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49
49화
그건 다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초견으로 한 연주라니….’
정말로 완벽했는데, 신기하게도 미리 연습한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너무 잘해 오히려 씬의 컨셉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뜻.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둘째 치고, 이게 과연 이 나이에 가능한 실력인가 싶었다.
초견을 유난히 잘하는 사람이야 꽤 흔하게 봐왔다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그것도 어디까지나 악보 보는 것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나이 찬 학생들의 이야기. 이 아이는 배운지 고작 1년 정도 되었다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만큼 악보를 보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귀로 듣고 연주하는 쪽에 익숙할 거라 생각했는데… 천재들이 으레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어느 쪽 하나 빠지는 게 없다니….’
짝.짝.짝….
침묵이 깨진 것은 어느 이름 모를 스태프가 친 박수 소리로 인해서였다.
그제야 부랴부랴 컷을 외친 베르나르는 벌떡 일어나 함께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
무대도 아닌 곳에서 마치 공연이 끝난 후의 박수를 받는 것 같은 상황에 서진은 조금 멋쩍었다.
하지만 이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무대인사 하듯 청중에게 화답했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어디가 되었든, 지금 이 순간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한 곳이 바로 무대였으니까.
“최고야! 정말 최고야! 아하하하!”
“브라보! 브라보!!!”
감독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다비트는 커다란 손으로 서진을 번쩍 들어 올려 제 어깨에 목말을 태웠다.
“으앗!”
“브라보, 역시 천재 소년!”
서진은 당혹스러웠다. 목마라니. 저기, 저 세 살도 네 살도 아니고 무려 한국 나이로 열네 살이란 말입니다…?
“와하하! 우리 천재 소년 덕분에 영화가 대박 나겠는데!?”
“당연하지! 이게 대박 나지 않으면, 다비트 자네가 연기를 너무 못한 탓이야!”
“뭐야!?”
안 그래도 연기력이라면 찔리는 구석이 있던 다비트는 할 말이 없었다. 흐흠. 그래도 눈빛은 좋았잖아! 무엇보다 난 연주로 승부한다고…!
“천재. 얼른 자라라. 네가 성장한 모습을 보고 싶어 못 견디겠구나. 하하하!”
“….”
뱅글뱅글.
서진은 그저 어지러웠다.
* * *
“와… 정말 멋지구나!”
웅장한 저택의 모습에 선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나절 정도 촬영 일정이 비어 모자가 함께 나들이를 나온 날. 서진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뿌듯했다.
“엄마가 아들을 잘 둬서 이렇게 유럽여행도 와 보고… 고마워, 아들. 다 우리 아들 덕분이야.”
처음으로 와 보는 유럽여행. 정확히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첫 해외여행이니만큼 가까운 일본 정도만 가도 들떠 신나기 마련일 텐데, 평소 꼭 가보고 싶었던 유럽에 왔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사실 해외여행은 서진도 처음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들 덕에 호사를 누리게 된 덕분인지 정작 어린(?) 서진보다 선희가 더욱 들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다 못해 하늘로 치솟을 지경이었다.
“여기가 그 영화 세트장의 배경이 된 실제 저택이라고?”
“네, 엄마. 다른 씬은 여기서 진짜 촬영했대요.”
“그렇구나…. 우리도 여기서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나름대로 영화 관계자인 서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구경하러 와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관광지로 오픈되어있는 저택이 아니었기에, 베르나르가 따로 신경 써 준 게 아니었다면 안에까지 들어와 보지 못했을 테니까.
덕분에 모자는 영화의 촬영지가 된 이곳저곳을 비롯해 제노바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기왕 유럽까지 온 마당에 촬영만 하고 돌아가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그래도 좋다. 정말… 너무 좋다, 그치?”
“네. 좋네요. 정말.”
한가로운 낮의 풍경.
이렇게 여유롭게 유럽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저택을 구경한 모자는 근처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 들고 멀지 않은 공원에 자리 잡았다.
커다란 고목이 가득 심어진 너른 공원.
겨울임에도 그리 춥지 않은 날씨에 제법 풍광이 푸르렀고, 나무 아래 어른거리는 햇빛도 따스했다.
“이런 게 유럽 감성이구나….”
“공원에서 샌드위치 먹는 거요?”
선희가 쿡쿡 웃었다.
“그냥, 다. 거리의 분위기부터 다르잖아. 이렇게 한가하게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서울처럼 사람도 너무 넘쳐나지 않고.”
“그러게요. 느긋하니 좋네요.”
“여기서 살고 싶다.”
“나중에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응?”
“정확히는 외국에 정착한다기보다는, 제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머물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때 같이 오시면 되죠.”
상상만 해도 좋다며 선희가 미소지었다.
그렇게 모자가 나란히 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음?’
저쪽, 공원 너머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쩐지 무척이나 익숙했다.
“왜 그래, 서진아?”
“어, 아니에요. 그럴 리 없지.”
걔가 왜 지금 여길….
아니겠지, 설마 하며 다시 눈을 비비고 보는데,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아무리 봐도 맞았다.
“어머, 저기 지연이 아니니?”
선희 역시 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
아니, 이런 곳에서 마주친다고? 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우연이라면 대단한 우연인데, 세상 원래 은근히 좁은지라 꼭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서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연 쪽으로 다가갔다. 아예 못 봤으면 모를까, 이 먼 곳에서 마주쳤는데 못 본 체하는 것도 조금 그러니까.
* * *
“…서, 서진?”
길을 걷던 중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서진의 모습에 지연은 토끼처럼 깜짝 놀랐다.
사실 은근히 기대하며 떠나온 길이긴 했다.
본래의 목적은 유학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탐방이었으나, 그 김에 서진도 만나볼 겸 일부러 제노바로 행선지를 잡은 것. 정작 제노바는 유학 예정지와 전혀 상관없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호기롭게 제노바로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도착해서 서진에게 연락하려니 손가락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고 하면 어쩌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고작해야 친구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인데 굳이 이 먼 곳까지 보러왔다니…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그런저런 생각에 머뭇거리기만 할 뿐, 도저히 깨톡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어, 안녕.”
마치 동네에서 마주친 듯 여상한 태도로 서진이 인사를 건넸다.
“어? 어어, 이, 이런 데서 마주치다니 신기하다.”
진짜로 이렇게 만나다니. 그것도 길에서 우연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이 동네가 작은 곳이라 하지만….
이거 혹시, 무슨 운명… 이라거나 그런 게 아닐까?
그래. 정말로 그런 걸지도 몰라. 지연은 거의 횡설수설하는 수준의 내적 중얼거림을 꿀꺽 삼켰다.
“그러게. 여긴 웬일이야? 유학 때문에 온 거야?”
그렇게 반가움과 당혹감이 교차하는 지연의 반응과 달리, 서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어? 으응. 유학, 맞아. 유학 때문에. 미리 사전답사 와볼 겸… 음, 겨울방학이니 여행도 할 겸….”
“아, 가족 여행 온 거야?”
“아니. 엄마는 바쁘셔서… 튜터를 붙여주셨어.”
“아….”
설마 혼자 온 건가 깜짝 놀랄 뻔했던 서진은 안도했다.
그나저나 재벌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오죽 바쁘면 딸아이의 유학 준비에 같이 와주는 대신 튜터라는 이름의 비서를 붙여줄까.
뒤에서 꾸벅 인사하는 튜터의 모습에 선희도 한 걸음 다가와 눈인사를 건넸다.
“참, 이쪽은 우리 엄마. 전에 봐서 알지?”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이런 데서 다시 뵈니 정말 반가워요…!”
지연이 밝게 인사했다.
안 그래도 튜터 하나만 딸랑 대동해 먼 타국에 와있으니 마음이 허했는데, 서진에 이어 평소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던 선희를 만나니 반가운 게 당연했다.
“어머, 지연아. 이런 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반갑다!”
튜터 어쩌고 이야기를 들은 건지 지연을 바라보는 선희의 얼굴에는 살짝 안쓰러움이 스쳤다.
지연의 손을 덥석 잡은 선희는, 오늘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같이 관광을 다니자며 동행을 제의했다.
“정말요? 그래도 돼요?”
냉큼 반색하는 지연.
그렇게 졸지에 셋이 되어버린 일행은 종일 같이 돌아다녔다.
* * *
촬영도 어느덧 막바지였다.
“자, 밥도 먹을 겸 잠시 쉬었다 합시다.”
베르나르의 말에 촬영팀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이 힘든 건 아니지만, 연주를 하다 보면 배가 너무 금방 고파진다. 게다가 짧은 시간 동안에 고도의 집중을 쏟아부었더니 탈진할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기, 땀 닦아.”
촬영을 구경할 겸 놀러 온 지연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촬영장 안은 더워서 땀이 절로 흘렀다.
“고마워.”
“이렇게 보니… 느낌이 되게 다르다.”
“응?”
“너 말이야.”
이런 경험도 연주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촬영장에 한 번 와보지 않겠냐며 서진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그 말대로 지연은 상당히 색다른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연주하는 모습이… 평소와 왜 이렇게 달라 보이지…?’
저렇게 분장까지 한 채로 바이올린을 들고 있으니, 진짜로 파가니니 같았다.
“…?”
“있어, 그런 거.”
아무튼, 한 것도 없지만 지연 역시 조금 지치는 마음이었기에 반색했다. 서진의 음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아직도 감정의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 분위기 환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휴식 시간. 이제 제법 친해진 촬영 팀 스태프들이 슬금슬금 서진의 곁에 몰려들어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연기자들이 쉬는 동안 촬영분을 돌려보던 베르나르가 그 모습을 흘긋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와 이거 표정 어떻게든 살려 쓰고 싶은데….”
아역 배우랑 기본적인 생김새가 너무 다르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표정을 직접 카메라에 담지는 못해도, 그 내면의 절박함은 고스란히 소리에 담겨 있었다. 적당한 긴장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런 감정들이 여실히 느껴지는.
“서진, 이것 좀 볼래?”
잠시 고민하던 베르나르가 서진을 불렀다.
“급한 대로 좀 만져봤는데, 어때?”
“와….”
교차 편집으로 만들어 놓은 영상.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리얼한 장면이 뽑혔다.
“이게 바로 카메라와 편집의 힘이지.”
거의 비슷하게 분장한 둘이었지만, 서진은 아역 배우가 아닌 자신이 나온 씬을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제 분량이 많네요?”
“어떻게든 살리려 노력했지. 지금은 일단 러프하게 작업한 거라 이 정도지만, 좀 더 세밀하게 편집 들어가면 더 살릴 수 있을 거야.”
이쯤 되면 서진이 아역 배우의 연주 대역이 아니라, 아역 배우가 서진의 얼굴 대역인 느낌.
서진은 졸지에 비중이 줄어들게 된 아역 배우한테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영화판이라는 게 원래 다 이런 모양인지, 정작 당사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서진. 크레딧에 네 이름도 아역 배우와 함께 나란히 오를 거야.”
“네?”
“대역으로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말이지.”
“…정말요?”
처음엔 그냥 아역 배우의 대역 정도로 시작하고 한 일이, 어째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기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통화를 하고 온 듯한 다비트가 잠시 베르나르를 불러냈다.
무슨 이야기인지 둘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숙덕거렸다. 영어가 아니라 서진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이야기가 끝난 건지 다비트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서진은 귀를 의심했다.
“네에…? 협연이요?”
“그래. 내가 지금 막 프란츠, 아 빈 필의… 알지?”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유명한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 프란츠라면 서진도 알고 있었다.
“프란츠와 통화했는데, 내게 제안을 하더군. 우리 둘이 함께 빈 필의 협연 무대에 서는 게 어떻냐고 말이지. 한국에서 서진과 함께 연주한 Io ti penso amore 의 영상을 봤다고.”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