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24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뿔테안경 너머의 눈빛을 보고 이것이 절대 사랑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무슨 일이시죠?”
“드릴 물건이 있어 왔습니다.”
그녀는 손에 있는 커다란 박스를 나에게 건냈다. 받아드는데 무게가 육중하다.
“이게 뭡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바깥에서 이야기하기는···어려운 문제라서.”
권보람은 방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쓱 훑었다. 책으로 만든 제단과 오늘 마신 콜라들이 널부러져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소 열심히 하고 살 걸.
“도청기기는 없어 보이는군요.”
“···예?”
“물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권보람은 말을 마치고 박스를 열어젖혔다. 박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은···바이 크 수트였다. 아니, 바이크 수트라기에는 조금 더 이런저런 것들이 붙어 있다. 보호장구들이 실용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눈에는 익숙하지만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
“···히어로 수트?”
“정식 명칭은 ‘대 듀얼용 충격완화외골격’입니다.”
대 듀얼용 충격뭐시기의 디자인은···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멋졌다. 검게 만들어진 갑옷 느낌이 나는 외형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에 쓰는 헬멧도 멋들어지게 만들어져 있다.
딱 하나. 딱 하나 별로인 게 있다면 억지로 쑤셔넣은 것 같은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스카프가 있다는 점 정도.
“이걸 왜 가져온 거죠?”
“그간 전익현씨의 행동을 하나하나 관찰했습니다.”
“···뭘요?”
“···그렇게 모르는 척 말씀하시겠죠.”
다 안다는 표정으로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권보람.
“구룡보등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시간강사 카드로 보안을 뚫고 들어가셨었죠.”
“···죄송합니다.”
“죄송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처리했으니까요. 다만, 이현일 총장님께서는 이번 일 이후로 당신에게 이 수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리고···이 뱃지도 필요할 겁니다.”
권보람이 옷의 가슴팍에 있는 뱃지를 가리켰다. 카드에서 일곱 빛깔이 쏘아지는 형태의 뱃지다.
“저희 아카데미에서 발행되는 신분 증명 뱃지입니다. 정교수와 동일한 수준의 접근권한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상하다.
“저에게 왜 이런 걸 주시는 거죠?”
“드린다기보다는, 대여해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얼마 전부터 게이트의 발생이 많아졌습니다. 저희 교사진들이 최대한 막아보려 하고 있지만 중과부적이죠. ”
“그래서요?”
“누군가가. 자진해서 막아 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사들의 수가 부족하니까 시간강사들까지 돌리겠다는 이야기다.
이거 불법 아니야?
물론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암흑 속성을 쓸 때에 내 신분을 숨길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니까. 게다가 정교수의 접근 권한이라면 다닐 수 있는 ‘사냥터’들도 꽤나 많고···.
“추가 수당은···.”
“물론 없습니다. 자진해서 하시는 일이니 저희는 추가 수당을 지불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인지 권보람은 미소를 짓는다. 방금 이 대화 어디에서 미소를 지을 포인트가 있었는데? 불법 노동이 장난이야?
뭔가 부당함을 항소하고 싶었지만 나는 한낱 시간강사에 불과한 몸이다. 시키면 하는 수밖에.
“···그보다. 이 수트. 디자인은 누가 한 겁니까?”
“제가 과거에 디자인했던 겁니다. 제품이 만들어지기 전에 폐기됐지만, 작동을 시험해보기 위해 만들어둔 물건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미적 감각이 상당하시네요. ···저 스카프만 빼고요.”
“스카프는 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
“그러면?”
“···총장님이 억지로 넣은 겁니다.”
그럴 줄 알았다.
“총장님께서는 본인의 디자인 감각이 특출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쓴 소리를 좀 들어야 할 텐데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권보람이 짧게 한숨을 쉰다. 하긴. 그런 마이웨이인 총장을 제어하려면 고생좀 하겠지.
“시제품이지만 재료는 최상으로 썼으니 안심하시길. 30데미지 정도까지는 충격 완화율이 90%정도에 달하니까요.”
오. 그건 좋은 소식이다. 안 그래도 살벌하기 그지없는 듀얼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번 듀얼은 마냥 내가 후드려패는 듀얼이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언제나 맞지 않고 듀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90%의 충격을 줄여준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터다.
나는 슈트를 받아들었다.
A/S요청은 언제까지 되냐는 질문에 A/S는 없다는 단호한 대답을 들었다.
예산이 없다나.
아껴아껴 써야지.
***
[···그러므로 게이트의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데 가장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되는 것은 교환비라고 할 수 있다.]“오늘도. 별 것 없는 수업이었어.”
여한설은 오늘 있었던 전익현의 수업을 네 번 복습한 끝에 언제나처럼의 결론을 내렸다. 역시 강한 덱은 그 자체로 강한 덱이 강한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쓸모없는 건 아니야.”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빛 속성의 「컨트롤 덱」은 더 이상의 튜닝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슈의 전문가들이 손을 대 만든 덱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둠 속성의 덱에는 전익현의 이론이 적용할 만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 내 덱에는···다크 트롤, 심연의 눈, 어둠의 손 정도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좋다는 거군.”
아쉽게도 죄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카드들이다. 카드를 구하려면 카드상점에 가야 한다.
“할아버지는 어딨어?”
“오늘은 해외 송유관 관련 계약을 마무리지으러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셨습니다. 별로 중요한 계약이 아니니 내일 귀국하시겠죠.”
좋다. 여진성이 내일 돌아온다면 기회는 오늘뿐이다.
“오늘. 카드 살래.”
“카탈로그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그 카드들 말고.”
“···어둠 속성 카드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자금은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아가씨가 직접···.”
“그럴 줄 알고 자금도 구해 놨지.”
그녀는 자랑스럽게 카드 홀더를 꺼내들었다.
“바로 이거지.”
“···텅 비어 있는데요?”
“당연하지. 내가 팔 물건은 카드가 아니라 카드 홀더 그 자체니까.”
이지후는 카드 홀더를 바라봤다. 명품 제작자가 수제작한 뒤 금과 다이아몬드로 코팅 처리한 물건이다. 가장 마지막 장에 있는 넘버링은 No.0. 최고의 제작자가 하나만 만들고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는 표기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
“···그보다 이거. 회장님이 선물하셨던 물건 아닙니까?”
“할아버지가 이걸 왜 선물해 줬을까?”
“손녀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기뻐하기 위해 카드 홀더를 쓴다면 할아버지가 기뻐하지 않겠어?”
기적의 논리에 이지후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지난 번에 어둠속성 카드들을 살 때 있는 바가지 없는 바가지 다 쓰면서 카드를 사는 것을 이미 보았던 터다.
시세의 800배 가까운 가격에 후려치기를 당하는 것은 그녀의 인생 처음 보는 일이었다.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단호한 얼굴로 ‘내가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통에 조언조차 하지 못했다.
바가지 쓰기 분야의 고금제일인을 노리는 그녀의 재능을 봤을 때, 아마 저 카드 홀더로도 카드 세네장 정도를 사고 끝일 터. 가만 놔뒀다가는 집안에 있는 선물이란 선물은 다 팔아댈 것이 분명한 상황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이런 꼼수는 오늘까집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돈을 버셔야 합니다.”
“···너무하네.”
입을 비죽이는 저런 것에 넘어가면 안 된다.
“그럼. 언제 나가실 겁니까?”
“난 언제든지 나가도 상관없어.”
이지후는 휴대폰을 꺼내 강수확률 옆에 있는 게이트 발생확률을 확인했다.
[오늘의 게이트 발생확률 : 14%]평소보다는 높은 수치다. 나가면 안 된다고 할까. 잠시간 생각했지만 14%면 절대적으로 봤을 때 일어날 가능성보다는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낮은 수치다.
“뭐. 별 일 없겠지.”
이지후는 애써 머리를 치켜드는 불안감을 죽이려 중얼거렸다.
***
검은 수트는 사나이의 로망이다. 이것은 태초부터 이어온 사실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있다.
나는 만족스럽게 수트를 입은 채 포즈를 잡았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게이트」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랜덤하게 발생하는 게이트지만 오늘. 그러니까 중간방학이 끝난 날에는 게이 트가 100% 발생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일종의 튜토리얼 개념으로 억지로 쑤셔놓은 탓이다.
잡다한 일일 퀘스트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런 것들에 신경쓸 날이 아니다.
나는 지도를 확인했다. 처음 게이트가 열리는 위치는 8km 떨어진 동작대교 쪽이다. 예상 발생 시간은 대략 1시간 뒤. 넉넉하기 그지없다. 듀얼 사이클을 타면 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듀얼 사이클은 도심에서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게이트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듀얼 머신이다. 별 대단한 건 없고 그냥 오토바이 위에 듀얼 디스크가 얹혀진 것 뿐이기는 하지만.
듀얼 사이클은 날렵한 몸체와 미래적인 디자인 덕분에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팬이 꽤나 많았다.
물론 초 인도어파인 TCG 제작진들이 직접 타고 다니며 듀얼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팬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나도 물론 이 듀얼 사이클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TCG만으로 채워져 있는 소울 커맨더스 아카데미에서 있는 나름의 환기용 요소라고나 할까.
뭐니뭐니해도 속도감이 죽여준다. 이걸 조종하며 검은 도시를 질주하는 것도 나름대로 짜릿하단 말이지.
이걸 직접 탈 수 있다는 고양감을 안은 채, 나는 공용 듀얼 사이클 위에 걸터앉았다.
“······.”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오토바이 운전 면허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오토바이란 건 AWSD 버튼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도.
나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터였다.
날 밝으면 일단 오토바이 운전학원부터 등록해야지.
오늘 일어나는 이벤트는 사실 놔둬도 인명 피해는 없는 이벤트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없는, PVE 모드를 처음 하는 초보자를 위한 이벤트.
그렇기에 본래라면 랜덤이었어야 할 몬스터들도 「암석 거한」으로 고정되어 있다. 내 빈약한 설정에 대한 기억에 따르면 암석계통의 봉인 약화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던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런 설정따위는 나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암석 거 한」이 게이트에서 확정적으로 나온다는 점. 그리고 내게 「데스 나이트」와 「의식 단검」이 있다는 점이다.
처음 조우하는 몬스터로 난이도가 낮은 암석 거한을 고른 건 뉴비들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개발진 놈들이 착각한 것 하나.
뉴비를 위한 배려를 가장 잘 해쳐먹을 수 있는 것은 고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뽑아먹을 것이다.
##흑화(3)
여한설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으며 이지후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이동에는 헬기가 편하고 빠르기는 하지만 헬기를 탄다면 여진성에게 걸릴 확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여진성에게 어둠 속성 카드를 샀다는 것을 들켰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터.
이지후가 혼자서 운전할 수 있는 차량으로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카드를 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처음 간 카드숍에서 카드들을 모조리 다 산 탓이다.
“흐흥. 흐흥.”
“그렇게 좋으십니까?”
“필요한 카드들을 한 번에 다 샀어. 게다가 보너스로 다섯 장이나 더 받았고.”
여한설은 말을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어둠 속성 덱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걸 이렇게 넣으면··· 안 돼. 그러면 위니 진이 약해져. 그러면 오히려 위니진을 살짝 포기하고 미드레인지 쪽을 높이는 게 좋을까? 어떻게 생각해?”
“제가 조언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음. 역시 미드레인지 쪽을 강화하는 게 현재에는 더 좋은 것 같네.”
덱에 들어갔다 나갔다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카드들. 계속해서 어둠 속성을 만지는 것은 사실 긍정적인 일은 아니다. 그녀의 덱은 빛 속성이기에. 그리고 튜닝이란 것 자체가 충분한 재력이 있는 상태에서는 필요가 없는 일이기에.
그녀의 집사로서. 그리고 감시인이자 여씨 가문의 고용인으로서 여기서는 따끔하게 혼을 내 놓는 게 맞다.
‘하지만···.’
여한설은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주변에 비쳐지지만, 그녀는 선을 크게 넘는 일은 벌이지 않는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할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종종 쓰는 억지스러운 일들도 언제나 허용 범위 안에서의 일만 벌여 왔다.
평생 선을 넘어서지는 않아 왔던,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벌이는 ‘진짜’ 외도.
‘그러니. 조금은 괜찮겠지.’
성장기에 조금 엇나가는 정도는 심성 발달에도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이지후는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이지후는 속으로 자조했다. 지난 번에 그렇게 혼나고도 이 모양이다. 자신은 글러먹은 고용인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성 덱은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전혀 마음에 안 들어. 혹시라도 나쁜 놈들이 어둠 속성의 덱을 가지고 올 수 있으니까 배워두는 것 뿐이야.”
대답을 하면서도 눈은 새로 얻은 카드들을 쉴 새 없이 읽고 또 읽고 있다.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다. 아마 자신이 여진성에게 일러바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겠지. 이지후는 그렇군요. 라는 말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