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12
문제는 나머지 하나의 가능성. ‘플레이어의 사망’이라는 변수다.
이 세계의 ‘플레이어’는 누구인가?
“···물론 나겠지.”
“무슨 말이지?”
“아니야. 슬슬 내려가지.”
“다시 묻는데. 나와 함께할 생각은 전혀 없나? 도움이 될 만한···.”
나는 흑일삭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으며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내가 죽는다면 이 세계는 아마 다시 원점으로 회귀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죽고 세상이 회귀하건 말건 내 알 바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금액도, 사람도 구할 수 있지. 네가 바란다면 초법적인 일도 벌일 수 있다. 가령···.”
“이 세계는 어떻게 회귀해 온 걸까?”
“···여러 명과 결혼을 한다거나, 세계의 수장이 된다거나, 누구나 우러러보는 부를 움켜···.”
“시끄러우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 줄래?”
뇌에 들어오지도 않을 쓰잘데기없는 소리들을 조잘조잘 지껄이는 탓에 머리가 산만해지잖아.
“그래. 이런 것들은 너에게는 의미없는 일들이겠지.”
“알면 됐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나는 흑일삭의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을 끊은 다음 생각을 다시 이어나갔다.
이 세계가 회귀한다는 조건에 ‘플레이어’가 필수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세계의 회차에 들어왔던 플레이어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나의 몸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전익현’의 몸을 바라봤다.
내 기억속에 존재하지 않던 캐릭터. 레귤러 캐릭터들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다. 웬만한 레귤러 캐릭터들과의 듀얼을 해 봤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본래 더미 데이터에 있던 캐릭터라는 건데···.
더미 데이터에 있던 수없이 많은 캐릭터들을 나는 생각했다. 그 사이에 지난 번에 만났던 장백호도 끼어 있다. 청 브리즈의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기묘한 캐릭터.
만약 그 버릇이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제 플레이어의 버릇이라면?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직전에 청 브리즈가 대회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 때에는 단순히 예선전을 뚫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카드 게임 프로라고 해서 예선을 무조건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운이 없다거나, 메타 적응력이 부족했다거나 한 이유로 대회 예선을 뚫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니까.
하지만 예선을 뚫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 이를테면 거지같은 세상에 떨어지고, 클리어를 못 한 탓에 이 세계에 갇히게 된 거라면?
“으음.”
“뭔가 고민이 있는 건가?”
“회귀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듀얼만 하는 세계를 생각해 봤어.”
“어떤가?”
“끔찍해.”
이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된 게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죽으면 이 반복되는 세계에 갇히게 된다.
더 이상 새 카드 지원이 없는 세계라니.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다.
“아무튼.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군.”
카드들도 받고, 보상도 받았으니 이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게 만남의 시작일지도 모르지.”
뭔가 있는 척을 한 흑일삭이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갔다. 좋은 카드 다 털려서 개털이 됐을 게 뻔한데, 다시 만나서 좋을 일은···
띠링!
[플레이어 「흑일삭」에게 듀얼 신청이 왔습니다.]···아예 없진 않긴 하다. 듀얼 파트너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랜덤 매칭을 더 이상 잡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나는 수락 요청을 누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신하연이 올 때까지는 쉴 수 있을 것이다.
신앙거석의 공략도 끝났고, 이번 주가 끝날 때까지는 여유롭다. 그간 밀린 빨래도 하고, 집에 있는 털들도 치우고, 부러진 캣타워도 수리하고, 어항도 청소하고, 어항의 물풀도 새로 키우고, 해태의 산책도 하루 네 번으로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여유로운 거. 맞지?”
왜지. 전혀 여유롭지 않은 것 같은데.
짐 안에 있는 군식구들을 살해위협 없이 치워버릴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며 나는 듀얼을 계속해 나갔다.
***
새벽녘은 이마를 짚었다. 눈 앞의 신하연의 옆에 스탠드처럼 붙어 있는 유령 때문이다.
“그래서 무기로 고른 게 그 유령인 건가?”
“맞아요.”
칭찬해 달라는 표정에 가까운 신하연의 얼굴을 보며 새벽녘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했다.
“크흠. 이 몸을 무기로 고른다는 발상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발상이 특이하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방해될 것 같아 보이면 그대로 파티원에서 탈락이다.”
“풀무불꽃님의 실력을 못 믿으시는 거에요? 몇천 년을 살아오셨는데 당연히 듀얼도 잘 하시겠죠!”
“보면 볼수록 노인공경을 잘 아는 처자로고!”
시험 듀얼을 몇 번 지켜본 바로는 풀무불꽃이 하는 짓이라고는 쓸데없는 훈수를 두는 것 뿐이었다. 새벽녘은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20층의 시험을 담당하는 탑주에게 밉보여서 좋을 일이 없었으니까.
‘뭐, 시범 듀얼에서의 덱 파워는 이미 출중한 것 같고. 구태여 무기가 없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없겠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새벽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오늘 다른 멤버가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 다는 아니고 한 명만 올 뿐이지만.”
“고르디우스인가요?”
“그래. 나와 같은 매듭의 멤버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이미 도착해 있어.”
세 명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반갑다. 강철이라고 한다. 새로운 멤버가 왔다고···.”
“반갑습니다. 신하연이라고···.”
자기소개를 해 나가던 신하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150이 될지 모를 정도로 작은 키, ‘강철’이라는 금속 속성인 것을 광고하는 것 같은 명칭.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피하듯 돌아가는 헬멧까지.
“···남연철?”
“난 그런 사람 모른다.”
“거짓말하고 있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강철’의 시선을 따라 남연철은 졸졸 주변을 돌았다.
남연철은 새벽녘의 정강이를 후려찼다. 입술을 깨물고 웃는 소리가 헬멧 너머로 들려온다.
“남연철을 정말 모른다고요?”
“정말이다. 모른다.”
“저한테 얼마 전에 10번기 7대 3으로 진 애 이름이에요.”
“7대 3이 아니라 6대 4였잖아! 그리고 한 판은 완전 운빨로 이겼고!”
“남연철 맞잖아.”
남연철이 고르디우스의 멤버였다니. 그보다도 남연철은 정체를 숨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걸까.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위장인 것 같은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강철’이라는 고르디우스의 일원과 남연철이라는 인간을 모르니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가 고르디우스의 멤버였다니 조금은 충격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던 신하연은 결론을 내렸다.
“···음. 크게 상관 없으려나.”
신하연은 머리를 긁으며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남연철이 고르디우스의 멤버라는 것 정도는 전익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전익현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일 터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전익현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아마, 탑 공략에 필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남연철을 놔둔 거겠지.’
남연철은 고르디우스에도, 집행자에도 속하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솔직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탑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 그 탑 공략을 누가 하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신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탑을 오를 수 있게 도와주고, 전익현과 함께 듀얼할 수 있는 데까지 갈 수 있게 도와 주는 존재라면 어떤 존재라도 괜찮았다.
“···그래도 살인은 안 하지?”
“전적 거짓말치는 사람은 가끔 죽여.”
“너무하네.”
“공략은 이번 주 금요일이야. 잊지 말고 덱 제대로 짜서 오도록.”
남연철의 말은 차가웠지만 표정은 풀려 있었다. 신하연의 실력은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덱이 얼마나 강한지도. 그녀가 있다면 20층을 돌파하는 것도 도움이 꽤 많이 될 터였다.
끝
“심심해.”
나는 하품을 쩍쩍 내뱉으며 탑 앞에 서 있었다. 신하연 얘는 왜 안 오는 거야.
탑 들어가는 거 체크하고 집안일 해야 하는데.
“아! 강사님!”
양반은 못 되겠네. 신하연이 손을 방방 흔들며 다가오려다 잠시 멈칫했다.
“옆에 있는 그건 뭐에요?”
“열대어.”
“뭔지는 알고, 왜 여기 있는지를 여쭤 보는 거에요.”
“산책하고 싶대.”
[시레나! 산책 좋아! 인간 많아!]시레나가 작은 어항 안에서 뱅글뱅글 헤엄친다. 매일 해태만 산책하는 것이 부러웠는지 산책을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댄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상태다.
“뭐···강사님이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물고기 데리고 산책 안 해요. 평범하게 행동하지 않으면···들킬 수도 있으니까요.”
뭘 들키는데. 뭔가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신하연이 소근거린다.
“나도 나오기 싫었어. 근데 시레나가 산책 안 나오면 전자제품을 암살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보통 인간들은 물고기랑도 대화 못 해요. 아시겠죠?”
“얘는 평범한 물고기가 아니야.”
“애완동물 주인은 모두다 자기 애완동물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애정이 있으면 그렇게 되는 거죠.”
말을 말자. 말을.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힐 것 같지가 않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시레나가 담긴 어항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시레나의 눈이 신하연에게 고정되어 있다.
물고기의 표정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과 듀얼리스트로 다져진 표정 읽기로 추측해 봤을 때, 시레나의 지금 표정은 ‘호기심’이다.
“왜. 무슨 일이야?”
[시레나. 얘 마음에 들어!]“왜 갑자기.”
[이 인간. 반짝반짝 빛나! 소개해 줘!]“예전에 본 적 있지 않냐?”
생각해 보면 신하연과 여한설이 우리 집에서 깽판놓고 듀얼을 할 때에도 분명히 봤을 텐데.
[본 적 없어!]하긴. 생선 머리로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게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가끔 놀라운데, 신하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얘는 신하연이라고 해. 쓰는 덱은 물 속성의 미라클 덱.”
[물 속성 듀얼리스트! 최고! 최고!]퐁당! 시레나가 어항에서 점프했다. 요새 점프력이 점점 좋아진다. 나에게 좋은 일은 아니다. 저격가능한 전자제품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이야기니까.
돌아가는 길에 전자제품에 씌울 방수포를 사야겠다.
“얘는 왜 저러는 거죠?”
“네가 마음에 든대.”
“갑자기요?”
“좀 신기하긴 하네. 다른 듀얼리스트들한테는 반응 안 했거든.”
“제 듀얼력에 매료된 거겠죠!”
[시레나! 이 인간 듀얼 많이 하는거! 사는거! 죽는거 보고 싶어!]말을 좀 똑바로 해. 죽는 거 보고 싶다니. 표정으로 보건데 죽는걸 구경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고, 듀얼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수호자가 듀얼리스트에게 호감을 보이는 경우는 하나다. 그 듀얼리스트가 충분히 강할 경우.
신하연의 실력이 이제는 시레나의 호감을 살 정도 이상으로는 강해졌다는 것일까.
“···근데. 너는 나한테 왜 호감은 안 가지냐? 나도 듀얼 잘 하는데?”
[시레나! 전익현 듀얼 좋지만 전익현 얼굴 무서워! 듀얼 이기고 나서 얼굴이 사악해!]쪼르륵.
나는 어항의 물 삼분지 일 정도를 바닥에 부었다. 시레나가 다급하게 [그래도 전익현 좋아! 전익현 듀얼 좋아!] 를 외쳐댄다.
역시 사람이건 동물이건, 물은 정답을 알고 있는 법이다.
“물을 왜 부어요! 시레나가 무서워 하잖아요!”
신하연이 어항을 내 손에서 뺏어들었다. 넌 왜 갑자기 얘를 두둔하냐. 둘이 친구냐? 물 속성을 쓰는 동지애라도 있는건가?
“얜 좀 나를 무서워 해야돼. 그리고 시레나는 물 없어도 잘 산다고.”
“그런 물고기가 어디 있어요! 뭍에서도 숨 쉴 수 있는데 물에 사는 물고기가 세상 어디에 있냐고요!”
나도 시레나한테 똑같이 물어 본 적 있는데, “물에서 숨 쉴 수 있는데 왜 굳이 뭍에서 숨 쉬어?”라는 대답이 돌아왔었지.
그러고서는 공기로 숨 쉬는 나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