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48
48화
아역과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가발을 쓰고, 분장도 최대한 비슷하게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모습, 뒤쪽 옆에서 비스듬히 바라보는 모습으로는 쉽게 구분이 안 될 정도.
감독의 사인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자, 서진이 신들린 듯 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부터 비추기 시작한 카메라 앵글이 앞으로 오며, 빙글 돌아서 서진의 얼굴이 아닌 손을 비추었다.
점점 빨라지는 음의 향연.
숨이 막힐 듯 치달아 오른다.
그러나 그걸 연주하고 있는 서진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화려한 소리와 다르게 공허한 눈동자.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을 리 없으니 눈빛이 카메라에 담기진 않겠지만, 어린 파가니니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서진은 상상한 그대로의 감정선을 잡았다. 그러한 감정이 결국 소리에 담길 테니까.
연주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우면서도 공허했다. 그러나 특유의 화려한 기교가 그 허전함을 가려주었다.
“오케이, 컷!”
감독의 박수 소리가 세트장에 울려 퍼졌다.
“좋아, 완벽해! 하하하, 정말로 잘했어, 꼬맹아!”
“이봐, 베르나르. 꼬맹이가 아니라 어린 연주자.”
다비트가 약방의 감초처럼 나서 지적했다.
“어이쿠, 이런 내가 흥분해서. 미안하다.”
서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같은 음악인이라면 모를까, 어른들의 눈에 대체로 자신이 꼬맹이에 불과한 건 사실이니까.
베르나르에게 악의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서진을 칭찬하느라 침이 튀기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빴으니까.
“오우, 어떻게 지난번이랑 또 다르지? 지난번도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이건, 이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그냥 어린 파가니니 그 자체였어! 좋아, 정말 좋아! 앗하하! 그 결정을 내린 건, 내가 정말 신의 한 수를 둔 거였어!”
아마 본래의 아역 비중을 줄이고, 서진이 연주하는 장면을 늘리기로 한 것을 말하는 듯했다.
사실 베르나르는 절대로 이렇게 칭찬에 너그러운 이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거장을 간신히 모셔와 놓고는 주연인 다비트에게조차 이래라저래라 싫은 소리를 해댔다.
물론 음악적인 측면보다는 연기적인 부분에 있어서 하는 잔소리였지만, 어쨌든 쉽게 칭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와우, 지금 나도 좀 소름 끼쳤어.”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조연이나 단역에서부터 조명, 연출, 분장 등등의 스태프들까지. 모두가 제 일을 팽개친 채 서진의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그 옛날 파가니니라면 정말로 이랬겠지? 분명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아냐. 내가 그 시절을 안 살아봐서 모르긴 모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아. 이건 분명 그 이상이야.”
“소년… 너, 정말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건 아니겠지…?”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음악을 듣자,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온 것들이 스르르 떠올라 재생되는 게 아닌가. 파가니니에 대해 상상했던 모든 것이 절로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기분.
이 소년의 음악은 정말로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로 눈앞에 지극히 아름다운 무언가가 펼쳐지고, 그 웅장함에 흠뻑 빠져 있노라면 정말로 눈앞에 장엄한 광경이 펼쳐진다.
시각과 청각이 완벽히 하모니를 이루며 충족되는 만족감.
이걸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소위 마약 중독자들이 느낀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인다는 말이, 환상적인 감각이 펼쳐진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절로 두 감각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쏟아지니,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본 적 없었던 감동이 차올랐다.
‘이건… 반드시 대박이 난다!’
베르나르는 확신했다. 이 영화는 도저히 대박이 나지 않을 수 없다고.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이 기분을 비유하자면, 딱 그것과 같았다.
영상과 배경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
영상미를 완성하는 데 그에 걸맞은 배경음악을 결코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듯, 음악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하.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아냐. 소년. 정말로 이건….”
베르나르는 벅찬 감동에 여전히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한 가지만으로도 벅찬 감각이 한데 어우러져 동시에 느껴지니, 그 충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악마에 영혼을 팔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소리라고.”
…이 사람들이 정말.
파가니니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21세기인 지금도 이런 소리가 나오는데, 수백 년 전 그 옛날엔 오죽했겠는가. 그런 지긋지긋한 소문을 달고 다녔을 만했다.
한바탕 호들갑이 지나가고,
잠시간의 휴식 후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 대본에서 대충 봤던 것보다, 서진이 들어가는 씬의 비중이 훨씬 늘어나 있었다.
지난번 봤을 때 좋은 생각이 났다며 어쩌고저쩌고 조정한다더니, 생각보다 그 정도가 더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몇 가지 씬을 찍은 후 세트가 바뀌었다.
어느 귀족의 살롱으로 보이는 장소.
극 중 스토리 상 어린 파가니니의 후원자를 찾기 위해 유력자를 찾아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이는 씬이었다.
“아, 잠깐만. 미리 말 못 했는데, 여기는 악보가 달라.”
“…?”
감독이 건네준 것은 받아본 적 없는 악보였다.
“처음 보는 거네요.”
“미안. 갑자기 추가된 거라. 미리 주는 걸 깜빡했네.”
아역 씬의 비중을 늘리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긴 했지만… 베르나르는 사실 조금 짓궂은 장난을 쳐보려는 생각에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혹시, 초견으로 가능할까?”
…? 갑자기 이게 무슨?
“이봐, 베르나르. 솔직히 말하라고. 어린애 놀리지 말고.”
“하하. 다비트 너무 그러지 마. 이게 내용이 뭐냐면….”
파가나니의 부친이 아들을 자랑하러 어느 후원자 앞에 데려갔을 때, 후원자의 요구에 연습해온 곡이 아닌 처음 보는 악보로 초견을 시켜보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추가된 악보인 건 사실이니 베르나르의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지만, 장면의 리얼리티를 위해 서진에게 초견을 시켜보고자 악보를 일부러 미리 주지 않았던 것.
“촬영을 초견으로 바로요?”
서진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사실 못 할 건 없었다.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기도 했고.
미리 잔뜩 연습해 놓고 초견인 척 연주하는 것보다는, 정말로 초견으로 찍는 게 더 리얼한 모양새가 나올 테니까. 카메라에 비치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효과가 다르겠지.
물론, 초견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연주로 천재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붙겠지만.
“어때, 괜찮겠어?”
베르나르의 기대 어린 시선이 서진에게로 향했다.
서진은 대답 대신 악보를 쓱 훑어봤다.
빠른 템포. 복잡한 리듬꼴. 싱코페이션도 잔뜩 들어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박자가 꼬이기 십상일 터.
고음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포지션이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한다.
아무리 15살에 이미 기교를 다 마스터하고 자신만의 테크닉을 만들어 냈다는 파가니니라지만, 10살의 나이에 이게 가능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때의 파가니니는 몰라도…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해 볼게요.”
“오우, 정말?”
자기가 시켜놓고 놀라는 척은.
“네. 충분히 가능해요.”
“하하! 오케이! 자, 그럼 분장 좀 다시 손보고 바로 들어가자.”
본래의 아역과 최대한 비슷한 비주얼을 뽑기 위해 틈틈이 분장을 손봐야 하는 점이 번거로웠다.
감독이 손뼉을 짝 치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가와 서진의 가발과 화장을 손봐주었다.
서진은 머리 손질을 받으며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비록 이곳은 세트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저택은 실제로 있는 장소라고 한다. 외부 풍경이랑 건물 외관 등등은 실제 저택에서 찍었다고.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역 배우는 저택에 들어서고 후원자가 될 귀족을 기다리고 하는 등의 장면을 찍기 위해 실제 그곳에서 촬영한 모양이었다.
‘그건 좀 부럽네. 이왕 유럽까지 온 거 나도 관광도 해보고 가야지’
잠시 떠오른 딴생각을 밀어 넣은 채, 서진은 바로 그 저택에 들어서는 어린 파가니니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다. 보다 완벽하게 어린 파가니니의 입장이 되어보고자.
지난번, 감독은 서진의 연주를 극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날의 연주는 어린 파가니니가 아닌 ‘한서진’이었으니까.
이건 단순히 연기를 잘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이 배우도 아닌데 연기력을 따질 일은 아니었으니까.
서진은 단지, 파가니니다운 소리를 완벽히 내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그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편이었지만… 아직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좀 더, 좀 더 파가니니가 되어….
“자 준비하고.”
서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부분이 바로 포인트라는 것을. 관객의 시선을 확 붙잡을 수 있는.
긴장감. 절박함.
어린 파가니니가 느낄, 반드시 성공해내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서, 처음 보는 악보를 어떻게든 완벽히 연주해내기 위해 빠져들듯 집중했다.
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초견으로 연주해 보이는 미친듯한 기교.
고도의 집중으로 인해 서진의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바늘 떨어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만이 아주 작게 들렸다.
‘…악보가…. 정말 만만치 않네.’
현란하게 그려진 악보가 정신없이 눈앞을 스친다. 난생처음 보는 복잡한 곡을 읽어냄과 동시에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빡세긴 진짜 빡세다.
게다가 단순히 기교를 훈련하는 장면이 아닌, 누군가의 앞에서 하는 제대로 된 연주다. 음악적 표현 역시 따라와 주어야 할 터.
어린 파가니니의 감정이 듬뿍 담긴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악기에 익숙해질수록.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서진의 능력 발현은 자연스러워졌다.
소리의 홍수가 마음 깊은 곳 파고들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는 듯한 기분. 절로 두 손이 꼭 쥐어진다.
“….”
“….”
연주가 끝났으나, 감독은 컷을 외치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