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56
“···그딴 인간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있어. 그런 사람도.”
신하연은 말을 마치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반대로 여한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보아하니 혓바닥만 산 사이비. 이를테면 전익현 같은 놈의 거짓말에라도 속은 모양이다.
여한설은 머릿속으로 신하연을 ‘강하지만 머릿속이 꽃밭인 사람’ 카테고리에 집어넣었다.
“아무튼. 내일은 안 질 거다.”
“내일도 여기서 봐!”
신하연은 여한설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의 재밌는 듀얼이었다. 맨날 전익현에게 개박살이 나는 것도 지겨웠는데.
“계속 이기는 거. 엄청 재밌다. 그치?”
신하연은 옆에 있는 고양이에게 물었다.
냐아. 고양이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울어댔다. 볼 일 다 끝났으면 나가라는 태도다.
“그렇지? 너도 보기에 재밌는 듀얼이었지? 내일도 기대된다!”
냐아옹! 냐옹!
‘내 방에서 소란피우지 말고 당장 꺼져.’라는 느낌으로 고양이가 울어댔지만 신하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다음 덱 튜닝을 시작했다.
스핑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자애다. 스핑크스는 신하연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결심하고 TV를 켰다. 오늘은 가장 좋아하는 도전무한의 1000회 특집 방영일이었기 때문이다.
[도전! 무한! 1000회 특집!]“어. 뭐야. 갑자기 켜지네.”
틱.
TV를 끈 신하연이 튜닝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핑크스는 다시 TV를 켰다.
“네가 TV를 켠 거야?”
냐아.
‘그렇다. 미천한 인간아. 나를 방해하지 말거라.’ 라는 뜻이었지만, 이번에도 스핑크스의 생각은 신하연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TV도 켤 줄 아는구나.”
그러고 보니 영리한 고양이들은 주인들의 행동을 보고 정수기에서 얼음을 뺀다거나 문을 여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TV를 켤 줄 아는 것도 전익현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일 터.
TV를 오래 켜는 것은, 특히나 주인이 없을 때에 TV를 켜는 것은 명백한 전력 낭비다.
신하연은 리모컨으로 TV를 꺼 버린 뒤 리모컨의 건전지를 빼버렸다.
고양이가 아무리 영묘하다고 해도 손 없이 건전지를 리모컨에 넣을 수는 없을 터다.
실제로 지금도 앞발로 건전지를 들어올리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신하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튜닝을 다시 시작했다.
냐아. 냐아아! 냐아!
최애 TV쇼의 특집을 놓친 고양이의 슬픈 울음소리가 반지하를 맴돌았다.
***
검림劍林은 커다란 언덕에 무수히 많은 무기들이 꽂혀 있는 장소다. 금속의 「탑주」인 「풀무불꽃」이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무기들이 자리한 장소.
아무리 그래도 무기를 이따위로 대충 꽂아놔도 되나 싶기는 하다. 하다못해 매대에 제대로 진열이라도 좀 해 놓던가.
하지만 뭐, 무기의 질 자체는 나무랄 여지가 없다. 문외한인 내 눈으로 보기에도 삐까번쩍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능력치가 좋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씩 예외는 있다.
보통 카드화化되어 있는 무기들이 착용할 때 사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 있는 무기들은 사용 횟수가 무제한이다.
아마도 카드가 아니라 무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울 스톤」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20층까지밖에 쓸 수 없다는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검림에서의 무기 선택은 앞으로 최소한 10층을 좌우한다. 그러니 좋은 무기를 고르는 것은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나는 검림에서 압도적으로 쓰레기인 조홍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걷기 시작했다.
검림에 쌓여 있는 무기들이 영업이라도 하듯이 광채를 발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들고 갈 만한 물건은 둘 뿐이다. 두 무기의 특성상 중앙에 있을 리는 없다. 나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검림의 끝이 보였다. 끝자락에 있는 것은 별 것 없었다. 드워프 정도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철문. 반토막이 나 날만 있는 검. 그리고 반투명한 영체인 늙은 드워프.
“···여기까지 오는 인간은 오랜만이군.”
금속의 탑주, 풀무불꽃의 영체는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운을 뗐다. 본래 대화 스크립트 같은 거 없는 캐릭터인데. 대화를 굳이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렇다고 나이 지긋한 노인네를 무시한다는 건 내 안의 유교본능이 허락하지 않는다.
“뭐, 올 수도 있는 거죠.”
“그런가? 중앙에 있는 작품들일수록 역작이거든. 보통은 중앙 주변에서 무기를 고르고 돌아가지, 여기까지는 오지 않아.”
“조홍검. 중앙에 있던데요?”
“그 버러지같은 물건이 거기 있던가? 용광로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걸 깜빡한 모양이야. 에잉. 쯧쯧쯧”
역시 그렇군. 난 또 조홍검에 뭔가 히든피스 같은 거라도 있는 줄 알았네.
히든피스가 없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양자택일의 고민만 하면 된다.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날이다.
[조각난 검날 : 공격력 0, 어딘가에서 조각나 떨어진 검의 파편입니다.]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에게 검림에서 가장 좋은 무기는 바로 이 ‘조각난 검날’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각난 검날’을 고르면 20층을 클리어 하는데 무리가 생긴다는 데 있다.
0티어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선택했겠지만,「대칠성」과 「시간강사」에 붙어 있는 약화된 특이성들만 가지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다.
···그래도 아쉽다.
“그걸 주워 쓰려고? 어디 쓰려는 건가?”
“이거. 버리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검림에 있는 물건이면 모조리 내 소중한 작품이지.”
말을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눈에는 의문이 가득하다.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는 이 조각난 검날이 정확하게 어디에 쓰는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설정집에서 다수의 기억을 잃은 귀신이라고 했으니. ‘조각난 검날’이 본래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다.
“이거 고르면 다른 무기 하나 더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겁니까?”
“어림없지! 탑을 오르는 인간당 무기는 하나! 그게 대원칙일세!”
“하지만 자웅일대검 같은 경우에는 검 두 자루가 하나잖아요.”
“그건···!”
“사련각은 네 개고. 쌍두절곤도 두 개. 귀등환은 여덟 개···.”
“자네. 방금 여기 오지 않았나?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자세히 알기는. 모조리 다 써 본 무기들이니까 자세히 아는 거지.
“···아무튼, 자네가 말한 무기들은 모조리! 다! 합쳐져야만 제 몫을 하는 무기들일세.”
“그렇군요.”
풀무불꽃은 왜 자웅일대검이 둘이면서 하나인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그다지 궁금한 내용은 아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 정도 왔다.
“그럼. 방패는 어떤가요?”
“방패?”
“방패는 방패만으로 무기가 되지 않죠. 방패는 검과 한 쌍으로 묶어 팔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일리가 있다는 듯이 풀무불꽃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 금속 쪼가리···.”
“금속 쪼가리라니! 내 필생의 역작···!”
금속 쪼가리의 이름을 읊으려뎐 풀무불꽃이 입을 닫았다. 자신이 만든 칼날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아무튼. 검 방패. 소위 검방은 기본 세트이니 만큼, 이 반쪽짜리 검이랑 방패. 세트로 주시죠.”
풀무불꽃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잠시의 고민 후, 풀무불꽃은 음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만 그런 특전을 줄 수는 없지. 그러니 패널티를 부여할까 하는데.”
“뭡니까.”
“한 번에 두 개의 무기를 선택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야. 그러니 이번 무기 선택이 끝난다면 ‘검림’의 무기를 교체할 수 없는 정도의 패널티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지.”
“뭐. 그 정도야.”
“그리고. 만약 자네가 세 달···아니, 두 달 내에 20층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내 조수가 되어 줘야겠어. 어때. 이 정도면 공정한가?”
뭐. 그 정도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이는 순간, 풀무불꽃이 사냥감을 잡은 사냥꾼 얼굴으로 변했다.
흐흐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드워프의 혼령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석고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 검림에는 방패따위는 없다! 내가 하루에 다섯 번씩 돌아다녔으니 누구보다 잘 알아!”
와. 진짜 더럽게 심심했나보다. 여기 다 돌아다니려면 네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하긴, 나이 들면 산책이 점점 재밌어지긴 해.
“네놈은 꼼짝 없이 내 노예가 되는 거다! 그것도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풀무불꽃의 마지막 목소리가 검림에 메아리쳤다.
아. 귀 아파. 방패 들고 빨리 나가야지.
“이야기 다 끝났나요?”
“머저리같은 놈아. 내가 방금 한 말을 못 들었느냐? 이 검림에는 방패 따위는 없다! 네놈은 20층의 공략은커녕 이곳을 나갈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건 댁 생각이고.”
확실히. 이 검림에는 방패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놓고 나 방패요. 하는 물건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풀무불꽃이 이곳에 방패가 없다고 착각할 만도 하다.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풀무불꽃 너머로 옮겼다. 내가 걸음을 옮긴 곳은 문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출구가 아니다! 머저리같은 놈!”
애초에 출구를 찾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용무가 있는 것은 출구가 아니라. 문 그 자체였으니까.
나는 문을 고정하는 경첩을 뜯어냈다. 경첩은 처음부터 뜯길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져 있던 터라 쉽게 뜯어져 나갔다.
애초에 이 문은 문이 아니다. 문처럼 ‘생긴’ 물건일 뿐이지.
내가 경첩을 하나하나 뜯어낼 때마다 풀무불꽃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이런···이런···미친···!”
이런, 미친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풀무불꽃을 무시한 채 나는 작업에 열중했다. 문에서 경첩들을 다 뜯어내고 나자, 아름다운 형체를 갖춘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후의 보루방패 : 공격력 0, 매 전투, 한번의 피해를 무효화합니다.] [「최후의 보루방패」와 「조각난 검날」을 습득하셨습니다.] [「검림」에서 무기를 교환할 수 없습니다.] [20층 공략에 타임어택이 적용됩니다.] [두 번째 플로어로 귀환합니다.]“무기 잘 먹고 갑니다.”
“안돼! 잠까아안!”
[귀환이 취소됩니다.]“아. 왜요.”
“그···혹시. 조언자 같은 거. 필요 없나?”
필요 없는데요.
끝
풀무불꽃은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그가 대장장이었다는 것과, 이곳이 탑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이곳에 있는 수많은 무기들이 그가 벼려낸 것이라는 것 정도.
그는 어렴풋이 자신이 본래의 「풀무불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세계에 남겨진 진짜의 파편이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검림을 떠돌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이를 찾아 헤메었다.
수없는 기다림이 지나고, 풀무불꽃은 자신보다 더 이곳에 있는 무기들을 잘 아는 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문이라고 착각했던 방패를 당연하다는 듯이 꺼내들었다. 그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려줄 것이다. 아마도.
그러니 절대 놓칠 수 없다.
“아. 좀. 보내 달라니까요? 조언자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자네. 탑에 대해서 알고싶지 않나? 이 탑이 왜 만들어졌는지···.”
“안 궁금해. 그리고 당신도 제대로 모르잖아.”
그는 정말로 궁금하지 않은 눈치였다. 풀무불꽃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 탑에 대한 아주 미세한 정보들과 검림에 대한 소유권, 그리고 대장장이질 뿐이다.
검림에 있는 무기들로 협상을 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저 자식은 이미 얻은 방패만으로도 20층을 돌파할 자신이 있어 보여.’
대체 저 방패가 어떤 무기이기에 저런 자신감이 있는진 모르지만, 검림에 있는 무기들은 그에게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 남는 것은···대장장이질 뿐이다.
“아! 바짓가랑이는 잡지 마요!”
“···자네! 무기를 쉽게 강화하고 싶지 않나?”
“쉽게 강화를 한다고요?”
처음으로 전익현의 눈에 흥미가 생겼다. 풀무불꽃의 매의 눈은 썬팅된 헬멧 안의 표정인데도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11층부터 20층까지! 각 층계를 올라갈 때마다 무기를 제련할 수 있지! 그리고 나는 그 무기를 벼려내는 대장장이라네!”
“그건 알고 있고. 쉽게 강화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