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177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여한설이다. 으음. 오늘따라 계속해서 옆에 사람들이 들러붙는 느낌인데. 평소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뭐, 그래도 친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득이려나.
여한설이 평소의 차가운 표정으로 인파를 바라봤다.
“평소라면 시시하다고 했을 것 같은데. 이런 거, 저런 거, 죄다 우리 집에는 있다. 우리집에 금송아지도 있다. 이런 식으로.”
“집에 금송아지가 없을 수도 있나?”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농담이었는데. 내 방에는 더 이상 금송아지가 없거든.”
“왜?”
“돈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여한설도 나 정도로 다이나믹한 한 해를 보내고 있었군.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고, 덱 종류도 바뀌고, 아카데미에서 1위도 놓치고.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 그렇게도 많았는데, 근래에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꽤 밝았다.
“표정이 좀 더 다양해진 느낌이네.”
“칭찬 고맙군.”
“칭찬 아닌데.”
“뭐가.”
“표정이 다양하면 표정을 읽히기 그만큼 쉬워진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여한설이 종래의 머리빗으로 내 옆구리를 다시 후려갈겼다. 폭력적인 성향까지 보이다니. 상대의 플레이를 못 참고 폭력을 쓰면 그것도 바로 실격 처리된다고.
“듀얼리스트로서 마이너스인 버릇들만 잔뜩 들어가지고는.”
“세상엔 듀얼만 있는 게 아니야. 머저리.”
“그런 것 치고는 듀얼 실력이 꽤 빨리 느는 것 같은데.”
“…안 속아. 또 커브 틀어서 비아냥거리겠지.”
“아니. 진심인데.”
「소커아」에 있는 듀얼리스트들의 실력은 빠르게 늘어나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 듀얼을 할 수 없다는 점, 「속성 고정」, 「특이성」이나 「듀얼혼」때문에 덱을 쉽사리 바꿀 수 없다는 점, 듀얼이 게임이 아니라 진지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는 점 등. 많은 요소들이 여기에 있는 듀얼리스트의 실력 증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듀얼 실력이 빨리 는다는 건. 가로막는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됐다는 거지.”
“예를 들면?”
“뭐, 가업을 잇는다던가, 남이 바라보기에 안 좋은 속성을 안 쓴다거나, 승패가 정해지기 전부터 패배를 생각한다거나.”
“…예전의 나는 그랬던가. 지금은 어떻지?”
“지든 이기든, 듀얼 한 판 한 판을 모두 즐기고 있지. 덱을 만들고, 구상하고, 상대의 호흡을 읽어내고, 이기기 위한 모든 과정들을.”
“듀얼 중독 초기 증상 같은데.”
뭐래. 겨우 그 정도로 듀얼 중독이면 나도 듀얼 중독이겠다.
아무튼. 여한설은 소울 커맨더스를 잘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즐기는 사람의 실력은 정말 빨리 늘어난다.
게임이 느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실력이 늘어나는 속도만으로 따지면 내가 원래 있던 세계의 최상위권 프로 정도쯤 아닐까.
실력도 지역 탑 100 프로게이머 정도쯤이 됐고.
“슬슬 내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디 떠날 사람처럼 말하긴.”
“모르지. 나는 내년에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계약직이라서 그런 건가? 그게 문제라면 기여금을 통해서 정규직으로 전환을 도와 줄 수 있어. 기여금도 내가 내 줄 수 있어. 이자는…음…. 여러 종류로 충당할 수 있고.”
“그래 줄 필요 없어.”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심장」을 공략하는 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심장과 함께 폭사할 테니 더 이상 이 세계에 있지 않을 테고, 공략하는 법을 찾아내서 소원권을 얻게 된다면 내가 원래 있는 지구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어디론가 떠나는 건가?”
“떠나는 건 아니고.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서.”
“돌아가야 할 곳?”
“거기에 남겨 둔 일이 있거든.”
“…그 남겨둔 걸 처리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난다고 해도, 여기에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벡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베타 테스팅이 끝나는 대로. 그러니까 심장이 파괴되고 난 이후에 원래 세계와 지구는 완전히 분리되게 된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표는 편도다. 다시 돌아올 방법 같은 건 없는 것이다.
나는 내 결정을 되씹으며 휴대폰을 다시 두드렸다.
삐빅!
[「모바일 소울 커맨더스」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설령 돌아올 수 있다고 해도 걸핏하면 휴대폰 소울 커맨더스가 정지되는 이 세계엔 딱히 돌아올 이유도 없다.
젠장. 대체 언제까지 먹통인 거야.
“…네가 가려는 곳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휴대폰으로 소울 커맨더스 안 돌아간다고 안 돌아오는 건 좀 선 넘는 판단 같은데.”
“사람 마음 좀 함부로 읽지 마라.”
이거 사생활 침해라고.
“사생활 침해는 매일같이 모닝콜 대신 모바일 소울 커맨더스 대전을 거는 게 사생활 침해고. 사람 표정 읽는 건 사생활 침해라고 하지 않아.”
나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물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저쪽 세계에는 나와 친한 사람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베타 테스팅이 끝나면 카드 패치팀도 이 세계에 대부분 남는다고 벡이 이야기했다. 소울 커맨더스의 패치도 이쪽이 훨씬 더 빠를 것이다.
‘그래도 돌아가야 돼.’
소울 커맨더스에는 ‘맹세 효과’라는 것이 있다. 맹세 효과는 그 카드를 발동한 시점부터 자신이 할 플레이에 제약을 두는 효과다.
맹세 효과는 내 의사랑 관계없이 지켜야 되는 룰이다.
그러니, 나는 지구에 돌아가서 내 볼 일을 마쳐야만 한다.
“보아하니 그 일이 중요한 일인 모양이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게임의 룰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으니까.
“그래.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네놈이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는 인간도 아니고.”
“소신이 확실한 거지.”
“하지만 나는 네가 사라지면 조금 쓸쓸할 것 같군.”
여한설의 눈에는 다소간의 아쉬움과 쓸쓸함이 맺혔다. 하긴. 그녀 입장에서 가만히 옆에 있기만 해도 듀얼 실력을 끌어올려주는 내가 사라진다니 아쉬울만도 하다.
“넌 내가 없어도 잘 할 수 있을 거다.”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여한설과의 친밀도를 조금이라도 올려 보려는 수작이 결코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네가 보고 싶은 날이 있을지도.”
“뭐, 그럴 날도 있겠지.”
“그런 날에 너를 기억할 수 있는 카드 한 장 정도만 있다면 좋겠는데. 이를테면 「어둠의 창기사」라던가.”
결국 너도 그쪽이었냐. 어째 구질구질하게 하지도 않던 빌드업을 하더라니.
나는 여한설의 몸을 들어올렸다.
“자…잠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들어올린 여한설의 몸을 들고 내가 왔던 길을 돌아온 다음, 문 밖으로 집어던졌다.
원하는 카드는 바로 살 수도 있는 여한설이 나한테 카드를 요구할 줄이야.
있는 놈들이 더한다더니.
“야! 「어둠의 창기사」가 안 되면 「블랙홀」도 좋아! 그게 아니면 백 보 양보해서 「명계신」이라도!”
냐아아! 냐아!
퐁당! 퐁당당!
바깥에서 들려오는 짜증나는 소리가 이중창에서 삼중창으로 늘어났다.
젠장. 진짜 한시라도 빨리 심장 공략하고 집에 가야지.
나는 내 본래의 목표를 다잡으며 다시 경비실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카드잡기 (4)
아카데미에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컨트롤 타워. 컨트롤 타워의 내부에 있는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고양이와 열대어가 포함되어 있는 관제센터에는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안 되네요.”
“그러게.”
“애초부터 안 될 거 알고 있었잖아. 그냥 버리는 카드라도 달라고 할 걸.”
진슬아의 투덜거림. 사실 전익현에게서 좋은 카드를 받아낸다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바에는 그냥 축제나 즐기는 것이 백배는 낫기는 하다.
“나는 그냥 포기하도록 하지.”
가장 먼저 파티에서 이탈한 것은 흑일삭이었다.
“나도.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거든.”
“마찬가지다.”
뒤이어 권보람, 새벽녘이 이탈. 바닥이 충분히 따뜻하지 않은 것을 불쾌해 하던 스핑크스가 시레나를 끌고 바깥으로 떠나버렸다.
“해체되는 것도 금방이네.”
“안 될 일은 안 되는 일이니까.”
“그래도 해 보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특이성을 강화시켜 준다는 커다란 보상이 있기는 했지만. 그 보상을 위한 퀘스트가 이 모양이어서야.
신하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였다.
“그냥 별 생각 안 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포기하자는 말이야?”
“포기하잔 건 아니고…. 그냥 축제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거지. 카드를 받을 기회가 지금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네 명의 고개가 까딱였다.
“근데. 축제는 어떻게 즐기는 거지?”
“보통 아는 애들이랑 돌아다니거나.”
“너희. 아는 애들 있냐?”
침묵이 네 명 사이에 감돌았다.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중요한 활동인 친목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듀얼에 미쳐서 안 했다고 하는 게 옳지만.
“…너희들 진짜 사회성 없구나.”
“사회성이고 자시고, 내가 다른 짓 하면 카운터 덱 만들어 올 생각부터 하고 있었을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
소울 커맨더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하면 물론 듀얼 실력 향상이다. 하지만 그와 버금가게 중요한 이유는 인맥 형성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정, 재, 듀얼계의 거물이 될 학생들과 미리 친해지는 것도 듀얼 실력 향상만큼 중요한 기둥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지금 자신들은 그 기둥을 없는 것처럼 1년을 보내 왔다는 점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답이 뻔히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성취라는 것은 누가 가르치냐와 밀접한 영향이 있다는 말이다.
* * *
아홉 번째로 내 카드를 요구한 흑일삭이 다녀간 뒤, 아무리 나라도 이 정도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카드를 주는 걸로도 친밀도를 쌓을 수 있는 모양이겠네.”
이 제작진이라는 놈들이 얼마나 악랄한 놈들인지 다시금 드러나는 대목이다. 듀얼을 하는 사람이라면 카드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이 카드를 희생해야만 친밀도를 올릴 수 있다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선택이다.
나는 혀를 찬 다음 내 덱을 다시금 확인했다. 아무리 확인해 봐도 뺄 수 있는 카드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브덱에 들어가 있는 카드들도 죄다 활용 가능성이 있는 카드들이고.
나라고 좀 친해진 사람들에게 카드를 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친해진 것보다 카드가 더 중요할 뿐인 거지.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뭔가 쏟아질 것만 같은 먹구름이다.
뭔가 다른 방법 같은 건 없는 걸까. 나는 손에서 카드들을 튕기며 고민했다.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하지만 없는 방법이 바로 딱 하고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릴없이 카드를 섞고 있는데, 카드 한 장이 튕겨져 나갔다.
+
【주정뱅이 잭】
【3 mana】
【소환 : 필드 위의 소환수 하나를 내 패로 되돌립니다.】
+
주정뱅이 잭. 카드 한 장을 내 패로 바운스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카드다. 이런 효과를 가지고 있는 카드군이 꽤 있다. 물론 자주 쓰이는 카드들은 아니다. 컨셉 덱인 「무한 바운스 덱」이나 「빛의 시대」덱에서 퀘스트를 쓰는 데 사용한 카드다.
여러 번 같은 카드들을 내야 퀘스트가 완료되는 「빛의 시대」덱에서는 나름대로 쏠쏠하지만, 개그 컨셉 덱인 「무한 바운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이 덱의 목표는 그저 패에 「주정뱅이 잭」을 두 장 모으는 것이다.
두 장 모아서 어떻게 하냐고?
마나를 회복할 수 있는 루프를 어떻게든 만들어낸 다음, 패에 있는 「주정뱅이 잭」으로 필드에 있는 「주정뱅이 잭」을 핸드로 가져오고, 다시 패로 돌아온 「주정뱅이 잭」을 사용해 필드에 나간 「주정뱅이 잭」을 핸드로 가져온다.
누가 필드만 본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 필드. 한 장의 「주정뱅이 잭」이 핸드에 남아있고 한 장은 나와 있는 상황이 무한히 반복되는 상황.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