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57
57화
엄청난 고음의 10변주 역시 식후 산책이라도 하는 듯 쉽게 소화했다.
지금 서진이 들고 있는 것은 다비트의 것과 같은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게 아니다. 크레모나에서 장인에게 의뢰해 제작했다고는 하지만, 명품 고악기에 비할 바는 아닌 수준.
그러나 그 소리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그것과 흡사했다.
이어진 11변주와 피날레.
과거, 사람들이 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다 기절했다는지 이해가 갔다. 정말로 프란츠는 지금 기절초풍했으니까.
“….”
“….”
“….”
곡이 끝났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
들리는 것은 오직 살짝 가빠진 서진의 호흡뿐.
끼이익.
의자 끌리는 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어딘가를 향했다.
작은 소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루돌프가 저벅저벅 서진을 향해 걸어왔다.
“…?”
루돌프가 서진을 향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허리를 깊이 숙였을 법한 분위기.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마에스트로. 아까는 제가 경솔했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모욕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프란츠는 깜짝 놀랐다. 그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루돌프가 서진을 향해 ‘마에스트로’라는 호칭을 사용할 줄이야.
‘어린 마에스트로’도 아니고 그냥 ‘마에스트로’다.
그만큼 서진을 한 명의 연주자로 오롯이 인정했다는 뜻.
‘하긴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음악인이라 할 수 없겠지.’
인정할 수밖에.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심지어 다비트도 인정했다. 서진이 자신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하하…. 내가… 명성이 우스워지는군. 좋아…, 그렇게 하지.”
다비트는 가장 파가니니답다고 칭해지는 자신의 이름값이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이 곡은 이제 서진의 것이야.”
그래서 아낌없이 내려놓기로 했다.
“…네?”
“실제 공연에서 말이야. 서진, 네가 하는 게 좋겠어.”
“아니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서진은 마주 미소지으며 루돌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키 차이로 인해 루돌프가 한참이나 무릎을 굽혀야 했지만, 더없이 훈훈한 장면이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에 더해, 원만히 해결된 관계에 대한 축하의 의미까지.
짝짝짝!!!
“좋은 생각이야! 나는 찬성일세!”
프란츠가 냉큼 찬성하고 나섰다.
“걸어 나가는 거, 그것도 꼭 해야 해, 알았지!?”
그렇게, 어쩌다 보니, 실제 공연에서도 서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아니 그건, 글쎄요.”
둘이 같이하면 모를까, 혼자서는 굳이…. 쪽팔리는데.
“자, 리허설은 이걸로 끝!”
훈훈한 분위기에 다비트가 초를 치는 가운데, 프란츠가 짝 하고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엥? 이게 리허설이었다고? 이걸로 끝? 다른 건 안 해봐도 되나?
…아, 원래 이렇다고 했지. 제대로 안 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맞춰보는 일이 드물다니… 거 참 특이하네.
서진의 당혹스러운 기색을 읽어낸 프란츠가 하하 웃으며 설명했다.
“하하. 늘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네. 그래도 걱정 말게, 소년. 사실 여긴 리허설도 공연으로 선보이는 곳이거든.”
“네에?”
“신년음악회 티켓이 워낙 전쟁이라 말이지. 전전날 진행하는 리허설을 프리뷰 콘서트, 전날 진행하는 리허설을 이브 콘서트라고 이름 붙여서 팔아먹거든. 그런데도 티켓팅이 전쟁이라….”
“….”
와 대박.
“아무튼, 우리 어린 마에스트로의 연주를 더 듣고 싶지만… 이제 오페라 공연하러 가야 하거든.”
서진도 어쩐지 아쉬웠지만, 본 공연은 따로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 사람들. 자신이 오기 전까지 음반 녹음 작업을 하고, 지금 리허설도 하고, 이제 저녁에 오페라를 뛰러 간다고?
정말인지 몇몇이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가는 건 아닌지, 인원의 전부는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하루에 몇 탕씩 뛰나요?”
“아, 모두가 그러는 건 아니고. 인원 풀이 워낙 넓어서… 교대로 뛰는 셈이지.”
아하. 이를테면 공연에 서는 사람이 40이라면 총 단원은 120명 정도 있어서, 여기저기 교대로 차출되어 나가는 식이었다.
하긴, 해외 순회공연을 간다고 국내 일정을 텅 비워놓을 수는 없을 테니, 인원 풀이 많을 수밖에.
“그리고 오히려 빈필의 공연 일정보다는, 오페라 쪽이 더 메인이라… 우리 입장에서는 저쪽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어서.”
“그렇군요….”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빈 필 단원들은 동시에 빈 국립(궁정)오페라극단의 단원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중복되는 공연을 차질없이 해내기 위해 단원을 많이 뽑았다. 오페라를 공연하는 동시에, 해외에서도 연주할 수 있도록.
물론 국내에서는 낮에는 주로 콘서트 공연, 밤에는 오페라 연주 이런 식으로 아예 시간대가 나누어져 있었지만. 한 마디로 빈필의 공연은 원래 자투리 시간에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홈그라운드인 빈에서라면 그 자투리 일정을 틈타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서진과의 협연 무대를 마련하는 게 어렵잖게 가능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참, 이번 공연 성격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요. 아까 다비트가 말한 대로 정말 그렇게 캐주얼하게 가도 되나요?”
“안 될 것 없지. 우린 찬성이야. 우리 그렇게 딱딱하지만은 않아. 여름밤 음악회 같은 데에서는 스타워즈 같은 걸 연주하기도 하는걸.”
그야 야외에서 하는 공연이니 원래 분위기가 그렇다지만…
어쨌든 된다니 다행이었다. 빈 필의 음악회 중 가장 유명한 게 빈 신년음악회와 쇤부른 여름밤 음악회인데, 그중 제법 격식을 따진다는 신년음악회조차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넣을 정도니 뭐….
“자, 그럼 공연 날 보자고, 어린 마에스트로! 오늘 정말 반가웠네. 내가 귀가 아주 호강했어! 안목도 새로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프란츠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 * *
클래식 애호가이자 한국 음악 영재들의 대부라고도 불리는 KH 아시아 그룹의 박회장.
그는 요즘 오케스트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는 신동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매년 돌아오는 숙제 같은 빈 필의 초청 문제가 또다시 돌아온 것이다.
빈필은 원래 워낙 몸값이 비싸 대한민국에는 한 번도 초청에 성공한 적 없던 오케스트라였다. 그러던 것을 최초로 성사시킨 것이 바로 박회장.
작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티켓값이 가장 비싼 좌석 기준 40만원이 넘는 고가였기에 원성도 자자했지만, 워낙 유명한 오케스트라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어쨌든 결과는 매진이었다.
하지만, 작년 한 번의 성공은 그렇다 쳐도, 이걸 매년 정기적으로 오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미국과 일본은 아예 ‘빈 필하모닉 주간’이라는 이름 하에 정기적인 순회공연을 매년 개최되는 실정이지만, 한국은 아직 아니었다.
그걸 위해 박회장은 올해도 어김없이 바빴다. 아직 그 정도로 고정적인 이벤트로 자리 잡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정기 내한공연이라도 유치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회장님. 빈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오, 그래. 뭐라 하더냐? 조건이…,”
“온다고 합니다.”
“…뭐?”
장황한 조건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그걸 다 맞춰주려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지 각오까지 단단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답이 들렸다.
“올해 공연도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앞으로 매년 한국 공연을 정규 일정에 넣겠다고….”
“뭐라고!? 왜 갑자기? 아니, 그보다 조건은?”
“따로 이야기 한 건 없습니다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따로 까다로운 조건을 건 것도 아니라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렇게 쉽게?
왜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꾼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네. 그런 말은 없었고, 아. 다만 이렇게 말하더군요.”
재단 측에서 전해온 말을 가져온 비서는, 들은 대로 똑같이 대사를 읊었다.
“‘오, 마에스트로 한의 나라! 당연히 가야지요! 마에스트로와 함께 공연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요’라고 말입니다.”
“….”
아니 이게 뭔 소리래? 마에스트로 한의 나라?
잠깐,
‘마에스트로 한이라면… 혹시?’
‘마에스트로’라는 호칭이 붙기엔 너무 어린 나이긴 하지만, 그런 성을 가진 천재를 하나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런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지. 빈 필하모닉이 본고장 빈에서 한국인 천재 소년과 협연을 한다고.
작은 저널에서 시작된 기사라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메이저 음악 저널에서 다루기 시작하면서 그의 눈에까지 들어왔다. 한데 설마하니 그게 한서진 군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박비서. 오늘 자 신문 좀 가져와 보게. 아니지. 인터넷 기사 좀 찾아봐! 그, 빈필이랑 한서진 학생 관련해서 말이야.”
“예. 회장님. 마침 준비해 놓았습니다.”
박비서는 이미 알고는 기민하게 신문을 척 대령해 놓았다. 비서로서 아주 흡족한 자세였다.
“…이런 일을 이제야 알았다니…!”
“영화 쪽으로도 이슈가 있었더라고요.”
“아. 그거라면 알고 있네. 영화 파가니니에 아역인가로 출연한다고.”
고개를 끄덕거린 박회장은 곧바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어떻게 된 연유인지 빈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고. 특히 빈필과 관련해서.
그리고 어떻게든 KH 재단의 이름을 끼워 넣어 그 사실을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하라고.
“그리고, 빈필의 내한 일정에도 그 소년이 함께하는지, 그것도 꼭 확인해 보고.”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 * *
빈에서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날의 리허설을 끝으로, 서진은 정말 그대로 공연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후우….”
물론 리허설을 추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논 건 아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서진은 분주했다.
비슷한 날의 아침을 한국에서도 맞아본 적 있어 처음은 아니지만, 외국에서 겪는 일이다 보니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서진이 새벽부터 바빴던 이유는 단지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챙겨야 할 부차적인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끼릭.
짜증스럽게 멈춰진 활이 소음을 토해냈다.
…이게 아닌데.
딱 한 음, 맘에 들지 않는 음색이 나오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도저히 용납되지 않아 새벽부터 붙들고 있는 것.
“서진아. 진짜, 진짜로 완벽하다니까? 전혀 이상한 데 없어.”
“….”
“고작 한 음이잖아. 이러다 공연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겠다.”
그런 그를 지연이 조심스레 만류했다.
“고작이라니.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어떻게든….”
“안 돼.”
서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연습 때 완벽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어떻게든 될 거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착각이야.”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