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참. 악보는 없이 해야 해. 괜찮겠어?”
특정한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강요로 기계적으로 훈련하는 모습을 담은 씬이다. 딱히 정해진 곡이랄 게 있을 리가.
물론 그 기교훈련에 필요한 음표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놓은 악보가 있긴 했으나, 화면상에는 담기지 않을 예정.
“네. 이미 다 외웠어요.”
감독의 질문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메트로놈 튼다.”
아직 분장도 하지 않았기에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정말 이 아이로 오케이인지 확인만 해보려는 것이니.
서진은 곧바로 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주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우중충한 세트장 –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실내의 모습은 굉장히 우울했다 – 에 화려한 바이올린 소리가 너울거렸다.
순간, 공간의 색깔마저 바꿔버리는 듯한 마법 같은 음색.
분명 음악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오직 연습을 위한 연습곡. 억지스러운 기교로 떡칠된, 남에게 어린 아들의 빼어난 연주실력을 뽐내기 위한 그런 곡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걸까.
이런 음색이라니…. 감미로운 선율 따윈 조금도 없는, 억지스러운 기교로 가득 찬 곡인데 이상하게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처럼 사람을 홀린다.
‘정말 신기하지….’
봐도 봐도 신비로운 아이.
그 옛날의 진짜 파가니니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않았을까.
기교 역시 완벽했다. 원래도 실력이 뛰어난 서진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진짜 파가니니 못지않게 빡센 연습을 해온 건지 정말로 파가니니의 환생이라 해도 믿을 모습.
‘오, 어디서 이런 애를 구한 거야?’
놀란 감독이 다비트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내가 뭐랬냐고.’
짧은 연주가 끝나자, 촬영장의 모두가 – 스탭뿐 아니라 잡역부들까지 전부 – 하던 일을 멈추고 서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만하지. 감독은 일하는 이들을 탓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들으면 그 자리에 멈춰서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짝짝짝…!
무대도 아니건만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은 활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리며 담담히 미소지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비록 제대로 된 무대에서의 연주도 아니었지만, 서진의 태도는 공연에 임하는 완벽한 연주자의 그것이었다.
“브라보. 합격! 완벽해!”
다비트가 기특하다는 듯 서진의 머리를 헝클였다. 아무리 어려도 같은 프로 연주자로서 존중하긴 하나, 그래도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다.
“감사합니다.”
“참, 그런데 이걸 더 빠르게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영화의 장면에서는 이걸 점점 더 빠르게, 조금씩 메트로놈 템포를 높여 나중에는 미친 듯이 빠른 연주를 해 보이는 모습이 나온다.
처음에는 똑 딱 똑 딱, 정도의 속도에 맞추던 것을, 마지막에 가서는 똑딱똑딱똑딱똑딱 이 정도의 속도에 해내야 하는.
베르나르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템포 더 높여도 될까?”
“최대치로 해도 괜찮아요.”
“오….”
사실 맥시멈 템포는 실제 연주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역 배우로서는 흉내도 어려우니, 서진이 적당히 시늉만 해주면 다비트가 연주한 음원 파일을 덮어씌우려 한 것.
한데,
“홀리…!”
서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이제 베르나르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서진을 칭찬해대기 시작했다.
“와우,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군. 내가 서진을 진작 알았다면 이 씬을 가지고 그토록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하하. 내 자네 반응이 그럴 줄 알았지. 우리 천재 소년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크하하! 정말 그 말이 맞군. 아무튼, 이대로라면 바로 촬영 시작해도 되겠어. 바로 스케줄 잡아서 아역 배우 부르고 들어가자고.”
“오케이. 그럼 이 대본대로 가는 거지?”
다비트가 기쁜 듯 물었다. 자신이 주선한 일이다 보니 베르나르의 만족스러운 태도에 함께 기분이 좋은 것이다.
“…아니다 잠깐만.”
“음? 왜?”
“내가 더 좋은 생각이 났어.”
“…무슨?”
베르나르의 눈빛이 무언가의 아이디어로 번뜩였다.
“아역 배우의 비중을 원래보다 줄이고, 대역의 촬영 분량을 늘리는 게 좋겠어.”
“호오?”
“그편이 훨씬 리얼한 연출이 가능할 테니까.”
“근데 가능할까?”
“아역 배우한테는 미안하지만, 일단 조정 좀 해보고. 카메라 쪽이랑도 상의하고….”
얼굴의 차이 같은 건… 일단 분장 빡시게 하고 가발 씌우고… 거기에 비스듬한 각도의 얼굴에 무대의 스포트라이트 비춘다거나, 역광으로 처리한다거나…, 어찌어찌 방법은 많았다.
베르나르는 핸드폰을 들어 잠시 어디론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역 배우와의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 사이 다비트는 서진 옆에 찰싹 붙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디서 머물고 있냐는 질문에 서진은 호텔 이름을 알려주었다.
“오, 페라리 광장 근처군. 좋아, 내가 그쪽 호텔로 옮기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다비트는 서진을 꼼꼼히 챙겨줄 생각이었다. 보호자가 동행했다고는 하나, 서진을 이곳까지 부른 건 자신이니 제 책임하에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띠리리리.
잠시간의 틈에 쉬고 있는데, 서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발신자는 무현이었다. 한예종의 지도교수로부터 온 전화.
‘…교수님이 갑자기 웬 연락이지?’
“네. 교수님.”
감도가 멀게 느껴지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내용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빈에서 온 연락이 한국을 거쳐 다시 유럽에 있는 서진에게 전해온 것.
“…빈 필하모닉이라고요?”
무현이 전한 말을 요약하자면, 한예종을 통해 오스트리아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소식이었다.
…빈필의 지휘자가 나를 직접 만나 보고 싶어 한다고…?
* * *
똑똑.
“할아버지, 들어가도 돼요?”
“오냐. 우리 강아지.”
방학을 맞이해 외가에 놀러 온 지연은, 오직 자신에게만 너그러운 할아버지의 총애를 가득 받으며 서재를 기웃거렸다. 외삼촌들이나 다른 사촌 오빠들에겐 엄한 할아버지지만, 딸과 외손녀인 제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한 할아버지다. 막내딸과 가장 막내 손주의 특권이란 본디 그런 것.
“지연이 심심하냐?”
“네….”
아닌 척했지만, 텅 빈 집에 혼자 있는 대신 할아버지 댁에 놀러 왔음에도 심심한 건 여전했다.
최근 들어 경영 일선에서 반쯤 물러난 덕에 주로 집에 머물러 있는 임회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손녀딸과 딱히 놀아줄 거리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
“허허… 지연이 너, 그 녀석이 없어서 심심한 게지?”
“네? 아, 아니에요!”
지연이 격하게 부정했지만, 임회장은 한눈에 봐도 알았다.
사실 그렇긴 했다.
지연은 이상하게 이번 방학이 허전했다.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며 시원섭섭한 마음이 드는 탓인지, 아니면 영재원에서 매번 얼굴을 맞대고 함께 지내던 서진이 훌쩍 멀리 떠나버려서인지….
모르긴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서진의 존재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즐겁게 전공 생활을 해나가지 못했을 테니까.
함께 수업을 듣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곡을 해석하고, 밤늦게까지 함께 연습하며 서로의 소리를 들어주며 공연을 준비하고 등등….
“욘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새 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모습에 임회장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다 큰 숙녀인 척, 도도한 척 새침하게 굴어도 아직 애가 아닌가. 얼굴에 훤히 보였다.
“서진이가 그렇게 좋으냐?”
“네에!? 하, 할아버지! 아니라니까요?”
은근히 묻는 임회장의 말에 지연이 펄쩍 뛰었다.
“욘석아, 아니긴…,”
“아니에요!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서진이는 그냥…,”
“그래그래. 이 할애비도 응원하마. 그렇게 좋으면 얼른 꽉 잡아야지. 유명해지고 나면 늦을 게다.”
아니, 할아버지 진짜 왜 그러신담!?
그런데 문득, 유명해지고 나면 늦는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희한하게도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도 학교와 영재원에서 인기 폭발인데, 만약 서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면?
막 월드클래스 스타, 스포츠계로 치면 김연아처럼 유명해지면?
급이 안 맞아 더는 파트너로서 함께 할 수 없어질 터.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대로 서진을 놓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지?
“어… 그게, 할아버지, 어쩌죠…?”
지연은 벌써 그렇게 되기라도 한 듯 울상이었다. 임회장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뒷말을 이었다.
“어쩌긴 열심히 뒤를 쫓아야지.”
“네? 저더러 쪼, 쫓아다니라고요?”
“그래. 열심히 그 애 뒤를 쫓아가야지.”
“아….”
“너희 둘은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적어도 음악을 하고 있는 동안은 함께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 네 성격에 뒤처지는 것도 못 견딜 테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무조건 음악에 매진하거라.”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파이팅이다. 더 노력해야지, 저 멀리 혼자만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쫓아가야지.
“그래, 그럼 엄마가 말한 대로 유학 가는 게지?”
“…아. 유학이요….”
지연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안 그래도 최근 이 문제로 고민이 컸다.
모친인 혜연은 딸아이의 일임에도 딱 잘라 냉정히 말했다. 음악을 계속할 거면 유학 가라고. 서진이와 넌 다르다고.
서진은 천재이기에 어디에 있어도 성공할 수 있으나, 지연은 달랐다. 보다 넓은 물에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성 재단에만 처박혀 있다가 한예종에 오니 부쩍 성장했던 것처럼.
“그럼 음악을 그만두고 이제 슬슬 공부에 전념하든가.”
“아, 아니에요!”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한국에 남아있는데, 자신도 당분간은 한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바이올린을 그만둔다고 해도 중학교 때부터 유학을 가야 하는 건 똑같다. 저 먼 이역만리 타국의 보딩 스쿨로.
어차피 그럴 거면 차라리 음악을 계속하는 게 나았다.
“세상에 공짜로 되는 건 없는 법이겠죠….”
임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내 손녀인 지연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저 어여쁘기만 했다.
바로 위의 사촌들이라 해도 벌써 시커먼 티가 풀풀 나는 사내아이들. 가뜩이나 손녀딸이 귀한 집에서, 이제 갓 중학생이 되는 어린 손녀가 얼마나 예쁘겠는가.
하지만 언제까지고 아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 큰 세상에 나가 부딪혀 볼 때가 온 것이다.
“그래. 열심히 하거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그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나이에 비해 차분하고 조숙한 편인 데다 워낙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만큼, 이 정도 운을 떼 주었으면 누가 따로 잔소리하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노력할 터.
“네, 할아버지!”
역시나 지연은 굳게 의지를 다잡으며,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기운차게 외쳤다.
* * *
서진은 조만간 시간을 내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인 프란츠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지금 유럽에 와 있다는 말에 꼭 보고 싶다고, 자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며 초대했는데 거절하기도 뭐했다.
물론 유럽이라 해도 이곳은 이탈리아 제노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과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하지만 공연에 초대하고 싶다는 말에 서진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언제 또 있겠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빈필과의 협연을 논의하기 위해 보자는 것인데.
그래서 일단 긍정적인 답변을 준 후,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당장은 영화 촬영이 우선이었으니까. 애초에 이게 목적이기도 했거니와, 아역 배우를 불러 촬영하기로 한 일정이 벌써 잡혀 있었다.
“컷!”
감독의 사인에 아역 배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이름은 쥬세페. 올망졸망하게 생긴 귀여운 어린아이였다.
키가 비슷한 게 얼핏 서진의 또래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10살로 서진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물론 서진은 이제 며칠이 지나 새해가 되면 한국 나이로 14살이 되지만, 이곳에서는 만 나이를 쓰니까.
‘근데 체구는 비슷하네….’
내가 이렇게 작은 편이었나 싶어 서진은 암울해졌다.
“자, 이제 서진 군 차례.”
여기까지가 아역,
이제 서진이 자리를 바꾸어 같은 자세로 섰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