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 Station RAW novel - Chapter 9
09.
차언은 자꾸 가라앉는 몸을 일으키려 소리 없이 버둥거렸다.
한참 만에야 일어난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순간,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최 실장이. 그리고 도원. 도원까지.
달려 나가려는 마음과 달리 따라 주지 않는 몸에 제동이 걸려 풀썩 침대 밑으로 자빠졌다.
얼른 일어나 대충 링거를 뽑고 나가는데 문 앞을 지키고 선 남자들에게 몸이 가로막혔다.
“저 가 봐야 해요.”
“들어가 있어.”
마침 병실로 오던 중인 건주와 마주친 차언은 그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실장님은요? 도원 선배는…….”
“최 실장은 수술하고 중환자실. 이도원은 숨통 붙여서 돌려보냈으니까 괜히 나서서 너까지 귀찮게 하지 말고 들어가.”
“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안도하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긴 숨을 내쉬자 건주가 쯧 혀를 찼다.
“이도원 만나러 간다고 지랄하면 너나 나나 피차 피곤해지니까 얌전히 있어.”
“…네, 그럴게요. 다친 게 아니라면 됐어요. 근데 이사님은…….”
“형님께서는 며칠 자리 비우실 거다. 그때까지 쥐 죽은 듯이 여기 있어.”
시백이 생사를 헤맬 만큼 크게 다쳤는데도 며칠 자리를 비우는 거라면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는 소리기도 했다. 아마도 시백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짐작이었지만 맞을 거라 확신했다.
며칠 동안 여기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게 생겼다.
입원 진단서라도 떼어 가면 출석 인정이야 해 주겠지만 이번 학기 성적은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사실은, 당장은 도원을 볼 면목이 없어 건주의 말대로 며칠은 이렇게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도원 역시 자신이 곁에 없어야 편할 테다.
옆에 있어 봤자 또다시 신상이 고달파질 건 뻔했다.
늘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은 힘들고 다치기만 했다. 차라리 모른 척하는 게 도원을 위해서 나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이틀을 병실에 갇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좀이 쑤셔 차라리 시백이 있는 병실만 가 보겠다고 떼를 써 간신히 허락을 받아 냈다. 그래 봐야 같은 VIP 병동에서 코너만 돌면 바로였다.
다행히 의식도 돌아오고 회복 속도도 빠르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아침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 회복 중이라는 좋은 소식도 들었다.
자신의 병실 입구처럼 남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병실 앞은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안으로 들어가려 서성거리기만 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자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종섭이 눈썹을 찡그리며 다가온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병실 앞을 지키던 종섭이 자리를 비운다 했더니 시백 곁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야. 아니 저기, 예쁜아. 여기 너 있으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었어? 얘 또 말 안 듣네.”
“제가 보고 싶다고 해서 허락받은 거예요.”
그러고 보니 종섭이나 건주도 이틀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보는 얼굴이었다.
종섭이야 어제까지 내내 시백의 병실에 있었다면 자신이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지만 건주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권석과 이틀이 넘어 3일째가 다 되어 가는 지금 이 시간까지 여태 함께 있었으려나. 물어보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함부로 입을 떼기가 힘들다.
자신의 물음이 결코 가벼운 것도, 철없는 질문도 아닌데 그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어 입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진다.
“형님께서 아시면 너나 우리나 피곤해. 어?”
“둬. 갇혀 있다가 뭔 짓을 할지 모른다, 우리 형수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이어 나타난 건주를 향해 우르르 서 있던 남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 봐.”
차언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서 누워 있는 시백에게로 다가갔다.
“왜 왔어.”
시백은 눈을 감고 이쪽은 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제가 뭐 못 올 데 왔어요? 걱정돼서 왔어요.”
“네 터진 이마빡이나 걱정해.”
“전 잘 아물고 있으니까 실장님 건강이나 신경… 쓰세요.”
반항적인 말대꾸에 눈을 뜬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보았다. 상체를 일으키려 가슴팍 쪽을 움켜쥐자 지키고 있던 남자들이 그를 부축했다.
자상은 깊었지만, 다행히 그가 그 순간에도 범인의 손을 붙잡고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심장을 비켜 갔다고 했다.
“너 자꾸 용기 낸다?”
“어차피 저 패는 거 이사님한테 허락받아야 하는 거 맞죠?”
이걸 확.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가. 너랑 말씨름할 기운 없어.”
“그냥… 이만하길 다행이라고요. 근데 김석진이랑 연관된 사람들이 그런 거예요? 도원 선배 납치하고 저한테 전화했던 사람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넌.”
“저 때문에 그런 건가 해서요. 저 때문에 괜히 실장님도 다치신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가 픽 하고 비웃었다. 그의 냉철한 눈은 늘 권석 못지않게 차가웠다. 어리고 철없이 행동하는 자신을 질타하고 채찍질하는 건 권석 하나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시백은 소리 없이 자신을 혼냈다. 한마디로 그녀가 늘 그의 눈치를 봤다는 소리였다.
“네가 그럴 주제나 된다고 생각해? 형님이 네 뒤 봐 준다고 네가 뭐라도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네가 뭘 해, 네가.”
네 주제에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나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남자.
여지없이 남자의 촌철살인 같은 말에 자신은 얻어맞는다. 그의 말이 맞다. 자신이 뭐라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안 주고, 감히 티끌만큼의 흠집도 내지 못하는 주제에.
차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서 병실을 나왔다.
건주는 말없이 병실로 돌아가는 차언의 뒤를 따라붙으며 쯧 혀를 찼다.
죄책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고 그냥 그 한마디 하면 될 걸, 그게 어려워서.
최시백 입 터는 거 보면 다 나았다 싶었다.
차언은 새벽이 다 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권석은 어디에 있는 것이고 자신은 언제쯤 여길 나갈 수 있는 걸까.
마침 감금 생활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퍼즐 같은 거나 사 뒀으면 그거라도 하는 건데. TV도 슬슬 지겨워지고 혼자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도 이젠 따분해졌다.
밤낮이고 새벽이고 늘 남자들이 자신의 병실 앞을 지켰고, 캔 커피가 마시고 싶다며 나가려 해도 남자들이 따라붙었다.
어차피 자신은 아프지도 않은데 입원한 환자였고, 척 봐도 편하게 감시하려 자신을 이곳에 발 묶어 둔 거나 다름없었다. 고작 이마 좀 찢어져서 꿰맨 게 뭐 대수라고.
도원에게 괜찮은 거냐고 전화라도 한번 해 볼까 하다 접었다. 전화 같은 걸로라도 자신과 접점이 있으면 도원은 다시 곤란해질 거다.
애란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잘 지낼까. 뭐 하고 지내고 있는 걸까.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미안하다고 말도 못 했는데. 그리고 권석은…….
다른 생각들로 에둘러 가 봐도 결국 고민의 종착지는 권석이었다. 그 남자가 벌써 연락도 없이 3일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툭, 툭 창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권석에게 전화를 한번 해 볼까? 그가 전화하라며 준 휴대전화가…….
사고가 났을 당시 쥐고 있던 가방 안에 있었다.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가방은 보이지도 않았다.
침대에 앉아 내리는 비만 바라보고 있던 차언은 오렌지 주스라도 한 캔 뽑아 마시려고 슬리퍼를 신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남자들이 달라붙는다.
“오렌지 주스요.”
“오렌지 주스라면 사 둔 게 있을 텐데요.”
“아는데… 좀 걷고 싶어서요. 산책하고 싶어요. 자판기까지만 갈게요.”
동전을 짤랑거리며 자판기가 있는 복도까지 걸었다. VIP 병동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일반 병동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VIP는 자신의 손발을 대신하는 사람들을 내보내기 때문에 더 그런 듯 보였다.
자판기에서 음료 하나 뽑아 먹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할 사람들. 하지만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으므로 이게 더 편했다.
평범. 언제부터 자신이 평범했다고.
평범하다는 생각을 태어나 처음 해 보는 것 같다. 조금도 평범하지 않은 남자들 틈에 있으니 자신은 그냥 지나가는 흙수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기분.
동전 하나를 넣다 말고 차언은 급격히 우울해졌다.
권석은 대체 왜 오지 않는 것일까? 급한 일을 처리하러 갔다는 건 알지만 걱정이 된다.
그 남자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자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없으니 걱정이 되고, 있으면 또 무섭고.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어디 다친 건가 싶고, 어디 다쳤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자니 그 강하고 독한 남자를 누가 다치게 할 수는 있을까 싶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마음이 복잡하게 그녀를 건드린다.
그래도 걱정이 됐다. 시백도 칼을 맞았지 않은가. 늘 자신의 주위를 지키는 남자들이 침착한 거 보면 아무 일이 없는 것도 같은데.
권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또 발 벗고 달려가겠지. 그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찾아 달려갔던 그때처럼. 독이 든 사과인 줄 알면서도 감히 베어 물었던 그때처럼.
그가 사라지면 자신은 또 홀로 남겨질 거고, 다시 아무도 없는 세상에 홀로 버려질 거다. 두 번 다시는 무슨 일이 생겨도 달려와 줄 사람도, 안아 줄 사람도, 없이 다시 혼자.
세상에 내 편이 없다는 건 너무도 외로운 일이었다. 자신이 버리지 않는 한 그가 자신을 버릴 리 없다는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차언은 확신했다.
그는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 얼굴도 모르는 부친, 어릴 적 떠나 이젠 생각도 나지 않는 모친, 피가 가득한 욕조 속에 잠겨 있던 언니. 그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김석진, 잘은 모르지만 그를 해하고자 하는 세력들, 그런 위기나 고난 따위로는 그에게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어떤 건 마음이 무엇보다 확실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사랑이니 연애니, 그와 자신은 할 리가 없는 그따위의 낯간지러운 감정들.
당장에 건주에게 가 권석의 행방에 대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동전 다섯 개를 넣었을 때 차언은 휙 옆을 돌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장신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놀라 쥐고 있던 나머지 동전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동전이 권석의 구둣발에 멈춘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권석은 떨어뜨린 동전을 밟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단 두 걸음이었다.
“내가, 얌전히 있으랬지.”
왜, 멀쩡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심장이 다 뭉근하게 뛰는 걸까.
어쨌든 자신은 살아 있었고, 그는 이렇게 숨 쉬며 제 앞에 있다.
“무슨 생각해.”
실은 자신의 곁에 없어도 상관없으니 살아만 있었으면 했다고. 그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낯간지럽고 창피한 말은 속으로 삼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뜨거웠다.
“그냥. 다행이라는 생각이요.”
“넌 주스 뽑아 먹으러 이 새벽에 기어 나와?”
“산책 겸이요. 저 얌전히 있었어요.”
남자는 말이 없었고, 침묵 속에 저 역시 그 미묘한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가 울지 말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눈알이 시큰거린다. 이유를 몰라 더 서러웠다. 꼭 무언가 놓치고 있는데 자신만이 모르고 있는 것처럼, 그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정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그냥.
“그냥 옆에만…….”
옆에만 있어 주었으면. 언제든 자신이 찾으면 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 그가 있어 주었으면.
고개를 들었을 때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새벽과 잘 어울리는 남자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있다. 그거면 된 거라 생각했다. 그거면.
“이사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
차언은 울지 않으려 애써 밝게 물었다. 화제 전환에 익숙하지 않아 대번 그가 그걸 지적하고 들 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는 말없이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그는 알고 있을 거다. 그는 그런 남자니까.
말하지 않아도 문제의 핵심을 늘 들여다보는 남자였으니까. 하물며 그런데 자신의 마음이라고 모를 사람일까.
“좆 좀 다친 거 말고는 멀쩡해.”
“네? 괘, 괜찮아요? 골절 그런 거예요?”
“어떡하냐. 너 재미 보던 거 당분간 못하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중요, 아니 얼마나 다치셨는데요. 대체 뭘 하면 고추를 다쳐요?”
“당분간 나을 때까지만 종섭이랑 재미 보고 있어. 그래도 밤마다 그 재미는 있어야지, 안 그래? 콘돔은 꼭 끼고. 다른 건 몰라도 김종섭 애새끼는 곤란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건 함정이다. 여기서 알겠다고 했다간 정말 어디 다리몽둥이 하나 뚝 부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리 한쪽이면 다행이었다.
“김종섭 자지도 빨고 다 해. 알았지?”
“나 다른 남자랑 안 자요. 유치해.”
“네가 덜 맞았지. 이게.”
“그, 근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네 눈엔 이게 괜찮은 걸로 보여?”
차언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는 그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가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가볍게 얼굴 몇 번을 헹궜다. 깊은 날숨을 쉬는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급한 용무를 보자마자 온 건지 자세히 보는 손날엔 군데군데 상처가 보였다.
차언은 흐르는 물속에 망설임 없이 손을 넣었다. 그리고 남자의 손을 휙 들어 보았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 듯한데.
“여기가 병원이라서 다행이에요. 연고라도 지금 바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가서 연고 하나 얻어 올…….”
“너 뭐 하냐?”
“상처가…….”
“좆이 다쳤다니까 뭔 씹소리를 하고 앉았어, 넌.”
“예?”
그가 자신의 손을 휙 끌어다 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이리로 더 오라 손을 잡아당긴다. 차언은 주춤했다.
“제가 볼 게 아니라 진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골절이 되면 정말 아프다 하던데, 괜찮은 건가? 차언은 물기 묻은 손을 닦으려 티슈를 찾는데,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손수건을 건넸다.
차언은 권석이 건네는 손수건을 조심히 받아들고 손을 닦았다. 그의 스킨 향이 미묘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익숙한 차권석의 체향이었다.
차언은 대충 손을 닦고 그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남자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다리가 길어 걸터앉고서도 바닥에 발이 닿는 그와 달리 자신은 발끝이 달랑거린다.
신체 조건 차이만큼이나 그와는 아랫도리 크기의 격차도 컸다.
유독 성기가 큰 남자와 그걸 담아내기엔 벅차기만 한 자신.
드로어즈를 천천히 끌어 성기를 꺼내는데 골절을 우려했던 자신과 달리 퉁, 튕겨 날아와 올라서는 페니스는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거대하게 올라붙었다. 퉁퉁 부푼 자지가 노골적으로 귀두구를 뻐끔거리며 선액까지 줄줄 흘린다.
확 끼치는 진한 수컷의 페로몬 냄새. 그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색정적인 냄새였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좆이지.”
“안 다쳤잖아요.”
“넌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빨아서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결국 그거였다.
오늘따라 조금 끄트머리가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 낮게 가라앉은 고요한 새벽을 닮은 목소리.
그래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미친 짓일지 모르나 조금은, 아니 제법 그리웠다. 그가 없는 동안 그가 그리웠다. 늘 외로움을 끌어안고 살던 자신의 가슴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물먹은 솜처럼 스미어 든 남자.
차언은 고개를 숙여 꺼덕이고 있는 귀두를 물었다. 으음, 혀로 먼저 와 닿는 끈적한 진액에 조금 흠칫하며 엉덩이를 물리자 그가 제대로 물라며 벌어진 잇새로 좆을 꾹 박아 넣는다.
여전히 어설픈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지만, 목구멍이 다치지 않도록 뒤통수를 억누르는 손길은 거칠지 않았다. 차언은 입안 가득 남자의 성기를 머금은 채 아래위로 길게 고갯짓을 시작했다.
방향을 제대로 조준하기 위해 밑동을 손으로 잡고 빨기 쉬운 귀두부터 혀로 핥아 내려갔다.
추읍, 춥. 침과 쿠퍼액이 섞이고 서로의 속살이 붙어 금방 색스러운 소리가 났다.
“으응, 음.”
한참 맛있게 빨고 있는데 밖에서 문이 열리는 듯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언은 화들짝 놀라 쥐고 있던 것도 내팽개치고 문에서 등을 돌려 그와 나란히 앉았다. 벌떡거리는 숨이 터질 듯이 목구멍 밖으로 흘렀다.
소리 없이 웃는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달콤하기보다 이성을 유혹하는 듯한 관능적인 음성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늘 그랬다. 어딘가 음습하고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듯한 퇴폐적인 어조. 분명 이 음성을 좋아할 여자들도 있겠으나 자신에겐 고압적으로 느껴졌던 목소리기도 했다.
어쩌면 주눅 들어 있는 게 습관이 되어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아, 머리야. 씨발 두통.”
그런 자신 때문에 골이 아프다는 듯 그가 베개에 머리를 베고 반쯤 드러누워 버렸다. 덕분에 좆이 그녀의 침을 이리저리 흘리며 덜렁거렸다.
“괘, 괜찮으세요?”
“빨아 주다가 피도 눈물도 없이 버렸는데 너 같으면 괜찮겠어? 애가 왜 이렇게 학습이 안 돼. 발전이 없어, 너.”
“…또 애 취급.”
“애한텐 좆 빨라는 말 안 하니까 안심하시고.”
“맨날 애라고 하면서…….”
“죄짓고는 살아도 취향은 합법이니까 걱정 마세요.”
남자의 일상에서 불법이 아닌 게 변태 같은 섹스 하나라니. 정말 차권석다웠다.
섹스할 때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여기선 하기 싫다는 데도 자신을 안고, 괴롭히고, 만져 대고. 자신의 의지와 반하는 행동을 수십 번도 더 하면서 그게 어떻게…….
“…그러길래 누가 이런 데서.”
“넌 뭘 그렇게 꿍얼거려. 언제쯤 알까 싶다, 우리 애새끼는. 날 새 봐야 너만 힘들어.”
그건 그의 말이 맞다. 결국 입씨름해 봤자 제가 더 손해였다. 아니 저만 손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밑지는 장사다.
이마를 짚고 누워 있는 그의 성기를 빨며 차언은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눈을 감고 피로를 푸는 그를 도와 차언은 빠르게 고갯짓을 재개했다. 언제나처럼 남자의 진한 스킨 냄새와 살냄새가 기분 좋게 났다.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의 곁을 비운 동안 모든 걸 처리하고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공들여 자지를 빨고 있었다. 이리저리 혀 날을 세워 방향을 바꿔 가며 귀두만 집중적으로 혀를 돌려 쭙쭙거리기도 했고, 혓바닥으로 기둥을 오르내리며 뿌리를 손으로 비비기도 했다.
혀끝이 뜨끈해지고 젖은 자지 살이 눅진눅진해진다. 서로의 살결을 접촉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 그게 나쁘지 않았다. 이 새벽에 설마 누가 올까 싶기도 했고, 실은 그가 없는 동안 그에 대해 했던 걱정이 사그라져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도 있었다.
“으응, 아… 응. 츄읏, 흐응.”
혓바닥을 길게 내 불알부터 귀두까지 걸쭉하게 핥아 올렸다. 거칠게 돋아난 핏대까지 혓바닥에서 뭉개지는 게 은근히 자극적인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 빨다 성기를 입안에 가둔 채 녹여 먹을 듯 혀끝으로 이쪽저쪽 굴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맛있게 잘 먹어. 이거 진짜 나 없는 동안 보지 단속 잘 한 거 맞아? 누가 뚫어 줬어?”
“으응.”
앙탈부리듯 눈을 뾰족하게 세우자 그가 조금 웃는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백을 믿어 주는 눈이었다.
“지랄. 어울리지도 않게 예쁜 짓은.”
엉덩이까지 조금 치켜든 채 들썩거리며 성기를 맛보는데 그가 그만 올라오라며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더니 품을 벌려 준다. 차언은 곧장 알아들었지만, 문밖에 서 있는 남자들 때문에 망설였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경험이다. 타인의 시선을 무시한다는 거.
그가 휴대전화를 꺼낸다 싶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종섭아. 밖에 애들 좀 물려라. 애들 때문에 영 떡치기가 껄끄러우시단다.”
남자는 우아했지만 무례했고, 모든 걸 갖춘 듯 고상했지만 천박했다. 그가 사는 세계의 기준으로 비추어 보자면 자신이 순진할지 몰라도 이게 평범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 자신은 그에게 휩쓸리고 있는 건지.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게 밀어붙이는 그는 분명 자신의 인생을 난도질하고 조각낼 남자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남자.
그의 말대로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관계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에게 욕정했고, 욕정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이 남자가 이렇게 뜨겁게 자신을 바라볼 리가 없으니.
남자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낱 섹스파트너쯤으로 욕정한다고 이렇게 여자를 가까이에 두지는 않을 테니까. 어쩌면 이 또한 자신의 순진한 생각일지도 몰랐다.
이 이상한 관계의 끝은 자신도 모른다. 알고 싶다고 말하기엔 사실 무서웠다. 알게 된다고 한들 그의 말대로 감당은 할까. 차라리 상처 난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꺾어 버리면 그만일 나뭇잎 하나 같은 자신을 그가 붙들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좋았다.
가끔은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내 마음이 좋은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좋을 때가 있다.
“뭐가 더 필요한데. 말을 해 봐 봐, 우리 애새끼.”
“됐어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위로 올라갔다. 말해 봐야 제 손해고 제 눈을 제가 찌르는 꼴밖에 더 될까.
차언은 헐렁한 병원 바지를 벗고 머뭇거리며 팬티를 벗었다. 그리고 제가 여태 착실히 빨아 눅눅해진 귀두를 구멍 새로 맞춰 엉덩이를 천천히 내려앉았다. 교미의 준비를 마친 성기가 음부 깊숙한 곳으로 밀려드는 기분에 절로 색스런 신음이 샜다. 만족을 알리는 앓는 비음이었다.
“아앙! 앙, 아흐…….”
“다리 더 벌려 봐. 어디 이래서 식전에 끝내겠어?”
아침까지 하려고? 불안한 예감에 등줄기 아래가 시큰거렸다.
“아, 응! 흣.”
오늘따라 더욱 차지게 달라붙는 자지를 빠르게 먹으며 엉덩이를 흔들어 젖혔다.
그가 툭, 툭, 단추를 열어 젖을 꺼냈다. 자신이 엉덩이를 흔드는 동안 젖꼭지 두 알은 그의 차지였다. 젖꼭지를 느긋하게 지분거리는 그가 좆을 더 맛있게 먹으라며 엉덩이를 때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마저도 흥분제로 작용했다. 그에게 엉덩이를 맞으며 페니스를 길게 넣었다, 뺐다 작정한 사람처럼 빨아 댔다.
“앙! 아아, 흐, 아흣! 앙!”
그와의 섹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불안감이나 자책,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생각할 겨를 같은 건 줄 마음이 없는 성기가 포악하게 안쪽으로 박혀 들었다. 아래를 반으로 가르기라도 할 것처럼 박혀 드는 데도 천박한 소리를 내며 성기를 먹는 엉덩잇짓을 멈추지 못했다.
“후…….”
그가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힌 채 이마에 손등을 얹고 있었다. 신음하며 쾌감을 조절하는 게 보인다. 피로해 보이는 그 모습도 오늘은 어쩐지…….
“흐으… 아!”
“넌 매번 욕을 처듣고도 나아지는 게 없냐, 왜.”
“아아, 흐읏, 앙! 아!”
“구멍에 힘 좀 풀라는 말을 영 못 알아먹겠어?”
“그게, 흐으응, 내 맘대로 잘 안, 아앙! 아!”
“보지 뚫어 줄 때마다 같은 소리 하게 만드네. 그래 봐야 너만 힘들어, 너만.”
“후으, 흐…….”
어떻게든 몸을 이완하려 할수록 도리어 삐걱거리기만 한다. 애초에 저 큰 게 들어와 구멍을 벌리는데 힘을 빼는 게 가능한 건가? 원초적인 궁금증만 머릿속을 떠다닌다.
“됐어. 자꾸 따먹어 버릇하면 언젠가는 잘하겠지.”
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 봐야 자신이 느끼는 쾌감은 풍선처럼 가득 부풀기만 했다.
여기서 더 좋으면 얼마나 더 좋다는 건지. 사실은 그건 그것대로 더 두려웠다.
계속 움직이라는 그의 말에 차언은 허릿짓을 재차 하며 압박과 마찰 운동을 동시에 가했다.
불뚝, 솟아오른 성기가 질 주름을 주르륵 긁고 빠르게 빠져나갈 때마다 아랫배 부근이 하릴없이 떨렸다. 그게 잦아들기도 전에 다시 퍽, 밀고 들어와 같은 자리를 비벼 버린다.
눈이 멀도록 자극적인 그 반복된 움직임에 두 다리까지 와들와들 경련했다. 이게 오르가슴의 전조 증상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으응, 아! 아앙!”
“이래서 흥이 나겠어? 후, 더 잘 흔들어 봐. 젖도 좀 맛있게 흔들고.”
그의 손이 뺨을 훑고 턱을 만진다. 그러다 다시 입술, 뺨. 그의 말보다 그 손을 믿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흔들리고 내놓은 엉덩이가 방향을 잃은 채 들썩거린다. 가슴 두 쪽이 아프도록 출렁거리는데 뭘 더 어떻게 하라는지. 반항심을 드러내기엔 밑구멍을 갉작대고 안을 벌려 치대는 집요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자꾸 박자를 잃어 엇박자를 타게 되고 속도 역시 불규칙적으로 변모했다. 그럼에도 뜨겁게 질 속을 짓눌러 비비는 그 느낌에 자꾸 초점을 잃고 눈이 풀렸다.
오로지 쾌락만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목표점이 같았고, 그러므로 더욱 절실하게 서로를 원했다. 다물지 못하는 잇새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이톤의 교성이 터졌다.
차언은 떨어지는 속도만큼 자꾸 꺼져 가는 쾌감이 못내 아쉬워 그의 목을 꾹 끌어안고 두 다리를 쩍 벌렸다. 그리고 귀두에 맞춰 보지 방향을 조준했다. 기분 좋은 지점을 향해 그가 내달려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침이 연거푸 꿀꺽꿀꺽 넘어갔다.
움직여 달라는 그녀의 뜻을 알아챈 그가 성기를 처박아 대기 시작했다. 비교도 안 되는 속도와 자지 무게감, 말도 안 되는 쾌감의 열량, 차언은 짐승처럼 다리를 활짝 열어 보지를 있는 대로 펼친 채 새되게 울어 댔다.
“아앙! 아, 아흐! 앙! 아아. 거, 거기. 아!”
머릿속이 연속적으로 뭉그러지는 쾌감에 눈물이 찔끔 났다. 기분이 이상해. 좋아. 왜,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 아무것도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그 감각만큼은 분명했다.
그가 자신의 아랫배를 더듬는다. 소화가 돼도 벌써 됐지. 그래도 그는 자신이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같았다. 그냥, 그는 뭐든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난 손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상처투성이인 그녀를 보듬는다. 차언은 뜨겁게 끌어안아 주는 그의 품을 거절하지 않고 파고들었다.
“좀 더 안아 봐.”
나른한 목소리가 귀를 주무른다. 네가 놓지 않으면 자신 역시 널 놓지 않는다고 몸을 끌어안는다. 아니 그녀가 이 손을 뿌리쳐도 어디도 갈 수 없다고 그가 속삭인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침대에서나 일상에서나 늘 명령조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꼭 이거 하라, 저거 하라, 명령은 하면서도 손을 먼저 붙여 오는 것도, 먼저 끌어안아 가는 것도 그였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서로에게 이끌리는 이 마음의 형태를 무엇이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두 사람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정을 하고서도 한참 동안 말없이 자신을 안고 있었다.
머리통을 끌어안고, 귓가에 가만히 숨을 불어 넣으며. 마치 생사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지금을 만끽하는 사람처럼.
별 사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별 사이처럼 행동하고,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감정적인 것들을 나눌 만큼 특별하지 않다고 하면서 감정의 교류는 그 외엔 어떤 누구와도 나눌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과 다르다. 그래서 따라잡기가 힘들고 그의 손을 잡기가 벅차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의 품을 선택했다. 그와 걸음의 보폭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고 여기며.
새벽이 지나가고 막 동이 트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문 앞에 놓인 종이 가방엔 속옷과 함께 사고 차량 안에 버려졌던 자신의 가방이 있었다.
* * *
병원으로 오기 전.
권석은 군데군데 치아가 빠져 쿨럭 피를 토하는 남자를 보며 피가 묻은 손을 닦았다.
뽑은 솜씨를 보니 종섭의 짓이었다. 대체 치아는 왜 처빼고 자빠졌나 몰라. 다른 걸로 가라니까. 그러다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원하는 답을 못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성태야, 김윤기가 맞다. 그지?”
“살려, 살려 주… 세요. 이사, 이사님.”
입을 다물지 못해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애원한다. 발음이 새 듣기도 불편했다. 그러게 김종섭 개새끼가.
“나 좀 궁금한 게 있는데, 김윤기는 어차피 나 못 이겨, 너도 알잖아. 근데 왜 그런 거야?”
“그냥 정보만 좀 주면 끝이라고 해서, 그냥 몇 푼 주고받고 그뿐이었습니다. 이사님. 제가 죽을죄를, 이사님…….”
“그래. 알아. 너 돈 필요한 거. 그래서 내가 너한테 꽤 잘해 줬던 거 같은데. 아냐? 우리가 생각하는 액수가 달랐나?”
“이사님, 제가…….”
“왜, 김윤기가 이 자리라도 준다고 하든?”
오들오들 떠는 남자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숨통이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지. 대가리는 장식인가. 목이 허전해서 달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대체 왜 이런 무리수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인생 한 방이고, 도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승률이 있을 때야 올인하는 거지.
“좋지. 전무이사. 자리야 좋아. 근데 죽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짧은 한숨이 잇새로 흘렀다.
“종섭아, 윤기 데려와라.”
한쪽 눈이 쇠꼬챙이에 찔린 채 질질 끌려오는 김윤기는 이미 한쪽 발목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아킬레스건을 누구보다 깔끔하게 절단하던 종섭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과격하다.
사실 배후가 김윤기라는 건 직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니라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상대 중 하나였고, 김윤기 하나 날린다고 제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성 회장도 아니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만이 살아남는다. 그 사실을 성 회장 역시 모를 리 없을 테고, 성 회장의 심중엔 자신뿐이니 사실상 성 회장으로서도 손 더럽히지 않고 문성 내 권력을 하나로 통합하고 권력 싸움을 일찍이 차단시키는 셈이었다.
그러기로서니 시기가 이르다는 게 문제였다.
성 회장은 아직 은퇴하기엔 젊고, 그러기엔 권석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도 성 회장으로선 골치가 아팠다.
그렇다고 이제 와 뭐 어쩌겠는가. 이미 문성 내 권력 구도는 한 방향으로 승패가 결정 난 것을.
설마 자신이 성 회장까지 치려고. 제아무리 문성 내에서 실세처럼 굴어도 권석이 성 회장을 먼저 치는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 역시 성 회장도 알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하극상 같은 게 문제가 되겠냐만, 자신 역시 성 회장을 큰형님으로 받들고 있는 처지에 배신이라는 전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꼴에 배신이라는 본보기를 보여 수하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겐 성 회장 역시 거의 반평생을 함께해 온 중요한 사람이었다. 목숨 바쳐 모셔야 할 상관.
그가 자신을 아끼는 만큼 자신 역시 성 회장이 그랬다. 중요한 건 지켜야 마땅하다.
“윤기야, 내가 형이라고 안 불러 줘서 화가 났어? 그래서 그래?”
“개 씨발 새끼야. 너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어?”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어차피 너 뒈지고 나서 일인데.”
권석은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재깍 불을 붙여 준 건주가 뒤로 물러선다. 정차언이나 지키고 있으라니까. 잘 안 그러는 놈이 명까지 어기고 따라붙었다.
최시백과 남다른 사이인 걸 아니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못마땅했다.
“건주야, 넌 여기서 뭐 하니?”
“형님, 이 새끼 뒈지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
“건주야. 정차언 다치면 네 책임이다. 제발 시키는 일이나 잘하자. 어?”
“가겠습니다.”
“그래.”
권석은 원하던 답을 다 들은 후에야 종섭에게 눈짓을 했다.
퍽, 그대로 목구멍에 칼이 꽂힌 남자가 옆으로 넘어갔다. 총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종섭은 유독 뾰족한 칼날을 휘두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가끔은 이 피 냄새가 지긋지긋했다.
“뒤처리하고 와라. 대충 마무리되면 애들한테 시키고 너도 최시백한테 가 봐.”
“예, 형님.”
뒤처리를 시키고 밖으로 나와 바다를 보고 마주 섰다.
2년 전쯤. 연락 두절된 수지를 발견한 건 그녀의 집에서였다.
도박 빚에 허덕였던 김주섭이 내연녀를 찾아가 돈을 빌리다 결국 정수지에게까지 찾아갔다. 태어나 처음 보았을 부친의 얼굴. 그게 괴물이었는지 몰랐겠지.
온몸은 멍투성이였고 속옷도 찢어져 있었다. 엉망이 된 몸뚱이를 가누지 못해 간신히 다리 닫던 여자.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죽어 가던 그녀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성 회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몸과 마음을 다 찢긴 채 죽기 직전까지 맞았던 여자. 돈을 뺏기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저항을 한 듯했다.
한 달 가까이 병원에서 살았지만, 친동생에겐 절대 연락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저와는 달리 강한 척해도 마음 약한 아이예요. 저 혼자만 아팠으면 해요.”
집엔 오지 말라고 정차언에게 전화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난다.
퇴원을 하고서도 그녀는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자살을 하기 직전까지도 그녀의 얼굴을 보았으나 별다른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김주섭을 처리했다고 말했을 때 아주 한참 동안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정도.
성 회장에게 받아 모아 두었던 돈이며 가방, 시계. 할 것 없이 돈 될 만한 건 김주섭에게 다 뺏긴 그녀는 오로지 동생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김주섭.
성 회장의 명령으로 그를 잡아들였다. 성 회장의 어린 애인을 건드린 죄는 죽음으로 모자랐다.
눈 한쪽을 찔렀을 때, 자신의 신발까지 핥던 남자였다. 살려 달라고 빌고 두 손을 모아 납작하게 엎드렸다. 머리가 땅에 닿고 그의 손이 바닥과 붙었다.
“다음에 네 자식새끼 만나면 이렇게 대가리 푹 처박는 거야. 알았어?”
“죄, 죄송. 제가 다 잘못… 제발 살려…….”
“그러니까 그 말을 네 딸자식한테 하란 말이야.”
총구를 겨누는 시백의 손을 걷어 치우고 남자의 머리통을 향해 칼끝을 내리꽂았다. 그 잘못했다는 말이 진심일지. 글쎄. 인간이 변하길 바라는 것만큼 등신 같은 짓이 또 있나 싶었다.
권석은 이 바다에 뿌렸던 김주섭의 피 냄새가 떠올라 조금 불쾌했다.
아마 정차언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교 앞 편의점에서였다. 새벽의 편의점. 김주섭을 처리한 그날이었다.
담배 하나를 사고 지폐를 내밀자 가만히 받아 가던 손.
그때만 해도 자신의 언니가 죽을 거라고는 모르고 그저 열심히 제 구질구질한 팔자를 탈피해 보고자 일하던 손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익숙한 손.
“저… 거스름돈이요, 손님.”
동글동글한 눈이 너무 맑아 짜증이 치솟았다.
김주섭의 씨를 받아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그때, 자신이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었을까.
왜 너만큼은 이 구질구질하고 좆같은 세계에서 꺼내 주고 싶었을까. 세상 누구보다 더러운 바닥에서 굴러먹으면서도 주제도 모르고 뭐, 그런 시혜적인 마음으로다 접근했었다.
그게 사랑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런 팔자 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