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80
무슨 말인가 하면 탑주들을 공략하기 위해서 필요한 덱을 짜는 데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미스틸테인···그러니까 zl존_신살검이 생겨서 다음 층 공략은 반 정도는 한 셈이지만, 이런 운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리도 없고.
“결정적으로···침식도가 올라간단 말이지.”
나는 침식도 수치를 확인했다. 침식도 게이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올라간다. 탑주 공략보다 침식도 게이지가 쌓이는 속도가 빠르면 얄짤없이 침식도를 줄이는 무지성 사냥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침식도를 줄이는 사냥이란 게, 대부분이 평범한 RPG게임의 반복사냥 퀘스트와 같다는 데 있다.
목숨이 걸린 주제에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승리가 확정되어 있는 듀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이 없다.
[전익현! 심심해 보여!]“심심하다기보다는 생각만으로 지루한 거야.”
[뭐가 지루해?]“무지성 듀얼.”
[무지성 듀얼. 뭐야?]“생선처럼 뇌 빼고 듀얼하는 거.”
촤악! 물보라가 내 등 위로 쏟아진다.
[생선 똑똑해! 엄청 똑똑해!]너는 조사라거나, 접미사같은 거라도 좀 배우고 와서 똑똑함을 어필해라.
아무튼, 3층을 공략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2학기 초는 돼야 할 테니, 그 동안은 진슬아의 덱을 가르쳐 주면서 여기의 침식도 작업 장소인 「물파리 동산」에서 무지성 사냥이나 해야겠다.
아. 벌써부터 싫다. 누가 물파리 동산 가서 대신 사냥 안 해 주나.
나는 진슬아에게 충고해주기 위해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본래라면 바깥에서 드로우 연습을 하고 있을 진슬아가 보이지 않는다.
“···진슬아 어딨지?”
“진슬아를 찾습니까?”
선글라스를 낀 태닝 양아치남이 껄렁거리며 서 있다.
김태양이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아우라가 심하다. 딱 봐도 남한테 피해만 끼칠 것 같은 인상.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대하는 것은 듀얼리스트로서 잘못된 일이기에, 나는 최대한 격식을 갖춰 물었다.
“진슬아를 어떻게 한 겁니까?”
“크크큭. 지금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격식이고 뭐고 지금 112에 신고해야 될 것 같은데.
“···신고는 하지 말아주세요.”
“어떻게 제 생각을 읽은 거죠?”
“읽은 게 아니라. 이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서 아는 겁니다.”
선글라스 너머로 김태양의 슬픈 눈이 보인다. 일단 신고는 잠시간 보류해 둘까.
“진슬아는 물파리 동산에 사냥하러 갔습니다. 실력을 쌓기 위해서요.”
“물파리 동산에요?”
“네. 아카데미에서 온 학생 한 명이랑 같이 갔습니다.”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물파리 동산에서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 덱이 말린다고 해도 진슬아가 있으니 크게 문제가 생길 일도 없고.
···이거. 자동사냥이잖아?
“···대충 하루에 물파리 백여 마리 정도는 잡을 겁니다.”
“누가 추천해줘서 거길 간 거죠?”
“제가 추천해줬는데요.”
“당신. 좋은 사람이네요.”
나 대신 자동사냥을 돌려 주다니. 게다가 물파리 백 마리면 일당 줄일 수 있는 침식도의 상한선에 거의 가까운 수치다.
내가 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
게다가 물파리를 사냥하는 것은 덱의 활용능력에 크게 도움이 될 테니, 진슬아의 덱 운용을 봐 줄 필요는 없다. 적어도 아카데미 편입시험에 탈락할 일은 없을 거다.
관계성 수치가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덱 튜닝을 해 준 시점에 이미 관계성 수치는 충분할 것이다. 설령 부족하다고 해도 아카데미에서 관계성을 올릴 수 있는 이벤트란 게 넘쳐나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마지막으로 사냥터. 물파리 동산은 크게 위험한 사냥터도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질 일은 없을 터다.
김태양과의 이야기를 마친 나는 방에 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 여름방학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뭘 할 거냐고?
방구석에서 폐인처럼 굴러다니면서 모바일 소울 커맨더스를 주구장창 돌릴 거다.
개꿀.
***
진슬아는 그녀의 외골격을 찬 채 물파리 동산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멀리에 보이는 짙게 썬팅을 한··· 듀얼외골격을 차고 있는 한 사람.
‘저 애가 김태양이 말했던 아카데미 학생인가 보네.’
방금 만들어져 삐까번쩍한 외골격에는 듀얼로 인한 상처 하나 없다. 외골격이 차와 같은 것이라면야 신품이 멋있는 것이지만, 외골격에 상처하나 없다는 것은 몬스터를 상대로 하는 듀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만큼 약하다는 뜻이다.
하긴. 김태양이 그랬었다. 아카데미에서 바닥을 치는 실력의 소유자라고.
돈은 많아 보이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강한 건 아니니까.
“···여기엔 왜 왔지?”
변조된 음성이 슈트에서 흘러나온다. 음성변조장치까지 달려 있다. 폼 잡는 외골격 유저들의 전유물.
···진슬아 자신의 외골격에도 달려 있는 기능이긴 했지만, 자신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달아 놓은 것이니 엄연히 다르다. 진슬아는 음성변조장치를 마주 켠 다음 대답했다.
“사냥하러. 너는 여기 왜 왔지?”
“외골격을 길을 들여야 한다기에.”
여한설은 눈 앞에 있는 외골격을 차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대충은 감을 잡았다. 김태양이 말했던 ‘지원자’일 터다.
‘···실력을 봐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런 외골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언급한 학생이라면 실력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이라면 남의 듀얼이 어떻건 덱이 어떻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테지만, 전익현과의 수업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그녀는 남의 덱이 어떤지, 그리고 플레이스타일이 어떤지 아는 것이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게 되었···
‘동의는 개뿔.’
여한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전익현의 사상에 저도 모르게 동의할 뻔 했다. 자신만의 듀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근본도 없는 칠색조같은 인간의 듀얼관에 동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한설이 반년간 당한 가스라이팅에 맞서 자신을 필사적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을 때, 진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아카데미 학생이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건 알 필요 없고. 전익현이라는 강사의 수업. 들어본 적 있어?”
“···들어본 적은 있어. 그런데 왜 묻지?”
“그 사람이 내 덱을 봐 줬는데. 실력이 어떤가 싶어서.”
“전익현이 덱을 봐 줬다고?”
“싫다고 했는데도 강제로···. 완전히 강제는 아니지만. 아무튼 덱 튜닝을 해 줬어.”
호오오. 여한설의 입에서 정체모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랬단 말이지. 자신의 덱은 거의 일주일간 죽자사자 듀얼로그를 뽑아간 다음에야 봐 줬는데. 그것도 심지어는 「어둠」속성이 아니라 「빛」속성이었는데.
어디 길 지나다니는 이상한 애 덱은 그냥 봐 줬다는 말이지.
팟. 여한설의 머리에서 작게 퓨즈가 끊어졌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물어 봤어. 전익현이라는 강사. 강해?”
“쓰레기.”
“뭐?”
“쓰레기야. 밑바닥중의 밑바닥.”
“실력이 밑바닥이라는 거지?”
“그래.”
여한설은 품 안에 있는 덱을 꼬옥 쥐며 대답했다.
끝
진슬아는 자신을 노려보는 여한설의 시선을 감지해냈다. 평소라면 굳이 경쟁 따위를 할 시간에 밀린 잠이나 자자는 쪽이었지만, 그 상대가 아카데미의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왜 나에게 갑자기 적의를 불태우는 거지?’
찬찬히 상황을 되돌아본 진슬아는 결론을 찾아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가장 간단한 대답이 바로 정답인 법.
“안심해. 전익현 씨와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
“···‘그런 관계’란 게. 무슨 관계지?”
“그냥. 질투하나 싶어서.”
“질투한 적 없어!”
피치가 높아지고, 썬팅된 헬멧 너머로도 이글거리는 눈알이 다 보이는데, 뭘 질투한 적이 없다는 건지.
진슬아는 픽 웃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하긴. 아카데미에 간다고 해서 모든 인간들이 카드에 미쳐 있는 것은 아닐 터다.
개중 몇 명 정도는 청춘사업에 더 열을 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날 쳐다보는 게 뭔 시선인진 모르겠는데. 불쾌하니 치워.”
진슬아는 그녀가 더 화내기 전에 얼른 헬멧을 돌렸다. 전익현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세상에 70억명의 사람이 있으면 취향도 70억가지 아니겠는가.
“그보다. 물파리들이 그리 많지 않네.”
“···아무래도 놔 두면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몬스터니까.”
물파리는 비선공, 저공격형 몬스터들이다. 주는 데미지가 작고 체력 수치가 대인 듀얼에서의 체력 수치인 30과 같기 때문에 소위 「스파링」상대로 많이 쓰인다.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조금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새 덱이나, 새 외골격을 시험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지.’
시험하는 동시에 옆에 있는 경쟁자의 실력을 확인하면 더욱 좋고.
···조금이라도 더 앞서면 더욱 좋다.
진슬아와 여한설은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듀얼!’을 외쳤다.
자신의 필드를 빠르게 만들어 나가고, 남는 시간에 옆의 필드를 관전한다.
‘쿼드러플 소울이라.’
네 가지 속성을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듀얼리스트라니. 전례가 없다. 여한설은 진슬아의 플레이를 읽어나갔다.
“···꽃잎 토큰 덱?”
“이 덱을 알아?”
“몰라. 잊어먹었어.”
그 빌어먹을 인간. 왜 덱을 짜 줘도 저딴 덱을. 여한설은 빠르게 눈 앞의 물파리를 정리했다. 1대 0. 자신의 리드다.
“느리군.”
“핸드가 말려서 그래!”
“그러시겠지.”
여한설은 픽 웃으며 다음 물파리를 정리했다. 여한설이 두 마리째를 사냥하고, 다음 세 마리째의 공략을 시작한 순간에야 진슬아는 첫 번째 사냥을 끝냈다.
30장을 거의 다 사용하고서야 첫 사냥이 끝난 탓에, 여한설은 진슬아의 덱 리스트를 거의 다 외울 수 있었다. 전익현의 말에 따르자면 상대의 덱 플레이를 보고 덱 리스트를 외우는 것은 승률에 미세하지만 도움이···.
“내 머릿속에서 나가!”
여한설은 소리를 빽 질렀다. 아무튼간에, 저 여자애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쿼드러플 소울」이다.
여한설이 가지고 있는 「무덤」에 비하면 황금이나 다름없는 능력.
거기에, 전익현이 만들어준 덱 리스트는···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완벽한 덱 리스트였다.
‘그러면 뭐해.’
“나는··· 「진균 번식」을 사용.”
지금은 한 턴 더 기다리며 템포를 쉬었어야 하는 타이밍이다.
“네 마리째.”
“나는··· 「수다쟁이 꽃」을 소환.”
템포가 밀렸을 때에 수다쟁이 꽃은 콤보 사용의 가장 후순열이 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가르치고 뭐 한 거야!’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그에 준하는 덱을 받은 주제에 실력이 이 모양이라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개 발에 편자다.
여한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타인의 플레이를 보면서 화가 나는 것은 거의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전익현이 갓 입학한 자신의 플레이를 보면서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자신을 꼼꼼하게 가르쳐 줬던 전익현과 다르게, 그는 남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없다.
여한설은 진슬아의 플레이에서 신경을 쓴 채 물파리들을 잡아나갔다.
김태양이 말했던 50마리의 할당량을 모두 채운 여한설은 진슬아의 플레이가 잘 보이는 곳에 가 앉았다.
“구경이라도 하게?”
“그래.”
진슬아는 멘탈을 다잡았다. 뭐, 패배가 놀랍지는 않았다. 열대어에게 듀얼을 지고 나면 어떤 종류의 패배에도 꽤나 내성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침묵. 그것도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냥 그러고 계속 볼 거야?”
“그래.”
진슬아는 이런 종류의 침묵을 못 견뎌했다. 늘 졸린 눈을 하고는 있지만 언제나 시끌벅적한 집에서 자라온 탓이다.
“···그 외골격 디자인. 눈에 익네.”
“그래?”
“그 오빠. 웬만해서는 한 번 만들었던 외골격을 다시 안 만드는데. 심지어 자신의 걸작이라고 엄청 자랑했었거든. 디자인도 엄청 멋지고.”
디자인이 멋지다는 말에 여한설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들은 외골격에 대한 칭찬이다. 그녀가 외골격에 대한 칭찬을 거의 못 들은 것은 유일한 자랑 대상인 이지후가 ‘너무 칙칙해서 바퀴벌레 같아 보입니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