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 돌아와 ‘한서진’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날이 많아졌다. 아직은 어린 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벌써 그런 마음이 들 나이가 되었나 보다.
혜연의 시선이, 살짝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며 마법을 자아내고 있는 서진의 모습을 향했다. 그를 바라보는 혜연의 눈빛에는 임회장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호의가 감돌았다.
사실 혜연은 그동안 지연의 학교 문제로 상당히 고민이 많았다.
몇 년 전 이곳 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이래, 지연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그때는 차라리 바로 유학을 보내거나 또 다른 사립학교를 알아볼 걸 그랬나 후회했지만, 이미 한부모 전형으로 구설수에 오른 상황인지라 막상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서진이라는 원석을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본인들은 잘 깨닫지 못하는 듯하지만,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음악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참 대견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 여전히 귓가를 울리고 있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그 광경에 방점을 찍었다.
주거니 받거니, 둘이 자아내는 절묘한 화음에 소름마저 끼쳤다.
관객들 역시 숨도 쉬지 않고 둘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누군가는 몸이 다 나아 행복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누군가는 가족의 품으로 건강히 돌아가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냈다.
그건 단순한 음악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였다.
관객들의 몰입은 끝까지 이어졌다. 듀엣 연주가 다 끝나고 이어 둘이 각각 솔로 연주를 할 때까지, 그 누구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 차례, 대미를 장식할 연주는 서진의 곡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크라이슬러의 서주와 알레그로.
사실 크라이슬러라는 작곡가 자체는 친숙한 이름이지만, 그중 이 곡은 일반인들이 많이 아는 곡이 아니었다.
좀 더 대중적인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서진은, 꼭 오디션 때의 곡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프로그램을 바꿀까 고민하다 마음을 바꿔 그대로 선곡했다. 청중들로서 이런 기회에 새로운 곡도 알게 되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장중한 선율이 너울너울 울려 퍼졌다.
처음 들어보는 곡명인지 낯선 표정을 하고 있던 청중들은, 첫 마디가 시작되자마자 훅 치고 들어오는 선율에 곧바로 매혹되었다.
아….
아까의 곡이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것은 쌓여있던 모든 감정을 고조시켜 터트려주는 기분이었다.
그 끝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에 억눌러온 모든 감정이 해소되는 느낌.
그 순간은 마치 찰나 같았다.
원래도 그리 길지 않은 곡이긴 하지만, 워낙 집중했던 탓에 체감으로는 더욱 짧았던 것.
···짝, 짝, 짝.
누군가의 느릿한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연주에 멍하니 정신이 나가 있던 청중들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일제히 쏟아지는 기립박수.
서진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그건 함께 연주한 지연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살면서 이런 뜨거운 호응을 받아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정식 공연장도 아니고, 이런 간이 무대에서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짝!
몇 분이 지나도록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서진의 연주가 너무나도 마음에 와닿아, 절로 마음에서 박수가 우러나오는 것이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너무 끊이지 않으니 서진은 은근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게 콘서트홀이라면 앵콜을 내놓으라는 소리인데,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일부러 티켓을 끊고 들어온 클래식 애호가들이 모인 자리도 아니고, 설마 앵콜을 원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가 아니었다.
“앵콜 앵콜!”
“앵콜 앵콜!”
솔직히 너무나 황홀한 연주였다. 본디 클래식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실황 연주를 한 번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실제로 듣는 소리는 그만큼 아름답기에.
짝짝짝짝짝짝짝짝!
“형아, 멋있어요! 더 들려줘요!!”
계속 이어지는 박수 소리에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이런 자선 공연에서 앵콜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잘 없는데,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그 환호를 들으며 서진은 더욱 확고히 드는 생각이 있었다.
다시금 다지는 이번 생의 목표.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곡을 들려주고 싶다. 그걸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만 있다면.
짝짝짝짝짝짝짝짝!
계속 이어지는 박수 소리에 결국 앵콜이 결정되었다. 다행히 이런 일이 있을 경우까지 미리 염두에 두었기에, 간단한 곡 정도라면 준비되어 있었다.
쿵짝짝 쿵짝짝.
왈츠 특유의 박자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 앵콜 용으로 많이 나오는 무난한 곡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에 활동한 러시아 출신 음악가로 거의 1970년대 중반까지 살다 간 인물이었다. 현재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시대의 사람이라는 뜻.
하지만 한국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냉전 시대 러시아 음악가인 만큼, 근 1980년대까지는 한국에서 연주가 금지되었던 탓에.
그럼에도 이 왈츠의 멜로디는 많은 이들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현대음악에 속하는 만큼 상당히 난해한 것들도 많았지만, 이 왈츠 2번은 영화음악에 종종 쓰인지라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곡이름과 작곡가는 몰라도, 곡을 들으면 누구나 바로 아~ 할 만큼.
밤하늘을 수놓는 3박자의 왈츠.
특유의 감성, 러시아의 애수가 마음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학생 시절 서방체제의 영향을 받은 쇼스타코비치가 재즈풍으로 작곡한 것으로, 비록 형식은 왈츠지만 기저에 깔린 진한 러시아의 정서를 숨길 수 없었다.
특유의 장중함과 비감이 느껴지는 선율.
그게 마음을 울컥 건드린다. 어딘지 애상 어린 느낌이 가득 차오른달까.
바람결에 선율이 흩날렸다.
사람들은 혼이라도 빼앗긴 듯, 넋을 놓은 채 음악에 몸을 맡겼다.
너무나 낭만적인 밤이었다.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한.
* * *
공연이 끝난 후,
자리를 정리하며 짐을 챙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어린 소년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형!”
초등학교 2~3학년쯤 되었을까. 까만 눈이 똘망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휠체어를 탄 채 모자를 깊이 눌러쓴 것이 투병 중인 듯한데,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리를 다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도 몸이 약해 휠체어에 앉아 이동하는 것일 터.
“응? 나?”
“응! 형아!”
공연장처럼 따로 문으로 막힌 대기실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봉사하러 온 학생들을 보러 다가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혀, 형…! 너무 멋졌어요! 진짜진짜!”
자그마한 키에 발그레 달아오른 볼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양손을 불끈 쥐고 외치는 모습에 하마터면 쓰다듬을 뻔했다.
“내 연주를 본 거니?”
“응! 너무너무 좋았어요! 나도 형아처럼 나중에 꼭 바이올리니스트 될래!”
서진이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건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었다.
“근데 그러려면 엄마가 나 얼른 나아야 한대. 엄마랑 약속했어! 얼른 건강해지기로….”
뒷말은 조금 시무룩해져 나왔다. 서진은 고개를 숙인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며 나직이 물었다.
“좋게 들었다니 고마워. 근데 이름이 뭐니?”
“지훈이에요, 이지훈!”
“지훈이구나. 멋진 이름이네. 형은 서진이야. 한서진.”
“와, 형아는 이름도 멋지다!”
그때, 모친으로 보이는 보호자가 뒤이어 나타났다.
“…지훈아! 갑자기 그렇게 가버리면…, 어머! 아까 그 주인공이죠!?”
서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리스트로 선 것을 주인공으로 표현한 거라면 맞으니까.
“네.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저희 애가 병원 생활을 오래 해서…, 나이 차 얼마 안 나는 형을 보니 반가웠나 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손을 내두르며 답하던 서진의 시선이 아이를 향하자, 여자는 묻기도 전에 얼른 덧붙여 설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하도 많이 겪은 탓에, 차라리 먼저 말을 꺼내버리는 것으로 불편한 시선을 벗어나려는 방어적 행동이었다.
“백혈병이었거든요. 그래도 수술이 잘 되어 다행히 경과가 좋대요. 아직 거쳐야 할 일이 많긴 하지만….”
“…아.”
백혈병이라면 요즘은 완치가 가능한 병이다. 불행 중 다행인 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힘들지 않을 리 없을 터.
그러고 있는데, 지훈이 불쑥 끼어들며 외쳤다.
“엄마, 나 켜서 형아처럼 될 거야!”
“우와, 우리 지훈이 정말 멋지겠는데? 엄마 기대할게.”
“형도 기대할게. 그럼 지훈아, 형아랑도 약속할까?”
“약속? 무슨 약속?”
“우리 지훈이. 얼른 건강해지려면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엄마 말 잘 들어야겠지?”
“네!”
“그럼 형아가 다음에 지훈이 보러 또 올게.”
오늘 한 번 본 게 전부인 아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였다.
예전, 자신의 투병 생활이 떠올라서일까.
아직 힘든 투병 과정이 많이 남아있겠지만, 부디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그래서 언젠가 완전히 건강해져, 오늘의 일을 단편적인 추억 정도로만 간직한 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정말!? 정말정말!?”
“응. 근데 그때는 지훈이가 다 나아서 병원에 없으면 더 좋겠어.”
“힝… 그럼 못 만나잖아.”
“지훈이가 형아 보러 오면 되지. 전화해.”
“정말!? 정말정말!?”
“응. 약속. 다 낫고 꼭 만나러 오기.”
서진이 지훈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꼬옥 걸었다.
“응! 나 그럼 언젠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서 형 찾아갈게요!”
“그래. 꼭이야. 지훈이라면 꼭 될 수 있을 거야. 형이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
기분이 좋은 듯 함박웃음을 짓던 지훈이, 문득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지연을 향해 불쑥 말했다. 우리 서진 형만큼은 아니지만, 이 누나도 같이 연주하는 모습이 꽤 멋있었다.
“누나!”
“…응?”
“누나도 너무너무 예뻐요!”
기습 공격에 지연이 볼을 붉혔다.
“그럼 빠이빠이! 예쁜 누나도 안녕~!”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후다닥 도망가는 지훈의 모습에 서진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 지훈아! 같이 가야지…!”
휠체어가 참 빨랐다. 그 뒤를 헐레벌떡 쫓아가는 모친의 모습에 서진은 괜히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인기 많네.”
옆에서 지연이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예쁘다잖아.”
“….”
피식 웃은 서진이 답했다.
내 눈엔 그냥 애 같아서 잘 모르겠는데, 지연이가 예쁘긴 예쁜가 보다. 저런 꼬맹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걸 보면.
자리를 다 정리한 서진은 악기를 챙겨 매고 앞장서 걸었다. 지연 역시 말없이 그 뒤를 따라왔다.
“아무튼, 오늘 고생했어. 우리 제법, 잘한 것 같지? 아까 다른 애들이 떠드는 소리 들어보니, 소리 완전 잘 어울렸나 봐. 관객들이 나가면서 죄 그 얘기만 하더래.”
함께 공연한 다른 학생들은 이미 다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나 있었다. 지훈과 대화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서진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옆에 같이 있던 지연만 남아있는 상황.
“…응.”
지연은 아까부터 말이 거의 없었다. 공연이 준 여운과 서진의 소리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상에 마음이 복잡한 것이다.
“???”
…왜 저러지?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묵묵히 걷는데, 뒷마당의 정원을 따라 난 길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강아지!”
“…하, 할아버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