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드디어 피날레.
아르페지오로 수놓아지는 화려한 피날레.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반주 덕에 원래도 화려한 곡이 더욱 폭발하듯 음의 향연을 토해냈다.
남은 변주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측면의 입구에서부터 연주를 이어받은 다비트가 무대 가운데까지 오기 전에 연주는 끝이 났다.
탁탁탁…!
함께 연주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흐뭇한 얼굴로 활대를 쳐대며 박수를 대신했다.
“브라보! 완벽한 연주였어!”
짝짝짝!!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서진을 가운데로 데려온 프란츠가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냈다.
“공연에서도 지금처럼 하려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박수가 멎은 후, 지휘자인 프란츠가 단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색다르고 좋군요.”
“흥미로운 연출인 것 같네요. 우리 빈필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대부분 찬성이었다.
예의상 단원들의 의견을 물어본 것이지, 협연자의 퍼포먼스에 왈가왈부 함부로 입댈 게 아니라는 걸 아는 만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오, 이런 비극이…!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소.”
“…?”
모두의 시선이 루돌프에게 쏠렸다.
“루돌프, 뭐가 문제인 것이오?”
“기교에만 치중한 이런 저급한 연주라니…! 특히 8변주. 9변주. 하, 동양인이 그렇지 뭐. 정통 빈 스타일인 우리 오케스트라와는 맞지 않아.”
8번 변주는 연속되는 중음 주법으로 상당히 화려한 기교의 어려운 파트였다. 9번 변주는 극악한 난이도의 왼손 피치카토와 아르코가 교대로 나오는, 글자 그대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그런 연주였다.
그리고 그건 연주자가 동양인인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루돌프가 아무런 이유 없이 서진을 깎아내리기 위해 갖다 붙이는 억지였다.
빈 태생의 남성인 루돌프는 자신이 성골 중 성골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도 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보수적인 분위기를 털어내지 못한 빈필에는 이런 경직된 생각에 빠진 자가 여전히 제법 있었다.
단원으로는 오직 남성만 받는다는 성별의 벽이 깨진 게 불과 몇 년 전. 200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현악 파트에 여성이 정단원으로 들어왔으니 말 다 한 일.
오래 전 한 번 하프 주자를 구하기 어려워 여성을 영업한 적이 있긴 했으나, 비정규 단원이라는 타이틀 하에 공연 중계 때 오직 손만 보여주며 얼굴도 비춰주지 않을 정도로 공공연히 차별을 자행하는 것이 바로 이 바닥이었다.
“루돌프! 이 무슨 망발이랍니까!”
1 바이올린의 수석이자 악장인 요안나가 대경해 외쳤다.
그녀는 불과 2년여 전, 여성 최초로 빈필의 콘서트마스터(악장)를 맡은 전설의 여인이었다.
악장은 1 바이올린의 리더일뿐 아니라 관현악단를 대표하는 지위이기도 하기에, 그 상징성이 남다르다.
그 보수적인 빈필에 여성의 몸으로 입단에 성공한 것뿐 아니라 악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니, 일신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그녀였다.
“내가 뭐 못할 말 했소!? 모두 같이 듣지 않았소?”
루돌프는 원래도 요안나가 싫었다. 하지만 대놓고 싫은 티를 내기엔, 자신이 마치 저 여자에게 밀리기라도 한 것 같이 생각될까 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의견이 반목한 이 기회에 물고 늘어지려는 것.
“…자네, 진심인가?”
프란츠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다비트가 연주한 부분에 동양인 운운하며 기교에만 치중한 연주라니…?
누가 연주했는지 못 본 채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도 그렇지만, 어린 동양인 소년이 했다는 생각에 무조건 비하하려는 태도가 가장 어이없었다.
“하하하!”
다비트가 크게 웃었다.
“내 살다살다, 내 연주를 듣고 기교에만 치중한 ‘동양인’ 스타일이라 하는 말은 처음 듣는군.”
“…?”
“그거 미안하게 되었군. 형편없는 연주를 선보여서.”
루돌프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설마, 중간에 주자가 바뀐 건가? 그럼 자신이 혹평한 게 실은 다비트가 했던 것…?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감히 그 누가 다비트의 카프리스를 깔 수 있겠는가.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라 정평이 나 있는 그인데.
이건 되려 자신이 막귀임을, 아니 편견에 휩싸인 한심한 인간임을 만천하에 폭로한 꼴이었다.
아무리 연주자를 오해했다 한들, ‘이놈이 귀가 썩었나?’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마, 마에스트로.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아니 실수를….”
“실수?”
“그게, 제가 착각해서…, 마에스트로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말이 조금 이상하군.”
그의 말을 다비트가 차갑게 끊었다.
대체 어디부터 뭘 짚어줘야 하는지 답도 안 나오는 수준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이었지만, 일단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예?”
“만약 이게 내가 아닌 저 소년이 한 연주였다면 그렇게 평해도 된다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자네는 같은 소리를 듣고, 동양인 어린 소년이 했다고 생각했을 때와, 내가 했다고 생각했을 때의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군.”
“그, 그건 제가 착각한 탓에 편견을 갖고 들어서….”
“그래. 그러니까 사과는 내가 아닌 저 소년에게 해야지.”
다비트의 말에 루돌프는 마지못해 서진에게 사과하려 다가왔다.
“그…”
사실 서진은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세상 모두가 자신을 어화둥둥 예뻐해 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
그런 대우는 둘째치고, 애초에 자신의 실력이 이런 세계 무대에서 독보적인 수준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넓으니까. 한국에서야 회귀 버프로 또래 중 겨룰 이가 별로 없다지만, 각 나라에서 제일 잘한다는 존재가 한 명씩만 모여도 한 트럭 가득 천재들이 모이는 게 바로 국제무대다.
게다가 국제무대는 한국 예술계보다도 훨씬 더 힘의 논리가 강하게 적용되는 세계.
국내도 학연이니 지연이니 라인이니 만만치 않지만, 국제무대는 더하다. 국제 콩쿨은 국적에 따라 결코 공정하지 않았고, 공연장의 텃세나 인종차별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내가, 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루돌프는 계속해서 머뭇대기만 했다.
“필요 없네. 저 소년도 자네의 사과 따위 원치 않을 테고. 지금은 어차피 제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도 아닐뿐더러, 여전히 저 소년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테니까.”
그런 그의 말을 다비트가 또다시 잘랐다.
“….”
“대신,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다비트의 말에 프란츠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뜻이었다.
“누구의 연주라 생각했든 간에, 어쨌든 자네는 내 연주를 상당히 형편없게 들었다는 거지.”
“아, 아니. 그게…!”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소년이 연주하는 거로 해 보지. 저 소년이 나보다 잘한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사과하게. 진심으로.”
“….”
루돌프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지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안이지…? 저 어린 소년이, 이걸 전체를 연주할 수 있다고?
앞부분도 결코 만만치 않지만, 뒷부분은 정말로 헬 난이도일 텐데…?
솔직히 동양인 어쩌고 헛소리를 지껄인 루돌프 본인도 이걸 연주하지 못했다. 그만큼의 기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가 기교에 치중한 동양인 어쩌고 트집을 잡은 것도, 자신이 그 부분에 컴플렉스가 있기 때문.
“물론 자네가 그걸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피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같은 음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믿겠네. 어때, 소년?”
이번에는 서진을 향해 물었다.
자신을 쏙 빼놓고 돌아가는 상황에 서진은 조금 어이없었지만, 이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한 번은 넘어야 했다. 이놈의 텃세를 깨부수기 위해서라도.
“다, 다비트! 이건 조금…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서진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프란츠가 급히 다비트를 말렸다. 뒷부분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다비트에게 밖에 안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다 저 소년이 못하면 어쩌려고…. 아무리 천재라지만, 카프리스 24번은 조금….”
하지만 다비트는 깊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생각하겠지만, 다비트는 서진을 믿었다. 그동안 봐온 저 소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생각.
무엇보다 함께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이 곡을 직접 지도한 다비트는 서진의 진짜 실력을 알았다. 이 곡은 결코 서진의 한계가 아니었다.
“서진, 할 수 있겠어?”
“네. 해볼게요.”
“서진!”
프란츠가 외쳤다.
이건… 이건 아니다. 이 곡은 절대로 그렇게 만만한 곡이 아니다. 어설프게 흉내야 낼 수 있겠지만…, 아니 그조차 무리라는 생각이었다. 루돌프를 인정하게 만들 만큼은 더더욱.
씨익 웃어 보인 서진이 이번에는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계단이 없으니 아까와 같은 쇼는 무리. 제대로 해 보이려면 처음부터 자리를 잡는 편이 좋았다.
서진은 오히려 이 상황이 반가웠다.
어딜 가나 다들 자신을 좋게만 봐준다. 아직 어린 나이에,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 되게 잘한다고 손뼉을 치며.
하지만 서진은 신동이라는 이름의 아이보다는 한 명의 어엿한 연주자이고 싶었다. 조금 미숙해도 아직 아마추어라 용납되는 게 아닌, 당당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은 빈필과 협연을 수락하기로 한 후 더욱 강해졌다. 어린 영재, 신동이기에 따낸 무대가 아닌,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당당히 함께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서진은 나이를 떠나 이미 완성된 연주자라고 모두 인정하는 바였지만, 서진은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 내고 싶었다. 저 콧대 높은 인종차별주의자도 승복할 수 없도록 완벽한 연주를 보여.
딴따 따라라라, 딴따 따라라라.
다시 한번 서진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까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서진 혼자 연주하는.
작정하고 마음먹은 서진은 특유의 능력을 무의식의 영역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서진은 더 이상 이 능력을 치트키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역시 자신 고유의 음악적 능력의 일부니까.
그것이 남들은 득음의 끝에 이루어내는 경지라 한다면, 자신은 이 능력을 수단으로 득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뿐.
말했듯이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는, 그중에서도 특히 24번은 웬만한 프로 연주자도 어려워하는 난곡이었다. 프란츠가 걱정한 것도 충분히 이해 가는 일.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서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 보였다.
기본 테마. Quasi Presto.
거의 프레스토처럼 빠르게.
날아갈 듯 가벼우면서도 깊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많은 광고에 쓰인 바 있는 유명한 바로 그 곡.
3도 도약의 1변주와, 2도 음정의 2변주에 이어, 옥타브로 이루어진 더블스탑의 3변주.
서진은 작은 손으로 잘도 연주했다.
물론 결코 쉽진 않았다. 가만히 서서 연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100미터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땀이 흐른다.
3도 화음과 10도 화음을 선보이는 6변주, 셋잇단음표와 싱코페이션의 특징이 돋보이는 7변주.
이어 끝없는 3중 화음의 향연인 8변주. 그것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해야 하는 만큼 연주자의 부담이 엄청났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은 곡의 특성상 연주의 소리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는데, 특히 왼손 피치카토가 나오는 9변주는 악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충분한 소리를 얻기 어려웠다.
신들린 듯 줄을 뜯어대는 서진의 손가락 끝에서 띠링 띵 울리는 피치카토 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아까 다비트가 했을 때보다 훨씬 맑고 깊은 울림이었다.
아직 손가락 힘도 제대로 없을 나이인데 이게 된다니… 몇몇 단원들은 반주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진을 쳐다볼 정도였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