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68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안전한 장소라는 건 아니지만.”
이 평화로운 해남은 가만히 놔 두면 1년 정도면 수없이 많은 게이트가 펼쳐져서 지옥도가 펼쳐지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게 내가 온 이유다.
어줍잖은 정의감으로 ‘내가 사람들을 살리겠어!’ 를 외치겠다는 말은 아니다.
게이트가 많이 열린다는 것은 그만큼 사냥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뜻. 최고의 사냥터라는 말이지.
나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소울을 긁어모을 것이다. 소울을 긁어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져야···.
하는데. 너무 덥다. 양 손에 바리바리 들고 온 짐들이 더위를 부채질한다. 아무리 그래도 음식은 현지에서 조달할 걸 그랬나.
아냐. 여행지의 식재료는 비싸기 그지없다. 포인트를 아끼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쯤이야.
나는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해수욕장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해수욕장 주변부를 벗어나자 사람들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한다. 하긴. 여름에 해수욕장에 오는 것 말고는 여행객이 올 이유가 없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얼마나 걸었을까. 갓길에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 한 대가 나를 반긴다.
“전익현 씨 맞수?”
“맞습니다.”
“반갑수다! 나는 진용인이요. 용인 아재라 부르쇼. 하하하!”
고슴도치 수염을 한 상남자 스타일의 아저씨가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린다. 진용인은 내가 예약해 둔 낚싯배의 선주다.
진용인은 내가 들고 있던 짐들을 한 손으로 훌쩍 들어다 차 안에 집어넣었다. ···저거. 저렇게 가벼운 거였나?
“자. 타쇼.”
내가 빈약한 것이 아니라 진용인이 상상 외의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시킬 방법을 생각하며 차에 타자, 진용인이 운전을 시작했다.
“그래. 아카데미에서 교수를 하고 계시다고?”
“교수는 아니고. 시간강사입니다.”
“나같은 못 배운 사람한테는 시간강사나 교수나 다 높으신 분이지.”
진용인이 껄껄거리며 웃는다. 이 사람. 좋은 사람이다. 시간강사랑 교수를 구별 못 하는 사람중에 나쁜 사람은 없는 법이다.
내가 시간강사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빅 데이터를 통해 도출한 근거 있는 결론이다.
“안 그래도 우리 딸내미도 2학기에 아카데미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데.”
“따님 분은 듀얼을 잘 하나요?”
“그러엄!”
“그럼 좋은 결과가 있겠네요.”
“교수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하하하!”
아쉽지만 아저씨의 딸은 아카데미에 합격하지 못할 것이다. 2학기에 아카데미에 편입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초를 칠 필요도 없기에 나는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몇 마디를 보탰다.
“그보다. 요새 뱃길은 어떻습니까?”
“평소랑 같지 뭐. 해남에서 뱃길이 험해진 거야 어제오늘 일이던가.”
“···그렇군요.”
평화로운 해남의 상황은 해변가. 그러니까 해수욕장에만 국한된다. 배를 타고 나아가야 하는 남서부 해안은 배가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해류가 급하다.
“해신海神놈을 누가 잡아 줘야 할 텐데. 선뜻 나서는 듀얼리스트가 없단 말이지.”
···내가 해신 잡으러 왔다고 하면, 공짜로 배 타게 해 주려나?
“해신을 잡아 준다면야, 내 딸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하하하!”
나는 털복숭이 용인 아재의 얼굴을 바라봤다. 직업적 편견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낚싯배를 모는 게 아니라 산적을 하면 딱 좋을 외모다.
굳이 산적을 안 한다면 장팔사모 들고 장판파에 서 있어도 썩 어울릴 것 같고.
“···따님은 아저씨랑 닮았나요?”
“물론이지! 나랑 판박이여 아주! 동네 사람들마다 나랑 슬아랑 구별이 안 간다고 그래!”
좋아. 해신을 잡으러 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두자.
“따님이 미인이신가 보네요.”
“그럼! 혹시라도 탐나면 해신에게 도전해 보게! 크하하!”
영원히 숨길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숨길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숨기자.
나는 굳은 결의를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죄송합니다.”
이지후가 고개를 숙였다.
“아. 괜찮아. 괜찮아. 오해받는 건 익숙하거든. 땅에 메다 꽂히는 건 반년만이라서 놀라긴 했지만.”
이지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편견에 젖어서 애먼 사람을 바닥에 내다꽂다니.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다.
“정말 괜찮아. 여기, 명함이야.”
이지후는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아들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혀를 내밀고 있는 사진 옆에, ‘김태양’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떡하니 걸려 있었다.
“···김태양?”
“그래. 태양처럼 밝게 살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지. 멋지지?”
이지후는 대답 대신 여한설의 옷 매무새를 조금 더 단단히 고쳐맸다. 편견에 젖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지후는 품 안에 숨겨둔 전기충격기를 확인하며 매의 눈으로 김태양을 바라봤다.
“···괜찮아. 상처 안 받았어. 진짜로.”
둘이 열심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여한설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김태양의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의 진열장에는 그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외골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거 다 당신이 만든 건가?”
“그렇지. 알다시피 외골격은 군용이나 교수급의 듀얼리스트만 쓸 수 있도록 허가가 나지만,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도 쓰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거든. 자경단이라거나, 코스튬 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억만장자라거나.”
“···고르디우스라거나.”
“뭐. 고르디우스에게 납품해 본 적은 없어. 정체를 숨기고 신청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한설은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코스튬들을 바라봤다. 대부분은 영화에 나온 슈퍼히어로 복장을 따라 한 것들이었다. 죄다 영화 촬영에 실제로 쓰였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최소한 실력이 있다는 영상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돈을 얼마나 받는데. 그만한 값은 해야지.”
“여기 있는 물건들은 안 팔린 물건들인가?”
“아니. 죄다 실제로 판 물건들이야. 실제 외골격은 내부에 충격 완화를 위한 재료가 필요하지만 레플리카는 외면만 만들면 되거든. 그래서 실제품을 하나 만들고, 기념으로 레플리카를 하나 만들지.”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장을 훑어 나가던 여한설의 눈이 하나의 진열장에 고정됐다.
익숙한 강화외골격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본 적 없는 물건. 하지만 결코 잊지 못할 형태를 한 강화외골격.
“···이 물건의 주인. 혹시 알아?”
“미안하지만 구매자에 대한 정보는 절대 비밀이야.”
여한설은 카드를 꺼내들어 김태양의 손에 올렸다.
“「비명자」···? 아. 암만 그래도 가르쳐 줄 수는 없어.”
툭.
“「영혼비명의 족쇄」···. 카드로 나를 사려고 드는 건가? 아무리 비싼 카드를 건내도···.”
툭. 투두두둑!
“···.저 강화 외골격이 특수 카본과 그래핀을 결합한 최고품질의 물건이며, 아카데미에 납품한 것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어!”
“···아카데미?”
“아카데미의 높은 사람이 와서 제작 요청을 했다는 사실은 고문당한다고 해도 한 마디도 뱉지 않을 거야!”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여한설은 유리창을 만지작거렸다. 이클립스가 아카데미의 교수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이 수업을 들은 과목의 교수였을지도 모른다. 오가면서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고.
교수 중에 어둠 속성을 쓸 수 있는 교수라면 두 사람밖에 없다. 한 명은 유태진. 나이가 70이 넘은 늙은 교수다. 나머지 한 명은 모티아나. 미국에서 초빙된 여자 교수다.
두 명 다, 자신이 아는 이클립스와는 딴판인 체형이다.
···교수가 아닌 사람들로 범위를 넓힌다면 어둠 속성이 한 명 더 있기는 하다. 전익현. 「대칠성」의 보유자인 그라면 어둠 속성의 덱 또한 사용할 수 있다.
“이 물건. 시간강사가 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남자가 휴대폰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대략 3천년 정도 걸리네. 이자 없이 원금만 해서.”
여한설은 전익현이 살고 있던 방을 떠올렸다. 여한설이 쓰는 침실의 1/10정도밖에 되지 않는 지하실에 사는 인간이 저런 고가의 물건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조 없이 자신의 속성을 바꿔대는 인간이 그렇게 헌신적인 이클립스와 동일인일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기는 하지만.
‘···이클립스도. 아마 나처럼 「흑화」특이성이 있는 거겠지.’
가능성은 충분한 일이다. 누구인지 찾아내려 한다면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러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여한설도 알았다.
은인의 비밀을 파헤칠 정도로 여한설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더 인연이 있다면 친해질 수도 있을 것이고.
덱과 운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탑을 같이 오를 수 있게 될지도.
“···이거랑 한 쌍처럼 보이는 수트도 만들 수 있나?”
“나는 비록 불법적인 물건을 팔지만, 한 명의 예술가라는 자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어. 한 번 만든 물건의 모방품은 절대로 만들지 않아.”
툭.
여한설은 가져 온 덱 케이스를 통째로 김태양에게 건냈다. 김태양은 덱 케이스를 열고 들어 있는 카드들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러나 예술가의 영혼은 갈대인 법! 때때로 더 발전된 형태의 물건을 만들고 싶은 영감이 찾아올 때가 있지! 오늘이 바로 그 날인 모양이야!”
말을 마친 김태양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보아하니 제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끝
숙소에 도착한 나는 짐을 풀었다. 방세는 2주치를 미리 지불해 놨다. 가장 싼 곳을 고르기는 했지만 싸다는 것이 곧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게 바로 현명한 소비인 것이다. 숙박 어플 후기에 [악기바리를 조심하세요]라는 후기가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평판도 꽤 괜찮은 편이기도 했다.
방에 짐을 풀자 점심 시간이 되었다. 나는 짐에서 챙겨온 컵라면을 들고 숙소 식당으로 갔다.
“컵라면은 왜 들고 온 건가?”
“점심밥으로 먹으려고요.”
“우리 숙소에 온 손님인데! 밥은 당연히 줘야지!”
식사 제공이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음식 안 챙겨오는 건데.
“밥 준비 다 됐냐?”
“다 됐어요!”
식당 저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인 아재의 목소리랑 완전히 똑같다. 그건 그렇고, 카레 냄새 한 번 죽이네.
“요리 나갑니다!”
식당에서 커다란 국통을 통째로 들고 나온 것은··· 용인 아재였다.
···아니. 내 옆에 서 있는 게 용인 아저씨였으니 눈 앞에 있는 게 용인 아재라는 건 말이 안 되겠지.
근데 너무 똑같이 생겼다. 전혀 구별이 안 된다. 인간 복제, 무슨무슨 국제법으로 금지된 거 아니었나?
눈에 힘을 극도로 준 채 용인 아재와 용인 아재의 분신을 구별하려 애써 봤지만 허사였다. 철수세미 수염 하나하나까지 똑같다. 도플갱어인가? 듀얼로 처치하면 소울 주는 거 아니야?
“형씨가 새로 온 숙박객이구만! 자! 자! 많이 드시게!”
고봉밥 위로 카레가 계속해서 올려진다. 한 국자, 두 국자, 세 국자···. 사람 머리통만한 국자가 여섯 번 움직이고 나서야 나는 ‘그만’을 외쳐야만 이 국자질이 멈춘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제 됐어요.”
“아이고. 형씨. 그 비실한 몸으로 이렇게 적게 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지! 안 그래?”
푸드파이팅이라도 하는 게 아니면 먹지 않을 정도의 밥의 산을 선물해 준 용인아재Mk.2는 내 등을 후려갈겼다.
퍽! 퍽! 퍽!
한번 후려칠때마다 듀얼로 5데미지쯤은 맞은 것 같은 격통이 등에서 터져오른다. 세 대 맞았으니 15데미지다. 세 방 더 맞으면 골로 간다는 이야기다.
진짜 몬스터인가? 지금 당장 듀얼을 외쳐야 되나? 체력이 15밖에 안 남았는데 이길 수 있을까?
내가 두 명의 산적중 누가 도플갱어고 누가 진짜인지, 혹은 둘 다 도플갱어인 건 아닌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졸린 눈을 한 여자애가 잠옷 차림으로 밖으로 걸어나왔다.
하아아암.
식탁에 몸을 얹은 그녀는 스트레칭을 하듯 팔을 쭈욱 식탁 위로 뻗은 다음 그대로 다시 엎어져 버렸다.
나른하기 그지없는 몸짓,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행동거지, 떡져 있는 머리. 결정적으로 예쁘다.
에너지가 과도하게 넘치는 용인 아재랑은 하나도 안 닮았다. 그러니 숙박객이겠지. 그게 아니면 아르바이트거나.
나는 숙박객에게서 관심을 끈 채 카레라이스의 형태를 빙자한 산더미를 조금씩 등정하기 시작했다. 엄청 맛있긴 하네.
“낚시배 출항은 언제부터 할 수 있나요?”
“보통은 아침에 나가지.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내일부터는 매일 나갈 걸세.”
“그렇군요. 혹시 낚시배에 듀얼 보트(Duel boat)도 완비돼 있나요?”
“물론이지. 듀얼 보트도 없이 뱃일하는 집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나?”
그래. 그렇겠지. 이 세상은 차량에도 듀얼 디스크를 설치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리는 세상이니까.
“자네. 아카데미에서 왔다더니. 몬스터 사냥을 하러 갈 건가 보군?”
“뭐. 그렇죠. 낚시도 좀 하고.”
“아카데미에서 온 분이었나? 하아따. 높으신 양반이었구만! 자, 여기 고기 더 먹으시게!”
뭐지. 분명히 등정을 좀 한 것 같은데 왜 카레의 산이 더 커져 있는거지.
이게 그 악기바리인가 뭔가 하는 거였구나.
“그보다. 듀얼 보트를 쓰려면 자격증을 확인해야 하는데.”
“···자격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