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44
서로 아는 사이라면 돈 이삼백억 정도는 무이자 무담보로 빌려줄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통하질 않았다. 하긴. 진슬아는 눈치가 전익현과 필적할 정도로 없는 여자애기는 했다. 본인이 얼마나 강한지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무력원툴 바보에게서 같이 탑을 올라가자는 부탁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몰라. 안 되면 혼자 가지 뭐. 지금은 그냥….’
“진슬아.”
“왜?”
“듀얼이나 한 판 하자.”
“그럴까? 어차피 아카데미까지 가려면 시간도 꽤 걸리니까 괜찮을지도.”
여한설은 휴대폰을 켜고 진슬아와 듀얼을 시작했다. 이지후는 백미러로 듀얼을 하고 있는 두 여학생을 흘긋 쳐다봤다.
‘아가씨. 거기서 갑자기 듀얼로 넘어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근래에 여한설과 이야기를 하면 무슨 일이 생기건 결국 듀얼로 이야기가 수렴했다. 중증도 이상의 듀얼 중독이었다. 이지후는 얼마 전에 여한설에게 듀얼 중독 치료소를 이야기했었다. 여한설이 자신은 결코 듀얼 중독이 아니라고 아득바득 잡아떼는 바람에 치료소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버릇이 든 걸까.
‘전익현이라는 인간부터겠지.’
아가씨에게 생긴 나쁜 버릇들의 99%는 전익현을 찍으면 틀리지 않는다.
##탑#5 (1)
“아무튼, 초창기의 테스팅… 그러니까 지구에서의 테스팅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 간간히 폭주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강인공지능의 폭주야 뭐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걸 다 제압한거야?”
“그래. 「소울」사의 개발능력은 범차원적이거든.”
“그렇구만.”
하아암. 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란 게 뭔데?”
“이 이야기 전부가 중요한 이야기야!”
“거짓말하고 있네.”
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이야기가 거의 끝나 가니까 조금만 참아.”
“지금도 잘 참고 있는데.”
서윤하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 목을 조르고 싶어하는 표정이다. 몇십 번 봐서 안다. 나는 반보 뒤로 물러나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문제는 최종시안_진짜최종안_더변경없는최종안_말일최종시안34.exe를 시험가동하고 나서 발생했어.”
“파일명이 왜 그따위야?”
“더 말하지 마. 원래 그런 거니까.”
서윤하가 슬픈 눈을 했다. 개발자의 비애가 담긴 눈이다. 뭐, 내 알 바는 아니고.
“최종시안은 원래 세계와 이 세계 사이를 분리시키기 직전의 마지막 확인 작업이야.”
“마지막 확인 작업이라면서 왜 그렇게 덕지덕지 파일명이 길어진 거냐?”
“어떤 쓰레기같은 인간이 버그 리포트를 악의적으로 계속 해댄 모양이더라.”
“누구야 그게.”
“몰라. 알겠지만 개발 중간부터는 내가 없었거든. 듣기로는 「어니스트 엑셀러」를 사용한 악의적 파밍, 「혼돈의 도가니」를 사용한 판별불가 상황 제작, 「알파-베타-감마 트리오」를 사용한 데미지 오버플로우 같은 걸 썼다던데.”
음. 누군지는 몰라도 꽤 할줄 아는 놈이군. 내가 해 봤던 버그 리포트와 똑같은 발상을 해내다니.
“그 자식이 알아낸 버그들을 쟁여 놓고 최종시안이 제작됐다는 메일이 올 때마다 하나씩 버그 리포트를 한 모양이더라고. 한 삼사십 번 정도.”
나 말고도 그런 짓을 하는 놈이 있을줄이야. 그럴 줄 알았으면 버그 리포트같은 거 하지 말고 가만 있을 걸 그랬다.
“뭔가 찔리는 거 없어?”
“없는데?”
“이 탑 18층의 특정 벽돌 뒤에 ‘이우주 죽어’라는 글자들 적혀 있는 거 알아? 37가지의 서로 다른 언어로 적혀 있어.”
그런 건 처음 알았네. 쓰잘데기 없는 이스터 에그 만들 시간에 게임 완성도나 높일 것이지.
“그래서, 최종시안을 가동한 뒤에 생긴 문제란 게… 「심장」이 문제였다는 거지?”
“맞아. 놈은 이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존재해. 그리고 동시에 토벌되기 위해서 존재하지. 「심장」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 세계는 완전해지고, 테스팅이 완전히 끝나 버려. 시계선의 루프도 거기서 멈추지.”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놈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채고 만 거구만.”
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내가 「심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반복되는 루프,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상황.
패배가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루프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서, 어떤 존재가 이 세상에 들어와도 종말을 막지 못하게 만들면 되겠네.”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런 반복 루프형 덱에는 내가 또 조예가 깊잖아. 예를 들어서 「소급 허수아비」덱 같은 경우엔 상대가 매 턴마다 쓸 수 있는 카드의 수를 제한….”
“됐어. 중요한 건 알아들었다는 거니까.”
오늘 처음으로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서윤하가 내 말을 툭 끊어버렸다.
나는 속으로 이제는 쓸 수 없게 된 「소급 허수아비」덱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서 서윤하에게 설명하는 상상을 시작했다.
「소급 허수아비」는 상대방이 한 턴에 쓸 수 있는 카드의 수를 제한하는 지속물이다. 처음에는 사용 카드수가 10장으로 제한되는 카드였기 때문에 실사용은 거의 할 수 없는, 그저 루프덱을 카운터하는 카드로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카운팅 매수를 줄일 수 있는 「사막매의 포효」와 「왕궁칙령」카드와의 콤보를 내가 찾아내면서….
“「소급 허수아비」덱 설명을 속으로 하는 것도 금지야!”
“너무하네 정말.”
“아무튼, 그 후부터는 개발진들이 다급해졌지. 종말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거든. 우리는 다양한 프로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이 세상에 데려왔어. 그런데….”
“죄다 실패했군.”
“「심장」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들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거든. 최상위권에 있는 프로들을 차례차례 불렀지만 죄다 실패했어.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가 이우주였지.”
“근데 왜 날 안 부른 거야?”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을 개판낼 가능성이 심각하게 농후했거든.”
“…….”
내가 얼마나 얌전히 살고 있는데. 이 세상에 내가 미친 영향력이라고는 별 게 없다. 그냥 얌전히 학생들을 가르친 것과 탑주들을 쥐어팬 게 전부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과거’의 이우주야. 정확히 따지면 제일 매칭 점수가 높았던 때의 이우주.”
“걔 약한데.”
“나도 똑같은 의견이야.”
그래도 지금의 나를 고평가해준다니까 기분은 좋네. 역시, 게임은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개발진은 네가 과거에 했던 듀얼로그를 모조리 가져와서 분석했어. 그 결과 과거의 너와 똑같은 선택을 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냈지. 네가 죽어라고 안 듣는 몇 가지 ‘정보’들은 추가했지만.”
“내가 안 듣는 정보들?”
“「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
“다시 말하지만 나는 놓치고 있는 것 따위는 없어. 매의 눈과 사막여우의 귀로 모든 정보들을 잡아채는 게 바로 나라고.”
“어련하시겠어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는 얼굴로 서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래서 왜 이전 회차에서의 듀얼로그를 볼 수가 없는 건데?”
서윤하가 잠시간 눈을 깜빡였다. 아마 나에게 줄 수 있는 정보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행히도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정보인 듯 했다.
“이전 회차의 듀얼 로그라고는 하지만, 종말을 맞이해서 지금은 말소되어 버린 세계의 듀얼 로그야. 이 듀얼 로그를 얻으려면 추가적인 스토리 진행이 필요해.”
“대충 얼마나?”
“음. 7명의 탑주를 모두 처치해야 되지 않을까?”
“난 인정 못해! 버그잖아! 버그라고!”
“야! 이우주! 바닥에 눕지 마! 팔 흔들지 마! 먼지 날린단 말이야!”
에퉤퉤. 바닥에 먼지 더럽게 많네. 청소좀 하고 살지. 바닥에 먼지가 가득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는 바닥을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절대로 물러나서는 안 될 순간이 있다.
영감님의 절대 물러나서는 안 되는 순간은 언제였죠?
저는 바로 지금입니다.
“듀얼로그 카드 받아왔잖아! 듀얼로그 보여줘! 당장! 당자아앙!”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나 안해! 탑 공략 안해!”
움찔.
단호하게 거절하던 서윤하의 몸이 처음으로 삐걱였다. 근본적으로 놓치는 것 따위는 절대 없는 나의 매의 눈이 서윤하의 움직임을 바로 간파해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너희 개발진이 나를 불러냈단 건, 이제 「심장」의 계획이 거의 막바지라는 거겠군.”
“아, 아닌데?”
서윤하의 눈썹이 까딱인다. 서윤하가 거짓말을 할 때의 버릇이다. 딱 걸렸어.
“생각해 보면 침식도가 올라가는 속도도 미쳐날뛰고, 나오는 도플갱어의 질도 엄청나고. 청 브리즈같은 초일류 듀얼리스트도 실패했지. 아마 내가 지면, 이 세계는 완전한 파괴 루프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닐까?”
“…….”
정곡이로군.
“그러고 보니 너희 개발진은 묘하게 나를 차별해왔단 말이지. 생각해 보면 여기에 온 다른 테스터들은 「심장」의 특이성을 구경이라도 했을 텐데, 나는 그걸 구경도 못했고.”
“그건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난 그런 거 몰라! 게다가 이 세상이 이렇게 망하기 직전인데도 나한테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그건 규정과 법칙 때문에─.”
“규정이 문제면 규정에 아슬아슬할 정도로는 협조해 줘야지!”
서윤하가 길게, 정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네가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사항이 뭔지 알려….”
“그건 됐어.”
나는 단칼에 서윤하의 말을 잘랐다. 애초에 놓치고 있는 게 없다니까.
“진짜 필요없어?”
“응.”
“…좋아.”
서윤하는 눈을 감았다.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내게 듀얼로그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서윤하의 눈이 뜨여졌다.
“최대한 필요한 정보량을 줄일 방법을 찾아냈어. 아마 탑주 한 명만 더 처치하면 듀얼로그를 볼 수 있을 거야.”
[퀘스트 알림 : 다섯 번째 탑주 「해신 카이엔」의 처치.(0/1)] [보상 : 「듀얼 로그」의 복원]나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라면 해 볼 만 하지.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으면 공짜로 해줄 때까지 단식농성을 했을 텐데.
나는 목을 두둑거리면서 푼 다음, 지난 번에 부숴놨던 벽면을 건너갔다.
“벌써 도전하게?”
“어. 카이엔 처치는 사흘 정도면 되니까. 지금 해 두지 뭐.”
“……그게 사흘로 된다고?”
“그래.”
“대체 어떻게?”
“나한테 「?」카드 있는 거 알지?”
“그래.”
“그걸로 「정당하고 온당한 거래」를 만들 거야.”
“「정당하고 온당한 거래」…?”
「정당하고 온당한 거래」라는 카드명에 서윤하의 몸이 일시적으로 굳는다.
“…? …??”
아마 무슨 카드인지 떠올리려는 거겠지. 하긴, 아무리 개발진이라고 한들 떠올리기 쉬운 카드는 아니니까 버퍼링이 걸릴만도 하다.
“…?! !!!”
아. 눈치챘다.
“야! 이우주! 미친놈아! 그 카드를 쓰면 어떡해!”
또 소리지르네. 나는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서윤하가 있는 방을 튀어나왔다.
좋아. 개발진의 사용 허가도 떨어졌다. 이제 나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패배하셨습니다.]“아악! 또 졌어!”
진슬아가 휴대폰을 꽈악 움켜쥐었다. 악력을 견디다못한 휴대폰이 세로로 우그라들었다.
여한설이 진슬아 전용으로 만들어 놨던 강화티타늄강 휴대폰인데도 채 세 판을 견디지 못했다.
“간단하네.”
진슬아가 분함에 휴대폰을 다시 꽉 쥐었다. 유압프레스에 짓눌린 듯 휴대폰이 손 모양을 따라 잘려나갔다.
‘저런 인간 앞에서 도발을 할 수 있다니. 제정신인 걸까.’
,라는 이지후의 의문을 뒤로 한 채 여한설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던졌다.
여한설은 절호조의 상태였다. 온천을 나오고나서부터 한 층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핸디캡을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