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음, 그러니까….”
‘으음’ 하며 운을 뗀 서진이 자신의 의견을 두서없이 설명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레코딩을 들어보면 최근에 연주되는 것보다 훨씬 빨랐는데, 서진은 그 점이 오히려 아쉬웠다. 이 곡을 제대로 이끌어내려면 그보다는 오히려 살짝 느리게 표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며.
하지만…,
‘어쨌든 원 작곡가의 의도는 그거였으니….’
이것이 늘 딜레마였다.
연주자로서 곡의 해석에 어디까지 주관성을 가져도 되는 걸까.
작곡자의 의도를 존중해야 하는 건 맞지만, 해석에 있어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닐까.
무조건 작곡가가 의도했던 대로 100%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만약 그래야만 하는 거라면, 왜 현대의 연주자들은 라흐마니노프를 라흐마니노프가 쳤던 그대로 치지 않는 것인가. 음반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똑같이 하지 않는다.
그 답은 결국, 클래식 역시 대중이 원하는 바를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친 버전이 더 인기니까. 그에 맞게 해석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져도 된다는 것.
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이런 거요.”
말을 마친 서진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선희는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는 듯한 아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해준 것도 없는데 제 능력만으로 우뚝 선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또 그만큼 미안했다.
“서진아, 엄마가 옆에서 전적으로 서포트해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에요. 엄마. 저는 정말 괜찮아요.”
“돈도 돈이지만 함께해 줄 수 없는 게 너무 미안해서. 이제 다시 슬슬 일을 구해야 할 것 같거든.”
“그런 말씀 마세요, 엄마. 아니, 이참에 아예 쉬는 건 어때요? 제가 장학금도 꽤 받고, 너튜브에서 수입도 조금이지만 나오는데, 엄마가 굳이 힘든 일을 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저를 쫓아다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쉬셨으면 좋겠어요.”
서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회귀 전, 고등학생인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무리해 일하다 골병이 든 어머니였다. 그때는 철이 없어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선희는 펄쩍 뛰었다.
“일을 쉬라니, 말도 안 돼. 어린 아들이 받아오는 돈으로 놀 수야 없지. 장학금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크면 또 벌죠.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만간 음반도…,”
“서진아. 엄마 괜찮아. 나는 네 보호자야. 너는 어린아이고. 엄마가 너를 먹여 살리는 게 당연한 거야.”
서진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느 부모가 이제 갓 중학생이 된 아들이 벌어오는 돈만 믿고 놀고먹을 생각을 하겠는가. 자식을 낳았으면 응당 양육의 책임이 있는 법.
하지만 서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인생 1회차에서 다 받았다.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엄마는 이 일이 좋아. 아기도 귀엽고, 보람도 있거든. 아무튼, 서진아. 걱정 안 해도 돼. 엄마 아직 젊어.”
그야 아직 30대 중반이니 회귀 전과 달리 10년 이상 젊은 데다가, 그때처럼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학원비를 감당하느라 무리해 일하는 것도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아들로서 엄마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엄마는 오히려 네게 미안해.”
“네? 왜요?”
“우리 아들의 꿈이…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훨씬 큰 것 같은데, 내가 그만큼의 지원을 해주지 못하니 미안할 따름이지.”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니까요. 저는 오직 엄마한테 당당한 아들이 되는 게 목표예요. 참, 그거 좋겠다. 나중에 제가 성공해서 연주가뿐 아니라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 날리게 되면, 꼭 엄마를 위한 헌정곡을 지어드릴게요.”
“작곡? 우리 아들, 역시 그냥 바이올리니스트가 꿈의 전부가 아닐 것 같았는데. 진짜였네?”
“네. 사실 요즘 관심이 많거든요.”
이왕이면 자신만의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작곡가들의 명곡을 재현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어쨌든 온전한 자신의 음악이 아니니까.
내 음악을, 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누가 뭐래도 스스로 직접 작곡한 곡이 아니겠는가.
설령 그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그것처럼, 정작 작곡가가 아닌 다른 연주자에 의해 재해석된 버전이 더 좋을지라도, 어쨌든 라흐마니노프 본연의 뜻이 담긴 곡은 원곡 그 자체니까.
“예전엔…, 수백 년 전에는 음악가들이라 함은 응당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직접 연주해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순회공연을 다니고 하는 그런 존재들이었거든요.”
“아… 그랬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이곳 유럽에 와 보니 그 시대의 낭만을 어쩐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엄마는 잘은 모르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때, 거리 공연에서 느꼈던 그런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
“맞아요. 그런 낭만.”
“참. 그럼 빈필의 제안, 유럽 순회공연은 왜 거절한 거니? 네 말대로라면…,”
지난번 협연이 끝난 후, 빈필은 유럽 순회공연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서진에게 제안해 왔다.
“아쉬웠는지 내게도 다시 묻더라.”
“그건… 제가 아직 그럴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내가 무슨 그 옛날의 유명 작곡가도 아니고, 뭐라고 주제에 안 맞게 유럽 순회공연씩이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인걸요. 일단 날짜도 아직 미정인 데다… 일단 한국에서의 일이 먼저니까요. 어차피 조만간 한국에도 공연을 온다니, 그때 같이 공연하면 되기도 하고요.”
일단 한국 공연은 함께하기로 확답을 해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찌나 기뻐하던지, 서진은 지금 제가 상대하고 있는 이들이 저 콧대 높은 빈필의 단원이 정말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쉽지 않겠어?”
“뭐, 괜찮아요. 또 기회가 오겠죠. 유럽은 나중에 상황 봐서 다시 오든가 하면 되니까요.”
“그나저나… 그 얘기를 하니까 새삼 아쉽네요.”
“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10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참 좋았으련만….’
과거, 소위 클래식의 전성기라 불리던 그 시절의 음악가들처럼, 스스로 곡을 써서 발표하고 연주하고, 사람들이 그만큼 관심을 가져주고… 그런 환경이 뒷받침되어 준다면 참 좋을 텐데.
‘지금과 달리 아직 클래식이 살아있던 시기. 조금만 일찍 태어났어도 가능했을 텐데….’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자신만의 곡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올라와 있었는데, 최근 들어 더욱 맹렬히 강해졌다. 언젠가는 꼭 역사 속 유명 작곡가들처럼,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만들어 내고 싶다고. 나 역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역사에 기록될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고.
“…해서요.”
서진의 이야기에 선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지금도 꼭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아?”
“…네?”
“100년 후에도 누군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을 수 있잖아. 우리 아들이, 100년 후에 봤을 때 지금의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존재가 되어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
어머니의 금칠에 당혹감과 동시에, 갑자기 어떠한 깨달음이 피어올랐다.
비록 지금이 클래식이 죽어버린 시대라 하지만, 어찌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음악하기 좋은 세상이 아닌가.
귀족들의 등쌀도, 급변하는 체제하에 숨죽여 눈치 볼 필요도 없는.
그저 예전과 달리 식어버린 열기만 다시 살리면 되는 그런 시대.
그래. 열망.
그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엄마, 엄마 말이 맞아요!”
“그렇지?”
“저, 진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당장에 엄청난 명곡을 만들어 내겠다는 욕심은 아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당장 작곡은 어려울 테니 일단 편곡 정도라도 조금씩 해 두면….’
애초에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다비트와의 일을 계기로 시작된 편곡 작업이었다. 그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
“그래. 엄만 우리 아들을 믿어. 우리 서진이라면 꼭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서진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그녀의 마음과는 별개로, 작곡은 결코 만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보조 도구가 발달해서 그나마 수월한 편이라지만, 그 옛날에는 웬만큼 천재가 아니고서야 쉬이 넘볼 수 없던 영역.
‘아무래도 공부가 더 필요하겠지.’
편곡이야 회귀 전에도 깨작깨작 시도해 본 적 있는 것에 비해, 본격적인 작곡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까.
“감사해요, 엄마. 그래도 일단은 바이올린이 먼저니까…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완성을 우선으로 하되, 그에 곁들여 작곡도 공부해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바이올린을 위한 작곡, 아니 편곡을 먼저 해보려고요.”
“응? 엄마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니까… 지금 이 곡, 리스트의 곡처럼, 다른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을 바이올린 버전으로 편곡해 보려고요. 아, 물론 리스트와는 그 방향이 반대겠지만요.”
어느새 재생해둔 어플에서는 리스트 – 파가니니의 에뛰드 6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통통 튀는 경쾌한 멜로디.
투명한 피아노 음색이 적막한 밤을 울렸다.
“어, 이거…?”
“맞아요. 제가 빈필과 연주했던 그 곡이죠. 제가 한 건 원곡인 바이올린 버전이고, 이건 리스트가 그에 영감받아 피아노 버전으로 작곡한 곡이에요.”
“와… 신기하다.”
“그쵸. 근데 솔직히… 제가 바이올린 주자이긴 하지만, 전 원곡인 카프리스 24번보다 리스트의 피아노 버전이 더 좋더라고요.”
“우리 서진인 가만 보면 피아노 음색을 더 좋아하더라?”
“하하, 네. 아무래도 바이올린 소리는 제가 맨날 지겹도록 만들어 내는 소리다 보니… 감상하는 건 피아노 쪽이 더 좋더라고요?”
피아노라는 단어에 문득 찬윤이 생각났다.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머잖아 이름 있는 국제 콩쿨에서 최연소 수상을 하게 될 텐데. 그걸로 일찌감치 병역 특례를 따 두어서 많은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난다.
‘아… 병역….’
자신 역시 지병으로 면제받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보기 좋게 콩쿨 수상으로 면제받는 편이 나을 터.
하지만 아직은 국제무대에 설 나이가 되지 않으니, 천천히 준비해도 무방했다.
“아무튼 저도 이렇게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어서요.”
작곡의 시작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가끔은 원곡보다 편곡된 버전이 더 나은 경우도 있으니, 어쩌면 운 좋게 얻어걸릴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거 좋은 생각이네. 엄청 기대되는데?”
“…하하. 너무 기대하진 마시고요.”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리스트처럼 끝내주는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 싶은데, 어설프게 했다가 기존의 명곡을 망쳐버릴까 봐 쉽게 엄두가 나진 않았다.
이 역시 상당한 배움이 필요할 터.
그렇게 시작해서 조금씩 음악적 구조에 익숙해지면 차차 자신만의 곡을 써 보려는 계획이긴 한데….
‘이왕이면 관현악법도 정식으로 배우면 좋겠는데…. 오케스트라 활동을 정식으로 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작곡을 하려면 바이올린 외 여러 악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까.
모든 악기에 통달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일정 이상의 이해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중 특히 피아노는 기본이고.
그렇게 차근차근 하다 보면 언젠가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하던 서진은 문득, ‘차라리 정식으로 작곡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