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 Station RAW novel - Chapter 5
05.
차언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권석이 그녀의 집 대문을 열고 나왔다.
“이사… 님.”
흐트러진 셔츠 차림인 그를 힐끗거리며 애란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권석은 느리게 담배를 물다 말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애란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차언이 보러 오신 거예요?”
“뭘 알려 들어. 그거까지 너한테 일일이 말하리?”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시키는 거나 잘해. 아니다. 됐으니까 더는 뭐 할 생각하지 마, 너는.”
그는 차를 향해 걸으며 담배 연기를 흩뿌리고서 귀찮다는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시백아, 줘 봐라. 대충 줘, 봉투, 없어도 되잖아.”
마지막 말은 애란을 향한 질문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그녀의 표정이 굳는다. 뭘 잔뜩 기대했던 것이 여실히 표정에서 드러난다. 내가 널 모를까 봐서.
시백이 본인의 가슴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뭉텅이로 뺀 지폐를 그에게로 건넸다. 권석은 대충 애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 떨어진다. 줄 때 받아. 또 나중에 질질 짜지 말고.”
애란이 조금 어두워진 낯을 하고서 두 손으로 받아든다. 권석은 지폐를 내다 버리듯 처리하곤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살다 살다, 차권석이 정신 못 차리고 카섹스를 하다 차까지 버려 놔 다른 차로 갈아타기까지 했다. 미친 짓이 따로 없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권석은 멀어지는 애란을 보며 혀를 찼다.
그 시키는 일 하나를 제대로 못 해 결국 저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왜 화가 불쑥 튀어 올랐는지.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야말로 거세시켜야 할 감정인데. 정차언, 정차언. 똑똑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 말간 얼굴만 보고 있으면 자꾸 저답지 않은 짓을 한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차언이 이도원인지 뭔지 하는 짜리몽땅한 남자를 만났다는 보고를 들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퍽 애틋한 눈을 하고 있던 사진에 달갑잖은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예정에도 없던 목적지로 향했다.
제 기분을 살피던 시백이 어디로 모실까 묻는다. 따로 스케줄도 없는 이 새벽에 사무실로 들어갈 일도 없건만 저 멍청한 질문에도 답을 해야 하나 싶었다. 귀찮았다.
“이 시간에 사무실 가서 뭐 하게. 거기서 자리?”
“아닙니다. 모시겠습니다.”
권석은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애란을 구해 달라며 우는 얼굴이 떠오른다. 순진한 듯 보이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언니 좋아한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애란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속은 거 보면 순진해 빠진 거 같기도 하고.
곁에서 정차언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나애란이었다. 단순히 마킹만 하는 거야 누구를 시켜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감시만으론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 문제였다.
사내놈들 손에 맡겨 봐야 제대로 된 돌봄이 이뤄질 리도 없었고, 정차언이 순순히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쓰다 버릴 생각으로 데려오라 시킨 게 나애란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맡겨 놓을 생각이었다. 그 연극에 저까지 낄 필요는 없었는데, 김석진을 처리하러 간 그 밤, 차언의 얼굴을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난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에요.”
한번 툭 치면 픽 쓰러질 게 바르르 떨면서 맞서는 얼굴.
이 바닥에서 이 일을 하며 안 본 인간이 없었다. 그 부류의 인간을 잘 안다. 가진 건 쥐뿔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가장 귀찮고 순진한 부류의 인간.
자신을 이렇게 귀찮게 만들었으니 그냥 몇 번 괴롭히고 말 생각이었다. 호기심이나 충족하고 그만둘 생각으로 나애란이랑 적당한 관계를 모색해 장단 한번 맞춰 줬더니.
“모텔이 뭐 별건가. 10년을 모텔에서 살았어요, 나. 모텔이 뭐, 떡밖에 더 치나.”
괜히 제풀에 찔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햄스터 같다.
“혹시… 아까 일 때문에 갑자기 잘해 주시는 거예요? 제가 애란 언니에게 나쁘게 말할까봐?”
눈을 힐끔거리며 묻던 얼굴, 황당해 실소가 터졌다.
같이 있을 때 재밌으면 안 되는데. 이건 제 예정에 없던 감정인데.
권석은 피식거리다 말고 룸미러로 그를 힐끔거리는 시백과 눈이 마주쳤다.
“뭐.”
“형님, 근래 많이 웃으시는 거 같습니다.”
“너나 나나 참 지루한 인생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 하나 때문에 웃는 게 말이나 되나. 하는 짓이 썩 귀엽긴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학비나 좀 보태라고 돈을 보냈더니 그걸 또 냉큼 나애란 빚 갚는데 써 버렸다. 하여튼 감당이 안 된다. 잠깐 한눈을 팔면 일을 저질러 버린다.
잠깐 업무를 보고 있는 사이에 정차언이 대부 업체가 운영하는 룸살롱엘 찾아갔다는 보고를 들었다. 말이 대부 업체지 동네 양아치들이 굴리는 룸이고, 그렇다는 건 딱히 체계나 규범 따위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무식하게 여자를 굴리다 더 이상 불필요하다 싶으면 장기 매매로 넘기는 게 다반사다. 얼굴 좀 반반한 애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지. 정차언을 끌고 가 또 뭔 짓거리들을 할지, 귀찮은 생각이 펼쳐지자 인상이 구겨졌다.
결국 쥐고 있던 펜을 내려 두고 사무실을 나와야 했다.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는 데는 뭐 있지.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거길 그렇게 덥석.
“내일 오전 스케줄 뭐 있어.”
“오전엔 큰형님과 아침 식사 약속 하나 잡혀 있습니다.”
“큰형님도 참 악취미야. 시커먼 남자 둘이서 아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큰형님께서 워낙 형님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사양한다, 난.”
하여간 성 회장이나 정차언이나 저로서는 이해 못 할 위인들이었다.
그간 제 수하나 나애란에게서 받은 수많은 보고에도 이해 못 할 것들이 가득했다.
동네 여자가 버리고 간 애새끼를 챙기질 않나, 제 코가 석 자면서 나애란을 지키겠다 나서질 않나. 다른 남자 새끼들은 쫓아오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선을 그으면서 이도원, 그 새끼한텐 참도 너그럽다.
한때 만났던 사이라고 하더니 작정하고 헤퍼지기로 한 건지, 옆자리에 앉아 대놓고 추근덕거리며 술을 마시는데도 헬렐레해서는 다 받아 주는 꼬락서니하고는.
그게 묘하게 기분이 더럽다.
“김윤기 밑 닦는 새끼들이 자꾸 형님 주위를 마킹한다고 보고가 올라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냅둬. 우리 노친네가 바라는 대로 일단 들어줘. 속 시끄러운 거 싫어하시잖냐.”
“그러다 그 새끼들이 먼저 뒤통수라도 치면.”
“시백아.”
“예, 형님.”
“넌 날 아직도 그렇게 모르냐.”
“애들 시켜 더 잘 감시하겠습니다.”
“그래.”
담배, 담배가.
담배를 잇새에 물고 라이터를 달칵 연 권석은 불을 붙이지 못하고 치워 버렸다.
권석은 통 입맛이 없었다. 그런 권석 앞에서 성 회장은 연신 나이프 질을 해 댔다. 그는 레드 와인 소스가 덧입혀진 여린 양고기를 차례차례 해치워 나갔다.
“왜 아침을 통 못 먹냐.”
“저 아침 식사 안 하는 거 잘 아시면서 뭘 물으십니까.”
“싸가지 없는 놈. 이 노친네랑 밥 한 끼 먹으면 입안이 썩지, 아주.”
성 회장이 눈총을 주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 아이는 잘 지내냐.”
“따로 보고 들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입으로 듣고 싶어 그런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요.”
“수지랑 많이 닮았냐. 하는 짓 말이다.”
“글쎄요. 제가 정수지 씨를 잘 몰라서.”
성 회장이 권석의 답을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비교가 잘못된 셈이었다.
“하는 짓은 비슷한데 동생은 다르다고 하더구나. 본인처럼 독하지 못해서 정도 많고 마음도 약하다고 했어. 실제로 그런지는 몰라도 네 입에서 큰 불만이 없는 거 보니 속은 안 썩이는 게지.”
속을 안 썩여? 권석은 말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일하다 말고 몇 번이나 쫓아가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러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름이 뭐랬더라. 석진? 김석진? 한용아. 이름이 뭐였나.”
“김석진입니다.”
테이블 뒤로 물러서 뒷짐을 진 채 지키고 서 있던 성 회장의 오른팔이 즉각 답했다.
“지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지키라고 했지 껄떡거리는 놈 대가리 따라는 소린 안 했다. 네가 어디 마음 안 내키면 시킨다고 하는 놈이냐. 웬만해선 나서지도 않는 놈이. 제 손으로 대가리까지 땄으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게지.”
“뒤탈이 남는 것보다는 그편이 여러모로 나으니… 이런 재미없는 얘기 하실 거면 앞으로 시백이랑 하시죠. 재깍 보내 드릴 테니까요.”
“싹수없는 새끼. 내가 너를 모를 줄 알고.”
성 회장이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서야 만족스레 입을 닦았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앞에 세워 두는 버릇은 여전했다.
“우리 동생, 이 큰형이 뒈지고 나면 다 너한테 줄 것인데 너무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말아라.”
“형님.”
“윤기는 그냥 페이스메이커 아니냐. 너 과속할까 봐 세워 놓은 과속방지턱인데 네가 좀 너그럽게 봐줘.”
심드렁하게 라이터만 달칵거리고 있는 권석을 보는 성 회장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건 그렇고 그 아이, 한번 보고 싶구나.”
“…….”
“언제 자리 한번 만들어 봐라. 왜. 내가 그 아이를 보는 게 싫으냐. 늙은이가 또 주책이라도 부릴까 봐서. 수지랑 닮은 건 안다만 정식으로 얼굴 본 적은 없지 않냐.”
“만들겠습니다.”
“그래. 골프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겠다. 시백아.”
“예, 큰형님.”
“네가 고생이 크다.”
시백의 어깨를 툭, 치고 걸어 나가던 성 회장이 아차, 하며 뒤돌아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던 권석이 손목시계를 고쳐 매만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선물은 하나 해야지. 동생이 꽃을 좋아한댔지. 수지 닮은 꽃다발이나 하나 보내 놔. 또 안목하면 너 아니냐.”
그리고 성 회장이 쿨하게 퇴장했다. 이러니 귀찮은 짓은 제가 다 하는 셈이지.
“시백아.”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다. 까라면 까야지. 고르러 가 보자.”
뒤 닦으라면 닦아야지. 별수 있나.
후우. 짙은 한숨은 제 몫이었다.
차창 밖으로 꽃가게가 보였다.
2년 전쯤, 정수지와 함께 있던 차언이 떠올랐다. 딱히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안목이 좀 더 낫다는 이유로 성 회장을 대신해 선물을 몇 번 고른 게 화근이었다.
호텔리어로 일하던 정수지는 성 회장이 처음으로 품은 직장 내 직원이었다.
뭐, 그러다 보니 정수지와 성 회장이 데이트하는 자리에 몇 번 얼굴을 비치기도 했고, 식사 자리에 한 번 합석을 했던가. 정수지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제가 동승하기도 했었다.
그래 봤자 성 회장과 정수지가 만나던 몇 개월 남짓이었을까.
단편적인 기억들 속에 정차언이 뚜렷하게 자리 잡은 건 그때였다.
겨울이었던 거 같고 새벽이었던 거 같다. 온통 모텔뿐인 골목에 정차언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정수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생에게로 달려가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언니의 은밀한 연애 사정을 모르는 동생은 그저 일하다 돌아온 줄 알고 눈을 접어 웃었다.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리지 말랬잖아. 왜 언니 말을 안 들어. 이거 봐. 손은 잔뜩 얼어서.”
아직 앳된 얼굴은 추위 속에서 언니를 기다리는 게 익숙해 보였다. 밤새 여기저기서 일하다 돌아오는 언니를 마중하는 게 한두 번은 아닌 듯싶어 보였다.
걱정 가득했던 얼굴이 정수지를 보자마자 환해졌다. 어떤 세상에서 살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일이 생기는 건지, 문득 그게 궁금한 적은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일이 자신의 세계에선 없어 놔서.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관심을 둘 만큼 인간이라는 머리 검은 짐승에게 낙관적이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인간이란 게 거기서 거기라는 걸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호기심, 그런 무용하고 가치 없는 감정에 이끌려 시간낭비를 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왜 자신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정수지가 죽은 후 거짓말처럼 바래 버린 그 눈동자가 그냥 좀 거슬렸다. 그뿐이었다.
한두 번 지켜보다 그만둘 생각이었던 계획이 점차 어긋난 것도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죽고 사는 게 일인 인간사에 혈육 하나 뒈진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청승을 떠는지.
처음엔 그냥 몇 번 놀리다 말 생각이었다. 이렇게까지 정차언 인생사에 깊숙이 발들일 생각이 아니었다. 한심하다. 여자 하나에 시간 낭비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자그마한 걸 보고 있자면 그 발끈하는 눈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몸이, 제법 재밌어 자꾸 생각이 난다.
실은 아직 아프면서 아프지 않은 척하는 그 눈동자도.
다 알고 있는데, 숨겨 봤자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애써 아닌 척하는 그 얼굴도. 놀려 주고 싶고 괴롭혀 주고 싶고, 울리고 싶다. 당장에 제 목을 그어 버리면 그만인지도 모르고 잔뜩 성이 난 햄스터처럼 와락 달려들 때면 헛웃음이 난다. 그런데 이게 헛웃음인지 웃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징조다.
팬티를 벗기자 한 대 때리고 싶은 눈으로 그를 휙휙 쏘아보던 눈빛. 그녀를 알 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참 다채로운 표정을 많이도 보는 거 같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숨기고 있다고, 있는 대로 닫고 있던 무릎을 벌려 안 된다고 꾹 다무는 구멍에 입을 박았었다. 어떻게든 차단해 보겠다고 벌름거리며 발버둥치는 것을 한참이나 빨며 예뻐해 줬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그를 괴롭혔다.
그러다 새는 보짓물에 혀를 갖다 대면 빨아 먹지 말라 엉덩이를 흔들어 대고… 가끔 주먹을 쥐고 실수인 척 머리도 쥐어뜯는데 하는 짓이 귀여워 모르는 척 넘긴 것도 숱했다. 너무 봐줘 버릇하면 안 되는데. 애 버릇 나빠지는데.
그의 잇새에서 한숨이 흩어졌다. 갓 스물을 넘긴 애한테 선 것도 모자라 곱씹고 있는 꼴이라니.
애새끼도 아니고 잠시 이러다 말테지.
“형님.”
“그래.”
권석은 차에서 내려 꽃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우리 차언이한테 집적거리는 게 어떤 놈인지 한번 볼까?”
희아가 웃으며 꽃다발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차언은 제 앞으로 날아온 꽃을 무감하게 보며 피곤한 손으로 어깨를 주물거렸다. 이틀 전, 권석과 그 일이 있고 나선 무슨 정신으로 일상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늘 그랬듯 하루가 바쁘게 흘렀다.
벌어졌던 두 가랑이 사이가 아직까지 아팠다. 작신작신 두들겨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이 뻑적지근하다. 사실은 기억이 선명해서 더 죽을 맛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차 밖을 향해… 온갖 추태를 다 보인 데다…….
“차언이 앞으로 온 거라고? 누가 보낸 건데?”
“누구라는 말은 없고 카드에 그냥 성원형이라고만 적혀 있어.”
“성원형?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 같은데. 누구였더라?”
단아하게 핀 흰 꽃은 낡은 미용실에 어울리지 않게 예뻤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꽃이었다. 일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수지가 한번 집으로 사 들고 온 적이 있었다. 꽃을 고르는 안목이 좋다고 했더니 그 이후로도 몇 번을 사 왔다.
말은 사 왔다고 하는데 저런 꽃다발이 못해도 몇만 원은 훌쩍 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수지도 저에게 발목 잡혀 구질구질하게 살지만 말고 연애도 하고 남자도 좀 만나라고.
“야, 차언아. 너 요즘 왜 그러냐. 왜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애란이도 돌아오고 다 잘 해결됐다며. 너 좋다고 이렇게 꽃 보내는 남자도 있는데.”
“이 남자는 누구야?”
영림에 희아까지 누구냐고 들들 볶아 대지만 저라고 알 턱이 없었다.
“나도 누가 보냈는지 몰라. 가게 손님이었나?”
“우리 미용실 오는 남자 손님이라고 해 봐야 국밥집 최 사장님인데 퍽이나.”
“여자가 보낸 걸 수도 있지, 왜.”
“그래. 편견이 없는 건 좋은데. 성원형이라는 분이 남자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거야?”
예쁜 꽃다발을 보며 호들갑을 떨기엔 심기가 너무도 복잡했다.
“언니, 나 잠깐…….”
바람이라도 쐬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마침 가게 문을 열고 애란이 들어왔다. 이틀 전보단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차언아. 어, 이 꽃은 뭐야?”
“몰라. 차언이 앞으로 왔는데 누군지 말을 안 해 준다.”
“그래?”
한동안 말이 없는 애란이 꽃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그녀의 시선은 금방 제게로 돌아왔다. 미용실에 온 용건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차언아, 우리 커피 한잔하자.”
잠깐 얼굴 좀 보자는 말에 차언은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할 말이란 게 뭔지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용건을 알고 있었다.
미용실을 나와 골목을 돌고 마사지 숍도 보이지 않는 카페로 들어갔다. 애란이 가는 대로 말없이 뒤따르기만 했다. 미용실 옆 커피숍을 두고 한참을 돌아가는 짓을 하는데도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얼음이 잘강거리는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창가에 앉았다. 늘 가게 안에서 씨름하는지라 온종일 중 해를 만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 중 하나였다.
“언니, 있잖아.”
“차언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얼음이 녹아 가는 커피를 보면서도 손 하나 대지 않는 애란이 담담히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고저 없는 톤이었지만 내려앉은 속눈썹이 제 마음만큼이나 복잡해 보였다.
“문성 차 이사님. 나랑 스폰 그런 관계 아니야. 애인 그런 건 더더욱 아니고.”
어제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던 애란이 이틀 만에 찾아왔다. 어제 온종일 고민했던 걸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럼 왜… 그랬던 거야?”
애란이 제게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그게 궁금했다. 애란이라면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를 믿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한테 무슨 일 있는지, 별일 없는지 그런 거 보고하고 너 챙겨 주고 수고비 받기로 했었어. 너도 알다시피 나 돈 생기면 이 바닥 뜨려고 했잖아. 그 돈으로 나도 새 인생 살아 볼까 했었거든. 너 속인 거 미안해. 내가 너 이용해서 돈 벌려 한 것도 인정해. 미안.”
대충은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왜? 왜 그 남자가 그런 걸 보고 받는, 아니 왜 그게 궁금한 건데? 왜 내 안부 같은 게…….”
“나도 그 이상은 몰라. 정말이야.”
애란에게 물을 게 아니라 그 남자에게 가서 따져야 하는 게 맞다. 알면서도 답답해 자신도 모르게 채근했다.
“정말이야, 차언아.”
“알아. 언니가 그 이상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해.”
누구에게나 쉽게 이유를 말할 정도로 헐렁한 남자가 결단코 아니었다. 그러므로 애란의 말은 근거가 명확했다.
“나 이번 주까지만 나가기로 했어. 네 덕분에 수고비 받았거든. 마담이 마이킹 땡겨 주겠네 어쩌네 애들 동원해서 갖은 추잡한 유혹 다 하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마담이 뭐라는 줄 알아? 나보고 신장이라도 팔았녜.”
그 남자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마땅한 건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어쨌거나 애란에게는 잘된 일이었으나… 그래, 결론만 생각하자면 애란에게는 백번이고 잘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왤까. 이 찜찜한 기분은.
“여기 길 건너 카페에 취직했어. 다음 주부터 출근이야. 나 그간 바리스타 자격증 열심히 따놨잖아.”
“오빠는 어떻게 된 거야?”
“연 끊은 새끼니까 더 볼일도 없어.”
“또 빚쟁이들이 찾아오면 어떡해. 도박 빚이라며. 또 도박에 손대서…….”
“그땐… 씨발. 야. 좋은 날에 꼭 그 개새끼 얘기를 해야겠어? 다시 찾아와 봐. 그땐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여기 뜬다, 내가.”
어째 좀 성질 죽이고 참는다 했지. 그제야 보이는 애란다운 모습에 차언은 조금 안심했다.
“나 점점 그 사람이 좋아져. 차언아. 이상하지. 알아. 내가 이상해 보이지?”
설렘과 슬픔이 혼재돼 엉망으로 얽혀 있었던 그 눈이 정말 그냥 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던 걸까. 그뿐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 남자와 오고 간 이야기가 그뿐이라면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됐을 얘기였다.
“언니, 저기… 이사님이랑 말이야.”
“이사님이랑은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야, 나도 너한테 들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나온 김에 낙지볶음 먹을까? 갑자기 매콤한 게 당기네.”
애란이 제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차언도 더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물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더는 물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란이 웃는다. 더는 묻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묻지 못하는 건 애란 때문일까, 제 마음 때문일까.
애란의 답을 듣기가 겁이 났던 걸까. 왜?
차언은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을 따라가다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말없이 애란을 따라나섰다.
“근데 차언아.”
“응?”
“그러는 넌 이사님이랑 무슨 관곈데? 무슨 사인데 이사님이 널… 아냐.”
애란이 씁쓸한 웃음을 애써 감추며 길을 걸었다. 그녀 역시 궁금하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보였다.
자신처럼.
차언은 의문투성이 꽃다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골목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차권석 그 남자와 얽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었지만 직감이란 게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남자 번호라도 받아 두는 건데,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은 꿈에도 하지 못해 전화번호 하나 묻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어찌 됐든 애란이 만나는 남자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따로 만난다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으므로 도망치듯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했었다.
이렇게 멍청히 모른 채로 있는 것보다는 뭐든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애란에게 연락을 주고받았던 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맞은편에서 검은 세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번쩍거리며 다가왔다. 남자가 타던 세단과는 차종이 달랐지만 차언은 알 수 있었다.
차권석의 사람이었다.
“어, 앉아라.”
처음 보는 남자의 첫인상은 젠틀해 보였다. 이유도 모르고 얼결에 따라왔으나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권석과 연결된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오면 차권석 그 남자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유 정도는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곳은 애란과 삼자대면을 했던 그날 밤의 그 호텔이었다. 같은 층, 같은 레스토랑. 이 젠틀해 보이는 남자가 차권석과도 연관이 있을 거라는 자신의 추측은 더욱 굳건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중후한 느낌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나이는 있어 보이는데, 남자는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혼란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궁금해요.”
“에둘러 가는 법 없는 건 수지나 너나 똑같구나.”
수지? 언니?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차언은 이어 나오는 애피타이저에 손 하나 대지 못하고 남자를 향해 물었다.
“언니를 어떻게 아세요? 혹시 꽃 보내신 분이… 그쪽인가요?”
능숙하게 와인으로 목을 축이던 남자가 웃는다. 남자 역시 그녀의 말이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맞긴 한데. 글쎄. 시킨 건 맞는데 고른 건 다른 쪽 안목이라.”
“그게 무슨…….”
자신이 오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음식은 곧바로 나왔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갖가지 야채를 곁들인 고기 요리였다. 스테이크의 한 종류일 테지만 자세한 요리의 명칭은 알지 못한다.
“뭐 해. 들어요. 식으면 맛없어. 뭐든 갓 했을 때 먹어야 제맛이야.”
“…말씀해 주세요. 저희 언니랑 어떻게 아시는데요? 저희 언니를 잘 아세요?”
“그 좋아하는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다가도 동생한테 전화가 오면 어찌나 표정이 밝아지던지. 먹던 것도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 하더구나.”
이제야 이 남자가 누군지 조금씩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학년이 바뀌고 부턴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느라 그 이상은 알지 못했지만 자취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낌새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퇴근 시간보다 조금씩 귀가가 늦어지고, 주말이면 친구들을 만난다며 집을 나갔지만 들뜬 얼굴은 감추지 못했다.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니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라.
언니의 장례식 날, 실신해 병원에 드러누워 있었을 때 늦은 새벽 의문의 조문객이 다녀갔다는 얘기는 들었다.
올 사람이라고 해 봐야 거의 술집 여자들뿐인 장례식장에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들은 수상하기만 하니까. 하지만 그냥 언니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그 조문객이 조의금을 두둑하게 넣은 덕분에 장례 비용 걱정은 덜었지만, 회사 차원에서 보낸 돈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 다녀갔던 익명의 남자가 이 남자인 듯싶어 보였다.
“…저는 왜 보자고 하셨어요?”
“다 늙어 빠진 애인이 추접스럽게 질투도 못 하고, 널 어찌나 챙기던지. 수지 그렇게 가고 나서 신경이 쓰이더구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안부나 묻자고 부른 자리니. 뭐 해, 들지 않고.”
“…그날, 조의금. 맞죠?”
남자는 말이 없었다. 긍정의 답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감사하면 감사한 거지 너도 뭐가 꼭 조건이 붙어야 하냐.”
“아, 기분 상하게 해 드리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 큰돈을 덥석 받아서 죄송한 마음에…….”
차언은 결국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서로 말없이 식사했다. 그러다 남자가 한마디씩 툭 던질 뿐, 도대체 자신이 무얼 먹고 있는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런 것들은 머릿속에서 곤죽이 돼 버렸고 결국 남은 건 판에 박힌 감사하다는 소리뿐이었다.
“언니는 그렇게 그냥 저를 두고 가 버릴 사람이 아니었어요. 언니한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회장님은 혹시 알고 계신 게 있나요?”
대체 왜 언니는 그날 그렇게 발견됐던 건지, 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도 쪽지 하나만 달랑 남기고 가 버렸던 건지.
차언은 이 남자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가장 듣고 싶은 것을 물었다. 이 남자라면 분명 알고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게 있었다면 나보다 친동생인 네가 더 먼저 알고 있었겠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서 식사를 마저 하라고 남자는 딱 잘라 말을 돌렸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무엇인진 몰라도 이 주제가 저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분명했다.
그 분명하고도 정확한 의사 표현에 차언은 더 이상 입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더욱 그랬다.
“회장님.”
“어, 그래. 들어오라고 해.”
성 회장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무어라 짤막하게 보고함에 성 회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이프를 놓고 손을 닦았다. 그러곤 와인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군다.
자박대는 발걸음 소리들, 작은 소음과 함께 이내 가까워지는 인기척. 이 말도 안 되는 위압감과 사람을 잡아 조이는 듯한 중압감.
테이블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들을 발견하는 순간 차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바짝 쥐었다. 아는 얼굴이 죄다 보였다. 시백과 종섭, 그 외에도 그날 밤 석진을 죽이는 데 함께 있었던 얼굴들. 그리고 그 중앙에 선 남자.
이틀 전 밤, 자신과 엉망으로 뒹굴었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날 밤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무감하고 건조한 얼굴로. 슈트 재킷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서 머리까지 깔끔하게 만져 올린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성 회장에게 가벼운 묵례부터 한다.
“늦었구나. 앉아라.”
처음 문성 이름이 적힌 권석의 명함을 건네받았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수지와의 연관성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지가 문성 산하의 호텔에서 일한 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일개 호텔리어와 전무이사가 접점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석에 앉은 성 회장을 중심으로 권석이 차언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비로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바짝 얼어붙어 반 차렷 자세로 앉은 차언과 달리 편안히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는 남자는 습관처럼 지배인이 내어 온 와인 잔을 앞으로 가져왔다.
“우리 차 이사 바빠서 아사할까 봐 이 형이 불렀다. 두 사람은 구면이겠구나.”
“예. 덕분에요.”
“자식이.”
말은 그리했지만 성 회장은 권석을 어여쁘게 보았다. 아낀다는 것이 보였다. 타인의 눈에도 그게 극명히 느껴질 만큼.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학교는. 언제 복학할 예정이야.”
“아직은 계획에 없어요. 하지만 늦지 않게 돌아가려고요.”
“그래. 남자친구는, 있고?”
내 사생활이 대체 왜 궁금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성 회장을 지키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런 말을 꺼낼 용기가 제게는 없었다. 처신 알아서 잘 하라며 협박하던 시백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을 졸랐다.
“아뇨.”
“권석아 네가 애들 중에 괜찮은 놈으로 한번 알아봐라.”
“어, 아니에요. 전 괜찮습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정말이에요.”
“감사하면 성의는 받아야지. 강식이나 윤기도 너한텐 안 되지만 사내 구실은 제법 한다. 우리 이래 봬도 사우나 메이트 아니냐.”
분명 말의 첫머리는 차언에게로 향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성 회장의 눈은 노골적으로 권석에게 향해 있었다. 설핏 눈살을 찌푸리는 권석에게로. 그러더니 말없이 웃는 성 회장이 와인 잔을 들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도 재미있어 보였다.
“아니면 우리 최 실장도 괜찮고.”
최 실장이라며 턱짓을 하는 성 회장의 시선 끝엔 시백이 있었다. 표정이 좋지 못한 권석을 보며 성 회장이 대놓고 웃음을 흘린다. 제게 말하고 있었지만 성 회장의 대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시백아, 너는 어떠냐. 장가가서 자리 잡아야지. 언제까지 그 누님 만날 거야.”
“저, 회장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차언은 서둘러 성 회장이 벌리는 판을 접으려 애썼다.
“그래? 괜찮은 놈이 제법 있는데 아쉽구나. 필요하다면 언제든 소개해 주마. 너한테 도움이 될 거다.”
성 회장이 다시 놓았던 나이프를 들었다. 스멀스멀 번지는 저 웃음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르겠다.
이상했다. 정말 안부나 묻자고 보자고 한 건가. 목적을 알 수 없는 만남이었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왜 권석이 자신의 주위에 있었는지. 왜, 애란을 시켜 그 이상한 짓을 했던 건지. 그 배후엔 성 회장이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의문점은 남는다. 그냥 수하들을 시켜 저를 감시하면 됐을 일을 번거롭게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
차권석은 전무이사다. 간부. 폭력조직 일이 됐건, 합법적인 사업이 됐건 저 자리에 오를 만큼 일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 남의 위에서 명령해야 하는 사람이 그 귀찮은 짓을 왜…….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나오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이 고요하다.
그날 밤, 그와 누구 하나 죽어 나갈 것 같은 섹스를 한 후 얼굴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함께 있는 게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그와 함께 좁은 공간에 있으면 긴장부터 인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는 자신만 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차언은 괜히 헛기침이 나와 목 아래를 꽉 조이고 있는 단추 하나를 풀었다.
“…….”
어제 아침, 일어나자마자 발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했었다. 그리고 얼얼하다 못해 아직 벌어져 있는 것만 같은 밑구멍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다소 부어 열이 나는 것 말고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새벽까지 몇 번을 더 한 건 분명한데, 실신을 한 이후부턴 기억의 조각이 드문드문 남아 기억이 그리 정확하지 못했다.
옆에 앉은 그를 힐끗거리다 룸미러 속 시백과 눈이 마주쳤다. 시백도 그날, 보고 들었을까. 그랬겠지. 죄지은 것도 없는데 시선을 회피했다. 온통 권석의 스킨냄새가 범람하는 이 좁은 곳에서 용기를 긁어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쪽은 보지도 않고서 눈을 감고 있던 권석이 입을 연다.
“뭐 또.”
차언은 룸미러 속 시백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고 권석을 보았다. 나른히 눈을 뜬 권석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전부터 날 알았던 거죠. 그럴 줄 알았어요. 내 주위에 문성 이사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던 건데. 그럼 이틀 전엔 왜 그랬던 거예요? 그냥 술 취해서 팬티 다 내놓고 있으니까 꼴렸던 거예요?”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니, 얘.”
권석이 시백을 향해 묻는다. 질문이라기보다 가볍게 던지는 평언에 가까웠다.
수지 때문에 자신을 알게 되고,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온 건 알겠는데 더 이 남자와 엮여도 되는 걸까. 성 회장에게 더는 자신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성의를 그렇게 물리치는 게 아니라는 짤막한 답 한 번이 다였다. 더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는데 더 떠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수지로 인해 계속되는 관계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안다. 그것도 자신의 주변을 감시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이런 관계는 마땅치 않았다.
차언은 손에 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이름만 수없이 들었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명품 가방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두꺼운 봉투가 들어 있었다.
“생일이더구나. 수지가 준 거라 생각해라. 그 정도는 해 주고 싶어 그러니 부담스러워할 거 없고. 네 맘 때쯤 애들한텐 뭘 해 줘야 좋을지 몰라서 가볍게 준비한 거니 받아 둬.”
성 회장이 건넨 선물이지만 알 수 있었다. 고른 것은 그라는 것을.
권석의 취향을 알 것 같았다. 꽃도, 명품 백도 화려하기보단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좋아한다. 이렇게 가다간 그 남자의 취향대로 가방을 들고 옷을 두르고 구두까지 바꿔 신겠지. 차언은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명품 백을 꾹 쥐었다.
이런 거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원하지도 않는 명품 가방을 언니 남자친구에게 받고 싶은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제가 잘 지켜보고 있을 테니 염려 마세요.”
애란을 시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니.
이런 관계는 확실히 이상했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언니 때문에 제가 신경 쓰여 그런 거라면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괜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제 더 이상은…….”
나긋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의 잘난 눈썹이 일그러진 건 그때였다.
“괜히?”
“애란 언니랑 마음에도 없는… 그런 거요. 제 신상을 염탐, 하고 그런…….”
“그래서. 네가 뭘 손해 봤는데.”
“네?”
“네가 싸고도는 그 여자 빚 갚아 줘, 보지 팔리는 것도 막아 줘, 너 좋아하는 불우이웃 자선사업 실컷 해 주지 않았나?”
차언은 차게 식어 완전히 얼어붙은 권석의 말에 그대로 굳었다. 남자의 말에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었다고, 그거 괜한 참견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은 좆같이 하지만, 짜증나게도 이 남자의 말이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남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 애란이나 자신이나 이보다 더한 진창이었을지도 몰랐다. 이 거지 같은 팔자에 더 깊은 수렁. 자신으로 인해 득 하나 보지 않은 자선사업만 해 준 꼴이라는 게 딱 맞았다.
차가 골목에 들어섰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그러니까 앞으론 그러실 필요 없다구요. 언니 때문에 날 감시하듯 지켜볼 필요도, 더는 도와주실 필요 없… 이제 자선사업 하듯 찾아오실 필요가 없다구요. 도움은 감사하지만 이제 이런 식으로는…….”
가방을 두고 빠르게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빌라 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 놓고도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대문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성 회장 앞에서는 용기가 없어 차마 선물은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을 더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겁하게 그냥 두고 내렸다. 차권석, 저 남자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 거 같아서.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꼬여 버렸는지 모르겠다. 비정상적이어도 한참을 비정상적이다.
그가 가 버린 건지 골목이 고요했다. 차언은 한참 만에야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등 뒤에서 입이 막혔다.
“읍, 읏!”
발버둥 치면 칠수록 눈앞이 요원해진다. 낯선 냄새였다.
목을 감싸고 등을 끌어안는 기분 나쁘고 섬뜩한, 촉감.
눈꺼풀이 무거웠다. 머리가 땅에 박힌 듯 아무리 몸부림쳐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검은 정장, 눈앞을 오고 가는 여러 개의 다리, 눈을 깜빡이자 눈 안에 가득 찬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뺨이 아팠다. 쓰러져 의식이 없는 동안 얼굴을 가격한 모양이었다. 터진 입술에서 시큼한 비린내가 난다.
바보같이 그 순간에도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올라간 치맛자락 사이로 핑크색 팬티가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이 쓰라리거나 내렸다 입힌 흔적은 없었다.
얼굴은 얻어맞아도 괜찮은데 다리 사이는 안 되냐. 자조 섞인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다.
“야, 저년 깼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알 듯 모를 듯한 얼굴, 입술 선이 짙고 눈썹 한가운데 난 스크래치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일어났어? 뒈진 줄 알고 걱정했잖아.”
퍽도 걱정했겠다. 그랬으면 이렇게 패진 않았겠지.
방금 너무 차권석처럼 말한 거 같은데, 같이 있는 그 잠깐 사이 그에게 물들어 버렸나. 차언은 입을 벌리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벌릴수록 턱만 아팠다. 뺨만 후려친 건 아닌지 눈두덩이 너무나 아팠다.
자동반사적으로 떨어지는 눈물은 얻어맞은 여파로 눈에 충격이 가해져 그런듯해 보였다.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거리자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턱짓을 한다.
“야, 일으켜 줘.”
남자 하나가 차언의 허리를 세우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앞뒤가 바로 보이는 시야엔 적지 않은 남자들이 있었다. 사방이 막힌 창고. 익숙한 장소가 아닌 걸로 보아 그녀가 머무는 동네를 벗어난 듯해 보였다.
온 얼굴이 아팠다. 잇새를 타고 흐르는 게 침이 아니라 핏물이라는 걸 알았다. 얻어맞은 적은 숱했다. 사창가 여자로 착각하고 제 팔을 끌고 가는 남자를 뿌리치다 맞아 보고, 석진에게도 맞아 보고, 수지에게 껄떡거리는 남자의 팔을 물고 또 얻어맞아 봤다.
그런데 이렇게 아파 본 적은 없었다. 아파 얼얼한 게 마음인지 몸인지도 분간이 안 간다. 실은 무서웠다. 너무도.
“김석진, 익숙한 이름이지? 걔 조진 새끼가 누구냐?”
김석진. 잊고 있다 방금 떠오른 그 이름에 저도 모르게 턱을 치켜들었다.
“…몰라요. 그 남자를 왜 저한테서 찾아요.”
“김석진이 네 기둥서방이었는데 그럼 누구한테 가서 물어요.”
“그 남자랑 저 그런 사이 아니에요.”
“지랄을 하세요. 그 새끼가 네 집 드나드는 거 본 사람이 몇인데. 김석진이 실종된 날 밤에도 너한테 간다고 했다던데. 목격자가 있어요. 씨발.”
“온 건 맞는데, 전 싫다고 했고 그 남자는 일방적으로… 그런 사이가 아니라구요.”
“그럼 이건 뭐냐?”
남자가 홱 낚아채 가지고 오는 건 슈트 재킷이었다. 그리고 손수건. 자신의 집 안에 있던 차권석, 그 남자의 물건들.
“딱 봐도 남자 옷인데, 이걸 네가 왜 갖고 있을까? 거기다 뭐라고 그랬지?”
“존나 비싼 브랜드입니다, 형님.”
“네 다리 사이에 남자 흔적이 몇 갠데 그런 구라를 까, 씨발아. 사창가에 사는 년이 입 털려면 좀 먹히는 구라를 쳐야지. 네가 만나는 새끼가 김석진 쑤신 건 아니고? 너네 둘이서 눈 돌아서 석진이 새끼 담근 거 아니냐고!!”
김석진이 몸담고 있던 이 근방 조직 세력이 분명했다.
남자들이 자신의 다리 사이에 빼곡하게 새겨진 권석의 흔적을 보며 숨을 헐떡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도통 모르겠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시시덕거리며 권석의 슈트 재킷을 걸쳐 입어 보는 남자들이 삐딱하게 서서 자신을 내려다본다.
“야 저년 잡아.”
남자가 의자 위에 올려둔 도끼를 가지고 다가온다. 팔이라도 하나 자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다고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아.”
“아니, 팔모가지라도 하나 자르면 달라질지 모르지. 원래 인간이 맞아야 생각이 나는 법이거든.”
살려 달라 악을 쓰면 좋다고 더 달려들 남자들의 습성을 안다. 그래서 차분하게 쏴붙였다. 그래도 무서웠다. 사실은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었다.
이거 놓으라 팔을 빼내려 해도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살려 달라 빌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걸 직감했다. 발목을 자른다고 협박하면서도 아프다고 울면 품으로 끌어당기는 차권석과는 다른 사람이다.
“야 잠깐, 네가 그렇게 허리를 잘 놀린다며. 아주 소문이 자자하더라?”
“…미친 새끼.”
“저년 가슴 죽인다, 씨발. 야, 벗겨 봐. 김석진이 따먹을 정도면 맛은 보장된 거 아냐?”
“이거 놔! 미친 새끼들아!”
“뭘 잘했다고 대가리 빳빳하게 쳐들고. 저년 바닥 기는 거 좀 봐야겠다. 석진이 새끼가 뭔 맛을 봐서 그 난리를 쳤는지 궁금해지네.”
“차라리 팔을 잘라. 개새끼야.”
“미친년. 그래 뭐 순서가 중요하겠냐? 찍고 나서 하자, 찍고 나서.”
남자가 당장에 손목을 찍어 버릴 기세로 도끼를 들고 달려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묶였던 팔목이 풀리고 팔 한쪽이 단두대 위로 오르듯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놓였다. 그래, 원하면 팔모가지든 발모가지든, 가져가라고. 자포자기했다.
어차피 제 팔자도 온실 속의 화초는 아니었다. 이렇게 죽을 생이라면 발악하며 더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언니, 무서워. 이렇게 무서운데 이렇게 죽는 게 두려운데, 왜 죽었어, 언니?
코앞에 죽음이 드리워지자 정말 묻고 싶었던 것들이 가슴속을 박차고 나왔다.
아닌 척하려 해도 무서워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다잡으려 이를 악물었다. 이가 먼저 나가든 팔목이 먼저 잘리든 결론은 둘 중 하나였다. 극도에 달한 두려움이 외려 그녀를 초연하게 만들었다.
찡, 하고 울리는 이명과 동시에 턱에 맺힌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일순 모든 소음이 잡탕이 되어 뒤섞였다. 사방이 시끄럽다. 물속에 잠겨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팔목을 붙잡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후드득 팔에 튄 미적지근한 무언가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차언은 물 밖을 유영해 나오듯 천천히 눈을 떴다.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것처럼 웅웅거리던 이명이 걷힌 것도 그때였다. 팔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복부 살점이 난자돼 시뻘겋게 벌기어 있었다. 사방이 벌겠다. 피 때문이었다.
자신의 팔을 타고 뚝뚝 흐르는 미적지근한 액체는 죽은 남자에게서 튄 피였다.
칼 하나를 쥔 채 서 있는 남자들 중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시백이었다.
배트를 하나씩 쥔 채 시꺼멓게 창고를 채운 남자들. 퍽, 퍽 대가리를 후리며 매찜질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들린다.
이윽고 툭 발밑으로 굴러온 대가리 하나에 차언은 소리를 질렀다. 방금까지 도끼를 들고 설치던 남자의 모가지가 살점이 뜯어진 채 발밑에서 나뒹굴고 있다. 패닉 상태로 피범벅이 된 팔을 휘저어 일어서 도망가려는데 창백해진 손이 붙잡혔다.
“이거 놔! 이거……!!”
억센 힘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눈이 마주쳤다. 차권석. 그 남자였다. 그가 무어라 부르고 있었다. 남자의 입모양을 보고서야 한참 만에 정신이 돌아왔다.
“정차언. 정차언 씨.”
“이, 이사…….”
“이해해. 좀 매너가 없었네.”
깔끔하게 끝내랬더니. 그가 짧게 혀를 찼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믿지 못해 눈을 깜빡이길 반복하자 권석이 담배 하나를 꺼내 문다. 담뱃불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인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불붙은 담배를 건넸다.
“진정을 좀 해. 여기서 너 어르고 달래 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무심하게도 어르고 달래면서 하는 말이라니.
차언은 곧장 뜻을 알아듣고 덜덜거리는 잇새로 담배를 물었지만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이걸로 어떻게 진정을 하라는 건지.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담배를 떨어뜨렸다.
얻어맞은 입술이 제대로 다물리지 않아 침이 질질 샜다. 무서워 눈물이 났다.
실신할 듯 숨이 넘어가고 눈앞이 아득해진다 싶더니 시야가 점멸을 거듭한다. 충격으로 이명도 함께 왔다. 놀라 권석의 팔을 꾹 붙잡고 있었다. 가쁘게 호흡을 하느라 헉헉대고 있는데 등으로 커다란 손이 붙었다.
제대로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눈을 들어 가까스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무심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냉랭한 눈을 한 남자가 어린아이 달래듯 등을 쓸어 준다.
“너 때문에 별짓을 다한다, 아주.”
심히 귀찮은 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눈이 마주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웃기게도 이 무서운 짓거리를 벌이는 남자가 옆에 있는데 그가 오자 미칠 듯한 안도감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 하나가 깨진 수박처럼 바닥에 짓이겨져 곤죽이 된 대가리로 엎어져 있다.
우윽, 입을 틀어막았다. 토악질을 할 거 같아 퍼르르 떨리는 눈을 감으려 애썼다. 얻어맞아 부풀어 오른 눈가가 제대로 닫히질 않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시큰거리는 눈을 어떻게든 꾹 감았다 뜨는데,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커다란 오른 손바닥이 자신의 두 눈을 덮고 있었다. 차권석, 그의 손이었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손가락엔 몇 차례 보았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촉감에, 스킨 향까지.
꼭 어린아이를 달래듯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이해해라. 애들 기분이 너나 나 못지않게 좆같은가 보다.”
차언은 그의 손가락을 꾹 움켜쥐고 눈물을 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곁에는 이 남자가 있다. 누구보다 잔혹한 이 남자가 자신을 지켜 줄 거란 이상한 믿음이 폭발적으로 번진다. 이 남자 역시 자신을 아프게 했던 남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덮쳤다.
무서워, 무서웠어요. 소리 없이 외치며 눈을 감았다. 실은 무서워도 무섭다고 말할 수가 없어 꾹 눌러 오던 마음이었다. 무섭다고 말해 버리면 양팔, 두 발목을 모조리 도려낼까 봐.
어쩌면 무섭다고 응석을 부리고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없었을 뿐.
그의 손을 붙잡고서 눈을 감고 있는데, 시야를 닫자 청각이 열렸다. 푹, 푹, 칼이 살을 헤쳐 바르고 깊숙이 꽂히는 소리, 스윽, 삭, 목을 긋고 팔을 긋는 소름끼치는 소리, 간혹 픽픽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이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들리는 남자의 신음 소리, 모든 게 필요 이상으로 선명했다.
그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려 권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자신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기만 한 남자의 두 눈이 건조한 듯 쌀쌀맞았지만 메마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차가운 눈. 그 눈을 보며 이 상황에 그가 와 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미친 상상을 한다.
그의 왼손이 차언의 입술 주위에 묻은 피를 닦고 지나갔다. 지극히도 따뜻한 손이었다. 미지근한 핏방울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온기.
저도 모르게 더욱 호흡이 가빠졌다. 숨을 연거푸 몰아쉬며 허우적거리자 지난번처럼 패닉이라도 올까 그가 짧은 한숨과 함께 그의 너른 어깨 한쪽을 툭 친다.
“잡을래, 안을래.”
“…아흐.”
“그럼 어떻게, 업어 줘?”
고개를 저었다. 거절이 아니라 자신조차 어째야 이 마음이 진정되는지 알 수 없어 무작정 한 몸짓이었다.
“뭐, 더한 거 하자고? 씹이라도 하기엔 장소가 너무 스릴 있는 거 아니냐?”
이 와중에도 농담이 나오는지 그가 저속한 말을 지껄인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셔츠자락을 더듬거리며 붙잡아 당기기만 했다. 숨을 몰아쉬며 꺽꺽대는데 찬찬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입술이 제 잇새로 붙어 왔다. 처음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호흡이 부족해 헐떡거리는 제게 숨을 불어 넣는 그가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 더욱 단단하게 동여맸다.
언제부터 단순한 입맞춤이 키스가 되었을까. 처음엔 얌전히 그가 건네는 숨을 받아 마시기만 했다. 그러다 혀끝이 맞닿았고, 움찔거리며 도망가는 그녀의 혀를 그의 입안으로 끌어다 놓았다. 울먹거리는 혀가 촉촉하고 뜨듯한 그의 혓바닥으로 접착됐다. 이 남자와 이보다 더한 것도 했음에도 첫 키스였다.
엉키는 혓바닥 속에 침이 고이고 차언은 목을 축이듯 그것을 받아마셨다. 입술을 틀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남자의 스킨 냄새가 언뜻언뜻 번진다. 마주한 살갗에 달붙은 입속에, 마치 제게도 옮아 오듯.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남자의 체액을 끊임없이 삼켰다. 진한 용기라도 나눠 마시듯. 그렇게 말하면 이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웃겠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지독하게도 두려웠던 가슴이 그의 온기로 상쇄되어 간다. 진하게 넘어오는 그의 체액에 섞여든 비릿한 이것은 제가 흘린 피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늘 피를 접하며 굴러온 인생에 이런 건 티끌의 난관도 되지 않는다는 듯 의연했다. 웃기지도 않게 그래서 더 강건한 그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 품에 숨어 조금은 안도하고 싶었다. 자신을 구해 줄 유일한 남자.
눈을 감으면 코 베어 갈까 늘 전전긍긍, 제대로 잠이 들 수 없었던 밤. 평생을 그래 온 밤. 언니가 떠나고 난 후 더 심해진 불면증. 조금은 편히 잠들고 싶었다. 잠이 들면 찾아오는 꿈 속 수지와 김석진. 무서웠다. 김석진이 무서웠고, 자신 역시 수지처럼 다 포기하고 놓아 버릴까 그게 무서웠다. 아무에게도 기댈 곳이 없어 두려웠고, 무섭다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두려웠다. 그녀가 키스하다말고 그의 뺨을 문지르며 타고 내려 가 그대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따뜻하고 깨끗한 목덜미에 피가 묻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푹 묻고 비벼 댔다. 까치발을 한 채 그를 와락 끌어안고 무너질 것 같은 지금을 버텼다. 그러자 그가 상체를 조금 기울여 자세를 맞춰 준다. 허락의 신호로 여겼다.
그제야 무서워져 울음이 나왔다. 눈알이 시큰거려서가 아니라 정말 공포가 북받쳐 터지는 눈물이. 여태 끌어안고 살아온 자신의 트라우마는 다 장난처럼 느껴질 만큼의 공포가 솟구치듯 터져서.
그를 끌어안자 등 뒤를 받쳐 안는 손이 단단하게 자신을 비끄러맸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어린애처럼 그의 목에 매달려 숨을 쉬었다.
비로소 편안한 호흡이 가능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기대 도움을 요청해 본 게. 구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모든 게 처음.
자꾸 울면 쟤들이 잡아간다.
[공금☞☜]
아이를 달래듯 이상한 겁을 주지만, 그녀가 떨어질까 받쳐 안는 팔과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단단했다. 이상하게 그 목소리에 더 눈물이 났다. 기대어도 꿈쩍도 않을 만큼 강건한 사람이라.
그렇게 자신의 다리를 가르고 무자비하게 쑤시던 남자에게서 느끼는 안도라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은 벼랑 끝에 서 있었고 수많은 선택지 중 이 남자가 가장 안전한 선택지기도 했다.
차언은 온통 그의 체향뿐인 목덜미에 코를 박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코끝으로 목덜미를 문지르고 쪽쪽 뽀뽀라도 하듯 권석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의 목선에 입을 붙여 댔다. 난생처음으로 부려 보는 어리광이었다.
남자는 귀찮다고 떼어내지 않고 그녀가 떨어질까 더욱 등을 받친 손을 눌러 상체를 붙여 준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미묘한 다정함에 차언은 지금을 핑계로 실컷 어리광을 부렸다. 무서웠다고 울먹여도 물리치지 않고 받아 주는 이 남자 때문에 자꾸 홀로 그치는 법도 잊고 보채게 된다.
“흐윽, 흑.”
‘이건 뭐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차언은 안심이 되었다.
“건주야, 너 조카 있냐.”
“예, 4학년 초등학생 있습니다. 참고로 남자앱니다.”
“남자 말고 여자애.”
“없습니다.”
“하여튼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도움이 안 돼. 아직도 서러워? 그만 그쳐. 내가 혼내 줬잖아.”
확실히 누군가를 달래는 데는 서툰 남자. 꼭 협박과 다독임이 공존하는 그의 말이 묘하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익숙한 뉘앙스였다.
단호하게 울음을 그치라 말하고 있지만 서럽게 울면 등을 문질러 준다. 그 묘한 괴리에 더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 서럽게 울 때면 남자는 퍽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무지막지한 남자는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의 눈물에 약해진다는 거였다.
비강 가득 남자의 체향을 흡입하며 또 한 번 허물어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자신은 살아야 한다. 버텨 내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가 가만히 등을 받쳐 주는 손길에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와 차에서 미친 사람처럼 몸을 맞춘 후 그는 집 안으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와 침대 위에 눕혔다. 술만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고 끙끙거렸다. 그가 옆에 있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격한 섹스가 끝이 났을 뿐. 하지만 분명 평소보단 한결 괜찮았다.
“자꾸 처울래? 그쳐.”
“허으, 흑, 머리, 아파아.”
“지랄도 가지가지로 한다.”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듯 떠올랐다. 그날 밤은 그토록 겁나게 말해 놓고 자신이 무서워 운다고 등을 쓰다듬으며 달래 주는데 그 간극이 더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어디, 뭐, 두통? 자꾸 그렇게 우니까 아프지.”
집 안을 뒤졌는지 찾은 두통약 하나가 입안으로 넘어왔다. 이어 그와 입이 맞닿았고 미적지근한 물이 넘어왔다. 꿀꺽꿀꺽 물과 약을 삼키고도 한참 동안 혀를 섞었다. 그러니까 이번이 첫 키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혀를 섞다가 그가 젖은 아래를 만져 주며 두 번째 삽입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거기서부터는 모든 게 드문드문이었다. 하필 또 앙앙대며 열심히 신음을 질렀던 건 기억이 난다. 잠에 취해, 약에 취해, 그리고 남은 술기운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아흐… 아앙, 거기.”
“어디, 뭐, 여기?”
“앙! 아! 하지.”
“하란 거야, 말란 거야. 뭐 어떻게. 해, 말아.”
“거기, 안. 아아!”
“괜찮으니까 그냥 싸. 뭐 한두 번 싼 것도 아니고.”
찰싹찰싹 엉덩이를 맞으며 흥분하고, 그의 성기를 꽉 맞물려 먹은 채 보짓물도 싸고, 싸면서 박는 좆을 먹고, 엉덩이를 때리는 대로 허리를 돌리며 날뛰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울지 좀 마. 너 울면 내가, 기분이… 씨발. 좀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섹스가 끝나고 훌쩍거리는 자신에게 분명.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돌아 버릴 거 같으니까, 제발 좀 그쳐. 코 자자.”
“이제 그만 잘 때도 되지 않았니.”
그리고 그의 가슴팍 안에서 남은 취기로 괴로워했던 것도.
술을 마시지 않는 건데. 트라우마에 맞서려 괜한 만용을 부리다 괴로워했던 자신이 똑똑히 생각났다. 엉엉 울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꼭 파묻던 자신의 등을 쓰다듬던 것까지.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워 넌.”
조용한 방 안에 어둠처럼 깔린 저음이었다.
“지켜 줄 수 있는 선까지 기어들어 가. 그 이상은 장담 못 하니까.”
기억이라는 게 무섭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처럼 가슴을 찌르고 들어올 때면, 무방비한 전쟁터에 노출된 것처럼 맨몸으로 맞서는 기분이다. 이 남자는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던 걸까.
“형님. 큰형님께서…….”
전화가 왔는지, 한참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서 남자를 끌어안고 있는데 등 뒤에서 시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뻗은 권석이 시백이 내민 것을 받아든다. 하지만 통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깔린 바다. 피비린내보다 더한 짠내가 훅 끼친다.
남자가 생수를 마시다 말고 제게로 뻗는다. 마시라는 뜻인가? 눈을 크게 깜빡이자 다시 한 번 생수통을 내미는 시늉을 한다.
“팔.”
팔. 아, 팔. 피가 굳은 팔엔 피딱지가 엉켜 있었다. 차언은 그가 내미는 생수 아래로 팔을 뻗었다. 쏟아지는 물에 팔을 씻고 그 손으로 엉망이 된 입술 주위를 문질렀다. 아까 그와 키스할 때 피 맛이 났으니 분명 입술 주위엔 피가 선명할 터였다. 근데 아깐 분명 괜찮았다. 그때처럼 패닉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정신 줄을 놓지도 않았다.
키스… 도 했구나, 아까.
차언은 곱씹듯 돌아온 기억에 더듬거리며 입술을 만졌다. 그러다 권석과 눈이 마주쳤다.
흠, 헛기침을 하고서 두 손끝을 만지작거리자 그가 손수건을 내민다. 차언은 말없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았다. 새로 보는 손수건이었다. 그가 자신의 원룸에 던지고 가듯 버린 손수건이 아니었다.
“마무리하고 와라.”
“예, 형님.”
물기를 닦고 손수건을 다시 내미는데 그가 그를 향해 열린 차 뒷좌석으로 걸었다. 차언은 손수건을 채 건네지도 못하고 그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타지 않은 채 돌아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자신을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차가 바닷가를 돌아 빠져나가고, 말없이 국도로 오르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말없이 시트에 기대 눈을 감고 있다. 좌석시트를 내려다보았다. 길고 섬세한 그의 손가락이 여차하면 제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붙어 있다. 정말 따뜻하던데 한 번 더 잡아 볼까. 내 손은 찬데. 순간 스친 생각에 차언은 스스로에게 더 놀라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잡고 싶은 거야. 자르고 싶은 거야. 왜 한번 빨아도 볼래?”
“예, 예?”
“그게 아니면 뭘 그렇게 눈을 못 떼고 봐. 떼서 주리?”
툭, 그의 긴 손가락이 시트를 두드린다.
“아, 아니요.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그런 의도가 아니면 눈 단속 잘 해. 오해한다.”
꼭 제 말만 하고 저렇게 끊어 버리는데도 할 말이 없다.
“차… 청소하신 거예요?”
푸핫. 순간 웃는 남자의 웃음에 차언은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다.
“네가 얼마나 싸질렀는데 그게 청소로 되겠어요?”
화제를 돌리려 한 말인데 또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같은 모델의 다른 차라는 소리를 참으로 친절하게 하고서야 뜻을 알았다. 더 말해 봤자 제 손해라는 것을 익히 깨달은 차언은 입을 다무는 편을 선택했다. 그러다가도 자꾸 잠결에 들은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기,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일 감사….”
“지겹지도 않니, 그 소리.”
나긋한 어조는 이 남자 특유의 음성이다. 조금도 들뜨지 않고, 놀라지도 않고 그래서 당황하는 자신이 외려 이상해지는.
담배를 찾아 가슴팍을 뒤적거리던 그가 이내 담배 없이 손을 툭 놓는다.
“왜 안 피우세요?”
“글쎄. 왜 안 피울까 싶네, 나도.”
다시 이어지는 정적에도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은 없었다. 그새 이 남자가 조금 편해진 걸까. 미친 생각을 했다.
“담배는 언제 배운 거야, 너.”
“아, 그거. 한 1년 전쯤에요.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어린 게 까져 가지고. 지랄도 가지가지로 하네.”
“스물넷이 뭐가 어려요.”
“뭐? 그거밖에 안 됐어?”
한쪽 눈가가 일그러지는 남자는 진심으로 놀란 기색이었다. 놀라는 남자를 처음 보는 거 같다. 이 남자를 알게 된 지도 이제 한 달은 훌쩍 넘은 거 같은데 처음 본 놀라는 얼굴이 제 나이를 듣고라니.
“어린애 따먹는 취미는 없는데.”
“조, 조용히 해요.”
어린애를 상대로 좆 선 것도 황당한데 그녀가 내린 명령조에 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버릇을 잘못 들여도 한참을 잘못 들였지. 너 말버릇 고쳐. 하루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차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네.”
그가 더 이상한 소리를 할까 차언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제 나이 모르셨어요? 하긴 가르쳐 드린 적이 없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한 건가.”
안 가르쳐 준다고 모를 남자가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참 순진도 하다. 라는 눈으로 그가 자신을 본다. 수지와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니 뒷조사도 어느 정도 했단 건데 모를 리 없었겠지. 하지만 자신에 관한 일은 새까맣게 잊었다는 쪽이 좀 더 적합한 추리였다.
“맨날 그 머리통으로 되도 않는 고민이나 싸매고 있으니까 애가 늙지.”
“예?”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겨서 생각하는 거 보면, 영.”
“아. 애늙은이. 제가요?”
“그럼 내가요? 말을 말자.”
그는 정말 말을 말자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가능해 보였지만 자신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실은 극도로 몸을 옥좼던 긴장이 풀리면서 저도 모르게 하는 횡설수설에 가까웠다.
“저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참 이사님 슈트 재킷이 저한테 있었는데, 곱게 못 돌려드려서 죄송해요. 얼마 하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사 드릴게요.”
“애새… 아가. 조용히 가자.”
자신도 말이 많은 편이 절대 아닌데 이 남자랑 같이 있으면 자꾸 혼자 떠드는 것처럼 느껴져 괜히 말이 많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오늘 일 감사하다는 말씀을… 아, 이건 지겹다고 하셨지.”
“넌 안 지겨우세요?”
“네. 자꾸 고마운 일이 생기니까요.”
“…이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언니가 그랬어요.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남한텐 신세 안 지려고 노력 많이 해요.”
“넌 그 노력 좀 그만할 필요가 있어.”
그는 쓸데없이 단정적이고 단호한 데가 있다.
“왜요?”
“그 정성을 좀 다른데 쏟아 봐. 안 피곤하니?”
“…제가 많이 답답한 거 알아요. 없이 커서 그렇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이렇게 살다 보니. 그래도 신세는 안 지는 게 서로 편하잖아요.”
남자는 말이 없었고 차는 고요히 도로를 달릴 뿐이었다.
“아무튼 도움받은 건 받은 거니까 제가 보답할게요.”
다른 무엇보다 예전에 그가 주었던 거액의 돈다발을 애란의 빚 갚는 데 덜컥 써 버린데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다. 어쨌든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은 셈이니까.
“돈 몇 푼에 식사, 뭐 그런 뻔한 사례면 미리 사양한다.”
“그럼… 제가 드릴 돈은 없지만 식사는 나쁘지 않으실 텐데.”
“흥미로워야 구미가 당기지. 맨정신에 한번 벗어나 보든가. 또 알아? 얼추 수지가 맞을지.”
저런 말을 어쩜 저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할 수 있는 거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그는 여유작작한 얼굴로 담뱃불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네가 어떤 답을 하든 호락호락하게 들어주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너무도 적나라해서 몸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왜, 싫어?”
차언은 허벅지가 드러나 있는 제 치마를 끄집어 내렸다.
“다 봤는데 숨기면 뭐 하나.”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그가 웃는다. 묻는 것도 힐난하는 것도 아닌 묘하게도 나긋한 어조. 그의 특유의 어투는 꼭 사람을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괜히 제가 철없이 느껴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길이가 짧아 더 내려가지도 않는 치맛단을 꾹 잡았다. 그의 잇새로 픽 웃음이 터졌지만, 조롱은 없어 뵀다.
“잘한다. 이런 거나 입고 있으니까 그 새끼들이 만지려 들지. 빤스도 그냥 다 보여 주지 왜.”
가진 돈으로 취향에 맞는 옷을 사느니 그걸 모아서 학비로 보태는 게 더 낫다는 걸 이 남자가 알까 싶었다.
“안 그래도 다 보여 줬어요.”
순간 처참할 정도로 구겨지는 남자의 미간을 보며 차언은 이게 맞는 대답이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아, 이어지는 한숨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애새끼 하나 키우기가 이렇게 힘들다.”
“키워요? 저를… 요?”
“그게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네 뒤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됐다. 차언아. 입 닫고 가자. 알았지?”
“아 혹시 언니 때문에…….”
차언은 말을 하다 말고 접었다. 언니 얘기는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와 함께 나눠 봐야 더 좋을 게 없었다. 아픈 기억만 자꾸 반추할 뿐.
“어, 어쨌든 제가 많이 가진 분들한테 뭘 해 드려 본 적이 없어서. 뭘 원하시는지 잘 몰라요. 그래도 필요하다면 해 드릴 수 있어요. 말씀하시는 그런 거 말구요.”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뭘 보답할 건데. 네가 뭘 줄 게 있어서.”
감사 표시조차 이렇게 찍어 눌러야 하나? 계속되는 핀잔에 저도 모르게 불쑥 속내가 튀어 올랐다.
“…네. 죄송하네요. 드릴 것도 없는데 주제도 모르고 그런 말씀드려서. 전 그냥 감사의 뜻으로…….”
“필요하면 네 발목이라도 한 짝 줄래?”
이 남자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더 들을 거라고는 상상치도 않았는데, 그녀의 표정이 굳어질수록 남자의 입꼬리는 깊어졌다. 놀리는 거지, 지금? 차언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제 심정을 입 밖으로 표할 수는 없었다.
“왜, 그건 또 싫어?”
아깐 그렇게 안아 줘 놓고서 이제 와서 발목이라도 자를 거라며 묻는 남자. 말은 살벌하지만 그가 실천에 옮기지 않을 거란 걸 이제는 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발목을 자르고도 남았겠지만 자신에겐 그러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찌릿찌릿하고 몽글거리는 그런,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기분이.
“내 인력을 고작 밥 한 끼로 퉁치시겠다? 쉽게 사네.”
하지만 곧장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차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잇새에서 새는 나른한 숨이 괜히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저 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차라리 웃으려면 아주 활짝 웃든가.
“…죄송.”
아니, 하나도 죄송하지 않다. 은혜를 입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을 이유는 없으므로. 하지만 입을 열어 봤자 계속 도움이나 받는 처지에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제 주제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게 이렇게 서글프다니.
“그렇다고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자꾸….”
“그럴 거 아니면 보답이니 갚겠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마. 네 얄팍한 대가리로 사람 떠보는 거까지 일일이 대거리하고 싶지 않다.”
그는 정말로 대꾸해 주기도 피곤하다는 기색이었다.
“대가… 제가 뭘 그렇게 잘못… 전 그냥.”
“캐파도 안 되면서 좋은 사람인 척은 하고 싶고, 정작 그 잘난 몸뚱이 아니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자존심은 내세워야겠고.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건 네 친구들한테나 가서 해. 같잖은 천사병 좆같으니까.”
“…하여튼 저 말발.”
“뭐?”
“아니요. 혼자 중얼거렸어요.”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또 들었는지. 차언은 금세 꼬랑지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기가 찬다는 얼굴에 다행히도 노기는 없어 보였다.
자신과 달리, 아니 자신이 살며 여태 보아 온 사람 중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무리 둘러 가도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다. 약속을 지킬 수도 없으면서 그냥 해 보는 겉치레 같은 건 원하지 않는 남자.
맞다. 가식. 따지고 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니까. 선의냐 악의냐는 그냥 마음에 달린 것일 뿐. 어쨌든 거짓말이었다. 해 줄 수도 없으면서 마치 할 수 있는 것처럼 입만 살아 나불대는 거짓말.
맞는 말이지만 구태여 촌철살인을 하며 자신을 자극하는 남자가 괜히 얄미워진다. 하지만, 하지만. 웃기게도 정말 수틀리면 대가리를 사정없이 잘라 가는 이 남자가 자신 편임을 알기에 조금은 마음이 풀린다. 그래서 실없는 농담이 나온다.
정말 미친 게 틀림없지만 이 남자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에. 발목 한 짝을 잘라 가겠다는 무지막지한 말을 하고 있지만 정말 제게 행동으로 옮길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너 어디 갈 데는 있어?”
아까부터 거슬렸는지 그가 손을 뻗어 긁혀서 굳은 피에 붙어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준다. 딱히 애정이 어려 있다기보다는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물건을 치우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늘 단정하고 깔끔하다 못해 단추 하나도 허투루 채우지 않은 것처럼 정갈하기까지 한 옷매무새로 나타나는 걸 보면 이 남자의 성향을 알 것도 같았다.
가볍게 던지는 돌 하나에 개구리는 죽는다고, 그가 이런 행동을 애란에게도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애란이 이 남자에게 비즈니스 이상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가벼운 궁금증이 구체적인 생각들로 이어지자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왜 이렇지. 차언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네. 며칠 정도 애란 언니 집에 있으면 돼요.”
“퍽도 안전하겠다.”
왜였을까. 만에 하나, 그래서 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 남자가 뒤에 서 있을 거 같은 기분.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는 짐작이었지만. 그럴 거 같은 막연한, 든든한 믿음. 그런 기분은 태어나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내려.”
차가 알 수 없는 곳 앞으로 정차했다. 병원 앞이었다.
“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얼음찜질 몇 번만 하면 가라앉을 텐데…….”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얼른 내리라는 남자의 무언의 압박에 차언은 난감해졌다. 괜찮다는데도 막무가내다.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푹 한숨을 쉬는 그가 손을 뻗는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는데 목으로 그의 팔이 감겼다. 그리고 그가 감아 놓은 팔을 그의 얼굴 쪽으로 바짝 당겨 창밖을 보게 했다. 남자의 얼굴이 제 옆에 있었다. 진한 남성의 향기가 코앞까지 붙었다. 그의 날렵한 콧대가 코앞에 있었다.
놀라 큰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데 남자가 손가락으로 창문 너머를 가리킨다.
자신의 은밀한 치부를 저급하게 쑤시기도, 엉엉 울던 등을 토닥이기도 했던 커다란 손, 기다란 손가락, 단정한 손톱. 차언은 정신을 차리려 헛기침을 했다.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엔 모자 캡을 푹 눌러쓴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저기, 모자 쓴 남자 보이지. 저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꺾어.”
“…….”
“응급실 가서 의사선생님 만나고 약 바르고 나와. 쉽지?”
유치원생 대하듯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설명을 하는 그가 ‘음?’ 하고 재차 답을 촉구했다.
놀리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장난처럼 말하면서도 여전히 무서운 눈을 한다. 병원엔 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으니 무서워 그러는 건가 싶어 다독이는 듯도 해 보였다. 물론, 이 이상 싫다고 했다가는 바로 돌변하겠지만.
“주사 안 아프게 놔 달라 하고.”
말과 행동이 묘하게 다른 남자다. 발목을 달라니 자르니 마니 할 땐 언제고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자신을 설득할 땐 자상하게 설명까지 한다. 물론 협박에 가까웠지만. 이상하게 대놓고 어린애 취급을 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어리광이나 부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의 언중에 조롱은 없어 보여서. 무엇보다 자꾸 챙겨 주는 거 같아서.
이런 것도 다 착각일 텐데.
여기서 또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면 대번 험악한 말이 튀어나올 거다. 이젠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왜, 병원도 바꿔 가야 해? 시백아 여기서 다른 병원 얼마나 걸리냐.”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말 들어. 오늘은 내가 기력이 딸려서 더 혼낼 여력도 없다.”
언니의 장례식을 치렀던 병원이긴 하지만 더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가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뭐라 더 대거리하기도 귀찮아 보이는 그의 얼굴이 멀어졌다.
시백이 차 문을 열어 나오라고 협박했다.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지만 그건 소리 없는 협박이자 압박이었다.
결국 응급실로 가 간단한 처치와 처방을 받고서야 다시 차로 올라탈 수 있었다. 그제야 출발한 차가 익숙한 동네로 길을 잡는다.
“며칠 더 쓰릴 거야.”
나지막한 저음이 신기하게도 심신을 안정시킨다. 남자의 목소리는 희한하게도 그랬다.
“괜찮아요. 많이 맞아 봐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쳐다보는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자신의 손목을 자르겠다고 도끼를 들고 있던 남자와는 분명 달랐다. 제 팔다리를 자르겠다, 같은 말을 하지만 다른 눈을 하고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최 실장 통해서 연락하고.”
남자가 앞좌석으로 한 손을 뻗자 시백이 두말 않고 명함 하나를 그에게로 건넸다. 권석이 명함을 제게로 내민다. 그 모습조차도 무례했다. 딱히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 몸에 밴 행동 같았다. 손가락 사이에 대충 껴 내민 명함 한 장. 받지 말아야 하는데, 차언은 거절하지 못하고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어쩌면 그와의 유일한 접점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하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지만 자신은 아니니까.
그게 성 회장의 명령이든 뭐든 그의 마음이 돌아서 버리면 끝이니, 감사 인사든 뭐든 이쪽에선 연락할 수가 없게 된다.
시백의 명함엔 휴대전화 번호까지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넌 곱게 대답하면 아가리가 찢어지기라도 해?”
“아, 네. 그럴게요.”
자신의 성미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는 그를 따라잡기엔 늘 한 템포 씩 느린 차언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저 남자와 맞추려면 얼마나 재깍재깍 몸과 마음을 굴려야 하는 건지, 새삼 앞좌석에 있는 그의 수하들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리세요, 정차언 씨.”
그가 내리지 않고 있는 자신을 보며 말했다. 장난처럼 말하지만 결코 장난같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 그래서 무서웠고 또 그래서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고요하고 조용한 골목엔 어느새 붉어 눈이 부신 아침 해가 내리쬈다.
고맙다는 말은 앞서 많이 했으니 이젠 내려야 한다. 닿을 듯 말 듯 하던 새끼손가락이 툭, 닿았다. 시트에 몸을 기대 나긋하게 이쪽을 보는 얼굴이 유유하다. 태생이 두려움 따위는 가져 보지 못한 눈. 어떤 생을 살아왔으면 저런 눈동자를 가질 수 있는 걸까. 얼마만큼의 못 볼꼴을 보아 왔으면 저리도 단단할 수 있는 건가. 문득 그게 무섭다가도 저 남자의 단단함이 탐나기도 했다. 저런 남자가 확실하게 제 편이 되 주겠노라 하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을 텐데.
감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업신여기며 함부로 손을 뻗을 순 없을 텐데. 싫다는 자신을 끌고 가며 뺨을 때리던 석진도, 석진을 어떻게 했냐며 목을 조르던 남자들도, 자신을 술집여자 취급하며 욕을 일삼던 남자들도.
이 동네에서 구원은 셀프다. 그게 버거워 스스로 삶을 놓아 버리는 사람들 틈 속에서 자신은 끈질기게 버텨 왔다.
손님을 상대하며 감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 역시 파도처럼 섞여 갈 뿐인 나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대쪽 같은 남자의 무례와 강인함이 부러웠다.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자신의 인생에선 처음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약한 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는 동네 양아치 석진과는 달랐다.
그의 오만무도함에는 아래위가 없었고,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자신의 발목 한쪽은 부러뜨리기는커녕 제대로 움켜잡지도 않으면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남자들의 발목은 망설임 없이 끊어 놓는다.
자신에게도, 자신이 여태 보아 온 사람들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폭력성을 갖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아니라고 덤빌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선망과 끌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차언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 남자는 독이 든 성배다. 감히 마시려 했다간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할 위험한 남자.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낯선 남자 손에 붙잡혀 능욕당하다시피 개죽음 당하느니 차라리…….
그와 밤을 보내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차언은 스스로를 질타했다.
그가 자신을 키운다고? 돌본다는 말을 남자의 식대로 표현한 거겠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괜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제 더 이상은… 애란 언니랑 마음에도 없는… 그런 거요. 제 신상을 염탐, 하고 그런…….”
그렇게 말했을 때 그래서 그가 화를 냈던 걸까. 그만 자신을 지키고 감싸라고 했던 뜻이었지만 말이 거칠게 나갔었다. 염탐이라는 둥 감시라는 둥. 그럴 거면서 정작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자신. 그가 없었다면 얼마나 곤혹스러운 상황이 이어졌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의 말이 맞다. 자신은 그에게 해 줄 것도, 아니 스스로 내 한 몸 지키는 것도 힘든 주제에 강한 척이나 하고 있었다. 여태 그렇지 않으면 안 됐으니까. 강한 척하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하고 밟으려는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
한동안 말없이 맞닿은 손끝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차언은 헛웃음이 나와 조금 웃었다. 고개를 드는데 여전히 턱을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불현듯 궁금해졌다. 이 남자,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렇게 대할까. 이렇게…….
“눈깔 간수 잘하라 그랬지. 오해한다고. 단속이 잘 안 돼?”
자상하게 병원까지 데려다 놓을 땐 언제고, 조금 거슬리게 한다고 또 속을 긁는다.
그럴 거면 명함은 왜 줘. 저는 되고 나는 안 되고. 차언은 머릿속이 부글거렸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이 남자가 무섭기도 했고.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말과 행동이 너무 대놓고 달라서.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이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기도 했다. 무엇이 진심인지 궁금해졌다. 그의 험악한 말을 믿어야 하는지 다정한 행동을 믿어야 하는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까 이 남자가 없었다면 십중팔구 팔이 잘려 나갔거나 팔다리가 다 잘려 나갔거나 둘 중 하나의 확률로 인천 바다에 던져졌을 거다. 여전히 자신은 살고 싶다는 걸 알았고, 이대로 언니처럼 죽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사님께서도 좋아하실 거 같긴 한데 그 집 음식 나쁘지 않거든요. 제 발목보다는…….”
“어, 생각 없어.”
“…….”
“뭔데 그게. 뭐길래 그, 됐다. 가 봐.”
더 대거리해 봤자 골만 아프다는 듯 그가 대충 가라고 손짓을 했다.
내리려 문을 열자 달칵, 금속 라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 참고 있기라도 하듯 담뱃불에 붙을 붙이는 듯했다.
“너.”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여전히 담뱃불은 붙지 않았다.
“그 옷.”
그의 눈을 빤히 마주 바라보는 순간 시백이 권석을 나지막이 불렀다. 중요한 일인 듯 핸드폰을 건네는 시백을 보며 그가 됐으니 그만 가 보라며 다시 손짓을 휘 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건물 입구에서 애란이 나오는 게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목욕탕엘 갈 생각이었는지 손엔 작은 바구니와 그 속엔 목욕용품이 가득 있었다.
“차언아. 너 어디 갔다가 이제, 너 얼굴이… 무슨 일 있었어?”
애란의 눈이 곧장 검은 세단으로 향했다.
권석의 차를 발견한 그녀가 안이 보이지도 않는 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슬퍼 보였다. 묻지 않았지만,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것. 감춰 보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것.
애란의 눈이 흔들린다. 수지도 해 보았고, 자신 역시 주제도 모르고 언젠간 꿈꾸었었던 그 간질간질하고 심장 터질 듯한 감정.
그것이었다.
차언은 무릎을 끌어안고서 약이 입혀진 입술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따뜻하게 닿았던 감촉이 떠올라 자꾸만 저도 모르게 혀를 내 입술을 훑어 본다. 씁쓸한 약맛만 느껴지는데 이상하게도 달콤한 기분이다.
“많이 따가워?”
걱정 섞인 목소리로 따뜻한 우유를 내어 온 애란이 차언의 턱을 들어 다친 얼굴을 살폈다.
“뭐 하다 이렇게 된 건데.”
어르고 달래 줄 사람도 없다면서 등을 받쳐 안고 작은 한숨과 함께 쓰다듬는 손이 따뜻했다. 그날 밤에도 손이 따뜻했던가.
말은 험악하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는 손.
입술에 와 닿는 열기와 등을 쓰다듬던 손길. 그날 밤, 격렬했던 섹스가 거짓말 같게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던 부드러운 키스.
키스… 자신이 붙잡혀 간 걸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생각 말자. 차언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선 안 돼. 알잖아. 얼마나 유해한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차언은 스스로를 꼬집었다. 제 주제에 이성이라니. 남자라니. 그것도 문성 이사…. 언제부터 팔자 편하게 남자 생각이나 했다고.
돌이켜보면 그때…….
“웬만하면 그 입 닫는 게 좋을 거야. 학자금대출에 쪼들릴 텐데 이 집이라도 지켜야지.”
시백이 그렇게 말했던 것도 그녀 편하라고 했던 소리였다. 자신이 말을 하든 안 하든 권석은 그들을 죄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을 테지만 자신은 그들의 위협에 시달릴 테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자신으로선 훨씬 편하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니.”
“누가 이랬어. 뺨 부은 거 웬일이니.”
“김석진…….”
“김석진? 그 새끼 어디 있었어? 미친 새끼, 그럴 줄 알았어. 어디 짱 박혔다가 이제 나타나서 손찌검이야. 미친놈이. 어디 봐. 많이 아파?”
김석진이 아니라, 김석진이 얽혀 있던 조직폭력배들.
차언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편이 서로 나을 성싶었다.
“이사님이랑은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애란이 조심스레 묻는다. 긴장이 번진 눈가, 초조함이 담긴 입술, 그 얼굴을 보는데 차언은 한순간에 들떴던 심장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입안이 씁쓸했다.
방 한편에 쌓인 소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애란은 마사지 숍 일을 시작하고부턴 일하는 시간 외엔 술을 잘 입에 대지 않았다.
몸 파는 년이 술까지 정신 놓고 마시면 정말 답도 없을 거 같아서. 애란이 언젠가 제게 했던 말이었다. 카드값 때문에 힘들 때나, 진하게 했던 연애가 끝날 때나, 돈 때문에 속상할 때, 그럴 때나 술을 마셨던 거 같은데.
“둘이 어제 같이 있었어?”
“…어쩌다 보니.”
“그랬구나. 아,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도 다행이다, 야. 해장국 배달시킬까? 식전이지, 너도.”
애란이 제 눈치를 보며 코 밑을 훔친다. 휴대전화를 찾으며 어설프게 웃는다.
“참, 며칠 여기 있겠다고?”
그 뜻을 너무도 잘 알아 서글펐다. 차라리 눈치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방지축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왔으면 지금보다 조금 더 편했을까.
“이사님 향수 냄새 나네. 야, 옷에 피도 묻어 있어. 뭘 했길래. 줘 봐. 빨아 줄게.”
“언니.”
“어?”
“이사님 좋아해?”
애란은 답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뜻을 알고 더는 묻지 않았을 거다. 더는 추궁하듯 캐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꼭 먼저 물어 달라는 듯이 애란이 먼저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자꾸, 자꾸, 그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그 남자에게로 주제를 돌린다.
“좋아해? 차권석.”
* * *
권석은 모두가 떠난 아무도 없는 회의실 상석에 홀로 남아 있었다.
손끝에서 홀로 타고 있는 담배도 더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지져 끄고 라이터를 의미 없이 달칵거렸다.
죽음에 초연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무서워하던 얼굴, 모텔 방 앞에서도, 어젯밤에도, 그런 등신 같은 얼굴로 약점을 내보였으니 김석진 같은 새끼가 껄떡거리지. 못마땅했다. 기분이 더럽다.
멱 하나 더 따는 건 문제가 아닌데, 왜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게 이렇게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불투명한 것만큼 좆같은 것도 없었다. 논리를 앞뒤 맞춰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라는 소리기도 했다.
“이 씨발. 집에서 하는 일이 없으면 살맛이라도 좋아야지. 뭐 바람? 네가 잘해 봐. 내가 딴 년을 찾나.”
이젠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 법도 한데. 기억이라는 건 쓸데없이 능력이 좋아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 일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놓는다.
모친이 부친한테 맞아 죽었다. 모친은 끝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탈출을 택하지 않았다. 도망쳐 봤자 시궁창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시궁창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정차언, 그리고 이제는 그 의지마저 꺾여 미용실 한구석에서 시들어 버린 정차언.
목숨이라는 게 참 가볍고 하찮다. 태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지만 죽는 법은 십 수만 가지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자초하느냐, 아니냐 그 두 가지뿐.
혈육을 끊어 내듯 애비라는 사람과의 연을 제 손으로 도려냈다. 모친의 죽음을 그렇게 단죄했다. 그리고 성 회장을 만났다.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애비라는 인간을 담그러 온 성 회장과. 그게 성 회장과의 첫 조우였다.
“…….”
권석은 영어로 쓰인 계약서를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어쩌다 보니 길어진 가방끈은 유용하게도 쓰였다. 딱히 착실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할 거 잠깐 대가리 굴려 졸업장만 따 두는 셈 쳤다.
이 바닥에 있다고 주먹질이 다라고 생각하면 순진한 판단이다. 그걸 너무도 일찍 깨달아 버린 게 피곤했다. 주먹질 아무리 잘해 봐야 대가리 쓰는 놈은 이기지 못한다는 걸 웬만큼 굴러먹은 놈들은 알고 있었다.
칼 들고 설칠 시간에 서서히 코너에 몰아넣고 쥐도 새도 모르게 손발을 자르고 손쉽게 대가리만 따면 그뿐이니까. 굳이 일을 키울 필요 없이 일 처리가 가능하다. 권석은 무감하게 라이터를 달칵거렸다.
“그럼… 제가 드릴 돈은 없지만, 식사는 나쁘지 않으실 텐데.”
“흥미로워야 구미가 당기지. 맨정신에 한번 벗어나 보든가. 또 알아? 얼추 수지가 맞을지.”
당황으로 얼룩졌던 눈.
세상 고달픈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생의 실상을 모르는 순진한 눈이다. 순진무구한 눈동자. 더럽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가학심이 솟구치다가도, 이 더러운 꼴을 너는 모르게 지켜 주고 싶다가, 제 밑에서 처참히 우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 말간 눈을 보고 있으면 십수 가지의 감정이 복잡하게 엉킨다.
그렇게 제 언니가 좋아 못 살았으면서 제 언니와 성 회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뭔 짓을 했는지는 몰랐을 테지. 하여튼 헛똑똑이가 따로 없다.
모텔에서 10년을 살았다고 덤덤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제 눈앞으로 한데 뒤섞여 떡치는 꼴을 보여 줬을 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거리던 입술이 웃겼다.
더 더럽고 추잡한 꼴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된다면 저 역시 미친 건가.
또 매달려 엉엉 울기라도 하려나. 멍청한 상상이다. 이딴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우는 거 좋지, 좋은데. 자신이 울리는 건 좋지만 딱 거기까지가 유쾌하단 게 문제였다. 무엇 때문에 우는 건지 이유 불문, 자신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좆같다.
말을 바로 하자면 김석진의 처단 이유는 그거였다.
제 심기를 상하게 했으니, 그것만으로 이유는 차고 넘겼다.
김석진을 죽게 만든 원인이 실은 정차언 본인이었단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픽, 별안간 웃음이 샜다. 즐거운 상상이다. 위험한데.
시백이 가져다 놓은 정차언의 명품 가방을 무감하게 바라봤다. 아주 빚 한번 지면 세상 무너지는 줄 알지. 적당히 눈 감고 귀도 좀 닫아야 살기 수월할 텐데. 그걸 할 줄 모르니 그리 고달픈 거다.
정차언 말이 맞다. 더 이상 애들을 붙여 마킹할 필요가 없는데, 뭐 어디 잡혀가든 팔려 가든 나설 필요가 없는 건데. 신경 쓰이게 해서 괜히 사람 귀찮게 만든다.
자신이 그렇게 충동적인 사람은 아닌데 머릿속을 충동질하듯 파고들어 장악하는 그 여자 때문에 골이 아팠다.
한참을 꽁초가 처박힌 재떨이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회의실을 나오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을 열고 시백이 들어왔다.
시백이 들고 있는 휴대전화가 반짝거렸다. 아는 번호다. 방금까지, 상상만으로 그를 퍽 즐겁게 해 준 존재, 정차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