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37
37화
반쯤 얼떨떨한 마음으로 공연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있던 찬윤이 반겼다.
“서진아~!”
“….”
서진은 어딘지 멍해 보였다.
반쯤 나사 빠진 듯한 모습에 갸웃거리는 찬윤.
얘가 왜 이러지? 너무 긴장했나? 전에 본 모습으로는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컨디션이 안 좋나?
“서진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어? 응? 아아, 형. 아냐 아냐. 아무것도.”
서진은 본능적으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꼬옥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큰일. 신줏단지 안듯, 아니 갓난아기 안듯 소중히 들고 다녀야지.
악기는 딱 공연 때에만 쓸 수 있다고 했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일단 이성 재단의 악기박물관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아무리 제게 이 명기를 잡아볼 기회를 준다 해도, 상시 아무 때나 들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닐 터.
“얼른 맞춰보자.”
서진은 악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연습을 택했다. 괜히 호들갑을 떨고 싶진 않다.
리허설을 위해 미리 도착한 공연장.
둘은 대기실 한쪽에 마련된 연습실로 향했다.
“와, 한 큐네.”
“그러게.”
오디션 통과 후 그간 종종 만나서 맞춰봤을 때도 잘 맞았지만, 오늘은 특히 찰떡이었다.
‘악기 덕인가…?’
에고 소드 뭐 이런 것처럼 주인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회귀 전 한때, 음악을 접고 방황하던 시기 탐닉했던 판타지 소설의 내용이 생뚱맞게도 떠올랐다.
“역시, 찬윤이 형 최고!”
서진이 엄지를 척 치켜들자, 찬윤은 쑥스러운 듯 더벅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어? 서진아!”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돌아보니 강윤수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어? 윤수?”
“…헉. 힘들다. 서진이 너 왔을 줄 알았어! 찬윤이 형도 같이 있었네? 아 혹시 둘이 협연해?”
어라? 윤수도 이번 공연에 서는 줄은 몰랐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을 해보긴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던 데다가 오디션에서도 못 봤기에 당연히 안 하는 줄 알았다.
윤수가 주섬주섬 악기를 꺼내 들었다.
근데 어째 좀… 크다?
“어? 비올라야?”
“응. 나 비올라로 나가.”
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말?”
아하. 비올라라서 못 본 거구나. 오디션 날짜가 달라서.
근데 윤수 얘 설마 완전히 전향한 건가?
“하하. 변명 같지만 바이올린은 서진이 네가 있는 한 힘들 것 같아서.”
전생에 도저히 넘지 못할 벽이었던 것 같은 강윤수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근데… 음악은 체육계처럼 1등만 알아주는 세상과는 좀 다른데. 연주자의 스타일에 따라 취향이 갈리니까.
“그것도 그렇고 엄마가 비올라를 더 추천하기도 해서. 밥 벌어 먹고살기 더 유리하대.”
아아. 이 통탄할 현실. 이게 초딩 6학년짜리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후으… 벌써부터 긴장된다. 이번 콘서트 규모 왜 이렇게 갑자기 커진 거야?”
“그래? 원래 이렇게 계획되어 있던 거 아니었어?”
“아냐. 이유는 모르겠는데 올해가 특별한 거래.”
“아, 혹시 그 40주년 어쩌고 때문인가?”
“응응. 특별공연으로 편성한다나… 그래서 오디션에도 사람이 엄청 많았잖아.”
이상하다… 내가 알던 것과 규모랑 내용이 많이 다른데? 분명 공고 때는 별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 해에는 원래 그랬던 건가? 회귀 전에는 이 시기에 영재 콘서트에 참가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기억이 없었다.
서진은 그게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탓에 오디션도 경쟁률이 폭발했었지만, 그 역시 서진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애초에 서진은 결과 같은 걸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무조건 붙을 거라는 자신감의 발로 때문이 아니라, 결과에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에 의의를 두겠다는 다짐 덕분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다시 만나니 좋다, 힛.”
오랜만에 만난 셋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 * *
“회장님. 간신히 전달했습니다.”
비서의 보고에 공연 시작을 기다리던 임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거참, 희한한 일이었다. 그 아이의 연주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당사자도 모르게 이렇게 두 발 벗고 나서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임회장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그 이름 높은 악기로 들려줄 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그래 수고했네. 오, 이제 시작하려나 보군. 자네도 앉게.”
임회장의 옆에는 지연 모녀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함께 박스석에 앉아 있었다. 음향적으로 좋은 자리는 아니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점 때문에 택한 곳.
‘허허. 빨리 그 아이의 차례가 오면 좋겠는데….’
서진이 등장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임회장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지연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할아버지가 저토록 흡족해하시는 걸 보니 괜히 제가 다 기분이 좋았다.
딩… 딩…
드디어 공연장의 불이 꺼졌다.
1부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서진의 차례는 멀었다. 임회장은 기다림에 목말라하는 대신 새싹 같은 영재들의 연주를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첫 타자는 이미 새싹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될성부른 소년.
피아노를 치는 아이라 했지. 이름이…
임찬윤.
‘저 소년도 재능이 상당해 보이던데… 당연히 우리 재단이 아니겠지?’
회장의 눈짓만으로도 알아들은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회장님.
‘쯧쯔….’
그게 왜 비서의 잘못이겠는가. 탓을 해도 일을 제대로 못한 딸아이를 탓해야지.
하지만 그러기엔 옆자리에 앉은 혜연의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 빛나고 있어 뭐라 타박하기도 뭐했다. 누구인들 안 데려오고 싶어서 안 데려왔겠는가. 다 재단이 그간 미술 쪽에만 투자해온 잘못이지….
한 곡 한 곡 결코 짧지 않음에도 차례가 훌쩍 지나갔다.
연주자가 바뀌는 사이, 임회장은 시선을 내려 아래쪽에 자리한 청중들의 면면을 가볍게 훑었다.
1층 중앙 VIP석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 덕에 손쉽게 안면 있는 얼굴들을 찾을 수 있었다.
‘호오.’
내로라하는 국내 예술가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많이 모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모두 저 아이를 눈독 들이는 건 아니고,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발걸음한 것이겠지.
그러던 중, 유독 눈에 띄는 얼굴이 있었다.
‘저 얼굴은… 주크먼?’
그의 내한소식을 듣긴 했으나… 설마 서진을 보러 온 건가?
아무래도 꽤나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
* * *
공연 순서는 전체적으로 영재들의 무대가 가장 앞쪽이었다. 앞부분부터 유명한 연주자들을 세우면 관객들 입장에서 자연스레 비교가 될 수 테니까.
그리고 서진은 그중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반면 찬윤의 순서는 맨 앞이었다. 즉, 맨 앞과 맨 뒤에 에이스를 박아넣은 형국. 파이널이자 하이라이트로 서진과 찬윤의 협연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서진은 숨조차 아꼈다.
제일 첫 곡이 다름 아닌 찬윤의 연주였으니까.
자리에 앉아 길게 숨을 한 번 내쉰 찬윤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로베르트 슈만의 Abegg Variation in F 메이저. Op.1
Abegg란 슈만의 상상 속 친구였던 Meta Abegg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Abegg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짝사랑으로 끝나 그녀의 이름을 딴 곡을 썼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 외에 Abegg 백작에게 선물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느 쪽인지 지금 시대에서는 알 수 없는 일.
어쨌든 중요한 건 선율. Abegg라는 글자에 맞게 실제로 라-시(b)-미-솔-솔 로 시작하는 멜로디.
시작은 느릿하니 서정적이던 선율이 어느 순간 격정적으로 화려해진다.
열정적이면서도 차분하고 침착한 연주.
날아오르는 듯 통통 튀는 손놀림. 맑은 피아노 소리가 장내를 감싸며 내려앉는다.
집중한 얼굴에 땀방울이 살짝 맺힌다. 음악을 느끼며 살짝살짝 리듬을 타는 몸놀림에서 그의 예술혼이 느껴진다.
자신의 모습도 남이 보면 이런 느낌일까.
서진은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하던 자신의 연주곡을 싹 잊어버린 채 연주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렇게 백스테이지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황홀한데, 음향설계를 제대로 반영한 저 가운데 객석에서 들으면 얼마나 영롱할까.
언젠가 꼭, 그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싶다는 욕심이 또다시 차올랐다.
짝짝짝짝짝짝!!!
관객들 역시 이 미래의 천재 피아니스트를 알아보는 건지 박수 소리가 상당했다.
정작 연주 때는 별로 긴장하지 않더니, 연주를 마치고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는데 살짝 후들거리는 다리가 보인다. 아무리 미래에 천재 소리를 듣는 피아니스트라고는 하나, 지금은 공식적으로 첫 데뷔 무대를 겪는 어린 학생일 뿐.
몸을 돌려 뻣뻣하게 걸어가는 자세는 귀엽기까지 했다. 서진은 괜히 제가 다 뿌듯하고 대견해 아빠 미소를 지었다.
서진은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친구들과 함께 손잡고 대한민국 클래식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고 싶다는 소망이.
단순히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역사에 이름 남긴 음악가들처럼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 * *
무대 뒤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 명 한 명 어린 연주자들이 뽐내는 기량을 감상하며 서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첫 순서라 제일 먼저 해치우고 조금이나마 마음 편해진 찬윤 역시 함께 자리했다. 끝났다고 부러워하기엔 맨 뒤에 연주가 하나 더 있는 그였다.
그러다 드디어,
비올라의 강윤수를 끝으로 맨 마지막, 서진과 찬윤의 차례가 되었다.
순서가 바로 뒤인 바람에 윤수의 연주를 제대로 못 들어 아쉬웠지만, 실황으로 방송한다 하니 나중에 고음질로 감상할 수 있을 터.
윤수의 연주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 즈음,
서진은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찬윤에게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형.”
“나야말로.”
찬윤은 이 어린 친구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오직 음악만을 추구하는 그였지만, 그래도 친구가 있다는 건 결코 나쁘지 않은 일.
영재원을 다니다 보면 워낙 주변의 나이가 들쭉날쭉하기에, 찬윤은 친구를 만드는 데 나이를 크게 따지지 않았다. 비록 두 살 어리지만, 서진은 함께 음악의 길을 걷는 동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친구였다.
“떨려?”
“응. 조금.”
떨린다. 아… 너무 좋아서 심장이 절로 떨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잘 믿기지 않는다.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임찬윤과 협연을 할 날이 올 줄이야…!
물론 그가 아직 기억 속의 명성을 얻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두근거렸다. 같은 음악인으로서 진짜 진짜 찐팬이었던 그가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제 눈앞에 있다니.
물론 서진이 단순히 그의 팬이라 이런 벅찬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으니까.
“너도 긴장을 하긴 하나 보네. 귀엽다. 풉.”
“….”
아니, 내가 이 나이(?)에 어린애(?)한테 귀엽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그런데 딱 한 곡이라니. 아쉽다. 감질나잖아. 솔로는 왜 신청 안 했어? 내가 반주해 줄 수 있는데.”
“그럼 형 세 곡이나 준비해야 하잖아.”
“상관없는데.”
“안 돼. 괜히 나 때문에 형 솔로에 지장 주는 건 싫어. 형 아까 들어올 때 완전 목각인형 같았던 거 다 봤거든? 연습량 부족하면 조금만 긴장해도 완전 망하는 거 알잖아. 세 곡은 무리.”
찬윤은 대답 대신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튼 딱 하나니까 더 잘하자. 밖에 사람들 많더라. 관계자들 특히.”
아까 밖을 보니 별별 유명인사가 다 와 있었다. 애들한테 얼핏 듣자 하니 해외 거장도 와 있는 것 같고, 국내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몇몇 보였다.
“응. 잘해야지. 근데 왜 이렇게 많이 왔지?”
설마 다들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아, 2부에 있을 동료 연주자들의 곡을 들으러 온 거겠구나.
물론 서진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 앞에서 연주를 선보인다 해서 새삼스레 떨리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약간 신경 쓰이는 구석이라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