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84
84화
한국어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한국인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나이는 약 십 대 후반 정도. 찬윤과 비슷한 나이거나 혹은 그보다 약간 위 정도로 보였다.
“네. 맞는데요.”
“나는 임종훈이야. 스무 살이고.”
현재 서진이 있는 곳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홀이라, 현악 4중주 지원자들뿐 아니라 작곡 부문 지원자들도 한데 섞여 있는 상황.
서진 역시 작곡 부문 파이널리스트를 위한 웰컴 세리머니에서 그를 본 적 있어 알고 있었다.
그때는 정작 자신을 본 척도 안 하던 그였지만.
“아, 네…”
말끝을 흐린 서진이 함께 곁에 있던 페르디난트를 돌아보았다.
페르디난트는 이번 콩쿨에 서진이 복수 지원한다는 말에 미련 없이 작곡 부문에만 나오기로 했다. 바이올린이라면 몰라도 작곡은 자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자신감 그대로 페르디난트 역시 4명의 파이널리스트에 들었다.
그런 만큼 서로 얼굴을 알 터인데, 굳이 제 지인으로서 소개해 주며 인사를 트게 할 필요는….
“이쪽은,”
…이라고 생각하기엔 페르디난트가 제 뒤로 슬쩍 숨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서주었다.
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수줍어서.
“알아. 페르디난트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페르디난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그런데 어째 표정이….
“아무튼 반가워. 특히 한서진 너에 대해 많이 궁금했거든. 그 곡이 워낙 인상 깊어서.”
“곡? 아….”
영화 파가니니 말하는 거구나. 이번 제출곡은 아직 심사위원 외에는 공개되지 않았으니까.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보았다.
이번에 지원한 한국인들 중에는 유난히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서진과 윤수처럼 최연소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스무 살 남짓의 젊은 나이가 꽤 많았다.
눈앞의 이 형(?)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이력을 가진 존재였다.
예원학교,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하여 유명한 작곡과 교수를 사사했다. 작곡 관련 콩쿨에서 이미 상도 몇 차례 받은 경력에, 심지어 재작년 제노바 콩쿨에서 작곡 부문 심사위원을 했던 한국인 작곡가의 제자인 그였다.
하지만 서진은 첫인상만으로 선입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첫인상으로 치면 페르디난트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이상한 꼬맹이였으니까. 물론 그때는 나이가 워낙 어렸으니 이해해 줄 만한 일이었지만.
“그런데 무슨 용건이라도…?”
“아니, 너희 둘이 최연소라길래… 그냥 궁금해서.”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콩쿨이라는 것은 단순히 경쟁의 장이라기보다는,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기엔 다들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작곡 부문은 좀 나았다.
연주 부문이라면 견제의 의도를 가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작곡은 미리 제출한 악보가 가장 중요하기에 크게 견제할 거리가 없었다.
물론 작곡 역시 본선 리허설과 결선 연주를 앞두고 작곡가 본인이 직접 무대 세팅을 체크하는 등 신경 쓸 게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주 콩쿨만큼은 아니었다.
“내일 리허설, 기대할게. 아, 그리고 너도.”
그 말을 끝으로 임종훈은 다시 사라졌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페르디난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확히 뭐라 짚어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묘하게 무시당한 기분? 딱히 기분 나쁜 소리를 한 건 없는데, 표정이랄까 눈빛이랄까… 느껴졌다.
“치잇, 내 곡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응?”
“아니, 그렇잖아. 너한테만 칭찬하고 가니까….”
“아… 너 말대로 네 곡을 들어본 적 없으니까 저러는 거지. 들어봤으면 잔뜩 견제하고 갔을 테니… 차라리 잘 된 거 아냐?”
아직 리허설 전이기에, 심사에 제출했던 곡을 다른 참가자들로서는 들을 기회가 아직 없는 상황이었다.
“흥. 견제한다 한들 어쩌겠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이건 서진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괜히 같은 한국인끼리 견제하느라 신경 소모해서 좋을 거 있겠는가.
‘저쪽도 과연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국제무대에서까지 라인 타느니 뭐니 그런 건 애초에 질색인데… 왠지 모를 예감에 서진은 골치가 살짝 아파 왔다.
“나 반드시 우승하고야 말겠어!”
“그래. 힘내라….”
“너도 이겨줄 거야!”
잔뜩 불이 지펴져 버린 페르디난트는 엉뚱하게도 타도 한서진을 외치며 타올랐다.
“그래그래. 열심히 해.”
파이팅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무대를 준비할 수 있겠지.
최종 리허설 전 연주자와의 사운드 체크도 제법 중요했으며, 일렉트로닉 장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에 테크니컬 테스트도 은근히 중요하니까.
서진은 성격상 전자 장비의 사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페르디난트는 정반대였다. 몇 년 전 행사에서 즉흥곡을 했을 때만 해도 고전적인 취향을 선보이더니, 최근 들어 무척이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무대 준비 잘해. 나는 그럼 연습하러 간다.”
누구랑 달리 복수 출전이라, 서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다행히 곡의 특성상 무대 준비에 크게 손이 가지 않는 편이기에 서진은 바이올린에 올인하기로 했다.
‘나도 나름대로 라이벌이 생겼으니까.’
* * *
원래는 작곡 부문에 중점을 두고 이쪽을 곁가지 느낌으로 지원했던 콩쿨이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지연이 깜짝 놀랄 만큼 성장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긴. 원래도 잘하긴 했지.’
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대체 요 몇 년간 얼마나 절치부심하며 노력을 했는지, 서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전체적인 표현력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기교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서진의 남다른 표현력에는 사실 심상 능력으로 인한 영향이 있음을 감안하면, 순수 실력으로는 지연 쪽이 앞서는 것이다.
물론 서진이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건강상의 문제로 올인할 수 없었을 뿐, 작곡에 열중하면서도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틈틈이 실력을 갈고닦아 왔으니까.
‘그러니까 지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지…?’
비록 서로 경쟁하는 상황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지연보다 못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현악 4중주 본선은 작곡 부문과 달리 엄청나게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우선, 영상심사를 통과한 본선 진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본선 1차 리사이틀. 이중 일부를 추려 세미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시키고, 그중 결선 진출자를 선발해 파이널 라운드를 갖는다.
각 라운드별로 리사이틀이 몇 개씩이나 있기에, 예선을 제외한 리사이틀 일정만 해도 한 달이 훌쩍 넘게 걸린다.
퀸 엘리자베스처럼 결선이 진행되는 내내 가둬놓고 진행하는 게 아니라 참 다행이랄까.
“다음 차례는….”
드디어 서진의 팀이 호명되었다.
이곳에 온 이후 맞이하는 첫 무대.
약간의 긴장감과 두근거림을 안은 채 4명은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본선 1차 리사이틀.
서진의 팀이 택한 곡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 no. 57 C 메이저와, 라벨의 현악 4중주 F 메이저였다.
제시곡은 크게 두 카테고리에서 각 하나씩 선택하게 되어있었는데, 하나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중 택1, 나머지 하나는 20세기 작곡가의 현악 4중주 중 택1이었다.
이번 콩쿨에서는 20세기 곡뿐 아니라 현대곡까지 폭넓게 제시곡으로 주어지다 못해, 후반 라운드에는 아예 완전한 자유 선택 곡까지 있었는데, 아마도 주최 측에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멎어든 동시에 연주가 시작되었다.
가뿐한 호흡으로 시작된 첫 음.
4명의 활이 고전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시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서진은 이 순간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콩쿨이니 경쟁이니, 그런 건 이미 머릿속을 떠난 지 오래.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세계 무대에 당당히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기분이었다.
회귀 전에는 콩쿨이라 해 봐야, 죽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 국내의 작은 무대에 올랐던 게 전부가 아닌가.
그런데 회귀의 기적에 힘입어 노력한 끝에, 이렇게 내로라하는 연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경쟁할 수 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쉴새 없이 손을 놀리고 있는 서진의 얼굴이 점점 차오르는 기쁨으로 빛났다.
자신을 믿고 함께해 주는 친구들에게 너무 고마웠고, 이렇게 건강하고 무사하게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었던 주위의 모든 이에게 무척이나 감사했다.
‘엄마가 많이 궁금해하고 계실 텐데….’
아직은 고작해야 본선 1차 리사이틀이기 때문에 생중계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방송으로 내보낸다고는 하는데, 어쨌든 당장은 볼 수 없다는 것.
그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심사위원들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리사이틀에 지쳐가는 기색이었던 심사위원들은, 서진 팀의 연주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번쩍 떴다.
귀가 탁 트이는 듯한 소리.
콰르텟의 생명은 하모니가 아닌가.
합주의 형태를 띠는 건 오케스트라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만, 워낙 많은 악기가 한데 뭉쳐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와 달리 콰르텟은 한 악기가 하나의 성부를 연주하기 때문에 더욱 하나하나의 소리가 중요했다.
한데 그 조화로움이 대번에 심상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각 악기 하나하나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듯, 저마다의 개성을 잃지 않고 어우러짐을 노래한다.
‘대단한 수준이군….’
다들 비슷비슷한 제시곡을,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 그게 결코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세계 수준의 인재들이니까. – 연주하는데, 이 팀은 혼자만 다른 세상에서 온 듯 달랐다.
뭐가 다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뭔가 모르게 여태껏 들은 연주와는 다른, 마음을 쿡 찌르며 깊이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답답했던 귀가 씻겨나가는 듯, 흐리멍텅했던 눈이 번쩍 떠지는 듯한 음색.
‘결선에서 반드시 볼 수 있겠군.’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진의 팀은 1차 리사이틀을 가뿐하게 통과했다.
세미 파이널, 즉 준결선 진출자들을 위한 웰컴 세리머니가 콘서르바토리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워낙 바빴던 서진은 다른 이들과 교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바쁘기야 곧바로 준결선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겠지만, 서진은 특히 작곡 부문도 준비해야 하기에 눈코 뜰 새 없었다.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부랴부랴 작곡 리허설 준비를 위해 돌아온 서진을 향해 페르디난트가 물었다.
“응? 별로? 음악이야 원래 평상시에도 항상 하는 건데 뭐.”
그냥 즐기면서 하고 있기에 서진은 정말로 부담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평소 한예종에서 종일 틀어박혀 곡을 쓰고, 친구들과 연주해보고 하던 것과 뭐가 다른지 정말로 잘 모르겠는 기분.
그냥 그 무대가 이역만리 타국으로 옮겨졌을 뿐, 일상생활을 하는 느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나도 별종 소리 많이 듣고 살았지만, 넌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서진은 칭찬 고맙다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안녕? 또 보네?”
그런 그들에게 임종훈이 다가왔다.
“아, 네.”
서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페르디난트는 바쁜 척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곧 개봉박두네. 엄청 기대되는데?”
“네.”
서진은 응수하는 대신 단답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를 나누기엔 뭐라 부를지 호칭도 애매하고, 별로 유쾌한 기분도 아니었다.
그런 서진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임종훈이 삐뚜름하게 미소지었다.
…그 곡은 어쩌다 얻어걸린 거겠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