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 Station RAW novel - Chapter 17
07. 손가락 걸고 약속
평소답지 않게 일찍 일어난 아현이가 언제 입었는지 새로 산 옷을 입고서 아빠 품에 안겨 있었다. 권석이 입혀 준 모양이었다.
“너 가서 아빠 말 잘 듣는다고 약속할 수 있어? 떼쓰면 바로 하산이야.”
하산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할 아현이지만, 기분이 좋은 아이는 아빠의 말에 활짝 웃으며 무조건 고개부터 끄덕였다.
얼마 전, 유치원에서 ‘1박 2일 아빠와의 캠핑’ 안내문을 받아 온 후 아현인 캠핑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잠도 설치며, 잠을 자다가도 아빠가 어디 아프진 않은가 침실로 들어와 감겨 있는 아빠 눈을 까뒤집어 보던 아현이었다. 혹시라도 아빠가 아프기라도 하면 캠핑을 같이 가지 못할 테니. 그렇게 삼 일 밤낮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아이 계획에 결국 제동이 걸렸다.
캠핑을 가기 삼 일 전날, 권석에게 급한 출장 일정이 잡힌 것이다.
그의 출장길에는 천 억짜리 계약 서류가 들려 있을 것이다. 자칫 어그러지면 여러 사람이 난감할. 얼마나 중요한 출장인지 알기에 차언도 아이를 달래는 쪽을 택했다.
당연했다. 급한 업무로 출장이 잡힌 남자를 붙들고 아이와 캠핑을 떠나라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빠의 중차대한 일정을 납득할 리 없었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 캠핑인데. 거기다 유달리 아빠를 따르고 좋아하는 아이는 아빠랑 같이 간다는 사실에 꿈속을 떠다니듯 들떠 있었다. 그런 아현이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아현아. 아빠가 급한 일이 생겨서 이번에는 아현이랑 같이 못 갈 거 같아.”
끝내 엄마가 전한 아빠의 불참 소식에 아이가 드러누웠다. 말 그대로 몸져누운 것이다.
처음에는 아빠를 살살 달래보기도 했다.
“아빠아. 아현이랑 가면 안 돼?”
자그마한 몸으로 아빠 팔에 매달리고, 손가락을 꽉 붙잡고, 집에서도 업무 서류에 골몰하는 아빠 눈을 이리저리 맞추며 ‘응응?’ 귀엽게 답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구슬려도 권석이 어디 그 말 하나에 눈이나 깜짝할 사람인가. 결국 아빠 입에서 건주 삼촌을 보내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을 때, 정말 아빠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이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건주우 삼촌이랑 말고.”
“다음번에. 이번엔 건주 삼촌이랑 같이 가.”
칭얼대며 졸라 대서 아빠에게 쓴소리도 들었다.
“건주 삼촌은 다음에, 다음에 갈래. 응?”
“너 건주 삼촌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싫대.”
아무리 삼촌이 좋아도 아빠가 더 좋은 아이의 마음을, 권석이라고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지만 그도 난감하긴 했다.
아이가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조막만 한 엉덩이를 든 채 서럽게 엉엉 울었다. 아빠 품에 안겨서 캠핑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아빠는 그날 저를 두고 일본으로 가 버린다고 하니, 밥도 안 먹고 시위도 했다.
‘아현이랑 같이 가면 이제 말 잘 들을 거야’, ‘양치도 혼자서 잘할게’, ‘콩도 꼬옥 먹을 거야’.
그간 아빠 앞에서 참 많이도 약속했다. 자기가 걸 수 있는 건 전부 걸어도 아빠가 뭐 하나 넘어가 주지 않으니 속이 새까맣게 탄 아이가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밤에는 열까지 나 쌕쌕대는 아이를 안고 병원에까지 갔었다.
먼저 두 손을 든 건 권석이었다. 그의 업무를 대행하게 된 시백이 권석의 지시를 듣느라 두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긴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었다.
결국 오늘 아빠 품에 안겨 같이 유치원엘 가는 참이었다.
이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 건가. 차권석이 천억 짜리 출장길도 손을 놓고 보고서 한 장 없는, 논리와는 거리가 먼 아이의 떼 같은 설득에 넘어가다니.
“차아현, 아빠 봐.”
권석의 목에 푹 파묻혀서 비비적거리던 아이가 똑바로 얼굴을 마주한다.
“너 아빠랑 한 약속 다 지켜야 해. 아빠 다 들었어.”
“으응.”
아빠 뺨에 뽀뽀하는 어린 딸이 어리광을 부린다. 내내 받아 줘 버릇했다고 하면서도 권석은 어린 딸의 애교에 아이를 더 꼭 당겨 안는다. 그럼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자 아이가 칭얼거리며 아빠 목에 매달린다. 그럼 또 그가 못이기는 척 아이 등을 쓰다듬어 준다.
“아현이 할 쑤 있어.”
사람 대가리 같은 건 그냥 잘라 버리는 저 무자비한 아빠 밑에서 태어난 심성 고운 딸이 차언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고사리 같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아빠의 커다랗고 굵은 소지를 끌어와 꼬옥 건다. 아빠 손가락에 제 손을 반도 걸지 못하는 아이가 꼭꼭 약속하듯 붙들고 있었다.
“아현이가아.”
“그래 아현이가.”
“약속한 거.”
그러면서 아이가 꾸깃꾸깃 쥐고 있던 종이를 아빠한테 건넨다.
늘 집에 오면 종이를 들여다보는 아빠 눈 맞춤 용인지 종이엔 삐뚤빼뚤 아빠한테 약속한 것들이 써 있었다. 이렇게 아빠를 좋아하는데, 그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차언은 주책맞게도 그 종이를 보는데 순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거 안 해도 아빠는 아현이 믿어. 손가락 걸었잖아.”
손가락 하나는 손쉽게 잘라 버리고 신체 포기 각서는 눈 한 번 깜빡이면 받아 내는 남자가, 담보라는 게 있어야 약속이란 걸 하는 남자가 아이와 손가락 한 번 거는 걸로 약속이라 하다니. 차언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아이의 엉덩이를 팔 하나로 받쳐 안은 탓에 부녀가 마주 보고 있는데, 아빠 눈을 빤히 보면서도 아이는 지지 않았다.
결국 권석이 딸아이 뺨에 입을 깊게 맞추고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어떡할래. 건주 삼촌 섭섭해하는데.”
캠핑 때문에 삼 일 밤낮을 눈물 바람이던 아이가 해사하게 웃는다. 차언은 카디건과 지갑을 쥐어 들고서 두 사람을 따라 현관을 나섰다.
아빠랑 뛰어놀다가 무릎이 까졌지만, 그거 말고는 무사히 돌아왔다.
1박 2일 동안 되레 마음을 졸였던 건 차언이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도쿄에서 한창 미팅 중일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경기도까지 갔다 돌아왔는데, 차언은 이상하게 그 모습이 흐뭇하기도 했다. 괜히 아현이 때문에 중요한 일을 손 놓아야 했던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차언은 신나게 놀고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든 아이 곁에서 한참 동안 머무르다 느지막이 아이 방을 나왔다.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도 권석은 쉬지 못하고 곧장 출근했다.
요 며칠 아이 때문에 덩달아 저 역시 잠을 설쳐 따뜻한 차라도 한잔할 생각이었다.
복숭아 조각을 주워 먹으면서도 유치원에서 찍어 준 캠핑 사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가 폴짝 의자에서 내려가 아빠에게로 달려간다. 권석은 능숙하게 아이를 안아 들고 아이가 내미는 복숭아를 입안에 넣었다.
“복숭아 짭짤하라고 간해 준 거야?”
헤헤. 웃는 아현이가 권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권석의 시선이 아이의 무릎으로 갔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원피스 말고 바지를 입고 가자고 그랬는데, 아빠랑 캠핑 가려고 새로 산 옷을 꼭 입고 싶어 했다. 아이 무릎엔 차언이 새로 소독해 붙여 놓은 건지 새로운 밴드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곁에 두었는데 일은 눈 깜짝할 사이 벌어졌다. 구워 먹을 고구마를 들고 달려오다 넘어진 것이었다. 천천히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기어이.
코와 뺨에 숯검정을 묻히고서 마구 뛰던 아이는 다시 씩씩하게 일어났었다. 양손엔 제 손보다 더 큰 고구마를 하나씩 움켜쥐고.
넘어지면서도 양손을 놓지 않아 고구마가 덩달아 까졌지만 아이는 숯 안에서 익어가는 고구마를 가만히 기다렸다 잘도 먹었다. 뜨거울까 봐 한참을 식히는데도 잠자코 기다리던 아이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권석이 내미는 노란 속살을 파먹었다.
이제 이 무릎 어떡할 거냐고 물으니 따끈한 고구마를 먹어 김이 나는 입으로 제 무릎을 호호 불던 아이가 냅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빠 품이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당장 아픈 것 정돈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보였다.
상처가 깊지 않은 듯해 소독하고 밴드를 붙여 두었는데……. 그의 잇새에서 희미한 한숨이 샜다.
“집에 사고뭉치가…….”
“응?”
“둘인가.”
그의 시선이 세탁물을 들고 나오는 차언을 향했다.
차언은 애틋하게 붙어 있는 부녀를 발견하고서 조용히 웃었다.
“씻고 와요. 아직 식전이죠?”
차언은 아현이를 내려놓는 그에게 다가가 아이를 토스 받았다. 그가 씻고 나오면 오늘 둘째 계획에 대해 넌지시 말을 해 볼까 생각 중이었다.
이만하면 저도 자리를 잡았고,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사실 둘째를 가진다고 해서 그가 환영을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으로도 충분히 세 식구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라.
아현이를 키우며 온갖 고생을 한 자신을 알기에 그도 딱히 말을 얹지는 않는 듯해 보였다.
식구의 구성 인원을 늘리는 것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물어볼 참이었다. 차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마치고 나올 남편을 기다렸다.
아현이가 까르르 웃으며 남은 복숭아를 조물딱거린다. 제가 한입 베어 물고 침이 묻어난 복숭아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 또 아빠 입에다 갖다 넣겠지. 차언은 남몰래 웃었다.
천억짜리 계약서가 어찌 되었는지 걱정이기는 했지만, 어련히 권석이 알아서 했으리라. 저리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니 역시 잘한 일이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