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주크먼이 자신에게 연락을 남겼다는 걸 아는 서진은 그의 시선이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작 그런 일이 서진의 연주에 영향을 끼칠 리는 없었다.
짝짝짝짝짝짝!
“어, 박수 소리 들린다. 윤수 끝났나 봐.”
이윽고 교대하듯 윤수가 들어오고, 둘의 차례가 되었다. 스쳐 지나가며 “잘했어.”라고 작게 말해주자, 윤수는 “둘 다 파이팅!”이라고 답했다.
이제 진짜, 대망의 순간이었다.
* * *
서진의 등장에 관객석이 살짝 술렁거렸다. 뒤이어 함께 걸어오는 찬윤에게도 시선이 쏠렸지만, 처음 등장한 앳된 소년의 모습에 가장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 거기에 더해, 아마 오늘의 연주자 중 가장 대중에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존재이기 때문일 터.
무대 위를 성큼성큼 걷던 서진은 자신의 이름을 쑥덕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관객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몇몇 존재가 있었다.
그중 한 명, 주크먼은 오랜 기다림 끝에 형형해진 눈빛으로 그토록 궁금했던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부디 내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소년.’
주크먼은 그동안의 상황에 내심 괘씸함을 느끼면서도 끝내 연주회를 보러 왔다.
처음에는 언짢았으나, 알고 보니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공연 전에 외부와 일체 소통을 끊는 연주자들이 많다는 걸 아는 만큼 딱히 유감을 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린 영재들로 이루어진 공연 프로그램은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기대되는 건 서진의 연주.
주크먼은 프로그램에 쓰여있는 곡명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크로이처 소나타.
이름만 들으면 크로이처가 작곡한 소나타 같지만, 실은 베토벤의 소나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9번. A 메이저. Op.47.
베토벤이 크로이처에게 헌정한 곡이라 하여 ‘크로이처’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정작 그 당사자에게는 외면받은 곡.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베토벤이 작곡한 총 10개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 가장 명곡으로 인기 있는 곡 중 하나였다.
주크먼은 모르겠지만 서진은 이 곡을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골랐다. 너무 과하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평범하지도 않은 곡을 선보이기 위해.
대외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천재로 보일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서진은 단지 지금의 자신으로서 최선의 소리를 내보일 수 있는 곡을 고르는 데에 집중했다. 거기에 찬윤의 의견도 고려해야 했으니, 정말로 어려운 선곡 과정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크로이처라….’
주크먼은 예전에 읽은 적 있던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떠올려 보았다.
그 크로이처 소나타가 바로 이 곡, 베토벤의 소나타다.
마치 이 곡을 스토리로 형상화해놓은 듯한 소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시작되었다.
강렬한 더블스탑.
시작은 아주 느린 화음을 노래했지만 그 음색만큼은 진하고 또 진했다.
어쩐지 음울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는 그런 선율.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피아노가 응답한다.
이어 고조되는 선율은 열정을 터트렸다. 베토벤 특유의 격정.
폭발적인 멜로디. 차오르는 갈등.
분명 완벽히 조화로운 2중주일진대, 마음에 피어오른 불안이 고조되며 타오른다.
날카로운 선율. 광기 어린 음색은 난폭하기까지 하다.
쥐어뜯는 듯한 세기의 피치카토.
굳은살이 박일 대로 박였음에도 아직 여린 살이 비명을 질렀지만 서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음색이….’
역시나 명기는 다르구나.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소리. 청중들도 그렇겠지만, 직접 연주하고 있는 서진은 더욱 남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임회장이 특별히 공수해다 준 바이올린은 말도 안 되는 음색을 내며 곡의 감성을 한결 깊이 끌어올려 주었다.
농도 짙은 소리를 가득 담은 서진의 연주가 청중들의 마음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
넘쳐흐르는 감정의 홍수에 청중들은 질식할 듯 압도되었다. 숨소리 하나 없다.
이게 무슨… 이게 고작 저런 어린아이가 내보일 수 있는 소리라니.
대체 심장을 후려치는 듯한 이 음색은 무어란 말인가. 듣는 순간, 눈앞에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주크먼은 난생처음 겪는 경험에 전율했다. 당장이라도 격한 숨을 토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무언가가 차오른다.
이 소리 하나로 뭐든 게 용서되는 기분이랄까. 아무리 자신을 바람맞혀 화가 났다 해도, 설령 대놓고 거절한다 한들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음색.
아니, 이 정도면 제 쪽에서 쫓아다니며 사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자로 들어오라는 게 아니라, 함께 음악인의 길을 걸어 나가자고.
이건 예전 사라 정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상대가 아예 한참 어린 나이라서 그런지 질투도 나지 않았다. 라이벌이 아닌 대상에게 시기를 느끼는 경우는 없으니까.
그렇다. 이 소년은 이미 자신이 라이벌조차 될 수 없는 존재였다.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아.’
하지만 그 사실이 부끄럽지도, 통탄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소리.
소년의 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분명 한국에 오기 전 영상으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새 더 늘어 있다.
실로 괴물 같은 발전 속도.
주크먼은 이 아이가 무섭기까지 했다.
* * *
객석에 앉아 아들의 차례가 되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한선희는 드디어 나타난 서진의 모습에 얼굴이 확 밝아졌다.
동시에 느껴지는 주변의 반응. 서진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게 절로 느껴졌다.
여태껏도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던 이들이었지만, 그에 더해 푸욱 기대앉아있던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한다거나, 프로그램이 적힌 팸플릿을 다시 확인한다거나,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이었다.
서진에게 받은 초대권 덕분에 VIP석 중앙에 앉아있던 만큼 선희는 그것을 확연히 느꼈다. 한눈에 척 봐도 한 가락 한다 하는 사람들이 대거 앉아있는 것 같은데….
특히 자신의 주변에 앉아있는 이들은 다들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일 것 같았다. 왠지 모르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일 것 같은.
그중에서도 제 오른쪽에 앉은 여인.
여자의 눈빛이 형형하다. 이유는 몰라도 어딘지 아들이랑 비슷한 분위기가 나서 한 추측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서진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우리 아들이 이 정도로 유명했었나?’
근데 이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잠시 갸웃하는 사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두 소년은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인 후 곧바로 손을 놀렸다.
중후하면서도 날카로운 선율의 향연.
휘몰아치는 격정이, 때론 감미롭고 때론 위태로운 화음의 소나기가 내렸다.
음악이 시작되자 선희는 조금 전의 생각 따위는 까맣게 날려버렸다.
···너무 아름답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비록 자신이 클래식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라 한들, 이거 하나만은 알겠다.
복잡한 수식어로 점철된 감상을 내릴 교양도 지식도 없지만, 사람인 이상, 귀가 있는 이상 이 소리가 아름답다는 걸 모를 수는 없으니까.
평소에도 늘 아들의 연주 소리에 행복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된 무대에서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심지어 지난번 대관령 때와도 또 달랐다.
객석을 꽉 메운 수백 명의 인파.
그중 하나로서 앉아있는 자신조차 지레 긴장이 되는데, 저 기특한 아들내미는 어쩜 저리 당당하게 연주를 해 보이는지.
내 아들이지만, 내 속으로 낳은 녀석이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나 훌륭해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 * *
한선희의 생각대로 주로 업계 관계자들이 많이 앉아있는 이곳 중앙의 초대석은 대부분 서진에 대한 관심으로 모여 있었다.
일반 관객들이 송여름 등 기성 연주자들의 이름에 혹해 왔다면, 같은 음악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서진 쪽이 오히려 궁금했다.
이미 유명한 이들은 이미 유명한 거고, 서진은 그 미래가 가늠조차 안 되는 천재성을 보이므로 그 실제 연주가 궁금한 것이다.
혹여 소리라도 낼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한선희의 옆,
아까부터 타오르는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반응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호오….’
솔직하면서도 단순한 감상이 한계일 수밖에 없는 선희와 달리, 그녀를 비롯해 주변에 있는 전문가들의 눈은 또 달랐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건 고금의 진리니까.
‘제2의 사라 정’이라고, 제 이름을 딴 수식어가 붙은 아이가 궁금해 마침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차 와 봤는데….
여자의 입꼬리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이거,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나도 분발해야겠는데…? 이름의 원주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아야지.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감상에 집중했다.
그야말로 환상의 하모니.
피아노도 어찌나 완벽한지, 한데 어우러진 연주가 귀에 깊이 들어박혔다.
그녀가 바이올린 연주자였기에 바이올린 위주로 귀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둘 중 하나만 모자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기는 힘들 터.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은하수가 펼쳐지듯 시야에 별무리가 흘렀다. 반짝이는 음들의 향연이 눈앞에서 마치 별처럼 빛났다. 얼마나 아름다운 음색이면 이런 기분까지 드는 걸까.
‘아…’
다른 이의 연주를 듣고 이런 전율을 느껴본 게 얼마만이던가. 웬만한 거장의 연주를 듣고도 쉬이 느껴본 적 없는 감정.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감상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일단 감상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런 역사에 남을 훌륭한 연주를 단 한 음도 놓칠 수야 없지.
맨 처음의 충격도 많이 가셔 이제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남은 연주를 감상하려는데,
‘음…?’
잠깐, 아주 살짝 으응? 싶었는데, 바로 음정이 제대로 돌아왔다.
잘못 들은 건가…?
뭐, 음정이 조금 흔들렸나 보지. 순간적으로 잘못 짚어서 비브라토를 하는 척 슬그머니 옮기는 건 흔한 일이니까. 숙련된 바이올리니스트조차 가끔 음정이 흔들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귀로는 알아도 컨디션에 따라 손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기에.
* * *
서진은 한참 연주에 몰입하던 중, 조율 상태의 변화를 느꼈다. 분명 포지션에 맞게 정확히 운지했음에도 음정이 미묘하게 다른 것이다.
비유하자면 미도 아니고 파도 아니고, 미와 파의 어딘가에 위치한 애매한 소리가 난다고 할까. 반의 반음 정도의 차이였지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차이였다.
인지하는 순간, 서진은 비브라토를 이용해 재빨리 손가락 위치를 미세하게 옮겼다. 슬쩍, 자연스럽게. 비브라토로 인한 편차 범위 내에 있는 음인 척.
너무도 절묘했기에 대부분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음감이 뛰어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하필 이런 타이밍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