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서진과 지연을 모두 내보낸 후,
“대단한 아이더구나.”
다시 딸아이, 혜연을 부른 임회장이 운을 뗐다.
“아버지 눈에도 그렇지요?”
“저 아이를 반드시 잡거라.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임회장이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답했다.
“네, 아버지. 그야 이를 말인가요.”
“그렇다고 억지로, 안 될 일을 강제할 필요는 없다. 꼭 이성의 품 안에 공식적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니, 계약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무조건 전폭적으로 후원해 주거라.”
“네. 이미 그렇고 하고 있어요.”
“언젠가 크게 성장할 녀석이니, 그걸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겠지.”
후원의 맛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될 놈을 알아보는 것. 점찍어두고 밀어준 이가 정말로 크게 성공했을 때의 그 뿌듯함.
그 상대가 고마움을 알고 기억해 준다면 더더욱 기쁜 일이다.
물론 가끔 받을 것만 받아먹고 입 싹 닦는 배은망덕한 인간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 못 가더라.
그가 후원해 온 대부분은 은혜를 아는 이들. 애초에 싹수가 노랬다면 아예 후원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혜연아, 밖에 김비서 좀 불러오거라.”
“네, 아버지.”
비서를 들인 회장은 짧게 지시를 내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모차르테움 관련해서 기자들에게…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더불어 우리 이성 재단 홍보도 확실히 하도록 하고.”
서진이 연주한 악기에 대한 정보를 기자들에게 슬쩍 흘리면,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양 좋다고 달려들 터.
“물론입니다 회장님.”
“아, 이왕이면 모차르테움 쪽에도 영상을 전해주면 좋아하겠군. 자신들이 보내준 악기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할 테니 말이야.”
아마도 영상을 보면 놀라 자빠지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 반응이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리고…. 그거, 서진 학생에게 해주게나.”
잠시 고민하던 임회장은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거라 하시면….”
“…말일세.”
혜연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나온 속삭임에 비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모습에 궁금해진 혜연이 물었지만, 임회장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 * *
“흐어어….”
YN 음악 저널의 강민지 기자는 오늘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끙….”
책상에 머리를 깊이 처박고는 두 손으로 부여잡는 모양새가, 누가 보면 대단한 실연이라도 겪은 듯한 모습.
“왜, 또.”
“건진 게 없잖아, 건진 게…!”
이모팬 1호로서 평소에도 늘 꾸준히 스토킹, 아니 자료수집에 열을 올려왔는데, 정작 이렇게 큰 건에 막상 쓸 게 없었다.
“으이그… 머리를 싸맨다고 없는 기사가 나오냐?”
“아우, 진짜…! 내가 명색이 1호 이모팬인데!”
그렇게 꽁무니 쫓아다녀 놓고 정작 가장 중요한 공연 다음 날 있었던 마스터 클래스 인터뷰를 놓쳤다.
공연 날이야 모두 공평히 헛물 켰으니 그렇다 쳐도, 다음 날 하필이면 집에 급한 일이 터진 탓에 연차를 내느라 그 중요한 주크먼과의 만남의 순간을 놓친 것.
“다들 사진 한 장씩 건졌을 텐데… 우리만 뭐 아무것도 없네. 하아…. 심지어 이 기사도 우리는 뒷북으로 내는 거잖아.”
임회장의 지시로 나온 모차르트 바이올린에 대한 보도자료는 당연하게도 다른 메이저 언론사로 향했다. 음악 저널처럼 특정 영역에 치중한 작은 언론에까지 콩고물이 떨어질 리는 없는 것.
“이거, 출처 이성이지?”
“응. 이성에서 직접 내보낸 홍보자료니까 마음껏 활용해도 상관없어. 사진도 아무거나 쓰면 되고. 이번 무대 위에서 찍힌 사진은 다 저 바이올린 들고 있는 거니까.”
똑같은 기사를 재생산해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다들 떠들고 있는데 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와. 영혼 없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다른 거 뭐 건질 걸 찾아야 한다고! 아오, 얘는 왜 이렇게 신비주의자야!?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 말고는 뭐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어!”
강민지의 투덜거림에 옆자리 동료, 신은정이 핀잔을 주었다.
“그야 당연하지, 그냥 초딩이잖아. 뭐 기삿거리 할 만한 게 있겠어?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이렇게 간혹 공연이 있을 때 빼고는 얌전히 학교만 다니겠지. 초등학교랑 영재원이랑. 그리고 밥 먹고 종일 연습하는 게 전부 아니겠어? 손가락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와, 말하고 보니 어린애가 대단하네…. 진짜. 독하다, 독해.”
“그러게. 이 랜선이모,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그러니까 이 이모가 우리 서진이 더더욱 돋보이게 해줘야 하는데….”
“네가 안 그래도 이미 유명하거든?”
“됐고, 그래도 좀… 뭐 없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내가 얼마 전에 소문을 좀 들었단 말이야? 내가 그쪽에 좀 인맥이 있잖아.”
“무슨?”
“재벌가에서 쉬쉬하며 도는 소문이라는데…,”
그렇게 운을 뗀 그녀는,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성 회장이 콕 찍어 눈독 들이고 있다고?”
“응. 이번 공연도 직접 보러 왔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어.”
“그래? 기사 안 났는데? 왔으면 분명 얘기가 나왔을 텐데?”
“조용히 보고 떠났나 보지. 아무튼, 이성 회장이 그 애를 붙잡고 싶어 난리라더라고.”
“정말? 그냥 후원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몰라 나도 카더라인데, 아무튼 임회장이 그 애 공연을 직접 본 게 몇 번이나 된다더라. 참, 그리고 또 하나 있어. 그 왜, 미국에서 다비트가 러브콜을 보냈다는 거 말야.”
“아 그건 나도 들었어. 자기가 챙겨주겠다고 유학 오라는 거 거절했다고.”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보내왔다는 건 이제 별로 새로운 흥밋거리도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야 한예종을 통해 예전부터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미 주크먼의 기사가 선수를 친 상황이었다.
“근데 왠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뭐랄까. 분명 예감이 드는데… 그 뭐냐. 다비트가 그때 서진이랑 협연한 후에 그런 인터뷰를 했잖아. 이 곡이 곧 제작될 영화 ‘파가니니’에 쓰일 곡이라고. 그걸 같이 작곡했다고.”
“음. 그랬지.”
“그래. 그 영화 쪽으로 뭐 없을까? 같이 작곡도 하고, 협연도 했는데, 영화에서는 뭐 없나?”
“글쎄…? 그건 딱히….”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묘하게 혹하는 감이 왔다.
잠깐. 영화라면… 혹시?
“있잖아, 요즘 한가한데 영화 취재 좀 가면 안 되려나?”
“참도 보내주겠다. 그전에 차라리 인맥부터 총동원해봐. 영화판 쪽으로. 건너건너 해외에 아는 사람 있겠지.”
좋아, 그거라도 일단 해 봐야지.
이거 분명 뭐 있다. 여자로서의 촉, 아니 기자로서의 감이다.
뭐 하나 크게 건지기만 하면… 대대적으로 때려 박는 거다!
벌써부터 조회수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에 강민지와 신은정은 신이 나 영화 쪽 인맥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한바탕 휘몰아친 일련의 일들.
영재 콘서트 공연에 이어 주크먼의 마스터 클래스, 그리고 이성 그룹 회장을 대면하고 온 일까지.
큰일들을 연달아 치른 탓인지 주말을 맞이한 서진은 웬일로 연습도 마다하고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휴….’
쉬는 것도 연습의 일부니 당당했다.
하지만 편안히 푹 퍼져있는 몸과 달리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아직 신경 쓰이는 일이 남아있는 탓이었다.
주크먼이 친히 방문해주었던 일은 훈훈히 잘 마무리되었지만, 다름 아닌 그의 권유가 문제였다.
며칠 전,
마스터 클래스가 끝난 직후.
KH의 협연 제의는 단호하게 거절했던 주크먼이, 서진에게는 되레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미국에서 나와 함께 협연을 하지 않겠나? 내가 뉴욕필과 무대를 마련해 줄 수 있는데. 카네기 홀에서 말이지.
-…!
뉴욕필…! 그것도 카네기 홀!
모든 연주자들의 꿈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서진 역시 순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만 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과 함께 줄리어드에서 공부하자는 그의 제안.
짧은 고민 끝에 서진은 정중히 거절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아직 한국에서 배우고 싶어요. 이곳에도 훌륭한 스승님들이 많으니까요.
협연은 아쉽지만… 언젠가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따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네.
면전에서 거절을 들었음에도, 이 먼 동양의 소국까지 날아온 보람이 없는 대답임에도 주크먼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되레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은근히 언짢아할 줄 알았는데…, 서진은 조금 의외였다.
-나는 미스터 한의 당돌한 자신감이 더욱 마음에 드는군. 하하…!
주크먼은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섰다.
서진의 존재에 열등감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그때의 장경화 그 이상으로.
한국인은 내게 번번이 패배를 안겨주는 존재인가… 나는 저 두 한국인 모두 이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시원했다. 그냥, 인정하니 편했다.
모두 이 아이로 인한 깨달음이었다.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이기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소리와 색깔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그런 깨달음을 얻은 주크먼의 얼굴은 전과 달리 편안했다. 그 변화를 서진 역시 어렴풋이 느꼈다.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하시기를요.
서진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 역시 편견을 걷고 주크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음악을 하는 사이라면, 그리고 같이 발전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환영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인연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지막 제안이 서진에게 상당한 고민과 갈등을 안겨주고 갔다는 것이었다.
“음….”
…과연 유학을 전부 거절하는 게 잘한 일일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회귀 전 생에서의 실패를 이유로 너무 겁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내일모레면 중학생인 나이다. 초등학생이라면 모를까, 유학을 가기에 그렇게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
“후….”
모르겠다.
일단… 이번 영화촬영을 기회 삼아 큰물을 직접 겪어본 후 결정해도 늦지 않겠지.
“서진아, 바빠?”
“아뇨, 엄마. 그냥 핸드폰 보고 있어요.”
그런 고민과 함께 뒹굴거리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선희가 문득 물었다. 그녀의 화면에는 서진이 연주하는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왜요?”
“어? 아무것도 아냐.”
실은 신경 쓰이는 댓글이 있어서 물어보려 했던 건데, 괜히 긁어 부스럼일 것 같아 망설여졌다.
“서진이도 연주 영상 보고 있었네? 또 너튜브 댓글 읽고 있는 거야?”
“네? 아뇨. 요즘은 잘 안 봐요.”
악플 같은 걸 딱히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린다는 것에 대한 신기함도 잠시, 흥미가 빠르게 식었다.
“그보다는 요즘 기사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 같아서 한 번 체크해 보고 있었어요.”
근거 없는 헛소리라도 실려 있으면 정정 보도를 요청해야 하니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