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218
“그거 말고 지금 할 일이라도 있냐?”
“그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시레나가 왜인지 입을 삐죽 내민다.
밤하늘 가득 떠 있는 별들과 그 별들을 비추는 바다. 단 둘이 있는 남녀. 이런 곳에서 남녀가 할 일이 듀얼 말고 뭐가 있겠는가.
“듀얼 필드가 없는 건 좀 아쉽지만.”
[듀얼 필드가 가동합니다.]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서 듀얼 필드가 솟아올랐다.
“전익현! 듀얼 필드도 창조해냈어! 듀얼 괴물! 듀얼 괴물!”
“말이 되냐 그게.”
“전익현 존재 자체도 말 안 돼!”
시레나의 혹 위에 혹 하나를 더 만들어준 나는 듀얼 필드를 확인했다. 꽤 낡아 있는 데다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탓에 색이 좀 바래기는 했지만 확실히 듀얼 필드다.
이 세계의 듀얼 필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정상’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설정을 만들어 놓은 개발자들은 듀얼 필드를 무작위로 배치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변에 듀얼 관련한 요소가 있다는 뜻이지.
“일종의 히든 피스인가.”
아마 이 부근에서 지금은 사라진 몬스터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그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도착하는 무인도.
확실히라고 해도 될 만큼 숨겨진 요소가 있다는 뜻. 이 숨겨진 요소는 ‘카드’가 확실하다.
그리고 숨겨진 요소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나갈 방법 또한 만들어져 있을 터.
자세한 건 섬 공략을 하며 알아가면 될 거고.
지금은….
“일단은 듀얼부터 몇 판 하지.”
“전익현. 역시나야.”
“뭘 걸고 할까? 제일 먼저 거는 건… 텐트에서 누가 잘지를 결정하는 건 어때?”
“…좋아! 시레나! 듀얼 엄청 강해졌어!”
강해지기는 개뿔.
시레나와의 듀얼은 조금 싱거운 편이었다. 다른 상대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연습을 계속해왔는지 실력 자체는 늘어 있었다. 내 눈에 안 차서 문제지.
“듀얼 좀 열심히 하라니까.”
“전익현. 듀얼보다 중요한 거 세상에 엄청엄청 많아.”
시레나가 꿍얼거렸다. 눈에서 눈물방울 나오기 직전인 것 같으니 오늘 듀얼은 여기까지만 해 둘까.
나는 필드를 정리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몸을 너무 움직였는지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일 이 섬에 무슨 요소가 숨어 있는지도 탐험해야 되고. 슬슬 자야 할 시간이다.
나는 바닥에 펼쳐 놨던 침낭을 챙겼다.
“전익현! 그거 시레나 침낭!”
“듀얼에서 내가 땄잖아. 넌 저기 바닥에서 자.”
“인간. 측은지심 있어. 전익현. 인간 아니야.”
“헤엄 못 치는 인어도 있는데. 측은지심 없는 인간도 있을 수 있지.”
“…….”
나는 내기 듀얼에서 시레나에게서 정당하게 소유권을 얻은 침낭, 배게, 벌레잡이용 등불, 위협용 휘슬, 코코아 컵, 방충망을 텐트 안에 밀어넣었다.
물건이 좀 더 있었으면 계속 듀얼을 했을 텐데, 물자가 바닥났다. 시레나가 더 걸 거라고는 몸에 걸치고 있는 비키니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
당연한 말이겠지만 남자인 내 입장에서는 비키니같은 건 따 봤자 아무 쓸모도 없다. 사이즈도 안 맞고. 두 짝이니 듀얼 두 번은 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니 듀얼은 여기까지.
“자러 간다.”
“시레나도 텐트 들어갈래!”
“안 돼. 듀얼에서 졌잖아.”
나는 두 겹으로 말아올린 따뜻한 침낭 안에 몸을 밀어넣었다.
다음 날의 컨디션을 위해서는 충분히 자 둬야만 했다.
* * *
나는 잠을 자면 항상 꿈을 꾼다. 꿈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가장 많이 꾸는 꿈은 역시나 자각몽이다.
내 자각몽 능력은 굉장히 뛰어나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열 번 자면 여덟아홉번 정도는 자각몽을 꿀 수 있다.
자각몽 중에는 듀얼을 하거나, 덱 튜닝을 하거나, 복기를 한다. 자고 있는 중이라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 흠이지만. 꽤 좋은 구상이 나올 때도 종종 있다.
요즘에는 자각몽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자각몽을 꾸는 대신 이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의 꿈을 종종 꾸게 됐다.
그리고 자각몽도, 이 세계의 꿈도 아닐 때는… 악몽을 꾼다. 열 번에 한 번 꼴로 꾸는. 피할 수 없는 악몽.
이번 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을 떴다. 몸은 평소처럼 땀으로 가득 젖어 있는 상태였다.
거듭되는 악몽을 겪다 보면 비명이나 소음 없이도 몸을 일으키는 법을 배우게 된다.
확률이라는 건 거지 같다. 도박 한두 번이라면 요행으로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일 년 365번. 잘 때마다 도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10%의 확률을 모조리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익숙해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익현. 괜찮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레나였다. 나는 등불을 켜고 시레나를 노려봤다.
“넌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거냐?”
“시레나! 바깥 무서워! 어두컴컴해!”
내가 듀얼에서 이겨서 여기서 자기로 했잖아. 넌 밖에서 자야 되고.
심지어 시레나는 내가 듀얼로 정당하게 얻은 침낭까지 쓰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시레나 물건인 줄 알았네.
내가 악몽을 꾼 게 저것 때문이었구만. 잠자리가 추우니 악몽을 꾸는 게 당연하지.
“침낭은 또 왜 니가 다 쓰고 있는 건데?”
“시레나! 따뜻한 게 좋아!”
“듀얼에서 졌으니까 추운데서 좀 자! 그게 벌칙이잖아! 하다못해 하나는 남겨줘야 될 거 아냐!”
내가 짜증을 내거나 말거나 시레나는 내게 다가와 머리를 문질렀다.
“괜찮아. 전익현. 시레나가 옆에 있어.”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없었으면 이 장비가 다 나 혼자 쓰는 거였다고.
시레나는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내 모든 걱정의 근원이 본인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이다.
나는 시레나의 혹 위에 달린 혹 위에 혹 하나를 더 만들어 줬다.
일이 잘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외전#5 : 시레나(3)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챙겨먹은 나는 시레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왜? 전익현 어디 가?”
“섬 안에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 돼.”
“왜? 시레나도 갈래!”
“안 돼.”
“왜!”
“안 된다면 안 돼.”
“왜!”
“안 되니까.”
“왜!”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야.”
계속해서 이유를 물어대다니. 미운 일곱 살도 아니고.
“시레나 같이 가면 시레나 위험할까봐?”
“아니야. 같이 가면 귀찮을 게 뻔하니까 혼자 가려는 거라고.”
“괜찮아! 시레나도 갈래!”
사람 말 좀 들어라. 몇 번을 설득해 봐도 시레나는 완강하게 나를 따라오겠다며 우겼다. 내 몸 상태로는 따라오는 시레나를 떨쳐낼 수도 없었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내 쪽이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응!”
“걸리적거리면 바로 버릴 거야.”
시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방 안에 최소한의 음식들을 챙긴 다음 섬 안쪽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울창한 야자수와 이름모를 풀들 가운데에 다소간의 빈 공간이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람이 사이로 걸을 수 있을 만한 거리다.
“바닥에 길이 있네.”
“길? 어디에?”
“여기.”
나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역시. 내 생각대로 여기는 개발진이 만든 구역이 분명하다.
이 세계에는 내가 모르는 요소들도 꽤 있다. 개발진 놈들이 일부러 나에게서 정보를 숨겼기 때문이다. 버그 리포트를 가장 많이 해 준 베타 테스터를 이런 취급하다니.
파티 플레이로 탑주를 상대해야 된다는 사실도 끝까지 숨긴 놈들이니 어련하겠느냐만.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RPG 마스터는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먼저 하는 법. 주변이 풀숲으로 뒤덮혀 있으니 아마 이곳에서 벌어지는 듀얼의 테마는 「숲」속성일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듀얼을 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점이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 봐도 듀얼을 할 만한 상대나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
“전익현! 여기 이상한 모양 석상 있어!”
“집중하고 있으니까 조용히 좀 해.”
있는 거라고는 저 멀리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원숭이뿐.
“전익현! 석상 머리가 막 돌아가!”
“설마…?”
추리의 대가인 셜록 홈즈가 한 말이 있다. 얼마나 믿을 수 없던지간에, 불가능을 지우고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이 진실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석상 머리에서 막 불빛 나와!”
“듀얼!”
─듀얼을 선언하는 것이다.
[듀얼 필드가 활성화됩니다.]바닥에 듀얼 필드가 활성화되며 우리를 쳐다보던 원숭이를 포획했다.
우끼끽─!
원숭이가 바닥에서 튀어올랐다. 포획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의태가 꽤 뛰어나군.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원숭이라고 착각했을 법한 모습이다.
[덱을 세팅하십시오.] [덱 세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덱이 세팅되지 않았습니다.] [상대에게 기본 덱이 제공됩니다.]“기본 덱이라. 상대하기 그리 어렵진 않겠군.”
[듀얼 스타트!]* * *
첫 번째 원숭이를 처치하고 난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만들어져 있는 길을 가다가 원숭이가 보이면 다가가서 듀얼을 건다.
내가 이 모든 과정을 하고 있는 동안 시레나는 계속해서 주변에 있는 석상의 모가지만 돌리고 앉아 있었다. 너는 역시나 별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우끼끼─!
“이게 마지막이다!”
꽈르릉!
번개 형상의 홀로그램이 원숭이를 후려갈겼다. 원숭이는 홀로그램에 깜짝 놀라 바닥에서 다시 튀어올랐다.
뒤이어 나오는 승리 메시지.
[승리하셨습니다!]“앞으로 몇 마리 정도나 남아 있으려나.”
내가 앞으로 얼마나 원숭이가 많이 남았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동안 시레나는 저 멀리서 석상의 모가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거 좀 그만 건드리라니까?”
“석상! 이거 마지막인 것 같아!”
어떻게 이렇게 적응력이 없는 걸까. 이 세계는 듀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다. 석상 머리 좀 돌린다고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주변에 원숭이가 없는지나 좀 더 찾아봐!”
시레나는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하고 석상의 모가지를 돌렸다.
그리고 석상의 모가지가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쿠르릉!
바닥이 진동하며 바닥에서 돌들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방금 처리한 원숭이가 마지막 원숭이였던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