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72
72화
“…!”
주제부를 연주하는 긴 오케스트라의 전주 끝에 나온 바이올린 솔로.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감미로운 아다지오의 선율.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소리였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모차르트다.
자신이 그동안 들어온 것들은… 미안한 말이지만 전부 가짜였다.
빈 필이, 모차르테움이, 다비트를 비롯한 유수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왜 그토록 저 아이를 보며 안달을 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인재를 진심으로 아끼는 박회장은 하늘에 감사했다.
저런 재능의 소유자와 같은 시대에 태어날 수 있음을, 그리하여 저 마법 같은 소리를 두 귀로 직접 들어볼 기회를 갖게 되었음을.
이 순간, 박회장은 빈 필의 한국공연 정기 유치를 위해 서진을 만나 설득을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잡념을 싹 잊었다. 그런 소소한 일 따위, 머릿속에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다시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장명훈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각이 잡혀 있는 단원들이 바이올린의 선율을 받아 주제부를 연주했다.
협연자인 서진과의 궁합이 훌륭하다 못해, 평생을 이 레퍼토리로 서로 호흡을 맞춰온 사이마냥 자연스러웠다. 모르는 사람은 분명 사전에 수도 없이 많은 리허설을 가졌을 거라 생각할 터.
쉴새 없이 흐르는 선율.
그러다 드디어, 바이올린 카덴차가 나왔다.
“….”
이제 박회장은 아예 입까지 떡 벌린 채였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걸까.
이건 단순히 음악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인데, 오감이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차오르는 기묘한 충족감.
흑백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물드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에 비유하면 좋을까.
이건 정말로 난생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박회장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깨달아 버렸다.
단 한 번 들은 것으로, 앞으로의 인생에 이 아이의 음악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어져 버렸음을.
‘행복한 노예가 되어버렸구나.’
음악 애호가로서 가장 기꺼운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입가에 가득 기쁜 미소를 띈 채 박회장은 무섭도록 무대를 바라보았다.
* * *
역시,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으로 해야 제맛이다.
찰떡같이 어울리는 이 음색.
서진은 오늘의 연주가 꽤 흡족했다.
바이올린이 손에 착착 붙는 것이, 의식적으로 곡을 연주하는 기분이라기보다는 빨려들 듯 모든 것을 곡에 맡긴 채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있는 기분이었다.
음악이 만들어 내는 세계를.
그러한 연주자의 마음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와닿은 것일까.
1부가 채 끝나기 전부터 지루함에 몸을 뒤틀고 있었던 건, VIP 객석 한 곳에 앉아있던 어느 이름 모를 청중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2부 역시 큰 기대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끔찍하도록 길겠지… 생각하며 객석으로 마지못해 돌아와 있던 상황.
상류층이라고 다 클래식을 사랑하여 깊은 조예를 가진 건 결코 아닌 일. 아무리 연주가 훌륭하다 해도, 애시당초 클래식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지겨운 자장가일 뿐이었다.
어린 소년이 무대에 올라오는 모습에 호기심을 보인 것도 잠시, 새삼스레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한데…,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며 잠이 싹 달아났다.
소년의 바이올린이 시리도록 맑은 첫 음을 토해내는 순간,
‘…어?’
뭐지? 귀에, 아니 가슴에 무언가가 푹 박혀 드는 이 기분은….
에라 모르겠다, 정 지겨우면 슬쩍 눈이나 붙여야지… 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남자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듣기 위해, 거의 거북목이 될 정도로 절로 고개가 늘어난다.
귓가를 맴도는 고운 음색.
마치 전설 속 새가 지저귀는 듯 깨끗하고도 맑은 소리에 남자는 홀린 듯 빠져들었다.
대체 눈앞에 펼쳐지는 이 감각은….
대자연의 장관을 만끽한 순간, 감동에 못 이겨 질끈 눈을 감아도 그 광경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아련히 펼쳐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음악적 감동을 시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이런 환상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걸까?
딱 그런 느낌으로 압도적인 감각이 차올랐다.
…카타르시스, 절정의 기분이 바로 이런 걸 이야기하는가 보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이런 게 진짜 클래식이구나.
저 아이는 악보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을 연주하고 있었다.
귀신에게 홀려 영혼을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
한서진.
황급히 팸플릿을 펼쳐 확인해 본 이름.
클래식 따위, 옛 유럽의 귀족 놀이를 따라 하고픈 이들의 허세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이름 석 자였다.
멍하니 고개를 든 남자가 이번에는 무대 위, 중앙에 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리에만 정신이 팔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얼굴 역시 잊지 말고 새겨둬야지. 제게 이런 엄청난 감동을 선사한 이의 얼굴 정도는 알아 두어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두 눈에 뚜렷이 박혀 드는 앳된 얼굴의 소년은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소년이 자아내는 마법과도 같은 오케스트라와의 하모니.
그것은 소년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마법이었다.
바로 그 주인공, 서진 역시 청중들과 마찬가지로 절정의 향연에 빠져 있었다.
‘이 느낌. 아아….’
벌써 몇 번이나 협연해본 경력이 있는 서진이었지만, 오늘과 같은 완벽한 호흡을 느낀 적은 없었다.
전화위복이라 해야 하나. 아까 리허설 때, 시작도 하기 전에 욕부터 먹고 하게 된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달까.
그때 부러 빡세게 능력을 사용해 보인 결과인지, 단숨에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 껑충 끌어 올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도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단연코 서진의 바이올린이 있었다.
너무나 영롱하게 울리는 선율.
사실 그에 비하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고작 반주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서진은 함께 ‘협연’하는 이들을 결코 곁다리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선율. 고조되었다가, 다시 살짝 풀어졌다가… 정신을 차릴 틈 없이 노래하는데, 희한하게 멋대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이끌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것은 고유의 개성을 가진 각 파트의 소리를 하나의 색으로, 서진만의 색으로 물들여가는 과정이었다.
서진은 자신 특유의 능력을, 다른 이들의 소리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른 이의 소리에도 심상 능력이 발휘되게 할 수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본능적으로 소리를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적극 활용했다. 제 파트를 연주하는 중에도 귀를 기울이며 전체의 소리에 집중하여, 멋대로 튀는 파트가 있으면 조심스레 끌고 들어와 전체에 녹아들게 어루만졌다.
어쩌면 이렇게 조화롭고 완벽한 호흡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장명훈의 지휘가 훌륭하다지만, 간혹 잘 어우러지지 않기도 한 소리가 있게 마련.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서진의 능력에 오케스트라는 각 악기 고유의 개성이 담긴 저마다의 노래를 하면서도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걸 어렴풋이 느낀 장명훈은 경이로운 기분이었다.
아까 리허설을 훈훈히 마무리지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오늘의 무대는 진심으로 훌륭했다.
정말로 대단한 아이.
신이 내린 재능.
아니, 인간세계를 보다가 답답해진 신이 직접 내려왔나 보다.
지휘자와 눈을 맞추며, 호흡을 읽으며, 이 모든 조화를 이끌어내다니….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서진이 모두에게 그렇게 경이를 선사하고 있는 동안, 어느덧 곡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진의 연주 역시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
경쾌하고 격렬한 기쁨을 분출하는 선율.
가장 모차르트다운 아티큘레이션.
사실 모차르트가 그리 취향이 아닌 서진이었지만, 이 곡만큼은 아주 좋아했다. 그런 즐거움이 녹아들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로 나타났다.
그 기쁨 어린 충만한 표정에, 지켜보는 이들 역시 모두 행복에 물들었다.
‘…아읏.’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왼쪽 손가락에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뭐지, 갑자기…?’
설마, 병이 발발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나마 다행히 막 비브라토를 넣으려던 중이었기에, 미세한 움찔거림을 절묘하게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바꾸어 티가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손가락을 바삐 놀리는 중이었다면 찰나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음정 미스를 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일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긴 한데….’
요즘 너무 무리했나…. 긴 유럽 일정에, 귀국 후에도 계속 바빴으니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그냥 단순한 건초염 정도면 상관없는데, 회귀 전의 일이 있다 보니 덜컥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이제 거의 막바지라 서진은 일단 무시하고 그대로 연주하기로 했다. 고작 이런 일로 무대에 선 연주자가 공연을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관객들에게는 무척이나 아쉽게도 시간은 빨리감기를 한 듯 마법처럼 훌쩍 흘러가 버렸다.
악장이 전부 끝나고도 사람들은 정말 끝인가 싶어 가만히 기다렸다. 너무 빨리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1악장에 이어 서정적인 분위기의 느린 두 번째 악장과, 곡명에 부제로 ‘터키풍’이라는 이름을 붙인 계기가 된 세 번째 악장까지.
다 합쳐봤자 30분 남짓. 아까 1부 때와 달리 너무도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짝, 짝….
누군가 시작한 작은 박수 소리.
그것도 그거지만, 실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뒤에 다음 악장이 더 있으면 하는 마음에 아닌 걸 알면서도 버티고 있었던 관객들이 뒤늦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브라보!!!!!!!
서진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일종의 VIP 공연이나 마찬가지인 무대인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은 몰랐다.
본디 클래식 콘서트든 뮤지컬이든 오페라든, VIP 공연은 일반 공연에 비해 관객들의 호응이 적은 게 보통이다. 음악을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티켓을 구매해 발걸음한 자리가 아니라, 초청을 받아 그냥 별생각 없이 참석한 이들이 대부분인 탓이었다.
그런데, 지금 관객들이 보이고 있는 박수갈채는 결코 초청 공연의 그것이 아니었다. 서진이 오히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관객들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활대를 툭툭 휘두르며 누구보다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함께 연주한 협연자에 대한 예우를 넘어,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가득 품은 채.
짝짝짝짝짝짝!
그중, 가장 열성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는 이는, 아까까지만 해도 가장 냉소적인 태도였던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다.
‘나이도 잔뜩 먹은 주제에 어린 소년에게 이런 추태를 부렸다니….’
다시 한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혼외자니 사생아니, 말도 안 되는 소문 따위 이미 아까 한 번의 리허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천재 소년은 자신을 질시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이들에게 굳이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음악으로 보여줄 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