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 Station RAW novel - Chapter 2
02.
차언은 바닥 구석에서 징징대는 휴대전화를 찾아 허리를 일으켰다.
잠을 설쳤다. 시계를 보니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라곤 미용실 언니들 내지는 미용실을 자주 드나드는 동네 여자들, 둘 중 하나였다.
애란의 전화라는 걸 알아채는 것은 금방이었다. 약속했던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해일처럼 한순간에 휩쓸고 지나가 버린 새벽의 일 때문이었다.
그냥 오늘은 못 간다고 말할까, 점심 식사는 내일 같이 하자고. 고민은 짧았다. 윗집에 사는 애란이 당장 내려와 대문을 두드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으나 막연히 애란이 이 방에 와선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제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차언은 대충 옷을 갈아입고 휴대전화를 챙겼다. 침대 위로 던져두었던 붉은색 치마가 보였다. 그가 한 말대로 촌스럽긴 했다. 인정한다.
이 스커트를 선물한 영림의 말론 요새 유행한다는 H라인 스커트라고 했다. 영림이 말하는 유행의 선도 기준이 화류계 여자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선물이라며 주는데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영림은 자신에게 미안하고도 고마운 존재니까. 그래서 딱히 취향이 아닌 스커트지만 거부감이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차언은 스커트를 반듯하게 정리해 옷걸이에 걸어 두고서 집을 나왔다.
술도 안 마셨는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해 그런가. 골목을 나와 약국에 들러 편두통 약을 한 알 먹고서야 휴대전화를 꺼내 들 정신이 생겼다.
“어, 언니. 방금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어디야?”
– 너랑 같이 나가려고 했는데. 나 벌써 미용실 앞이야. 얼른 와.
“뭔데 이렇게 신났어. 무슨 좋은 일 있어?”
– 와 보면 알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카드 값 때문에 미칠 거 같다고 술을 궤짝으로 퍼마시던 애란이었다.
그 며칠 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애란은 한껏 들떠 있었다.
“다 와 가, 언니. 가게 보인다.”
알록달록한 미용실 간판 앞에 애란이 서 있었다. 살짝 어깨를 드러낸 오프숄더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을 한 애란이 차언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쥐고 있던 아이스 커피가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팔을 뻗는다.
“언니, 무슨 일 있어?”
“원래 오늘 너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었는데 일이 생겨서 못 왔어. 오늘은 나랑 둘이 데이트하자.”
“누구길래 그래. 남자라도 생겼어?”
“이따. 지금 얘기하면 김새잖아.”
자세히는 몰라도 애란의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뭐야, 진짜 생겼나 보네. 누군데 그래.”
“너 돈가스 좋아하지. 언니가 오늘 스테이크 사 줄게. 너 왜 웃어?”
“또 목욕탕 건넛집?”
“야, 너 김포 아주머니 실력 몰라?”
스테이크라고 해 봤자 동네 돈가스 집이었다. 김밥과 쫄면을 곁들여 파는 조금 이상한 경양식 가게. 분식집이라고 해야 좀 더 정확했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노선이었지만 애란은 시종일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차언아. 나 잘하면 이 생활 청산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정말? 일 그만두는 거야?”
“당장은 아니고. 어쩌면.”
늘 손님과 새벽을 보내느라 퀭한 얼굴로 아침밥을 먹던 애란이 오늘은 설레 보이는 표정으로 돈가스 조각을 집었다.
이 재밌을 거 하나 없는 일상에 그녀에게 변화를 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선뜻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 동네에서 그녀와 함께 일한 세월이 얼만데, 저렇게 활짝 웃는 애란은 처음 보는지라.
“야. 너 내 밑으로 동생만 셋인 거 알지. 너도 알겠지만 우리 오빠가 동생들 돌볼 성깔이나 되냐? 그렇다고 신문지로 똥 닦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어떻게든 밑 빠진 독 메우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이제 이 생활 끝내면 동생들 생각 안 하려고. 걔들 인생은 이제 걔들 인생인 거고, 나는 난 거고.”
이 동네 여자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중 특히 애란은 잠옷까지 요란한 옷을 입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좋아했다. 늘 무채색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그녀에겐 옷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을지도 몰랐다.
“너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영림이 밑에서 이러고 있을래. 야, 수지는 그래도 대학도 졸업하고 취직이라도 번듯하게 해 봤다.”
“그래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
“너 그거 핑계 아냐? 수지 일 이후로 지금까지 이러고 있잖아. 네가 말하는 상황이란 게 네 마음의 문제 아니냐고.”
애란에게 말할 걸 그랬다. 이 집 스테이크는 이제 정말 물려서 싫다고, 그러니까 우리 다른 거 먹으러 가자고. 그 말 한마디를 못 해 늘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기만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게 싫어서. 그렇지 않아도 사연 하나씩은 있는 언니들에게 저까지 보태 상처 주진 말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하는데 모든 사람이 제 마음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차언은 말없이 잘려 나간 고깃덩어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맛없는 소스에 절여진 고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미안. 말이 심했다. 나처럼 학력이고 졸업장이고 넋 놓고 살다가 후회만 하지 말라는 거야. 넌 공부하고 싶어 했잖아.”
“언니가 뭐 어때서.”
“미친년.”
괜히 좋으면서 한 번 픽 웃고 만 애란이 고기를 썰다 말고 눈썹을 찡그렸다.
“참, 너 조심해.”
“뭐가?”
“김석진 말이야. 걔 그러고 날뛰는 거 다 너 잡아다 팔려고 그러는 거야. 손님들 앞에 내보여서 너 몸 팔게 하려고. 걔는, 걔는 매출 올릴 생각밖에… 걔 수법이야, 그거. 모르겠어?”
느닷없이 석진의 이름을 꺼낸 애란이 소리 없이 분개했다.
‘김석진’. 그 이름에 차언은 온몸의 피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잡았다.
김석진의 마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이제는 상관없게 되어 버렸다. 그의 생사는 모른다. 죽었을 거라 짐작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스쳐 지나가듯 자신을 지나쳤던 석진의 모습은 분명…….
“그 악질, 그거. 마이킹으로 애들 발목 묶어서 가둬 둔 게 어제오늘 수법인 줄 알아? 개새끼. 너도 잘 알잖아.”
차언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고기를 씹고, 무얼 마시는지도 모르고 물컵을 들이켰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강렬하게 콧구멍을 들쑤셨던 그 냄새, 잦아들던 숨소리, 죽음의 순간을 보았지만 발설해선 안 되었다.
“웬만하면 그 입 닫는 게 좋을 거야. 학자금대출에 쪼들릴 텐데 이 집이라도 지켜야지.”
자신을 삼킬 듯 벌겋게 타오르던 불빛이 턱 아래 있었다.
한데 학자금이라니. 자신이 학자금에 발 묶인 처지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자신 또래 학생들에겐 으레 학자금 빚이 있을 테니? 방 안에 전공 서적들이 있었으니 자신이 대학생이란 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완벽히 확신하는 어조였다.
“근데 김석진은 어디 갔는지 어제부터 보이지도 않더라. 마담이 아주, 연락 안 된다고 아침부터 애들 잡는데, 진짜 이 짓도 못 해 먹겠어. 야, 너 왜 그래. 괜찮아?”
“어?”
쨍그랑, 차언은 떨어트린 나이프를 주워 올렸다. 와인 소스가 묻어 지저분해진 나이프가 보인다. 소스에 흠뻑 적신 스테이크, 핏물에 절여져 있던 칼날. 그날 자신의 방을 가득 채웠던 그 남자의 향수 냄새가 떠올랐다.
“언니, 우리 나갈까? 커피 마시자. 내가 살게.”
“그럼. 당연히 네가 사야지, 얻어먹고 째려 그랬어?”
깔깔 웃는 애란의 뒷모습을 보며 차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오늘은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잇따랐지만 환하게 웃는 애란에게 내색할 순 없었다.
“너 오늘 시간 괜찮지? 오늘 퇴근하고 우리… 어머, 얘 얼굴 창백한 것 좀 봐. 체했어?”
걱정하는 애란을 향해 손사래를 치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갔다. 뭐든 이 답답한 속을 풀어 줄 시원한 것이 필요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자마자 빨대도 뽑아 버리고 벌컥벌컥 마셨다.
“또 비가 오네.”
지긋지긋하다는 애란의 말이 눅진눅진한 습기처럼 번졌다.
끝이 날 것처럼 잦아들던 장마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진절머리 나게 쏟아지는 비만큼이나 손님이 신물 나게 몰렸다.
영림을 보조하며 밀려든 손님과 한바탕 씨름을 한 차언은 뒤늦게야 가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차언아, 아까 애란이가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라던데?”
“왜?”
“난들 알겠니.”
미용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희아가 바닥을 쓸다 말고 허리춤을 짚었다.
“너 요즘 괜찮은 거 맞아?”
“뭐가?”
“하루 종일 좀 멍해 보여. 너.”
“괜찮아. 더워 지쳐 그래.”
“술이나 한잔할래?”
“물장사하는 동네에 살면서 술이 그렇게 넘어가?”
“직장인의 애환이다, 왜.”
저 역시 직장인이라면 직장인으로 매일을 아등대고 있는 처지니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너 머리 자를래?”
희아가 허리까지 구불거리며 오는 차언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갑자기 왜?”
“아니다. 머리 올리는 게 더 잘 어울리겠다, 너는. 긴 머리가 어울려. 이리 와 봐, 예쁘게 만져 줄게.”
“집에 갈 건데 뭐.”
“너 무슨 재미로 사냐, 대체.”
“갑자기 또 무슨?”
“대학 잘 다니던 년이 학교도 휴학해 버리고, 여기서 뭐 하냐고. 이 팔팔한 청춘에 남자 없냐고.”
“원래 휴학 많이들 해. 그냥 넘어진 김에 좀 쉬려고.”
“네 꼴을 봐 봐. 이게 쉬는 건지.”
퇴근을 하려다 말고 저벅저벅 다가온 희아가 손놀림 몇 번으로 단정한 올림머리를 뚝딱 만들어 줬다. 영림 다음으로 많은 단골손님을 보유한 기술자라 그런지 손재주가 좋았다. 차언은 자연스레 내려온 잔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러면 뭘 하나. 어차피 집으로 갈 거. 예쁜 머리도 옷도 지금은 자신에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무감하게 웃자 희아가 혀를 찼다.
“집에 가서 뭐 할 건데. 네 젖밖에 더 주물러? 밖으로 나가서 남자도 좀 만나고 그래. 이 몸매에 이 얼굴이면 뭐 하냐. 너 그거 안 쓸 거면 나 줘. 나나 해야지.”
희아가 농담처럼 차언의 가슴을 가리키며 깔깔댔다. 대충 티셔츠를 입었는데도 유독 봉긋하게 돌출된 가슴께는 어린 시절부터 콤플렉스기도 했고, 놀림거리기도 했다.
“내가 네 얼굴에 네 몸이었으면 잡지 모델을 했다. 속옷 모델이라든가 수영복 모델이라든가, 뭐 많잖아.”
자신도 이것저것 안 해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 대학에 진학했을 땐 의욕적이었다.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가리지 않고 다 해 봤다. 어떻게든 여태 살아온 것과는 달리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었으니까.
꼴에 처음 남자친구도 사귀어 보았지만 역시 남자란 제 인생에 인연이 없는 것인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걸 관두고 다시 이 동네로 돌아온 건 건 언니 수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자신의 무기력증도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새로운 인간관계에도 관심이 없어졌고, 어떠한 일에도 의욕이 없었다.
애란은 저더러 마음의 병 내지는 정신적인 병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성호 할머니의 말처럼 팔자대로 사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얼 바꾸려고 발버둥 치지도, 달아나려 하지도 말고 그냥 주어진 팔자대로.
한평생 취직하고 싶었던 호텔에 입사해 새 유니폼을 입고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결국 죽을 팔자였던 언니처럼.
“차언아. 내가 남자 소개시켜 줄까? 참, 너 남자친구 없었어? 학교에서 만들고 했을 거 아냐. 이 봐, 이 봐, 분명 있었네. 야, 어땠어. 어린 애들은 좀 맛이 달라?”
“아, 언니. 저질이야.”
“어리진 않아도 얼굴 반반한 애들은 많아. 말만 해. 내가 또 인맥은 좋잖아.”
“됐어.”
“튕기기는. 하긴 어렸을 때 많이 튕겨라. 나중엔 일한다고 바빠 봐, 얼굴도 팍팍 삭지, 몸도 하루가 다르게 늙어요. 그럼 하고 싶어도 못 해.”
잠시 후, 미용실 문이 닫혔다.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든 미용실 여자들이 각자 골목을 향해 흩어졌다.
곧장 집에 가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애란은 평소보다 조금 늦다. 꺼지지 않는 가로등, 내린 비로 선선해진 바람, 곳곳에 불이 꺼진 가게.
모든 게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묘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애란을 기다리는데 미용실 맞은편에 서 있는 외제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 동네에 저런 차를 탈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골목 끝에서 애란이 걸어왔다.
알은체를 하기도 전에 애란이 세단을 향해 종종걸음을 했다.
“오셨어요?”
애란이 창문을 통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데 분위기가 손님 같진 않아 보였다.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눈칫밥을 먹고 자라온 감이 그렇게 말했다.
“어, 차언아! 여기!”
휘휘, 손을 흔드는 차언에게로 다가갔다. 걸음을 뗄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된다는 무의식의 경고였을지도 모르겠다. 애란의 곁으로 다가가 덩달아 인사를 하려는데 익숙한 향이 풍겼다.
“안녕하세…….”
그 남자였다. 그 남자의 눈, 그 남자의 향수 냄새.
“네, 안녕.”
죽어 가던 석진 옆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던 남자.
분명, 새벽에 보았던 그 남자였다. 어제와 같이 옷깃 하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셔츠 차림의 남자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내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 있다고 했지. 이분이야. 내가 요즘 만나는 사람.”
믿기 힘든 말이 연이어 그녀의 뒤통수를 때리며 쏟아져 나왔다.
설마 새벽에 자신이 목격한 것을 발설할까 봐 이렇게 찾아온 걸까. 아니, 정말 애란이 만나는 남자일 뿐인데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화류계 여자들이 스폰서 하나씩 끼고 있는 거야 놀랄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애란이 스폰서를 제게 소개해 줄 리 만무했다. 숨겼으면 모를까.
이 동네 여자들도 스폰서를 드러내 놓고 얘기하진 않는다. 쉬쉬하지만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공공의 비밀이라고 해야 맞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연인이라는 결론이 좀 더 타당했다.
“타. 집에 같이 가자.”
“…어, 아냐. 나는 그냥 걸어갈게. 그게 편해.”
“어차피 같은 건물에 사는데 그냥 같이 가.”
하긴. 저 남자가 애란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멈칫하는 사이 애란이 제 손을 붙잡아 끌었다.
뒷좌석으로 올라타는 동안에도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아니 새벽 일 같은 건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되레 나른하기까지 하다.
골목 끄트머리로 서서히 진입하며 무심히 정면만 주시할 뿐, 남자는 자신을 의식하거나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바보 같게도 저를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란 것만으로도 안심이 들었다.
서행하는 차 안엔 무겁고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어쩌면 이 상황이 불편한 자신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저 남자와 애란이 진심으로 호감을 갖고 만나는 사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무서웠다.
사채를 쓰고 숨어든 사람들을 잡기 위해 조폭들이 드나드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그날 새벽에 들은 남자들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건대 단순히 사채업을 한다거나 룸살롱을 운영하는 동네 조폭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었을 거다. 이 동네를 드나드는 조폭들이야 20년 간 봐 왔으니까. 스쳐 지나간 뜨내기 건달들을 제 눈으로 본 것만 해도 숱했다.
조폭도 아닌 사람이 피를 묻힌다면 대체 정체가 뭘까. 설마 애란에게까지 석진을 대하듯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제 걱정이 부디 노파심이길 빌었다.
“감사합니다. 언니, 그럼…….”
이대로 그냥 애란을 보내도 되는 걸까. 저 남자와 둘이.
괜히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만나는 두 사람 사이에 껴 눈치 없는 사람이 되긴 싫었다. 그렇지만 피비린내 나던 어제의 일을 정말 없었던 일로 치부하며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애란이니까. 수지와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가족과 다름없는 애란이니까.
“저, 언니.”
“그냥 가려고? 가긴 어딜 가. 오늘 너한테 정식으로 소개해 주려고 기다린 건데. 빨리 와.”
차언의 집 대문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애란이 들뜬 소리로 고개를 내밀었다.
“빨리 와!”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란과 둘이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같이 있기는 무서웠다.
아무 말 없이 태연하게 차체에 기대 담배 연기를 뱉어 내고 있는 저 남자의 눈이, 자신은 무서웠다.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뜬 남자의 눈이 무언가를 쫓듯 이쪽으로 향했다. 차언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애란을 쫓아갔다.
* * *
“술, 은 좀 그런가? 커피? 커피 어떠세요?”
작은 테이블에 삐걱거리는 철제 의자, 늘 앉던 의자인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저 남자 때문이었다.
애란이 자연스레 커피를 만들러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이라고 해 봤자 거실에서도 훤히 보이는 단칸방 구조인지라 애란과 계속해서 눈이 마주쳤다.
꽃무늬 커피 잔에 얼룩덜룩 물때가 앉은 받침, 남자 앞에 잔을 놓으면서도 신경이 쓰이는지 애란이 겸연쩍어한다. 다른 잔 하나는 제게로 돌아왔다. 커피를 건네는 애란이 남자 몰래 싱긋 눈짓했다.
“너한테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고 싶었어.”
“아…….”
커피엔 손 하나 대지 않은 남자가 삐딱하게 앉아 자신을 바라본다. 불규칙하지만 조용히 뛰고 있던 심장이 갓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어제의 일은 그저 숱하게 일어나던 일상 중 하나인 사람처럼 무심한 눈이다. 아니, 되레 냉랭해 보이는 눈동자가 당황하는 자신을 꿰뚫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차언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다는 자신의 새빨간 거짓말에 남자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명백한 조소였다.
“왜 그렇게 긴장해, 차언아.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애란 역시 힐끔거리며 남자를 살핀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연인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애란에겐 아직 이 남자가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연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이 어색한 기류는 이상하기만 했다.
연인이라면 동등한 관계일 텐데, 애란과 남자는 꼭 상하관계, 내지는 고용주와 피고용주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여기 남자 하나 잘 물어서 팔자 펴 보려는 애들이 한둘인 줄 알아?”
석진의 조롱이 떠올라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애란의 선택이자 그녀가 결정할 일이다. 자신이 관여할 일도 오지랖을 부릴 일도 아니었다. 상대가 이 남자라서 그게 문제지만.
“너 어제 그 스커트 입지. 예쁘던데. 넌 빨간 게 잘 받아.”
애란이 속닥거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아 가만히 테이블 위에 놓인 남자의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금색 담배 케이스가 남자의 손안에서 의미 없이 굴려진다.
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남자의 손끝에 차언은 순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웃는 건지 아닌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그의 손에서 딸려 나온 건 작고 각진 종이 한 장이었다.
남자는 빳빳하게 날이 선 종이를 내밀었다. 중지와 검지 사이에 건성으로 끼워진 건, 명함이었다.
“아…….”
남자에게 자신을 소개했지. 그에 대한 답인 듯싶었다.
남자가 내민 것을 멍청히 바라만 보던 차언은 조심스레 명함을 받았다. 내밀 명함이랄 게 딱히 없는 그녀는 갈 곳을 잃은 손으로 남자의 명함만 꾹 쥐고 있었다.
받은 명함을 한 번 보지도 않고 가방 속으로 집어넣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거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은 들여다보기가 조금 겁이 났다. 알아선 안 될 것만 같은 기묘한 위압감에 손이 떨렸다.
남자에게 모가지가 쥐어 잡히듯 고개를 내려 명함을 보았다.
[문성 전무이사 차권석]회사 주소와 직책, 이름만 있을 뿐, 흔한 전화번호 하나 적혀 있지 않은 명함이었다. 뒤집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문성. 차언은 가슴이 덜컥했다. 모를 리 없는 기업명이었다. 문성 산하의 호텔은 수지가 일한 곳이기도 했다. 수지는 많고 많은 직원들 중 일개 호텔리어일 뿐이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쥐고 있다, 다시 적힌 것을 들여다보았다.
명함을 본 순간, 어제 본 모든 것을 납득했다.
역시나 동네 술집이나 운영하며 룸살롱이나 지키는 일개 조폭과는 달랐다. 자신이 본 남자의 소속과 직함은 그랬다.
얼마 전, 강남 노른자 땅 한복판에 완공된 호텔 건설사가 문성건설이라는 거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열 개의 호텔을 시공해 운영하고 있으며 건설 사업 외에도 갖가지 분야에 손을 뻗친,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형성된 폭력조직 기업.
일찍부터 재개발을 시작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아랫동네도 많은 빌딩의 시공사가 문성건설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보다 애란이 이 남자를 어떻게 알게 된 걸까. 그 남자가 석진과는 또 어떻게 아는 사이이며 그가 왜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던 건지 모든 게 미스터리하기만 했다. 여기서 입 밖으론 꺼낼 수 없는 궁금증이기도 했다.
날카로운 명함 끄트머리에 손이 베일 것 같았다. 마주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인 제 기분 때문일지도 몰랐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저는 애란 언니랑은 소꿉친구…….”
“반갑지 않을 텐데?”
“예?”
느닷없이 흘러나온 말에 순간 입안에 담긴 커피를 꿀꺽 삼켰다. 커피가 잘못 넘어가 기침이 나왔다. 눈물까지 찔끔 나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차언은 얼른 물을 건네는 애란을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쳤다. 숨을 다독이는데 벌게진 얼굴에다 대고 남자가 나긋하게 지껄였다.
“아니면 됐고. 마셔. 체하겠네.”
계속 마시라, 그가 손짓을 한다. 그마저도 성의 없이 건성이었다.
진짜 미친놈인가?
여전히 자신을 보며 비웃는 듯한 저 남자의 시야에서 얼른 달아나고 싶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일로 잠을 통 자지 못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언은 가슴이 답답해 조용히 커피만 마셨다. 남자도 말이 없었다. 조잘거리며 떠드는 건 팔 할이 애란이었다. 나머지 이 할은 자신의 대답 정도. 차언은 점점 줄어 가는 커피를 보며 애꿎은 명함만 긁었다.
“저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언니, 내가 먼저 가도… 될까?”
헛웃음 같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남자의 잇새로 흐른다.
실은 마지막 물음은 애란이 아닌 제 스스로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여전히 불안함은 존재했다. 어제 본 남자의 모습이 애란에게까지 미치는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은 깊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제가 관여하는 건 괜한 오지랖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떨치지 못했다.
이 동네 여자들의 스폰서는 대다수가 동네 조폭들이었다. 잘나가 봐야 구의원, 시의원, 거물급 조폭 정도. 이 남자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일 테지.
아무리 조폭이라도 설마하니 제가 사랑하는 여자까지 해할까. 어쩌면 제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애란이 이 남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거다. 알면서도 만난다는 건 이 남자의 그런 모습까지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자신이 훌쩍 떠나 버려도 괜찮을까 하는 복잡 미묘한 심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애란이 얼른 가 보라 등을 떠밀었다.
“너도 얼른 가서 쉬어야지. 왜, 할 말 있어?”
“…아니. 그럼 잘 자, 언니.”
차언은 마지막까지 찝찝한 마음으로 대문을 열었다.
“언니, 무슨 일 있거나 내가 필요하면 전화, 아니 소리 질러. 알았지?”
닫히는 문틈으로 큭큭 소리 없이 웃는 남자가 보인다. 문밖에서 지키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짧은 고민을 했다.
하긴, 이 동네에서 깡패 한두 번 만나고 본 것도 아닌데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모르지 않은가. 당장에 애란이 일하는 가게에도 깡패는 있다.
“…….”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남녀가 남아 이 시간에 할 일을 모르지 않았다. 어서 가서 쉬라던 애란이 떠오르자 뒤늦게야 얼굴에 열이 화르륵 올랐다. 계단을 내려가 집 문고리를 붙잡았다.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틀렸다는 경고음이 울린다. 천천히 다시 번호를 눌렀지만 재차 경고음이 울렸다.
“아.”
어제, 남자들이 집을 떠나고 나서 번호를 바꿔 놓았다. 뭐라고 바꿨더라.
머리가 아팠다. 분명 어렵지 않은 번호로 바꿔 놓았는데, 긴장이 풀리며 머릿속이 덩달아 엉망이 됐다. 한참을 키패드에 손가락을 대고서 머리를 싸잡고 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0918.”
놀라 휙 몸을 틀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가 벽에 기대서 있었다.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시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따갑다. 따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도 모호할 만큼.
그나저나 0918. 아직 입력하지도 않은 번호를 저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것은 어제 자신이 바꿔 놓은 번호였다. 그리고 수지의 생일이기도 했다.
“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저 감시한 거예요?”
푸핫. 순간 고개를 숙인 남자가 대놓고 웃었다.
“왜 웃으시는 거예요? 지금 진지해요. 어제 일,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해요. 하지만 이건…….”
어젯밤 일을 입 다물 순 있어도,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당장이라도 따지고 들 것처럼 연거푸 마른침을 삼키는데, 남자는 오히려 침착하게 굴어 더 불안했다. 너 따위 것 뭐 그럴 가치 있다고 감시 하냐는 듯한 눈으로 그가 지껄인다.
“아쉽지만 그건 아니고, 네 메모 쪼가리에 열댓 번이나 나오길래요.”
메모?
남자가 말하는 메모 쪼가리가 제 가계부라는 것을 눈치챘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가계부. 그 위에 있던 손수건. 걸레짝처럼 바닥에서 뭉개져 있던 손수건이 떠오른 건 찰나였다. 가계부 안에 적힌 많은 메모들 중 언니의 생일을 그가 본 듯했다.
“…어제 일 말 안 할 테니까 애란 언니 지켜 주세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덜덜 떠는 주제에 제법 당돌하게 말했다.
“건드려?”
“…애란 언니, 좋은 사람이에요.”
“안 건드리고 스폰인지 나발인지를 어떻게 하는데.”
남자가 말하는 바가 건전하지 못한 뜻임을 한 번에 눈치챘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달린 웃음이 깊어진다.
이번엔 조롱인지 진심으로 묻는 건지 판가름이 어려웠다. 순간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자 남자가 보란 듯이 턱 끝을 까딱거리며 재차 묻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애란 언니한테 안 좋은 짓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친구야?”
끝맺음을 맺지 못해 반토막이 되어 버린 말꼬리를 그가 지적했다.
”아니, 다치게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예요. 김석진을 그렇게 만든 건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애란 언니는, 아니잖아요. 부탁드려요.”
다 이으래서 이었더니 정작 남자는 말이 없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그래 고개를 돌렸지만 남자의 시선이 제게 꽂혀 있다는 걸 확신했다.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에 몸이 베일 듯 아팠다.
차언은 떨리는 손으로 0918, 남자 덕분에 떠오른 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이 왜 우리에겐 폭탄처럼 쏟아지는지, 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좋은 일이 한꺼번에 쏟아지겠지. 넌 그럴 거야.”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물걸레를 쥐고 미용실 바닥을 닦던 자신은 수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때 물어볼걸. 언니는? 왜 나만이야? 왜 공평하지 않게 나만?
그 답을 들었다고 해서 지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날이 아직도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언니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냥, 수지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에 붙어서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또 번호를 바꿔야 한다.
자신의 생일도 수지의 생일도 이젠 쓸 수 없다. 뭐라고 바꿔야 하나. 엄마, 아빠의 생일도 모르고 끽해 봐야 휴대전화 번호, 주민등록번호, 미용실 전화번호, 따위의 숫자들.
자신의 세계는 작고 좁았다. 어쩌면 그 협소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 것마저도 언니인 수지가 전부였을지도 몰랐다. 평생을 차지했던 전부가 떠나가 버리고 홀로 남은 생은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그거 핑계 아냐? 수지 일 이후로 지금까지 너 이러고 있잖아. 네가 말한 상황이란 게 네 마음의 문제 아니냐고”
애란의 말이 맞다. 핑계였다. 어둠 속에서 헤쳐 나올 자신이 없어 스스로에게 뒤집어씌운 핑계.
차언은 남자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떠난 빈자리엔 희미한 향수 향기가 남아 있었다. 차언은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고 문을 닫았다.
“…….”
이틀 전, 저 남자는 어떻게 집에 들어오게 된 걸까. 석진이 이 집에 숨어들어서?
그럼 석진은 어떻게 번호를 알고 있었을까. 아니 언제부터? 이따금 잠이 들면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잠결이라 생각했었다. 무의식중에 맡았던 술 냄새도 그럼… 어쩌면…….
차언은 떨리는 손으로 팔을 더듬어 안았다.
* * *
“그거 진짜야?”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문성 이사가 애란이 년을 왜 만나. 대가리에 총 맞았어?”
“문성 이사는 여자 안 좋아해? 애란이 출장 불렀다가 눈 맞았을 수도 있지. 이 근방 재개발도 그 건설사에서 다 했다며.”
“그러니까 문성 이사가 미쳤다고 이 동네 술집 년을 부르냐고. 주위에 널린 게 늘씬하고 돈 많은 부잣집 여자들일 텐데.”
“언니 순진한 거야, 순진한 척하는 거야. 남자들이 본처 두고 바람피울 때 여자 집안 가리는 거 봤어? 떡정으로 첩 삼는 거지.”
“바람은 무슨. 문성 이사 결혼 안 한 걸로 아는데.”
애란이 문성건설 이사를 만난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그 소문은 터무니없는 뜬소문으로 확정 지어졌다가 점심이 지나서는 두 사람이 살림을 차렸다는 여론으로 뒤바뀌었다.
소문을 의식이라도 한 듯 오늘따라 애란이 보이지 않아 미용실 여자들의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래 봤자 스폰이지, 뭐. 지가 별수 있어?”
“그래도 애란이 대단하지 않아? 팔자 고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소원 성취했잖아.”
“야 그 말을 믿어? 그냥 돈이 많은 남자면 몰라. 이건 비유하자면 수천억 가진 재벌이 이 동네 단칸방에서 세 들어 사는 거랑 비슷한 확률인 거야. 한마디로 나애란이 말도 안 되는 나발 불었다는 거지.”
“직접 본 사람이 있다잖아.”
“잘못 본 거겠지. 그 말을 믿어?”
선풍기 한 대가 덜덜거리며 돌아간다. 차언은 돌아가다 말고 멈춘 선풍기를 툭툭 쳤다.
이놈의 선풍기 좀 바꾸라니까, 이 여름에 선풍기 두 대로 미용실을 돌리는 게 말이나 되나. 안 그래도 불안하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선풍기 헤드가 바닥으로 툭 꺼진다.
불만을 말해 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영림을 알기에 차언은 짜증 섞인 손으로 선풍기 헤드를 들어 올렸다.
“차언아, 넌 뭐 아는 거 없어? 너희 둘이 맨날 붙어 다니잖아.
“나도 잘 몰라. 근데 그냥 에어컨 틀면 안 돼? 선풍기라도 바꾸든가.”
“내일 틀어. 오늘까진 선풍기 틀고. 김밥 냄새 날려야 한단 말이야.”
“에어컨도 교대 근무야? 가을 다 와서 틀게 생겼어.”
“말 돌리지 말고. 너 정말 몰라? 애란이가 무슨 말 없었어? 진짜 스폰이래? 뭐야. 어? 정말 문성 이사란 사람이 맞긴 한 거야?”
영림이 김밥 하나를 더 씹으며 쏘아붙인다. 더 있다간 질문 폭탄에 압사할지도 몰랐다. 조만간 미용실뿐만이 아니라 이 동네 전체가 그 남자를 알게 되겠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왜 날 붙잡고 그래.”
“하여튼 계집애가 대답 한번 곱게 하는 법이 없어. 아, 문이나 더 활짝 열어.”
차언은 반쯤 열린 창문을 활짝 열고서 밖으로 나왔다. 쨍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따갑다. 차가운 물에 걸레를 빨았던 손에서 미적지근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장마가 가시고 찾아온 무더위에 온몸이 물 먹은 미역인 양 축축 늘어졌다.
턱 끝에 매달린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돌아서다 말고 멈칫했다. 건너 커피숍 처마 밑에 애란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흐릿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게 보였다.
차언은 제대로 고쳐 신지도 못한 구두를 끌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언니 왜 여기 있어?”
“담배.”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가락 사이엔 담배 한 개비가 벌겋게 타고 있다.
“너도 피울래?”
묻기에 달라고 손을 내밀자 애란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너 담배 피웠어?”
“끊었어.”
끊었다면서 담배를 건네받는 자신을 보고도 더 묻지 않은 애란이 한 모금 깊이 빨며 정면을 바라본다. 더는 말이 없었다.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차언은 덩달아 담뱃불을 붙였다. 이 맛없는 거, 대체 왜 피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배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자고로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고 주위에 흡연자들 천지인 이 동네에서 담배에 손을 대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시작은 미용실 식구인 희아였던 거 같다. 수지를 보내 주고 돌아온 날 밤이기도 했다. 매캐한 연기를 마시며 콜록대는 기침에 울음을 삼켰다.
“언니 있잖아.”
“맞아.”
“어?”
내내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던 애란이 먼저 운을 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니, 그 남자에 대해 말은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짐작했던 소리는 아니었다.
“스폰 맞아. 나도 애인이라고 하고 싶지만.”
자조에 가까운 어조엔 씁쓸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쪽에 가까운 거지. 애인을 전제로 만나는 스폰이라고 할까? 진전되면 애인인 거고, 아니면 스폰인 거고.”
묻지 않았는데도 먼저 털어놓으며 어색하게 웃는 애란은 그녀답지 않게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차언아. 나 잘하면 이 생활 청산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당장은 아니고 어쩌면.”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애란과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렇게 환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애란에게 그 남자는 놓치고 싶지 않은 마지막 기회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질러가든 돌아가든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 된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오늘의 애란은 어쩐 일인지 씁쓸해 보였다.
“그 남자가 잘 대해 줘?”
“…음, 그런 거 같기도 해. 근데 너 왜 이것저것 안 물어봐? 궁금한 거 있을 거 아냐.”
“글쎄. 언니 사생활인데 나한테 말할 이유는 없지.”
이 동네 여자들치고 비밀 없고,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다.
늘 자신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던 애란이 입을 다물었다는 건 말하고 싶지 않은 속사정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 정말 이 생활 청산하고 싶어. 지긋지긋해, 차언아.”
실제로 애란은 다방에서 오래 일하다 마사지 숍으로 온 여자였는데, 몇 번이나 일하던 가게를 뛰쳐나갔었다. 그러다가도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다시 이곳을 찾았다.
물장사하던 년이 물장사해야지, 이제 와 뭘 하겠냐며 자조했다. 지옥 같은 생활에서 쉽사리 손 털지 못하는 그녀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한평생 수감 생활을 했던 죄수가 창살 밖을 나와도 마음껏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억압된 삶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언니가 원하는 대로 해. 그래야 후회가 없는 거라며. 내가 얼마 살진 않았지만 살아 보니 그렇더라. 후회가 없으려면 차라리 일을 저지르고 후회하는 게 낫더라고. 안 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세상 다 살았어? 어린 애가. 나는 너한테 미안해서…….”
“나? 나한테 왜?”
애란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매미 우는 소리에 귀가 얼얼하다.
“넌 왜 그렇게 착하냐. 바보같이.”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넌 나처럼 이 길로 들어서지 마. 너 아끼는 사람 만나서 사랑하면서 그러고 살아.”
요즘 내내 알지 못할 말만 하는 애란은 담배 한 대를 더 피우고 나서야 자신을 마주 보고 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는다.
“너 오늘 수요일이니까 일찍 끝나지? 내가 진짜 제대로 된 스테이크 사 줄게. 쇼핑도 하고.”
“됐어. 김포 아주머니 스테이크 이제 물려.”
“진짜로. 진짜. 김포 아주머니 아니고.”
“먹은 걸로 칠게.”
“나 오늘은 일 쉴 거거든? 이따 보자. 가게 앞으로 갈게.”
“됐다니…….”
애란이 밝아진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