해서는 지연 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완전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다. 적어도 예술 감독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 두어야 했으니.
“후….”
다 좋은데, 한바탕 집중했던 게 풀리니 기운이 쭉 빠지며 탈력감이 돌았다. 엔돌핀이니 도파민이니, 한 마디로 공연의 여운에 한창 잠겨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끝나고 나니 당이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초딩 때의 팔팔한 나이면 종일 뛰어다녀도 체력이 남아돌 때인데, 이 무슨 아재 같은 감상이란 말인가.
“와, 너무 잘난 것도 피곤하겠다.”
“뭐래. 형의 근미래거든? 딱 30분 후에 보자.”
“응? 나?”
이 형은 다 좋은데 자기가 잘났다는 걸 너무 몰라서 탈이다.
“어. 형 얘기야. 아무튼… 잘하고 와, 찬윤이 형!”
쉬는 시간은 짧았다. 드디어 시작되는 2부 공연.
2부에는 바이올린 외에 피아노와 첼로 등 각 파트별로 뽑힌 협연자들의 공연과, 메인인 거장들의 공연이 있었다. 그중 찬윤의 무대는 인터미션 후 가장 먼저 있을 예정이었다.
‘와. 내가 다 떨리네. 정작 내 무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래 덕질한 아이돌을 실물로 영접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F 마이너, Op.21. 1악장.
Maestoso. 장엄하게.
글자 그대로의 연주였다.
아… 이 형은 이때도 이미 소리가 완성되어 있었구나. 아직 본격적으로 전공하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로 아는데….
서진은 새삼스럽게 자극을 받았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자신은 회귀라는 치트키 덕분일 뿐, 이게 진짜다. 이 형은 회귀도 환생도 안 했는데 사기캐니까.
그에 비하면 난 아직 멀었구나.
‘더, 좀 더 깊어져야겠다.’
갈 길이 까마득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은 서진은 오히려 기뻤다. 그만큼 공부할 게 많다는 것이니까.
서진은 찬윤의 협주곡에 더욱 흠뻑 빠져들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듣는 찬윤의 연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말해 바이올린을 하는 입장이지만, 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이 최고다.
‘특히 라피협 2번, 차피협 1번.’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기도 한 이 두 곡은 서진에게도 최애였다.
희한하게도 어떠한 기분에 들어도 언제나 위로가 되는 곡이라, 언젠가 찬윤이 저 곡을 연주하는 걸 실황으로 꼭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을 정도로.
‘…아쉽다.’
1악장뿐인 연주라 감상 시간은 순식간에 끝났다.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너무나도 짧게 느껴진.
이어 협연자로 뽑힌 학생들의 연주와, 폐막 공연에 참석하는 거장들의 연주가 이어졌다.
모두 제각기 매력이 있는 연주였다. 이 순간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서진은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감상에 집중했다.
하지만 결국 끝은 오는 법.
거센 박수 소리와 함께 마지막 곡이 끝났다.
사람들은 1부 마지막에서와 같이 연신 앵콜을 외치며 흥분해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그대로 앉은 채, 무대 뒤로 들어갔던 지휘자와 마지막 협연자였던 유수의 첼리스트가 다시 무대로 나왔다.
“와아아!”
앵콜 무대에 관객들이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거장들이 차례대로 선보인 두 번의 앵콜.
하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앵콜을 위한 박수를 쉬지 않고 치고 있었다.
이쯤이면 다시 한번 나와주는 게 예의.
서진이 다비트와 나오기로 한 것도 딱 이 타이밍이었다. 정규(?) 앵콜을 끝낸 후, 서비스 앵콜.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누군가 무대로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는 박수 소리에, 드디어 서진과 다비트가 등장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