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91
91화
“…고마워.”
그리고 작은 미소와 함께 떠오른 안도의 표정.
남들에게 내색하진 않고 있었지만, 지연은 콩쿨의 후반부로 갈수록 스트레스로 인해 점차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콩쿨이라는 경쟁 상황에 놓여 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예민했고, 모두가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한 경쟁이 전부가 아니라 출전자들끼리 상호 교류하며 음악적 발전을 꾀하고 어쩌고… 하는 건 만화에서나 나오는 일일 뿐, 다들 본인의 음악 경력을 위해 이 콩쿨의 결과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차라리 혼자 출전하는 콩쿨이라면 모를까, 팀워크가 중요한 콰르텟이다 보니 트러블이 생길 가능성도 높기에 더더욱 다들 압박감에 시달렸다. 연습 중에 누군가 반복적인 실수를 한다거나, 소리가 잘 안 맞는다거나 하면 분위기가 싸해지다 못해 고성이 오가는 경우도 종종 있을 만큼.
다행히 서진의 팀은 전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어쩐지 콩쿨에 나와 있는 기분조차 잘 안 드는 태평한 분위기였지만, 다른 이들 대부분은 날 선 분위기 속에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네가 지연이 입이 닳도록 말한 그 천재? 기대하겠어’라는 뉘앙스로 비꼬고 갔으니, 보통 사람이었으면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고도 남을 일. 애써 다잡아 놓은 평정심을 뒤흔들어 놓기 충분한 말이었으니까.
“뭐가?”
“그냥, 다.”
지연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느슨히 풀어지는 걸 느꼈다.
정말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모두의 노력 덕에 마지막 결전의 순간만 남았는데, 자신 때문에 피해를 주는 건 정말로 싫었다.
“파이널리스트 셋에 들었다는 건, 이미 최소한 3위는 맡아놨다는 거잖아. 우리 이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고.”
윤수 역시 거들 듯 말했다.
“맞아. 누가 뭐라 떠들든, 아니 설령 윤수가 거하게 삑사리를 내서 망한다 해도 상관없어. 너희들 덕분에 곡도 여러 개 알릴 수 있었고, 정말로 이미 충분하거든.”
“야! 왜 예시가 나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다고 정말로 내진 말고. 나름 이번 파이널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신곡이라고.”
파이널 라운드의 연주 조건은 딱 하나였다.
자유곡으로 최대 45분 길이의 콰르텟 곡 하나.
이쯤 되니 아예 작정하고 신곡 발굴을 하려는 의지가 보이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서진은 콰르텟 부문 결선에서는 작곡 부문 결선에서 선보인 것과는 또 다른 새 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번 콩쿨을 통해 곡을 세 개나 발표하는 셈.
“아, 네네. 걱정 마시어요. 휴, 그나저나 너 진짜 징한 놈이다. 이게 다 몇 개야…?”
“응? 아….”
서진은 그간 써놓은 곡이 무척이나 많았다. 심지어 진짜 야심작들은 따로 있을 정도로.
‘오히려 그 곡들은 빈필과 협연하기에 제격이겠지.’
콰르텟이 아닌 바이올린 솔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들이니까.
서진이라고 빈필이 보낸 러브콜에 고민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정확히 자신의 신곡을 함께 연주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래서 협연을 염두에 두고 쓴 바이올린 곡을 제출하는 대신, 현악 콰르텟 곡을 골라 작곡 부문 콩쿨에 내려 했던 것. 그런데 어쩌다 보니 콰르텟 부문에도 복수 출전하게 되어 이래저래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아무튼, 일단 작곡 부문에서의 1위 수상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상황. 이제는 똑같이 빈필과 협연을 한다 해도, 서진이 그것을 통해 최초로 곡을 공개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예전과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남의 이름값에 힘입어 작곡가로 데뷔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 평가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 보인 후니까.
거기에 이미 파이널리스트에 든 것만으로도 서진의 K 콰르텟은 이미 이름값을 확보한 상황.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엄청난 퀄리티의 미공개 곡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무대를 마련하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터.
“나도 몰라. 많으니까, 앞으로 빡세게 굴려줄게.”
윤수가 ‘으윽’하는 소리를 내며 비올라를 집어 들었다.
파이널에 든 만큼 망해도 이미 최소 3위다. 실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거 이왕이면 1위에 욕심이 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욕심인 것 같긴 한데… 서진이 저 녀석과 함께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머지 멤버들, 하윤과 지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윤수는 새삼스레 목표를 다졌다.
그래. 싸나이라면 꿈은 크게 가져야지!
‘솔직히 여기서 나만 안 망하면 나머지는 걱정 없지.’
좋아…!
1위, 가보자!!!
* * *
딱 그 다짐 그대로,
아니 역설적이게도 정반대로,
윤수는 망했다.
‘어, 어떡하지…!’
결선이 열리는 빅토리아 홀.
이미 앞선 두 팀이 먼저 연주를 마치고, 서진의 K 콰르텟이 최후의 순서로 배정된 상황.
마지막이라 유난히 긴장되긴 했지만, 시작은 별문제 없었다.
늘 그랬듯 서진의 곡은 좋았고, 연주 역시 그동안을 통틀어 역대급으로 잘 되었다.
그야말로 물이 오른 훌륭함.
그런데 갑자기,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팅!
윤수의 현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윤수는 패닉에 빠졌다. 하필이면 자신이 메인 선율인 2악장이었다.
‘어쩌지….’
줄이 끊어지는 소리는 워낙 크기에 다른 멤버 모두 알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이 스쳤다.
하지만 윤수는 무척 장하게도, 줄이 끊어진 순간 놀라 연주를 멈추는 대신 살짝 움찔하는 것만으로 당황을 끝내고는 계속해서 연주를 이었다. 그에 나머지 셋 역시 일단 그대로 연주를 지속했다.
다행히 끊어진 현이 현재 소리를 내고 있던 현은 아닌지라, 찰나의 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빠르게 고민했다.
연주를 멈추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쩌지,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거더라. 규정이… 아니, 규정이 어떻든 간에, 괜히 심사에 영향을 미치면 어쩌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정 안 되면 갈고 와야겠지만…, 감점 요인이 공식적으로 있는지 없는지에 상관없이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최고조에 몰입해 있는 심사위원들.
그 흐름을 깼다가 다시 연주하면 집중도가 지금만 못한 건 당연한 일.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순위가 판가름 나는 마당에, 감상에 마이너스 요소를 만들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준결선이면 모를까, 가뜩이나 박빙인 결선이 아닌가.
안 그래도 윤수는 마리아가 속한 저쪽 팀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망해서 괜히 서진이까지 도매금으로 실력이 얕잡아 보이면….
‘바보같이 악기 점검도 똑바로 못 해서….’
현이 끊어지는 거야 그저 불운한 사고일 뿐이지만, 윤수는 끝없이 자신을 탓했다.
앞선 두 팀이 하필이면 완벽할 정도로 잘 해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대형 삑사리라니….
만약 끊어진 게 중간에 위치한 줄이었다면 하나 아래의 현에서 포지션을 높게 잡는 것으로 커버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A현(비올라의 가장 높은 음을 담당하는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 아래의 D현으로 커버되는 것도 어느 정도지, 고음으로 올라가게 되면 한계가 있었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소리가 난다거나 삑사리가 난다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떻게든 버티고 싶지만… 곧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올 터.
막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순간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생각은 길었지만 시간은 아주 찰나였고, 서진은 그 짧은 사이 이미 판단을 내려 있었다.
‘내가 할게.’
서진이 눈짓과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하루 이틀 호흡을 맞춰온 사이가 아닌 만큼 윤수는 대번에 알아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끊어진 게 만약 가장 낮은 현이었다면 어떻게 방법이 없었을 텐데, 바이올린과 겹치는 A현인 덕분에 바이올린이 커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서진은 총보를 펼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작곡자 본인인 만큼 악보 전체에 빠삭했다. 서진의 머릿속으로 총보가 주르륵 펼쳐졌다.
순식간에 1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악보를 총체적으로 파악한 서진은, 윤수가 감당하기 어렵다 판단한 음들을 제 악보에 덧씌웠다.
‘그나마 느릿한 2악장이라 다행인 건가.’
아마 빠른 템포의 악장이었다면, 현란한 선율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터.
물론, 그럼에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예였다.
비올라의 끊어진 줄이 담당하는 부분을 포함해 즉석에서 더블스탑으로 두 파트를 함께 연주하다니.
윤수는 아까 줄이 끊어진 순간에도 놓치지 않았던 연주의 흐름을 정작 지금 끊어버릴 뻔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렇게 갑자기 악보를 합치면, 여러 음을 동시에 짚는 건 둘째 치고 리듬꼴은 얼마나 또 복잡해지겠는가. 그게 초견으로, 아니 가상견(?)으로 단숨에 된다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쟤가 진짜 천재는 천재구나….’
와, 진짜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즉석에서 자기 악보에 비올라 악보를 더해 화음으로 연주한다니….
심지어 악보를 눈앞에 펼쳐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놈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임기응변인 만큼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서진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완벽히 해낸다 해도, 사전에 약속한 일이 아닌 만큼 간혹 겹치거나 빠지는 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진이 자신의 원래 파트의 음과 도저히 동시에 짚을 수 없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음이 비기도, 반대로 윤수도 나름대로 D현에서 어떻게든 짚으려 노력한 덕분에 둘이 동시에 같은 음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다행히 전자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고, 후자 역시 별문제는 없는 일이었다.
콰르텟이니만큼 개별 파트의 연주가 완벽한지보다는 전체적 조화가 중요한 법. 큰 맥락상 거의 흠 잡을 데 없는 연주인 것이다.
‘진심 미쳤다….’
직접 겪으면서도 안 믿어지는 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나중에 알려지면 레전드 되겠다’라고.
여전히 아슬아슬 외줄 타기에 가까운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원래 가장 오래도록 기억되는 법. 언젠가 나중에는 ‘그때 그랬지’ 하며 오히려 즐겁게 얘기할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실수는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서진이 애써 지탱해준 연주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
좋아. 이번 악장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 후에는 악장 사이의 틈에, 양해를 구하고 얼른 줄을 갈고 오면 되니까.
* * *
해프닝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서진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수습됨에 따라 지연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지연의 입가에 미소가 슬그머니 떠올랐다.
지연은 더없이 훈훈한 서진의 옆모습을 시야에 잠시 담았다가, 이윽고 경악으로 가득 차 있는 마리아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놀랐겠지. 여태껏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고 있었을 테니.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치떠진 눈동자를 보니 왠지 고소한 기분까지 들었다. 마리아의 눈빛은 거의 미친놈 바라보듯 하는 수준이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