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 Station RAW novel - Chapter 6
06.
차언은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권석을 외면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이사님 항상 넥타이 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마침 언니도 볼일이 있다고 해서 같이 나왔어요. 바쁘신데 제가 전화드렸죠.”
함께 나온 애란은 보지도 않는 채 남자의 시선이 따갑도록 제게만 꽂힌다.
“그… 맛없는 식사 대접보다는 그게 나으실 거 같아서…….”
일을 하다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정장 차림인 이 남자에게 싸구려 넥타이를 사 줄 거라며 떠드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어제까지도 이 남자와의 키스를 곱씹었으면서 그런 것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듯 웃고 있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좋아하냐고 묻는 물음에도 대답을 않던 애란이 그날 밤 술을 잔뜩 마시고 집으로 들어왔다.
“차언아. 나, 나, 말이야. 이사님 좋아해. 좋아해, 차언아. 이러면 안 되는데…….”
술에 취해 주체하지 못하고 울던 애란이 두 손바닥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한테 너무 질투 나서 사실은 네가 조금 미울 때도 있었어. 이러면 안 되는데. 처음으로 네가 원망스러웠어.”
“언니.”
“추하다, 진짜. 질투할 사람이 따로 있지. 내가 감히 너한테 질투를… 내가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언니 취했어.”
“근데도 있잖아. 자꾸 보고 싶어. 차언아. 너는… 넌 그 남자가 아니어도 되잖아. 넌 쉽게 포기가 되잖아. 알아 나 추접스럽지. 근데 난, 나는, 어흐윽. 정말 내 마지막 남자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 이런 감정 처음이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거…….”
처음이었다. 애란이 마음에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꺼내며 도와 달라 애원하던 건.
그녀의 오빠가 온갖 망나니짓을 하며 이 동네를 들쑤실 때도 힘들다 말 한마디 않던 애란이었다.
“오빠란 새끼가 또 찾아올 거고, 나는 또 언제 팔려 갈지 몰라서 너무 무서워. 그 사람이 있으면 나 정말 괜찮을 거 같은데. 너한테만큼은 정말 이런 말 하기 싫었는데.”
“하지만 언니 그 남자는…….”
차마 자신과 그런 일이 있었다 말하지 못해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상관없어. 나 다 알고 만나려고 하는 거야.”
무얼 다 알고 만난다는 건지 애란이 대뜸 자신의 말을 받아쳤다.
사랑이란 게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건지 몰랐다며 가슴을 쥐어뜯는 애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차권석과 더 이상 만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넌 수지 옆에 없었잖아. 난, 난 수지가 죽기 전날에도 같이 있었어. 우리 같이 있었어. 나 그 정도는 너한테 부탁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정차언 네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던 순간에도 자신은 곁에 있었다고, 죄책감을 자극했다. 자신이 없었던 그 많은 날들을 내가 대신해 네 빈자리를 채웠다고, 차언의 약한 부분을 흔들고 자극했다.
“이번 한 번만… 더 안 바랄게. 정말이야.”
그렇게 울던 애란을 보면서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차언은 애란이 잠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언니, 내가 그러면 언니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잠이 든 애란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맞다. 그 남자가 아니라도 자신은 포기가 익숙하니까. 없는 것에 적응하느라 늘 애썼는데 하나 더 보탠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성에 대한 끌림,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그 남자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뭐 대단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애란이 취중진담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확실히 자신을 대하는 분위기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을 보기가 껄끄럽고 또 미안하고. 얼굴 속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애란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그럴 수 없으니 애란만큼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은, 조금은 진심.
백화점 매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권석을 힐끔거린다. 일반 남성 매장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남자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주머니 사정으론 명품관은 턱도 없으니.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그저 뭐 어디까지 할 요량인지 지켜보기라도 하듯 자신만 바라보는 남자가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곁에 서 어쩔 줄 몰라 웃고 있는 애란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싶었다. 팔자에도 없는 사랑이니 뭐니 그런 헛된 꿈 꾸지 말고 이젠 열심히 일해서 복학이나 하면 다 끝날 일이라고.
어차피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받으며 사는 인생은 아니었잖아.
여기서 나가서 다른 매장으로 들어가자고 한대도 들어 먹어 줄 남자가 아니었으니 대강 골라야했다. 싸구려 넥타이를 골라 그의 목 아래로 들이밀어 보았다. 옷걸이가 좋으니 어떤 걸 갖다 대도 다 잘 어울리는구나. 차언은 되는대로 집어 들고서 계산대로 들고 갔다. 어차피 보답은 핑계일 뿐이고, 이 자리는 애란을 위한 자리였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차언은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지끈거렸다.
이제 더위도 한풀 꺾여 아침저녁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건만, 열대야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자꾸 울면 쟤들이 잡아간다.”
어지러워 몸에 힘이 풀린 자신의 귓가에 한숨처럼 속삭였던 남자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잡아가지 못하게 붙들어 주면서 말은…. 고개를 저었다. 뭐 언제는 누가 붙들어 주는 게 익숙했나. 누가 눈을 가려 줘야만 진정했나. 기대 버릇하면 혼자 설 수가 없잖아. 제 팔자에 사랑은 무슨.
“차언아. 뭐 해. 안 타?”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멍청히 바라보던 차언이 안으로 올라탔다.
무슨 정신에 선물을 샀는 건지도 모르겠다. 넥타이가 든 봉투를 든 애란이 의아해한다.
등 뒤에 그 남자가 서 있다. 사람이 더더욱 몰려든다. 엘리베이터가 만석이다. 등 뒤로 달라붙은 남자의 가슴이 단단하다. 밀어도 밀리지 않아 덕분에 중심을 붙잡고 섰다.
목덜미로 쏟아지는 그의 스킨 향을 들이마시듯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도 자꾸만 팔이 맞닿는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애란과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 닿았던 손을 치우고 두 손을 맞잡았다. 남자의 시선에 몸이 뜨겁다. 한데도 가슴 속은 끝도 없이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그답지 않았다. 순순히 이름도 없는 백화점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싶더니 자리에 착석한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산인 거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대충 자리는 만들었으니 빠져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화장실을 간다고 나가면 되려나. 이런 것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자신은 영 어설프기만 하다.
일부러 그의 맞은편 자리를 애란에게 양보했다. 차언은 힐끗 입구 쪽을 돌아봤다. 시백과 종섭, 그리고 낯익은 남자 몇이 입구 쪽을 지키고 있었다. 설마 화장실을 간다 하면 비켜는 주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대충 주문해 놓은 음식이 나왔다.
“아, 언니가 면 요리를 좋아해요. 이사님께선 뭘 좋아하시는지 말씀을 안 해 주셔서. 참, 영화표가 생겼는데 혹시 이사님 영화 좋아하세요? 바쁘실 텐데 시간이 되시려나.”
여전한 침묵에 차언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힐끗 쳐다보는 애란도 땀을 삐질삐질 흘려 대는 제게 미안한 눈치였다. 무엇 때문인지, 쳐다보는 권석의 시선에 가슴이 미칠 듯이 발열하는데 두 번 다시 못할 짓이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먼저 드시고 계세요.”
피식 웃는 웃음이 노골적이다. 차언은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움찔했다.
아예 테이블에 팔을 얹고 턱을 괸 그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이쪽을 본다.
“아니지. 거기서 그냥 가면 안 되지.”
내내 한마디도 않던 그의 목소리였다.
차게 식어 버린 말이 뾰족하게 날이 서 차언을 찔렀다.
“정성이 지극한데 하다못해 방 잡는 거라도 네 눈으로 보고 가야지. 안 그래?”
이런 어쭙잖은 작전이 그의 눈을 속였을 리 만무했다.
“귀엽게 굴길래 몇 번 장단 맞춰 줬더니 끝이 없네.”
말이 없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린다. 순간 싸늘하게 바뀌는 눈동자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시백아.”
부름에 즉각 다가오는 남자가 흐트러짐 없이 고개를 숙인다. 여전히 권석의 눈은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호텔에 룸 하나 잡아라. 지금 간다고 해.”
“예, 형님.”
곧장 가슴팍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는 시백이 자리를 떴다. 차언은 오도 가도 못 하고 굳은 채 서 있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권석이 처음으로 애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해, 일어나.”
“네, 네?”
“나더러 이거 하라고 너네 둘이 쇼한 거 아냐? 수준 맞춰 놀아 주겠다잖아.”
냉담한 목소리가 가슴을 할퀴고 목구멍을 쑤신다. 그럼에도 자신은 온전한 내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감히 손을 뻗을 용기가 없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무엇을 내 것이라 욕심 부려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땐 친구들이 가던 피아노 학원을 포기해야 했고, 학창시절엔 좋아하던 학생회장 선배의 고백을 거절해야 했다. 그렇고 그런 동네에 산다는 자신의 소문이 그를 괴롭힐까 봐서였다.
그냥, 그렇게 놓는 것이 익숙했다.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게 어색하다.
“넌 쉽게 포기가 되잖아.”
지금도 그 연장선일 뿐이었다. 그럴 뿐인데 왜 이렇게도 가슴이 아픈 것일까.
멀거니 서 있는 자신의 눈앞에 다가온 권석의 가슴팍이 보였다. 그의 넓은 상체에 고급 재질의 넥타이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산 싸구려 넥타이 따위는 감히 넘보지도 못하는 가슴팍.
“너는…….”
말을 잇지 않고 짤막한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잠깐 생각을 고르는 듯 자신의 머리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기분 맞춰서 몇 번 끌려다녀 주니까 내가 좆으로 보이지, 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노기를 참는 남자의 잇새에서 억눌린 숨이 터진다. 그가 탁, 차언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별다른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차언은 어깨가 아파 와 눈을 감았다. 사실은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어 내민 핑계였다.
“너한테 내가 얼마나 쉬워 보였으면 사람을 이 지랄로 갖고 놀 생각을 했겠어.”
“…이사님.”
“내가 그간 너무 친절했다. 그치?”
과호흡이 올 것만 같았다. 숨이 목구멍에 걸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맴도는 기분.
이런 기분일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이사…….”
“왜, 이렇게 된 거 너도 낄래?”
“아…….”
“뭘 놀라 놀라긴. 셋이서 떼씹이라도 하잘까 봐. 이왕 판 벌인 거 저년 구멍에 좆 들어가는 거까지는 봐야 할 거 아냐. 어떻게 싸지르나 보면 더 좋고.”
그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접힌 냅킨을 대충 끌어와 손을 닦으며 지껄였다. 그는 펼쳐 닦은 냅킨을 걸레짝처럼 테이블로 던지곤 재차 눈짓하며 묻는다.
네가 저지른 대로 제대로 천박하게 굴어 주겠다는 듯 그가 전에 없이 더러운 말을 지껄이며 그녀를 괴롭혔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을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도 늦은 후였다.
“나랑 얼마나 더 재미를 보고 싶어서, 네가. 어?”
차언은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두 눈동자와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싫어? 싫으면 치우고.”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스쳐 지나갔다. 애란의 손목을 낚아채 듯 붙잡은 채였다.
“뭘 해 주면 돼, 이리 따라 나와.”
남자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권석과 애란이 사라졌다. 뒤돌아볼 용기가 없었으나 그것만은 확실했다.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다. 시백이 잡아 놓은 호텔 방으로 두 사람이 함께.
남자의 향수 향기만 빈자리에 남아 있었다.
골목을 걸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 잘된 일이다. 뜻하는 바대로 됐잖아. 애란과 그 남자가 함께 사라졌고, 두 사람은 함께 있을 거고. 뜻하는 바대로 다 잘됐는데, 넌 왜 울고 그래.
차언은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직 오지 않았는지 2층은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그냥 끝내면 돼. 그러면 되지, 뭐. 뭐가 어려워. 바쁘게 일하다 보면 이런 생각들은 할 여유도 없을 텐데. 몸이 덜 고달파 그런 걸 거다.
두 사람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갇힌 방에서 남녀가 뭘 하겠어. 바보 같긴.
“…….”
애란을 원망할 것도 없었다. 그를 포기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언은 어느새 턱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빠르게 닦아 냈다.
부는 바람에 습기가 없어 조금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 지긋지긋한 여름도 다 가고 이제 곧 8월도 끝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복잡하면 몸이 바쁘면 된다고 했잖아. 그 남자가 그랬잖아.
차언은 가다 말고 멈춰서 심장을 부여잡았다.
뭐부터 해야 바쁠까. 복학. 취업준비. 지금으로선 당장 떠오르는 게 그뿐이었다.
아직 학비와 생활비를 같이 해결하기엔 빠듯해 예정에는 없었는데, 지금으로선 뭐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복학도 하고, 일도 하고. 새삼 바쁜 일상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당장에 집이 나갈지가 의문이었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이 동네를 뜨고 싶지 않아 뜨지 않은 게 아니었다. 집을 내놓은 지도 벌써 반 개월이 넘어가지만 집을 보러 오겠다는 연락 한번이 없었지 않은가.
길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미로에 서 있는 기분이다. 지금은 뭐라도 해야… 뭐라도.
“…….”
웃기게도 수지의 죽음 후 1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던 무기력증에서 반강제적으로 해방됐다. 지금은 뭐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차언은 결국 벽을 붙잡고 서 가슴을 쳤다. 너 대체 왜 울어. 왜. 다 각오했던 거잖아.
“어흑, 흐. 아.”
하지만 이런 기분까지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느껴 보는 이 가슴 아픈 느낌을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알지 못해 이유 모를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는 애란과 마주쳤다.
어제 새벽엔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아침까지 함께 있지 않았구나. 차언은 애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회피했다. 어젯밤 얼마나 뜨거운 밤을 보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너에겐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차언아.”
“두통 때문에 편의점 가는 길이야. 머리가 너무 아파서.”
도망치듯 빌라를 나와 편의점까지 걸었다. 의도한 회피였다. 애란 역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편하진 않은지 따라 나오지도, 미용실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날 그 사달을 내고 헤어졌는데 마주하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또 우연히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차언은 출근을 하고서 냉장고를 뒤적여 캔 콜라를 따 마셨다. 시원한 게 들어가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미용실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영림과 미용실 여자들은 잘된 일이라 했다. 학교로 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며 잘 생각했다고 자신의 선택을 환영해 주었다.
“그래. 여기 있어 봤자 수지 생각만 나지. 십수 년을 부대끼고 살았는데 이 동네 징글징글하다, 야. 우리야 네가 좀 보고 싶겠지만 넌 미래가 창창하잖아. 널 위해서라도 더는 여기 있지 마. 그래도 자주 연락하고. 너 연락 끊기만 해.”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안 배운 게 없었던 수지를 따라 10여 년을 드나들었던 미용실이었다. 떠난다 해서 섭섭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지만, 미용실 여자들과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건 씁쓸했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했던 식구들이었다.
“근데 그 집은 아직도 안 나가? 집이 나가야 이사를 하든 할 텐데. 어떡하게, 너.”
“당장은 집 나갈 때까지만 학교 앞에서 자취하게. 보증금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얼마 전에 월급 받은 거까지 해서 땡기면 등록금이랑 얼추 가능할 거 같아.”
“근데 애란이 년은 일주일이 넘도록 안 보이네. 웬일이야? 저녁만 되면 달려오는 년이.”
“나애란도 양반은 못되네.”
일주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던 애란이 샌드위치와 커피가 담긴 종이 캐리어를 들고 가게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 애란을 보던 영림이 쯧 혀를 찼다.
“뭐야? 왜 내가 들어오니까 말을 하다 말아?”
“네 욕하고 있었다, 왜.”
애란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려놓으며 눈을 흘긴다. 마사지 숍을 그만두고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더니 애란은 퇴근이 빨라졌다. 일주일 동안 바뀐 직장에 적응을 하느라 바빴던 낌새였다.
저 역시 바빴다. 복학 신청을 했고, 자취방을 알아보느라 몇 번을 학교 주변 원룸을 돌아다녔고, 미용실에서 남은 일도 해야 했다.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더 바쁘게 굴었다. 그의 말이 맞다. 생각을 지우려면 몸을 굴려야 한다. 고통스러우면 더 잘 잊을 수 있다. 또, 또 그 남자를 떠올리고 있다.
“나 그럼 가 볼게. 다섯 시까지 만나기로 해서.”
“차언아. 너도 와서 샌드위치 먹어. 먹고 가도 시간 되겠는데 왜.”
“아냐. 그 전에 가 봐야지.”
애란의 시선이 제게로 붙는다. 그날 이후 애란과는 급격히 사이가 멀어졌고, 서로가 불편해졌다. 애란은 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지금은 그녀와 부딪히는 게 버겁고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가슴이 힘든 일인 걸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늘 후회는 돌이킬 수도 없을 만큼 멀리 가 버리고 나서야 찾아온다.
차언은 말없이 손을 씻고 가방을 챙겼다.
“애란이 너 그때 만난다던 남자랑은 잘되고 있는가 보다? 옷에 신경을 과하게 쏟아부었다?”
“그렇지 뭐.”
싱긋 웃는 애란과 눈이 마주쳤지만, 차언은 지갑을 챙겨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누군데. 말 안 해 줄 거야? 뭐 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길래 너답지 않게 굴어.”
“남 연애사가 그렇게 궁금해?”
“지랄하네. 입 털 생각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이년아.”
시끌벅적한 미용실 안이 불편하기만 하다. 금요일 저녁이니 오늘 일찍 가게 문 닫고 술이나 한잔하자며 야단법석이었다.
“난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
차언은 한쪽에 챙겨 두었던 우산을 접어 가방 안으로 넣고 일어섰다.
미용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뒤통수로 달라붙는 애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그녀 역시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 정도 낌새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서로 눈빛만 봐도 알던 사이인데 서로가 껄끄러워졌다.
가게를 완전히 나와 큰길가로 향했다.
멀쩡한 하늘이 제게로 와락 무너질 것처럼 머리가 빙빙 돈다. 아니 가슴이, 심장 한쪽이, 물이 잔뜩 찬 것처럼 멍멍했다. 이유가 없는 어지럼증세가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차언은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 참으며 미용실을 나와 버스를 탔다.
학교 앞 봐 놓은 원룸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한 날이었다.
“곧 개강 시즌이라고 방 찾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늘도 이 방 보러 온다고 전화 오는 거 내가 아가씨 준다고 안 보여 준 거야.”
“네, 감사해요.”
차언은 계약서를 가방 안으로 넣으며 부동산을 나왔다. 개강이 멀지 않았다고 호프집 곳곳이 박작거렸다. 잘된 일이다. 복학도 했으니 마음잡고 공부나 해야지. 이렇게 복학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뭐가 어찌 됐든 제게 잘된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대로 지내다 집이 팔리면 그 돈으로 대출을 끼고 저렴한 동네 투 룸이라도 얻을 생각이었다.
언젠가 수지와 그렇게 하자 다짐했었다. 이젠 세상에 언니가 없으니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혼자서 뭐든 잘 해내야 했다.
차언은 버스가 집 앞까지 오는 동안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계약금은 휴학 후 영림 밑에서 1년을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마련한 종잣돈이었다. 이제 시작이니 기죽을 거 없다. 그래, 그럴 거 없어.
다짐이 계속될수록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도 커진다.
버스에서 내린 차언은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걸로 한 잔 주세요. 제일 큰 걸로.”
얼음이 잘강거리는 컵을 받아 있는 대로 들이켰다. 주위를 둘러봐도 더는 고급스러운 까만 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젠 감시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몰아붙였던 건 자신인데 왜 찾게 되는 건지, 왜 씁쓸해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될수록 속이 괴로웠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징징거린다. 전화가 왔다. 도원이었다.
“선배.”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 너 복학한다며. 효정이한테 들었어.
“아, 네.”
이틀 전, 효정에게서 전화가 왔길래 복학할 거 같다 했더니 그새 도원에게 말을 한 모양이었다.
– 기숙사 들어가?
“아뇨. 집 사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자취방 구했어요. 4학년한테는 기숙사 배정도 잘 안 해 준다고 해서요.”
– 그랬구나. 잘됐다. 너 복학한다는 소리 듣자마자 전화하는 건데 목소리 들어서 좋네.
작은 휴지 조각으로 가만히 손을 닦던 차언은 일주일 전,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자신을 눈짓하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무심하게 닦은 레스토랑 냅킨을 휴지 조각처럼 내던지던 오만불손한 몸짓과 그보다 더 불량스러운 눈짓.
그 주제에 깎아 놓은 듯 잘도 자리 잡고 있는 수려한 이목구비와 길고 단정한 손가락, 구김 한 점 없는 흰 셔츠, 넥타이. 그 모든 게 어우러진 남자는 자신의 손이 감히 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고상했다. 조폭 주제에.
– 차언아. 듣고 있어?
“…네, 선배.”
커피 속 얼음을 빨대로 휘저으며 창밖을 보는데 시커먼 셔츠를 입은 남자가 무더기로 지나간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몽타주.
어디서 봤더라. 분명…….
“김석진…….”
– 응? 누구?
김석진과 마사지 숍에 함께 있는 걸 본 기억이 있다. 분명 김석진과 함께 마사지 숍에 있던 남자들 중 하나였다.
“선배, 저 나중에 통화해요.”
차언은 통화를 끝내고 카페를 나와 남자들의 뒤를 밟았다. 자신의 집으로 이어진 골목으로 들어선 남자들이 전화를 걸며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설마. 숨을 죽이며 뒤를 밟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김석진을 죽인 건 권석이고, 권석을 찾아 죽이겠다 설친 남자의 목을 자른 것도 권석이었다. 김석진과 같은 조직이라면 두 사건과 연관된 권석을 찾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위험하다.
차언은 차 뒤로 몸을 숨기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열어 사진을 찍었다. 더 가까이 가면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최대한 줌을 당겼다. 얼굴이라도 알아 놔야 손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짧지만 강한 확신이 들어서였다. 카메라 소리가 들릴까 스피커 구멍을 막았지만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지 남자 하나가 휙 뒤를 돌아본다. 다행히도 주위를 한 번 둘러볼 뿐, 남자들이 다시 빠르게 걸었다.
차언은 급히 가방을 뒤적였다. 지갑을 벌려 시백의 명함을 찾았다. 집에 두고 온 건가. 큰일이다. 만약 저 남자들이 집으로 들어가 명함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핸드폰을 꺼내 발신 기록을 찾아 뒤적였다. 몇 번 내리지 않아 시백의 번호를 발견했다.
“제발 받아라, 좀.”
받지 않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로 골목을 달려 사거리로 나왔다.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문성 본사로 향했다. 다신 갈 일도 찾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시시콜콜한 생각들을 할 여유가 없었다. 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혹여 그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펄떡거렸다.
택시에서 내려 헐레벌떡 뛰었다. 하지만 입구에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제지당했다. 예상한 일이었다. 한데도 왜 자신은 알면서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이유도 확고히 정립하지 못한 채 무작정 왔다. 적어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만큼은 확실하니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저 정차언이에요.”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잠시, 차언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논리 정연할까, 숨만 들이켰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지 묻고 있지 않습니까.”
험악한 경호원의 목소리에 잠자코 듣고만 있던 시백이 말했다.
– 전화 바꿔 봐. 네 앞에 있는 놈 바꿔 보라고.
시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언은 곧장 휴대전화를 경호원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보던 남자가 건넨 것을 앗아 간다.
“예. 예, 알겠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시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경호원이 그녀를 안내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검은 세단 한 대가 출차를 위해 정차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가려던 참이었나 보다.
다가가니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 안쪽엔 익숙한 잔향과 향의 주인인 피사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만이었다. 아니 정확하겐 일주일하고도 20시간 만이었다.
제대로 눈도 맞추지 못하고 인사를 했다. 이 순간에도 그가 떠나 버리기 전에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냉담함을 견딜 뿐. 차언은 저답지 않게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두 번 다시는 만나 주지도 않을 줄로만 알았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떨릴까 차언은 숨을 골랐다.
“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싶네.”
음? 하고 재차 묻는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엔 그녀를 아량 넓은 이해심으로 기다려 줄 인내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아 보였다. 그렇게 만든 건 정차언, 자신 스스로였다.
“여기 너 기다려 줄 만큼 한가한 사람 없는데.”
그의 음성이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온기 없이 건조하기만 한 목소리. 그게 더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 그에게 자신은 대거리를 해 줄 상대조차도 아닌 것만 같아서. 화를 낼 일말의 애정조차도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아서.
“…김석진이 몸담고 있던 조직 사람들이 이사님을 찾고 있는 거 같아요. 아직 이사님인 걸 모르는 눈치긴 했는데, 오늘도 집으로 찾아왔었어요. 이사님이 다칠…….”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다칠지도… 몰라요.”
그녀는 급박한 음성으로 남자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이건 그 남자들 사진이에요.”
감흥 없는 표정은 난생처음 보는 눈이었다. 여기서 당장에 죽어 가도 손 한번 내밀어 주지 않을 것 같은 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지만, 휴대전화 쪽은 보지도 않는 그의 시선은 내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재밌네. 잘 들었어.”
조금의 관심도 흥미도 깃들지 않은 무미건조한 어조.
“두 번 다시 이딴 일로 찾아오지 말고. 가자, 종섭아.”
“예, 형님.”
올라가는 창문이 그녀를 차단하듯 닫힌다.
멀어지는 차가 이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그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지만 만나 봤자 좋은 꼴 못 본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네가 지금 남 걱정할 때야. 스스로를 비웃었다. 누구보다 제 앞가림 잘하고 제 몸 건사 잘하는 저 남자를 걱정할 처지냐고. 그러니까 여길 왜 온 거냐고.
“정신 차려, 바보같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잘 울지도 않으면서, 평생을 눈물 없이도 꿋꿋하게 버텼으면서. 왜 저 남자랑 엮이기만 하면 눈 밑이 뜨끈거리는지 모를 일이지. 남자를 만날 때마다 눈물을 보이는 것 같다. 진짜 바보같이.
언제 흘린 건지 턱 밑에 대롱대롱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는데 닦기가 무섭게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렀다. 하릴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닳은 구두 앞코만 보고 있는데 희뿌연 시야 안으로 깨끗한 정장 구두가 들어왔다. 비싸 보이는 구두에 못지않게 값나가 보이는 슈트 바지.
“그쳐. 갈아 마셔도 시원찮으니까.”
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후진해 온 건지 세단 뒤꽁무니가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코앞에서는 눈썹 한쪽이 일그러져 있는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래, 차라리 화를 내 줬으면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 않아 줬으면, 차라리 추궁이라도 해 줬으면 했다. 화가 난 남자의 얼굴을 보는데 왜 자신은 안도를 한 걸까.
“…죄송해요.”
“뭐가.”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아시겠지만 애란 언니는 이사님을 좋아하고 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사님이 자꾸 생각이 나는데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떨리는데 근데 너무 무섭기도 하고 또 든든하기도 하고.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사람이 주제넘게 행동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도 제 주제가 뭔지 잘 알아요.”
“왜, 그것도 네 언니가 그러든?”
“어떻게 아셨…….”
“네 언니도 딱히 주제를 알았던 거 같진 않은데.”
언니가 성 회장을 만났던 걸 꼬집는 거겠지. 그의 말이 맞으므로 딱히 대꾸할 말도 없었다.
“너는 너 두고 뒈진 애는 뭘 그렇게 매번 찾고 앉았냐.”
당연했다. 하늘 아래 가족이라곤 달랑 둘이었으니까. 몸을 흠뻑 녹이는 여름을, 마음 시린 겨울을 함께 견디며 자랐던 제 전부였으니까. 남자는 한참 동안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이미 한참을 주제넘게 행동해 놓고 뭐가 어째?”
“…죄송…….”
“나애란은 나랑 뭐 어떻게 해 볼 주제가 돼?”
“…….”
“퍽도.”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이어지는 한숨. 안다. 회피하고 싶었던 거. 애란과 불편한 상황도 싫었고, 맞닥뜨린 이 상황을 맞서기에도 자신이 없었다. 겁쟁이였다.
그도 자신에게 어느 정도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단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그를 떼어 내듯 밀쳐 냈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칠까 바보같이 미련하게 여기까지 달려온 거다.
그가 자신의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싫어서. 그건 너무나도 싫어서.
“제가 이사님을 좋아하는 건가 고민해 봤는데요. 그건 모르겠지만…….”
“뭐?”
“오해한 채로 이렇게 끝내는 건 싫어요.”
헛웃음과 한숨, 자신을 보면 늘 그가 짓던 행동 중 하나였다. 이젠 익숙해져 간다. 그런 그의 모습이.
차언은 눈가를 닦았다. 그렇게 한참을 허리춤에 한 손을 얹고서 이걸 어쩔까,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처치 곤란한 물건을 마주하고 있듯 한숨을 쉰다.
“어쩌면 좋냐, 너를.”
비정상적이다.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었다. 이 남자를 만나고 내내 그랬다. 안 그래도 종잡기 힘든 자신의 인생에 그가 더 큰 변수를 만들어 놓았다. 이유 모르게 터지는 행동이 하나 씩 모여 지금을 만들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확 그냥. 어디 매달아 놓을 수도 없고.”
골치가 아픈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자신 또한 이렇게 충동적으로 그를 찾아올 생각은 아니었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앞서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생기지 않을 줄 알았다.
숨을 죽이듯 자신을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구두를 보고 있는데, 지켜보고 있던 그가 뒤돌아서 차로 향한다. 깨끗한 구두가 멀어진다. 정갈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의 긴 다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가 버리는 건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멀어지는 남자를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들쳐 업어야 해?”
얼른 따라오라는 소리에 차언은 조금은 빠르게 뛰었다. 그에게로.
고요한 차 안이 이젠 낯설지가 않다. 차언은 대놓고 그를 힐끔거렸다. 일주일 정도 공백이 있었던 거 같은데, 고작 그 시간 만에 남자는 좀 더 샤프해졌다.
머리를 만져 올려서 그런 건가. 인상이 좀 더 날카로워진 것 같은 건 제 착각일까. 좀 더 예민해 보이기도 하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진다. 차언은 순간 흠칫했다.
“적당히 영악하게 굴어. 멍청하게 있다가 네 거까지 다 뺏기지 말고.”
“내 거요?”
내 거? 혹시 차권석 본인을 말하는 건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런 낯간지러운 걸 물었다간 욕먹을 게 뻔해 접었다.
“그 여자는 적당히 순진한 척 굴면서 본인 손익은 다 따지더만 넌 그 정도 배짱도 없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여자가 너 등쳐 먹은 건 알고는 있는 건가 싶어서요.”
쯧 그가 혀를 찬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긴 한데,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 짐작이 간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애란에게 뒤통수를 맞은 모종의 일이 있었다는 것보다 이 남자와 애란 사이에 있었던 일이 더 신경이 쓰인다.
“애란 언니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자꾸 빙빙 돌릴래?”
“…….”
“애매하게 굴 거면 내리시고요. 종섭아, 차 세워라.”
“자, 잤어요? 언니랑 그날 잤어요? 호텔… 갔어요?”
그래, 솔직해지자.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는 숨길 것도, 숨길 이유도 없었다. 서로에게 끌리는 남녀만이 있을 뿐. 궁금한 건 그거뿐이었다. 일주일간 애란을 몇 번 만났는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정말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위선자. 하지만 이제 와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조금 웃는 그의 입꼬리가 거슬렸다.
“잤으면.”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만큼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러라고 등 떠미는 건 자신이었으니.
왜였을까. 이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걸 감히 욕심내어 그 벌을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수지의 말에 반하는 행동을 했던 건. 이렇게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무언가가 난생처음. 그래서 용기 내어 손을 뻗는 방법도, 이 마음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랐을 뿐.
늘 그래 왔듯 회피하고 숨어서는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멀뚱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잤으면 잔 거지, 뭐.”
심장이 따끔거리는 걸 외면하고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만 보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는 안 좋아한다면서.”
“안 좋아한다고 한 적 없어요. 모르겠다고 했지.”
그사이 차는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근데 왜 똥 씹은 표정이야.”
“그런 적 없어요.”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앙큼한 대답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쥐고 돌리며 아직 멍이 남아 있는 곳을 본다. 그 별거 아닌 접촉도 괜스레 의식이 되고 신경이 쓰인다. 그는 눈으로 차언의 얼굴을 확인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했다.
“안 잤으면.”
“아, 안 잤어요? 정말?”
차언은 저도 모르게 들떠 물었다. 남자가 다시 웃었다. 놀리는 게 분명하다. 걸려드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와 이러는 게 얼마나 꼴사나울지 잘 알지만 그런 것들은 상관도 없을 만큼 그의 말 한마디에 온탕과 냉탕을 오고 갔다. 그는 턱을 이리저리 돌리던 손을 거두고 미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내 대답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네.”
꼰 다리 위에 가지런히 얹힌 그의 손을 보며 차언은 묵직해지는 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그의 손에선 기분 좋은 로션 냄새가 났다. 남자의 냄새.
“…뭐예요, 그게.”
“사람 좆 되게 만들어 놓고 그럼 너만 날로 잡술라고?”
“…좆… 돼요? 저 때문에요?”
“그럼 최시백 때문일까? 이건 알면서 묻는 거야, 모르는 척 사람 갖고 노는 거야.”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름에도 조수석에 앉아 있는 시백은 꿈쩍도 않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여태 시백과 종섭이 있는데 잤느니 안 잤느니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어.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에 이마를 짚었다. 네가 이성을 잃어서 정신을 놨구나.
“적당히 해, 적당히.”
“…저는 그게 아니라… 전….”
“좀 솔직해져 봐, 너도. 나애란은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지.”
차언은 망설였다. 자신은 여전히 뭐가 답인지 모르겠다. 그를 좋아하는 건지, 이 끌림을 따라가는 게 정말 맞는 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남자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 싫다. 밀어내는 것도 싫다. 같은 성별인데도 자신이 도원을 향해 느꼈던 마음과는 달랐다.
도원이 편안한 남자였다면 차권석은 불편에 가깝다. 혹시 자신에게 험한 말을 하지는 않을까, 정말 손가락 하나라도 뚝 잘라 내지는 않을까, 불편을 넘어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왜 도원과 함께일 때보다 이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더 심장이 요동치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다. 사실 안다.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이성에 대한 끌림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남녀 간의 관계만큼 명료하지 않지 않은 게 또 있을까. 어디서부터가 끌림인지, 왜 이 남자가 애란과 낮밤을 함께 보내는 게 싫은 건지, 무엇이 정답인 건지, 답할 수 없는 게 더 많다. 그럼에도 분명한 한 가지는 이 남자 곁에 있고 싶다는 거다.
“시백아, 종섭아.”
“예, 형님.”
“네들 어디 좀 가 있어. 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든가. 그 뭐냐, 레몬 맛. 왜 있잖아.”
자신이 레몬 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건 그렇고 어디 좀 나가 있으라는 그의 말에 남자 둘은 뭔 반문도 않고 차에서 내려 멀찌감치 서 있었다. 꼭 이 차를 경호라도 하듯.
“왜 저기 저러고 계시는 거예요?”
“네가 입을 안 열어서요.”
“…김석진 패거리가 이사님 찾고 있어요. 아까 사진 다시 보여 드릴까요?”
“…….”
“아무래도 조심하셔야 할 듯해요.”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눈 한 번을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사님이 위험할 수도 있고… 또….”
“아까부터 뭔 씹소리야.”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 자꾸만 뱅글뱅글 말을 돌리는 자신에게 그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참을 어색한 공기 속에 그의 손만 바라보고 있던 차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집에, 들어가실래요? 대접할 건 없지만 달달한 다방 커피라도 같이 마실래요?”
분위기 깨게 다방 커피가 뭐야 다방 커피가. 늘 물장사하는 언니들과 함께 있어 입에 밴 말이 다 그렇고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딱히 대꾸가 없었다.
“커피에 쿠키 정도밖엔 없지만 그래도 같이 안 드실래요?”
여전히 말이 없는 남자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을 건넸다.
“차도 싫고 모텔도 싫어요. 그러니까….”
조폭 주제에 상처 하나 없이 부드러운 남자의 손이 보인다. 검지에 끼워진 반지 하나도 괜스레 눈이 갔다. 가만히 시트 위에 얹힌 그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치솟았지만, 차언은 모른 체하며 자신의 충동을 짓눌렀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도 이상한 관계지만 지금 이 순간에 솔직 하자면 그와 자신은 서로에게 정욕을 느끼고 있다.
이끌림에서 비롯된 정염. 어설픈 호감이 기반 된 가장 확실한 본심.
정확하게 도출된 한 가지 결론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똑똑하니까 백 마디 말보다 이 한 가지 고백의 저의를 알아주겠지. 그러길 바라며.
“큰일 났네.”
그의 말을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듣지 못했지만 반쯤은 진심 같았다.
“너 이제 좆 됐어. 어떡할래.”
“…알아요.”
“알긴 뭘 알아, 네가.”
그는 그저 픽 웃고 넘겼지만 진심이었다.
저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감히 제 품에 담길 수도 없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돌이킬 수 없는 충동이었다.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제 인생은 언제나 갑작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엄마가 사라졌고, 갑자기 언니가 죽었고, 갑자기 휴학을 했고. 모든 게 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뿐이었다. 막을 수 있었으면 진작 막았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모든 건 늘 자신을 덮치고 휩쓸어 상처를 냈다. 이 남자는 어쩌면 제가 맞닥뜨린 것 중 가장 위험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 앙! 아흣, 아!”
차언이 삐걱거리는 침대를 박차듯 허리를 튕겼다. 삐걱거리다 못해 침대 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은 소리가 시끄럽다. 권석은 제게 안겨 오는 작은 몸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가슴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데 반해 허리는 참, 툭하고 힘 한번 주면 부러질 거 같다. 이게 제대로 기능은 하는 건지.
많이 맞아 봤으니 신경 쓰지 말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이 작은 몸에 어디를 손댔을까.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폭력을 버티기엔 지나치게 유약한 몸이다. 자신이 보아온 것 중 가장 섬세한 것.
“너 젖통 그렇게 흔들다가 싸구려 침대 이거 부서지는 거 아니냐.”
“몰, 아흐응, 라아, 흐…….”
차언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서 고개를 젓는다. 안 어울리게 어리광은. 그래도 제법 엉기는 게 귀여워 픽 웃자 눈물이 그렁그렁해 촉촉한 눈으로 그를 본다.
“모르긴 뭘 몰라.”
“말 시키지, 흣, 흐응, 마아.”
“점점 말이 짧아진다, 너.”
“앙, 아!”
제게 버릇없이 굴어도 해치지 않는단 걸 습득한 정차언이 그걸 무기로 내세운다.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 그냥 두었다. 빠듯하게 틀어박혀 있는 그의 것을 제대로 맞춰 움직이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그녀가 나쁘지 않아서였다.
열심히 물 범벅인 구멍 속으로 자지를 방아 찧듯 찧어 대는 그녀가 제대로 맞물렸다 싶으면 박자에 맞춰 둥글게 허리를 돌린다.
“어흐, 으… 아!”
흔들리는 엉덩이와 떨어질 듯 출렁거리는 가슴, 도도록하게 솟은 꼭지, 젖통에서 골반까지 이어지는 허리선, 고집스러워 보이는 저 눈매까지.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던 권석은 새삼 심기가 뒤틀렸다. 남자 새끼들이 환장할 만도 했다.
그는 발기해 통통해진 유두를 빨며 동시에 묵직한 살집을 터질 듯 쥐고 주물렀다. 더 밖으로 꺼내 놓으려 오독오독 씹자 금세 통통한 곡선을 그리며 꼭지가 불퉁해진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열이 오르는 듯해 보이지만 그녀는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아는 그녀는 그랬다. 생각보다 조심성도 많고 겁도 많고 경계심도 많다. 그걸 허무는 남자가 자신 하나뿐이길 바란다는 낯간지럽고 소름 돋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었다.
처연한 눈꺼풀 아래가 눈물방울로 젖었다. 저 눈으로 이름을 부르는데 믿고 싶지 않게도 꼴렸다. 그것도 아주 씨발, 환장할 정도로.
“아흐… 아, 이사님, 이사, 아!”
잇새로 챙겨 넣은 젖꼭지를 엉망으로 꼬집어 비틀자 자지를 쥐어짜고 있던 질벽이 대번 졸아들 듯 수축하며 불알까지 축축해진다.
유달리 몸이 민감한 그녀지만 유독 요도와 클리토리스 주변으로 분포된 성감대와 자궁 앞, 뒤쪽 스폿에 예민하다. 그간 그녀에 대해 알아낸 건 많지만 마킹이나 도청으로도 알지 못하는 게 있다. 그녀의 시시콜콜한 성감대마저도 제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그 어떤 최음제보다 짙게 정욕했다.
습관성 희생인가, 나애란이고 동네 여자들이고 저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두 팔을 걷고 나서는 게 꼴 보기 싫다. 저에게만 집중했으면 하는 이상한 욕심이 불쑥불쑥 든다. 자신이 소장욕을 느낀 것 중 가져 보지 않은 건 없었다. 문성 전무이사 자리, 문성, 일머리가 좋아 제가 두 번 나설 일 같은 건 만들지 않는 수하들. 그 가운데 이 작은 여자가 끼여 있다는 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그가 나애란의 손목을 잡고 나온 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고집스레 뒤돌아보지 않던 정차언이 떠올랐다.
차를 세워 내리라 역정을 내니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나애란이 대뜸 좋아하네 마네 지껄였다.
정차언이 그간 다른 놈을 따로 만나지 않았단 걸 아는데, 업소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했니, 모텔을 갔니 거짓 보고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정차언 마킹을 어디 나애란에게만 시켰을까봐.
거기까지도 한참을 봐줬는데 그걸 알고는 있는지 또 선을 넘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자, 대번 그의 심기를 파악한 시백이 나애란을 끌어 내렸다. 뺨 두 번으로도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더 손을 댔다간 정차언 그 예민한 똥강아지가 또 울고불고 지랄을 할지도 몰랐다. 본인 뒤에서 저 여자가 뭔 짓을 한지도 모르고.
시백에게 그만 거두라 했더니 나애란이 퉁퉁 부은 뺨으로 펑펑 울었다. 차는 그대로 나애란을 두고 호텔을 지났다.
누구 때문에 근 일주일이 개좆같았는데, 한데도 본인은 평소처럼 미용실을 돌아다니고, 미용실 여자들과 웃고 떠들고. 이게 진짜. 권석은 내심 벌이라도 주듯 젖꼭지를 콱 깨물고 잇자국이 나도록 돌출된 유두를 꺼내 씹었다.
“아! 세게 깨물지, 말……! 아앙!”
“엉덩이를 이렇게 부실하게 흔들어서 싸긴 싸겠어?”
“그럼 이사님이, 흔들면 되잖, 아흣, 앙!”
“이거 뭐 예쁘다고 박아 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꼴이란, 우습기 짝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중간중간 입술을 붙여 키스를 해 오는 그녀가 기특했다.
박아 주는 동안에도 그가 젖꼭지를 빨지 않을 땐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정신없이 움직인다. 빨던 꼭지를 뱉자 다시금 키스를 해 오는 그녀는 오늘따라 몸이 뜨거웠다. 자신과 같은 이유에서일 거라 짐작했다.
“으응, 음, 아. 츄읏, 흐.”
자지를 먹으면서도 혀는 쉴 새 없이 꺼내 놀리라 했더니, 삽입하면서 어떻게 쉬지 않고 키스 하냐며 코맹맹이 소리를 할 땐 언제고 잘도 혀를 놀린다. 하여튼 잘하면서 엄살은.
키스를 하다 말고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당기더니 온몸으로 안겨드는데, 꼭 길 잃은 다람쥐 같았다. 더는 챙겨 줄 사람도, 곁에 있어 줄 사람도 없는 어린 다람쥐. 얘 닮은 쥐새끼가 한 마리 있었는데, 종섭이 뭐라고 했더라. 친칠라? 친 뭐라고 했는데. 성격이 온순하고 몸집이 작은 데다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게 닮았다고 했다. 성격이 온순… 지랄하네.
그는 욕을 짓씹으면서도 차언의 뒤통수를 감싸 받치고서 서러워 흐느끼는 작은 몸을 달래 주었다. 그렇다고 봐줘 가며 길들일 생각은 없었다.
권석은 그의 침으로 범벅이 된 젖꼭지 두 알을 반죽하듯 주무르며 그녀를 시트 위로 눕혔다.
“다리 더 활짝 벌려야지. 안 보여 주면 내가 네 사정을 알아? 살살 박아 달라며.”
뭘 제대로 봐야 알 거 아니냐는 그의 얄팍한 유혹에도 의심 없이 홀랑 넘어가는 차언이 떨리는 숨을 쉰다.
슥슥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는 그녀가 바스락거리더니 자지 뿌리가 빠져나간 만큼 슬쩍 엉덩이를 내린다. 다시 꿀꺽 마저 삼킨 그녀가 조그만 손으로 소음순 양쪽을 좌우로 벌려 안까지 다 먹었다고 보여 준다. 굵직한 기둥이 좁은 구멍에서 한데 맞물린 탓에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틈이 애달프리만큼 벌어져 있었다.
“더 활짝.”
어딜 어물쩍 넘어가려고.
그는 두 눈으로 먹은 모양과 구멍 주변 사정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참 작은 몸이다. 구멍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좆을 삼키고 있는 입구 주위가 보기에도 얼얼해 보일 만큼 새붉었다. 그럼에도 봐주지 않고 성기를 끝 간데없이 맞물려 넣었다. 미끈거리는 보지를 펼치고 한껏 벌려 보여 주는 그녀가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응, 아흐…….”
여기서 오줌이라도 싸라 엉덩이를 때렸다간 또 저 입술을 삐죽일 테지. 그는 저속한 생각을 삼키며 다정한 사람인 양 그녀의 두 팔을 당겨 와 잡았다.
그렇게 잡고 싶어 힐끔거리면서 결국 먼저 손을 뻗을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어리고 여린 그의 사람. 그는 잡은 손을 더욱 끌어당겼다. 실은 결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쌀 때까지 결합된 생식기를 풀지 않을 테고, 밤은 길었다. 물론 쉽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도 없었다.
지난 일주일 그를 괴롭힌 벌을 모조리 받을 때까지 이 방문은 열어 줄 생각이 없으니.
“아앙! 아, 앗! 아, 하읏, 아!”
두 팔을 잡아당기며 동시에 성기를 못 박듯 박았다. 망치질과 다를 바 없는 좆질이었다. 그에 맞먹는 충격에 발버둥 치듯 도망가려 몸을 비트는데 흡사 살려 달라 울부짖는 몸부림 같기도 했다.
아까 저 혼자 야무지게 엉덩이를 흔들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새된 하이톤 교성이 연거푸 터졌다.
저 작은 몸으로 그를 받아 내고 있는 게 대견했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한참을 박아 넣었다 뺐다, 속도를 올리며 떡을 치는 데 몰두했다. 이음매 가득 물풀처럼 늘어난 마찰액을 치대며 그는 욕정을 먹어 팽팽해진 좆을 달래느라 바빴다. 풀린 눈으로 뭉친 침을 흘리고 있는 그녀 역시 자지를 만끽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보지 안 한가득 들어찬 기둥을 느끼느라 발그레해진 뺨으로 자꾸 시선이 간다. 어쩔 수 없이 자궁구를 밀어 대는 기둥에도 힘이 실렸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빨라지는 만큼 교성도 새된 울음소리로 변해 간다.
“아흐응, 흐, 아앙! 앙! 아!”
손을 놓아 달라 밀어내길래 놔주었더니 그새 흥건해진 눈두덩을 비빈다.
“정차언.”
저를 부르는 걸 아는 거 같긴 한데 뭐라 뭐라 횡설수설하는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튕기는 반동이 심해 박는 족족 작은 몸이 위로 올라가기 바쁘다. 그녀의 머리맡에 손을 뻗어 강한 반동에 저항을 걸자 쳐 대는 힘이 고스란히 보지로 가해지는지 침까지 질질 흘리며, 그녀는 발음이 뭉그러져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양쪽 허벅지를 붙잡는데 자그마한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손바닥이 흠뻑 젖어선.
“우, 으, 아, 나, 보지, 아, 이상한, 아흐응, 앙! 아, 아앙, 나쁜, 이, 앙아, 앙!”
원체가 몸으로 부딪치는 데는 도가 튼 놈이라 힘으로 하는 건 뭐든 잘했지만 정차언은 그게 버거운 거다.
그는 옹알거리는 입속에 혀를 쑤셔 넣었다. 힘이 풀린 입술이, 혀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나풀댔지만 키스를 감행했다. 츄읏, 춥, 침이 뒤섞여 부딪히는 지저분한 소리와 생식기가 철떡철떡 맞붙는 천박한 물소리, 그는 아래위로 나는 상스러운 울림을 만족스럽게 들으며 무자비하게 허릿짓을 해 댔다.
그녀가 자지러지는 지점을 찾아 빠르게 질벽을 타고 오른 귀두가 자궁을 지나 깊고 으슥한 지점에 도달했다. 바야흐로 자궁을 밀어내고 뒤쪽에 위치한 공간, 질궁으로 진입한 자지가, 싸지르는 보짓물을 호응 삼아 미쳐 날뛰다시피 거듭 추삽했다.
“안, 돼, 앙! 아안, 아앙! 아!”
“뭐가 그렇게 안 되는 게 많아, 너는.”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그 아찔한 반복에 턱까지 뒤로 젖히며 고꾸라지듯 울부짖는 몸을 조금도 도망가지 못하게 끌어당겨 왔다.
“안……!”
“그럼 뭐가 되는데, 손잡고 소꿉장난이라도 해?”
잇달아 몰아치는 진퇴에 결국 그녀가 온몸을 떨어 대더니 가슴을 집채만 한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바동거렸다. 몸을 뒤집으려는 시도였다. 네 발걸음으로 어디 도망이라도 가려는 심산 같은데. 제게 닥쳐든 이 벅찬 오르가슴을 어찌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양다리를 족쇄 채우듯 붙들어와 그녀가 뱉어 놓은 자지 심을 처넣자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쓰다시피 운다. 깊어서 더는 안 된다고 애원한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봐주지 않고 안 된다고 거절하는 그 지점을 집중 가격했다. 귀두가 미끄럼 타듯 자궁경부를 치고 쑤욱 뒤춤으로 사라져 딥스폿을 치자 이내 울컥, 하며 애액 덩이가 뭉텅이로 새기 시작했다.
마찰이 가해진 교접점은 희멀건 거품 범벅이다. 잘 먹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의 잇새에도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우, 아으, 앙, 아! 안, 아흑, 흐, 앙! 아아!”
달뜬 몸이 어떻게 주체가 되지 않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손으로 젖을 하나씩 쥐고 꾹 끌어안는다. 슬쩍슬쩍 젖꼭지를 만지고 스스로 문지르며 자위하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는 가만히 그런 그녀를 지켜볼 뿐, 굳이 터치하지 않았다. 질주하듯 내달리던 성기가 추삽의 속도를 늦추니 깊은 곳에서 물린 생식기를 제 스스로 슬쩍슬쩍 흔들며 자극을 부추긴다.
“귀엽긴.”
“흐으, 으응, 응?”
“뭐가, 뭐.”
다시 말해 주길 바라며 묻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동그랗게 뜬 눈 주위로 물 자국이 짙다. 볼 때마다 울고 있는 듯한데, 어째 저만 만나면 우는 거 같아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만족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더 괴롭혀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싶기도 하고,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그녀를 달래 주고 싶기도 하니.
권석은 그런 생각들로 복잡한 스스로에게 자조했다. 괜히 괘씸해져 제 셔츠 소매를 잡고 늘어지는 그녀를 보면서도 그는 욕심껏 흔들어 주지 않고 맞물려 두기만 했다.
“아흣, 흐…….”
그러자 갑자기 오르가슴에 제동이 걸린 차언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올려다본다.
“…시백 씨 들어오라고 할, 거 아니죠?”
“왜.”
“내가 잘… 못해서?”
불안해하는 눈이 볼만하다. 그간 해 왔던 협박이 은연중 두려움으로 남아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보지 잘 벌려서 대 줘야겠지.”
어떻게 더 벌려야 하는지 모르는 어설픈 몸짓이 더욱 그를 불붙였다. 두 다리를 양팔에 하나씩 걸어 주고 제대로 잡고 있으라 시키니 또 얼결에 움켜쥔다. 그는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와 재차 자지 각도를 맞추고 귀두를 목표점으로 조준했다.
“쌀 거니까 이렇게 잘 벌리고 있어. 알았어?”
“아, 안에 쌀 거예요?”
“여태 뭐 들었어.”
“밖에 싸면 안, 되, 아앙! 아!”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무작스레 허리를 흔들었다. 두 다리를 팔 사이에 끼운 탓에 고정된 보지 구멍이 드나드는 굵은 자지를 하릴없이 받아내야 했다. 좆질 한 번에도 몸이 솟아오른다. 그는 여린 몸이 튕겨 나가기가 무섭게 허리를 잡고 눌러 앉혔다. 더해 가는 속도에 결국 손을 놓아 버린 차언이 두 팔을 바르르 떨며 알지 못할 몸짓을 한다. 그게 뭐든 오르가슴의 형태인 것만은 분명했다.
“우, 앙! 아! 거기, 아파, 아앙! 앙! 아!”
“안 아파.”
안에 싸지 말라 고개를 젓는 그녀의 속살 안쪽 깊은 곳에 귀두를 갖다 박은 그가 단단하게 뭉친 정욕의 덩어리를 헤쳐 풀었다. 걸쭉한 정액을 푸짐하게 토해 낸 그가 몸을 뒤트는 차언을 붙잡은 채 추삽질을 재개했다.
쏟아져 나오는 정액을 질벽 주름 곳곳에다 가져다 바른 그가 한참 만에야 섹스 한 판을 끝냈다. 이미 탈진한 듯 드러누워 버린 차언은 벌어진 보지를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리를 쩍 벌린 채 쌕쌕거리고 있었다.
시트가 아주. 정차언이 질질 흘린 애액에 침, 질구 새에서 흘러나온 정액. 몸부림을 감당 못 해 구겨져선 처참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그는 그녀의 체액으로 꼴이 말이 아닌 자신의 셔츠와 바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 꼴이 됐는지. 권석은 무방비하게 입을 벌리고 누워있는 차언을 보며 아직 왼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시계 하나 풀 여유도 없이 떡친다고 정신이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오르가슴을 털어 내느라 잔여물을 싸고 있는 차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응….”
털 범벅인 둔덕, 떡이 져 뭉쳐 있는 치모에 허연 정액이 군데군데 껴 번들거리는 소음순까지 난잡한 제 아랫도리 사정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건지 그녀가 물을 픽픽 지리며 가시지 않은 절정을 만끽하고 있었다. 요도 구멍이 새침하게 벌어지며 남은 절정을 마저 내보낸다.
정신이 나가 있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통통하게 부풀어 쾌감에 떨고 있는 클리토리스를 제 손으로 슬쩍슬쩍 문지른다. 그래 놓고 아닌 척 코를 훌쩍이는데 뺨이 울긋불긋하다. 권석은 그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음모가 습기를 머금어 머리카락처럼 이리저리 늘어진 것도 눈길이 갔다. 경계도 겁도 내다 치우고 잔뜩 헝클어진 정차언.
보기 좋으니 감히 그의 혼을 쏙 빼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기로 했다.
가까스로 제정신이 든 차언이 온 얼굴이 익어선 눈을 깜빡인다.
“뭘 봐.”
“차권석.”
“뭐?”
“…이사님이요.”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고 제법 용기 내 눈을 맞추는데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난감해야 하는 건지 혼을 내야 하는 건지, 그는 결국 헛웃음이 흘렀다.
“근데 여기, 방음은 잘 되나?”
사색이 된 그녀가 천장을 올려다본다.
“뭐 설마 윗집까지 들리려고. 하긴, 이사님 자지 맛있어요, 앙앙 적당히 울었어야지. 너 또 주먹 쥐었지.”
정차언과 같이 있으면 자꾸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보통 조짐이 아니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저 다음 학기에 복학해요. 사실은 복학도 급하게 결정을 한 거라 정신이 없긴 한데 그래도 잘된 일인 거 같아요.”
차언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그간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일이라고 해 봤자 고작 복학을 마음먹은 것뿐이었지만 제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니까.
그의 말대로 더 이상은 죽은 언니를 끌어안으며 우울에 갇혀 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면 좋겠지만 시작이 반이니까. 본의는 아닐 테지만 그 시작을 이 남자 덕분에 얻은 셈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저 혼자만 말하고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차언은 대충 버클만 풀고서 흉측한 좆을 떡하니 내놓은 채 나른하게 침대 헤드에 기대 있는 그를 힐끔거렸다. 그러고 나서도 두 판을 더 했던 거 같다.
한 번 더 감행하려는 그를 간신히 밀어내는 데도 한참이 소요됐다. 이젠 가만히 있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참 동안 애액에 몸을 담그고 있어 절여진 성기는 징그러운 모양새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색깔도 진해 가지고 흉측스럽다.
“저 씻을 건데, 먼저 씻으실래요? 여긴 욕조 하나뿐이고 제대로 된 부스가 없어서 씻기 힘드실 텐데. 화장실이 좁거든요.”
유독 귀두가 굵어 주먹처럼 붙어 덜렁거리는 성기가 심히 시선을 앗아간다. 거무죽죽한데 붉은 밤색이 도는, 명도가 낮은 고구마 같은 색깔이기도 하고… 액이 묻어 막 꺼냈을 때보다 색이 짙어져서는…….
저렇게 굵고 두꺼운 건 어디 침대 기둥에서나 봤지, 그것도 자신의 집 싸구려 침대가 아니라 굵고 튼실한… 귀두가 저렇게 크니 처음 들어올 때 자신의 그곳이 찢어질 듯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지. 안 찢어지고 붓기만 했던 게 용했다. 길기도 뭔데 저렇게 길어선 여자 고생시키려고……. 고추도 꼭 저 남자 성깔을 빼다 박았다.
생긴 건 고상하게 생겨서 섹스 할 때보면 꼭 어디 힘쓰는 게 천직인 백정처럼 천박하게 허리를 흔들고 성기를 박아 댄다. 너무 세다고, 깊다고, 구멍이 이상하다고 침까지 흘리며 빌었는데, 자신의 애원을 흥분제 삼은 그는 더욱 짓쳐 대고 금수처럼 좆질을 해 댔다.
예의범절 따위는 걷어치운 성기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새 발기한 건지 남자의 고간에 뿌리 내리고 있던 기둥이 벌떡 기립했다. 가만히 있어도 성깔을 부리는 것만 같은 성기인데 얼마나 힘이 좋은지 그의 복근 위로 단번에 올라붙어 그림자까지 만든다.
품평 아닌 품평을 한참 동안 하고 있던 차언은 이내 생각을 단념했다. 자꾸 마주 대할수록 감당하기 벅찬 모양새에 두려움만 커질 뿐이었다.
차언은 멍하니 그의 고간을 쳐다보다 자연스레 올라간 시선에 권석과 눈이 마주쳤다.
“세워 놓고 책임 안 질 건 아니잖아.”
“네? 저 그런 적 없, 저 씻을 건데요.”
“그러니까 지금 좆 세워 놓고 너는 샤워나 하겠다, 뭐 그런 소리야?”
“억지 부리지 말아요. 저 안 그랬어요.”
“눈으로 실컷 따 드셔 놓고 뭐가 안 그래요.”
“따라하지 마세요.”
“지랄한다.”
“지랄하지 마세, 아니, 요, 욕하지 말아요.”
“저걸 그냥.”
차언은 무지막지한 모양새로 발기한 그를 외면하듯 지나쳐 얼른 갈아입을 옷만 주워 들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을 선반 위로 올려 두고 변기에 앉았다. 요도에 힘을 막 푸는데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갓 포식을 마친 호랑이처럼 느긋하게 들어오는 그는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내내 혼자 살았기도 했고 수지와 있을 때도 욕실 문은 굳이 잠글 필요가 없었기에 그게 적응이 돼 미처 생각지 못한 판단 미스였다.
“아… 나, 나가요.”
쏴아아, 소변 줄기가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가라고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차언은 불가피하게 그가 보는 앞에서 오줌을 싸야 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이보다 더한 것도 했는데 창피라는 게 죽지도 않고 고개를 든다.
“저쪽으로 고개 돌리면 안 돼요?”
“네 손으로 보지 벌리면서 쌀래?”
그는 한다면 하는 남자다. 지난번과 같은 수치를 또 보일 바엔 죽고 말지. 결국 그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 남은 소변까지 내보내고 나서야 휴지를 말아 닦았다.
침울한 눈을 하자 그가 소리 없이 웃는다. 저렇게 웃는 그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지금 그것을 감탄하고 있을 정신이 못 됐다.
“잘 싸는구만 뭐가 문제야, 대체.”
말을 말지.
냉큼 일어나 샤워기를 걸고 그 아래에 서는데 그가 등 뒤로 붙어 선다. 움직일 때마다 등 뒤로 발기한 성기가 비벼진다. 차언은 바닥에 대강 널브러져 있는 샤워젤을 펌핑해 몸을 문질렀다. 뒷걸음질 한 번에 등이 그의 가슴팍으로 찰싹 붙었다.
이상하다. 이 좁고 작은 욕실에서 저 남자와 같이 씻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일상이 예상치 못한 일 천지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언니가 죽으며 남겨진 자신에게 본인 대신 보내 준 사람… 아니지. 절대 아니지. 수지라면 차라리 다정한 도원 같은 남자를 남겼지 저런 깡패 같은, 아니 깡패를 남길 리가 없다.
무심코 등을 씻으려 뒤돌아서는데 단단한 가슴팍이 떡하니 있다.
“아.”
“그래서, 학교 앞에서 자취한다고?”
“…네.”
차언은 그의 가슴팍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샤워젤을 꾹꾹 짜 남자의 몸을 문질렀다. 저와는 달리 온몸이 근육 아니면 뼈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몸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온통 살뿐인 거 같은데. 워낙에 근육이 붙지 않는 체질이라. 차언은 양쪽 가슴팍에 큼지막하게 붙어 덜렁거리는 제 젖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남녀 신체 구조가 다르다지만 이건 너무 차이가 심하잖아.
원체 그의 몸통 자체가 넓고 단단하다 보니 더했다.
몰랐는데 그의 등에는 까만 문신이 있었다. 언뜻 봐선 용처럼 생기기도 했고 뱀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단순한 그림 같지는 않아 보였다. 무슨 그림처럼 생긴 글자 같은데, 형체를 알긴 어려웠으나 확실한 건 저 별것 아닌 문신으로도 주눅이 드는 기분이 든다는 거였다.
섹스할 때 마구 더듬어 할퀴어도 봤다. 제가 감히 저 남자의 몸을. 잠자리를 할 때가 아니면 섣불리 상처를 낼 수도 없는 몸을.
영양가 없는 생각에 잠긴 사이 그의 팔을 조물거리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까보다 더한 모양으로 굴곡져 성기가 꺼떡거리고 있다. 발기 각도도 어쩜 저렇게 가파른지.
“그… 복학하면 이제 정말 바쁠 거 같아요. 제가 입사하고 싶은 곳이 토익성적을 중요하게 보는데 한동안 손을 놔서 예전만큼 성적이 나올지 모르겠지만요.”
“공부 좋지, 좋은데.”
어쩐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그가 그녀의 젖 한쪽을 움켜쥐었다. 헉, 놀라 뒷걸음질 치는데 미끄덩한 바닥에 몸을 꿈틀거리자 그의 반대쪽 손이 대번 손목을 붙잡는다.
“왜요?”
“자취방이 어딘데.”
“이미 어딘지 알고 계시잖아요.”
“많이 늘었네, 우리 차언이.”
꼭 놀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쓰다듬는데 어째 그마저 경고처럼 느껴진다.
“…또 어린애 취급.”
“중얼거릴래?”
“근데 자취방은 왜요?”
“어떻게 알아. 잠시 한눈판 사이 딴 새끼 불러다 떡이라도 좆 빠지게 치고 있을지.”
“원래 대학생들은 그러는 거 아닌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기도 하고. 뭐….”
차언은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팔을 슬쩍 밀어내고 움켜잡힌 가슴을 빼냈다.
“질투, 뭐 그런 거 바라는 거면 다시 생각해. 네 수법은 진부해서 재미없어.”
그가 흥미를 잃은 눈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 넘겼다. 같은 물을 맞으며 같은 샤워젤을 문질렀는데도 그는 자신처럼 구질구질하지도 처량 맞지도 않게 샤워를 한다.
욕실 중앙에 걸린 커다란 거울로 자신을 확인한 그가 다시 한번 머리칼을 넘긴다. 물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여 한번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으면 닿긴 하려나. 까치발을 하면 닿겠지?
섹스할 땐 자연스레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움켜쥐어 볼 수 있지만, 맨정신으로는 어려우니까.
샤워기 아래 선 남자의 그림 같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차언은 다시 제게로 온 그의 시선에 휙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을 뻗어 선반 위로 올려놓은 담뱃갑을 가져왔다. 저 담배, 피우려고 갖다 놓긴 했는데 뜯기만 뜯고 손도 대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가져오려고 하자 그가 가볍게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딱히 그의 취향은 아닌지 한 모금만 들이마시고는 살짝 인상을 쓰는 그가 손가락 새에 끼운 담배를 내밀었다.
피우라는 말인가? 별로 피우고 싶진 않은데, 머뭇거리다 가까이 다가가 입을 벌리자 그가 휙 담배를 들어 올려 버린다.
“네?”
“자꾸 혼날 짓 해.”
“이사님도 피우시잖아요.”
“토 달래? 어린 게 까져 가지고. 좋은 것만 해 좋은 것만.”
“언제는 좋은 것만 맨날 먹을 순 없다고 나쁜 것도 먹어야 한다고 그래 놓고. 그리고 전 그럼 이사님이랑 만나면 안 돼… 아!”
그녀의 정수리에 땅콩을 먹이는 그가 주저하지도 않고 축축한 선반 위로 담배를 지져 껐다.
“입.”
주둥이 닫으라는 말을 오늘은 제법 친절하게 한다.
“…담배.”
아직 장판에 저 남자가 지져 끈 담배 자국이 있는데, 이젠 선반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고 오만불손하기로 따지면 망나니도 고개를 젓고 갈 이 남자와 몸을 부대끼는 게 싫지 않다니.
말로는 사람을 후들겨 패다 못해 몇 번이나 심장을 푹푹 쑤시면서 당장에 강도가 들어오면 저부터 보호해 줄 남자를 알기에.
담배를 지져 끄고 귓불을 살짝 문질렀다 떼는 의미 없는 행동에도 자꾸 눈길이 갔다. 손가락이 길고 단정하다. 뼈대는 굵은데 길쭉하고 단단해 보인다. 아까 끼고 있던 반지는 침대맡에 두고 온 건지 손가락이 비어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자꾸.”
“아, 아니요. 근데 아직도…….”
무서운 모양새로 치켜 들린 귀두가 자꾸만 침을 질질 흘리고 맞닿아 있는 살갗을 비빈다.
차언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두려움과 긴장이 동반돼 의지할 곳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 무서운 성기를 지닌 남자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목.”
“네?”
“목 안으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아, 아니에요. 그렇게 안 보면 안 돼요? 무서워요.”
“네 반응이 무서워하는 반응이야? 길 가는 시백이 새끼 잡고 물어봐.”
차언은 그가 시키는 대로 목을 끌어안고 상체를 기댔다. 그 순간 덜렁 들린 다리가 순식간에 그의 허리로 감겼다. 정확하게 가위자로 벌어진 사타구니 틈새로 올라선 성기 기둥이 들붙었다.
말도 안 되게도 아직 체력이 남아도는 이 남자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언은 이어지듯 들어차는 위압적인 부피에 신음을 참으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단단한 근육에 제 이가 먼저 나갈 것만 같았다.
“응, 아!”
가슴이 출렁거리며 앞뒤로 요동칠 때마다 무게가 더해져 더욱 깊은 삽입이 이루어졌다. 탁, 탁 골반을 튕기며 성기를 박아 대는 그가 차언의 머리칼을 낚아채듯 잡아채며 거칠게 지껄였다.
“뭐? 대학생들은 다 그래? 이게 누구를 호구 좆으로 보나. 입단속 제대로 못하지. 어.”
“아깐, 흐으, 질투 같은 거, 앙! 아! 아, 안 한다고, 했, 아앙!”
“내가 따먹은 여자를 씨발, 딴 새끼랑 돌려먹어야겠어?”
휘어잡은 머리채를 그와 마주 보게 고정시키는 남자가 인상을 쓰고 있다. 구겨진 눈썹이, 매섭게 일그러진 눈매가 분명 화가 났다. 그는 화가 나면 표정 변화가 확실해진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남자의 심기가 불편하단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거, 때문에……?”
차언은 제 뺨을 단단하게 붙여 두었던 그의 목덜미를 퍽 아쉽게 바라보며 권석과 눈을 맞추었다. 밑구멍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성기는 매서울 만큼 뜨거운데, 차디찬 말만 뱉어 내는 남자.
“그럼 뭐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해?”
차언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저도 내가 따먹는 남자, 앙! 아! 아!”
더 이상 나불거리는 네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그의 성기가 안을 휘저었다.
“하여튼 그, 입에 좆이라도 물려야 다물지, 네가.”
남자의 힘에 거칠게 휘둘리고 난폭하게 몸을 섞는다.
그래도 그의 말보단 몸을 믿고 싶었다. 사납고 난폭하지만, 안아 주는 온기가 조금은 더 진심일 거 같아서. 아니, 깡패한테 진심이란 게 있긴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지만 지금은 그냥 몸이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머리도 몸도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고 싶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아서.
차언은 동도 트지 않은 새벽, 퉁퉁 부어 떡이 된 눈두덩을 비볐다. 뺨이 우둘투둘했다. 침대에 내내 엎드려 있어 얼굴엔 시트 무늬가 그대로 얼룩져 있었다. 따뜻했던 이불 속을 나와 촉촉한 눈을 비비던 차언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발견했다.
새벽까지 함께 있던 남자의 빈자리가 휑뎅그렁했다. 늘 바쁜 남자니 볼일이 있어 간 듯싶었다. 수지가 죽고 난 후 누구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쓰며 잠을 청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유독 빈자리가 넓고 크게 느껴졌다.
차언은 머리맡을 뒤적여 늘어진 티셔츠를 하나 주워 입고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나와 습관적으로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데, 책상 위에 못 보던 포장가방이 놓여 있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종이가방을 벌려 보았다.
“…….”
만날 때마다 자신의 스커트를 못마땅하게 보던 남자였다. 꼭 이딴 걸 입어야겠냐며 눈총을 주고 혀를 차던 남자. 차언은 잘 개켜 포장된 스커트 하나를 꺼내 입어 보았다. 발목에서 달랑거리는 스커트가 부들부들하다.
포장 가방에 그려진 익숙한 로고. 익숙하지만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브랜드. 그 남자가 쇼핑을 즐길 리는 없을 듯해 보였지만 직접 고른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여태 보아 온 그의 취향과 동일한 범주 안에 있는 스커트였다.
심플하고 깔끔하지만 고상한 느낌의 디자인. 옆에 함께 놓인 다른 종이 가방에는 스커트와 맞춘 니트와 블라우스가 있었다. 계절별로 하나씩 맞춰 넣은 듯한데 기분이 이상했다.
성 회장에게서 명품 가방을 억지로 선물 받았던 그때와는 묘하게도 다른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차언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옷가지가 든 가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오늘은 이 옷을 사러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텐데, 그전에 샀던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잠이 몽땅 달아났다.
* * *
차언은 짐 정리도 할 겸 집 안 청소를 했다. 짐이 든 작은 박스를 들고 방을 나오다 말고 고개를 들어 위층을 보았다.
개강까지 그리 많이 남지도 않았는데 인사를 해야 할지, 이대로 그냥 가는 게 맞을지. 마주치기 싫어서 나오지도 않는 애란에게로 먼저 찾아가자니 저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뒤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차권석 그 남자가 그런 말을 했던 건지 물어보며 추궁을 하기에도 저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그녀에게 권석을 포기하겠다 선언한 셈이었고 그걸 지키지 못했으니까.
차언은 버릴 것들을 쌓아 둔 박스를 잠시 내려 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벨을 눌렀지만, 기척이 없었다.
전화를 해 보려 휴대전화를 꺼냈지만 통화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보통 이 시간엔 일을 하러 가니 집에 없을 확률이 높았다.
권석의 말이 맞다. 애란은 수지가 아니며 오랫동안 어울려 지내 온 동네 여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더는 그녀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는 게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차언은 결국 애란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짐을 버리고 손을 터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골목 끝자락에서 들어왔다. 길을 막아서듯 아무렇게나 대충 정차한 차 안에서 내린 건 시백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차언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봐도 가까이하기 힘든 남자다.
“받아.”
남자가 종이봉투 하나를 내민다. 권석과는 또 다른 스킨 냄새가 난다. 역시 가까이하기 두려운 냄새. 차언은 순간 미세하게 좁아지는 그의 미간을 움찔거리며 바라보다 서둘러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성의 없이 툭 떨구듯 종이 가방을 주는 시백은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권석이 아닌 사람들에겐 제멋대로인 남자는 예의 같은 건 대놓고 내다 버렸다.
“이사님 일이 있어 잠시 도쿄에 가신다.”
“아, 네. 근데 이건…….”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고.”
“…이사님께서 바로 받으시는 건가요?”
“그래.”
“네… 저기…….”
힐끗 고개를 틀어 차 쪽을 보았지만, 권석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잡힌 출장일까. 아니면… 궁금했지만, 기대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처럼 서 있는 시백에게 쉽사리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언제 가시는 건지…….”
“지금.”
“…네.”
아직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종이가방을 꾹 쥐고서 차언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멀어지지 않는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하실 말씀이라도.”
“형님께서 주시면 토 달지 말고 받는 거다.”
차언은 그제야 받은 종이 가방을 열어 보았다. 제가 내다 버리듯 그의 차 안에 두고 간 가방이 들어 있었다. 하나에 몇천만 원을 훌쩍 호가한다는 그 가방이. 그리고 그 안에 새것처럼 보이는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필요하면 연락을 하라던 시백의 말뜻을 이제야 좀 더 정확히 이해했다.
이미 휴대전화가 있는데 또 주는 걸 보면 이걸 통해서만 연락을 하겠다는 건가.
차언은 굳은 채 멀어지는 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성질대로 아무렇게나 주차한 차가 이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골목엔 고요가 찾아왔다. 권석 없이 살던 제 세계 그대로.
어쩐지 이제는 낯선 고요였다.
시백이 주고 간 휴대전화에서 전화가 왔다. 마땅한 이름도 없이 달랑 전화번호만 떴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차언은 가만히 통화 버튼을 눌러 귓가로 가져갔다.
“네.”
– 다녀올 동안 얌전히 있어. 네 뒤치다꺼리 지긋지긋하다. 알았어?
“네. 그럴게요. 저기 근데 그 옷이요. 주신 옷.”
– 옷 뭐. 말을 좀 빨리빨리 이어 주겠어요.
귀찮다는 듯 말이 느린 자신을 놀리고 있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의 남자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젯밤까지 자신과 있어 놓고 또 그 새벽으로 일을 보러 간 모양이었다.
그 특유의 동작과 행동들이 이젠 조금씩 보이는 듯도 했다.
“…감사하다구요. 아니 그냥, 그, 그렇다구요.”
불편하다고 해서 다시 들고 갈 남자도 아니고. 더 말을 길게 늘여 봐야 누구 하나 좋은 꼴 못 본다는 걸 알았다.
– 누가 뭐래?
조금 웃음기 섞인 그의 음성이 비웃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차언은 괜히 이상한 기분에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늘 느끼지만, 그의 목소리는 해가 저물어 어슴푸레한 새벽과 막 동이 트기 시작한 고요한 아침과 잘 어울렸다. 어수선한 밤이 아닌, 이 동네 하루 중 가장 고요하다는 아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