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74
74화
“너를 기억해 둘게. 우리는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진은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한바탕 난리가 끝났다.
이제 드디어 해방될 시간.
“이제 가요, 엄마. 저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주최 측에서 초청받은 연주자들을 위한 식사 자리를 만들어 주었지만, 서진은 곧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에 앞서 온갖 기념식이니 뭐니 골치 아픈 순서가 가득 있기에, 굳이 기다렸다가 참석할 마음까지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갔다가 또 얼마나 여기저기서 관심을 받게 될지. 만약 두 회장님들이 제게 아는 척이라도 한다면….
더 이상의 구설수는 사양이다. 솔직히 소문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만, 당분간 관심에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
솔직히 서진은 그리 외향적인 성격이 아닌데, 최근 들어 너무 여기저기 노출되었더니 피곤했다. 이제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뿐.
기껏 발걸음해준 두 회장님들을 따로 만나보질 못해 조금 미안했지만, 어차피 아쉬운 건 서진 쪽이 아니었으니까.
“…실례합니다. 한서진 학생 되시지요?”
그런데, 막 돌아가려는 서진을 누군가가 불러세웠다.
“네. 그런데요?”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메인 행사 관련해, 잠시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 자리가 있어서요.”
“메인 행사요?”
이런, 아직 끝이 아니었나 보다.
“네. 앞서 안내해 드렸는데, 설명이 충분치 않았나 봅니다. 한-오 수교 기념 민간 문화예술 교류 홍보대사로서 한서진 군께서…, 또한 이성 재단과 모차르테움, 양측간의 결연을 대표하는 역할로서…,”
한-오 수교 기념으로 설립된 재단 차원에서 표창이 있을 예정으로, 양국의 문화예술 교류를 위해…. 무슨 대표로서 상을 받고… 어쩌고저쩌고.
척 봐도 엄청난 자리로 보였다.
이성 재단과 모차르테움과의 교류야 원래 있었던 일인데, 그걸 굳이 이번 수교 행사와 엮어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 딱 봐도 서진을 돋보이게 해 주려는 모양새였다.
“엄마, 어떻게 할까요?”
서진은 그녀에게 혹시 확인 차 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
하지만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눈이 초롱초롱해져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들이 국가 행사에서 표창인지 상인지를 받는다는데, 그걸 마다하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서진을 정중히 안내했다.
* * *
그렇게 극진히 모셔지더니, 갑자기 격식 철철 넘치는 자리에 불려가 주인공으로 서게 되었다.
저어기, 연단 아래의 VIP석에서 박회장과 임회장이 나란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둘이 언제 저렇게 사이가 좋았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두 회장들이라고 해서 서진에게 개인적으로 아는 척하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차례가 끝나고도 저기 VIP들은 계속 여기 붙잡혀 있어야 할 테니, 따로 얼굴 보거나 하기도 힘들 터. 참으로 다행이었다.
“…교류의 상징으로서, 양 재단의 협력을 대표하는… 영재 학생을 발굴함으로써 오스트리아에의 유학을 장려함과…. 양국의 문화예술 교류를 민간차원에서 확대…,”
얼마나 사설이 길면, 상을 받으러 올라가 아직도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유학이라….’
문화예술 교류니 유학 어쩌고 홍보대사로서 상을 받기엔 그쪽으로 유학 갈 생각이 조금도 없는 서진이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럴싸한 말들의 향연.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짝!
드디어 뭔가 받았다. 표창과 함께 번쩍이는 트로피가 주어졌다.
이어, 다음 차례가 되었다.
행사 자리에 소개된 것은 서진뿐이 아니었다. 아까 얼핏, 귓등으로 들었던 존재. 오스트리아의 바이올린 신동으로 유명하다는 페르디난트인가 하는 소년도 함께였다.
양국의 음악 신동이 한자리에 모인 상황. 한국에서 한 명, 오스트리아에서 한 명 대표로 총 두 명의 천재 소년들.
한국에서는 만장일치로 서진이 추천받았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페르디난트였다.
서진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함께 올라와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얘가 누구더라….’
회귀 전의 기억을 뒤적여 보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어린 영재들 이름까지 줄줄이 꿰고 있던 건 아닌지라, 나름대로 기억을 되짚어 봐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진이 지금 한국에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미국 음대생에게 물으면 알 리가 없듯,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지일 터.
마찬가지로 길고도 긴 사설의 수상이 끝나자, 사회자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젊은 음악가분들께, 어떻게 함께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이는 어려도 충분히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대우하는, 매우 정중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준비한 게 따로 없었다. 특히 이 처음 보는 소년과 듀엣을 할 만한 것으로는.
페르디난트 역시 마찬가지인 듯, 서진과 잠시 얼굴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피차 처음 보는 사이라고요.’
하지만 이내, 서진을 바라보던 페르디난트는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을 접었다.
‘…?’
장난기가 돌았다. 그리고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승부욕도 불타올랐다.
서진은 전혀 모르는 바였지만, 페르디난트는 서진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여기서 반드시 내 스스로를 증명해 보여야지.’
유럽 내에서 리틀 파가니니로 유명한 그였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보다는 모차르트이고 싶은 그였다.
오직 바이올린 한정 천재였던 파가니니보다는, 음악 면에서 다방면으로 천재였던 모차르트의 칭호를 갖고 싶은 마음.
그런데 파가니니의 환생이라는 호칭도, 모차르트의 명성도 저 동양의 꼬맹이가 다 빼앗아 갔다.
‘흥!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 꼬맹이가…!’
적개심. 질투.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감정의 소용돌이가 페르디난트의 눈가에 이글이글 타올랐다.
“죄송합니다. 듀엣은 준비한 바가 없어… 하지만 내빈 여러분들을 위해 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여 볼까 합니다만… 즉흥곡으로 바이올린 배틀, 어떠실까요.”
능구렁이처럼 유창한 문장으로 페르디난트가 입을 뗐다.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기껏해야 제 또래일 듯 보이는 소년인데, 저 무슨 천년 묵은 능수능란함이란 말인가.
그리고 뭐?
바이올린 배틀?
뭐시기 드라마에 나오는 피아노 배틀도 아니고,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
“와아아!”
하지만 이미 관중들은 기대에 가득 차올라 있었다.
아니, 저 사회 각계각층 출신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고작 이런 거에 눈을 빛낸다고?
말도 안 돼…
라고 외치기엔 이미 현실이었다.
얘가 쇼맨십이 좀 있구나…. 관객들이 뭘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도 나름 능력이다.
‘손가락은 괜찮아지긴 했는데….’
아까 그건 그냥 착각이었나…? 그냥 살짝 관절에 무리가 가서 아팠던 걸지도.
끝나고 병원엘 꼭 가봐야 하긴 하겠지만, 지금은 또 괜찮기에 서진은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즉흥곡이라면… 방식은요?”
설마하니 저 즉흥곡이라는 게 정말 제대로 된 ‘즉흥곡’을 말하는 건 아닐 터.
클래식에서 말하는 ‘즉흥곡’이란, 정말로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작곡한 곡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즉흥적인 악상에 따라, 기존의 작곡 기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작곡한 악곡을 뜻하는 말로, 그 역시 일종의 형식이었다.
그렇기에 서진은 저 즉흥곡 연주라는 게 그냥 모티브나 선율 일부, 짧은 악상을 표현하는 정도리라 생각했다. 진짜로 이 자리에서, 순간적인 악상만으로 완성된 곡을 뽑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내빈분께서 원하시는 조성을 지정해 주시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들려주는 식으로, 어떠신가요?”
역시나, 낭만파에서 유행한 ‘즉흥곡’이 아닌 짧은 몇 마디의 ‘즉흥적인 연주’ 정도를 뜻하는 것인 듯한데…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작곡에 제법 일가견이 있는 모양. 서진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형국이었다.
“저는 작곡에는 아직 배움이 짧아… 차라리 이렇게는 어떨까요. 그쪽에서 먼저 즉흥 자작곡을 연주하면, 제가 듣고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해 보이지요. 둘 중 어느 쪽의 연주가 더 감명 깊었는지, 판단은 청중들의 몫이겠지요.”
서진의 말에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모두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페르디난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절대로 자신이 해 보이는 만큼 내가 따라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쪽이야말로 자신 있었다. 작곡은 몰라도, 청음과 초견이라면 어디 가서 결코 꿀리지 않으니까.
페르디난트가 먼저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며 신청을 받겠노라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당당해서 서진은 순간 긴가민가했다.
설마… 정말로 즉석에서 제대로 작곡을 해 보인다고? 무슨 옛날 클래식 전성기의 천재음악가들도 아니고, 그게 가능할 리가….
아마 기존에 작곡해 둔 곡이 있겠지. 그걸 즉석에서 조옮김만 해서 연주해 보이는 게 아닐까.
조바꿈이면 몰라도 조옮김 정도는 즉석에서 할 수 있을 테니. 장조로 한 곡, 단조로 한 곡 정도 준비해 놓은 게 있다면 즉흥곡처럼 뽑아낼 수 있을지도.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음감이 받쳐줘야 하는 데다가, 바이올린의 특성상 조성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운지가 바뀌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음을 올리거나 내린 만큼 포지션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만으로 전부 해결되지는 않으니까.
“A 마이너, 좋습니다.”
정말로 신청을 받은 페르디난트가 살짝 미소지으며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깨끗한 고음의 화려한 바이올린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첫 마디부터 범상치 않더니, 무척이나 격정적인 선율이 이어졌다. 주제가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며 이어지는데, 바이올린이 슬픔과 격정에 울부짖는 듯했다.
“….”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적당히 즉흥곡인 척 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재능이라 생각할 일이었는데, 웬걸. 지켜본바, 저건 진짜였다.
이건 결코 미리 작곡해둔 곡을 임기응변식으로 조를 바꾸어 내보이는 것이 아닌, 정말로 조성과 악곡의 형식 정도만 요청받아 그 자리에서 즉흥곡으로 선보이는 것이었다. 미리 작곡해둔 곡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얘는 다른 의미로 천재네….’
온전한 소나타 한 악장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제를 표현하기에 충분한 길이의 연주였다.
“….”
연주가 끝나고도 객석은 한동안 조용했다.
저 소년이 내보인 연주가 어떤 의미인지, 저 즉흥곡의 작곡이 어느 정도의 능력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압도되는 것이다.
짝짝짝….
가장 먼저 박수를 친 건 서진이었다.
진심으로 감탄한 서진은 싱긋 웃으며 그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이어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뒤따랐다.
박수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며 서진은 주인공에서 살짝 빗겨 난 기분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승심이 더욱 자극된달까.
사실 배틀이니 뭐니 오글거린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물론, 저 ‘배틀’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차마 입에 담을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이제, 제 차례인가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