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99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자벨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후의 용이라니? 각하가 나후타야를 산 채로 봉인했잖아. 그럼 저 금빛 용을 죽이든 살리든 아스칸다르는 최후의 용이 될 수 없는 거 아냐? 그리고, 아스칸다르가 각하를 사로잡았다고?”
이자벨라가 피식 웃었다. 테온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데, 고작 아스칸다르 따위가 그를 사로잡았단 말이 우스웠다.
“꼬마들아, 너희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지상에 각하를 궁지로 몰 수 있는 존재는 없어. 각하는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는 용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이지.”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강함이 모든 위기를 막아 주진 않아요.”
“요 어린 계집애가 말하는 것 좀 봐. 누가 누굴 가르치는 거야? 지금쯤 각하는 동방에 도착해서 아스칸다르를 토막 내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미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일지도 모르지.”
테온을 떠올리자, 이자벨라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테온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요한나와 아우레오는 그 모습을 보고 이자벨라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신, 그동안 어디 깊은 숲속에서 지냈어요?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라든가…….”
두 성직자의 물음에 이자벨라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성녀와 성자, 그리고 마녀
“어떻게 알았어? 난 벌써 몇 주째 요정숲에서 죽치고 있거든. 지겨워 죽겠는데, 누굴 좀 기다리느라 요정숲을 떠날 수가 없었어.”
이자벨라는 자기가 테온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을 쏙 빼놓고 말했다.
마녀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테온이 곤란할까 봐 말을 아낀 것이었다.
하지만 요한나는 둘의 관계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후타야의 둥지에서 크로우 백작 각하를 기다리고 있었군요. 그래서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고요. 아, 당신이 각하와 각별한 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러니 편하게 이야기해요.”
“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마녀가 테온과 각별한 사이라고요?”
아우레오의 물음에 요한나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자벨라는 뱀파이어 마법사이며, 테온과 복잡한 인연으로 얽힌 사이라는 내용이었다.
“테온에게…… 뱀파이어 친우가 있었다니…….”
아우레오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올곧은 믿음의 상징과도 같았던 테온에게 자기가 몰랐던 일면이 있었다.
“야, 누가 친우야? 난 각하의 연인이라고!”
“연인?! 당신이 테온의 연인이라고?!”
이 대목에서는 아우레오도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테온이 뱀파이어와 사적 친분이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연인이라니? 아우레오는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에이, 이봐요, 그건 아니잖아요. 왜 거짓말을 해요?”
“거, 거짓말이라니? 나는 각하와 함께 살고 있고, 서로의 비밀을 전부 공유해. 내가 각하의 연인이 아니면 뭐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상호 동의한 연인 관계예요?”
“그, 그건…….”
핵심을 찌르는 요한나의 물음에 이자벨라가 버벅거렸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의 흐른 뒤 초라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 예비 연인이야…….”
* * *
한편, 아도나이가 홀연히 떠난 천막.
혼자 남은 아스칸다르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금빛 용……. 영혼만 남았다는 금빛 용을 찾아서 죽여야 해……!’
아스칸다르에게 당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중부 대교구의 군대가 눈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도, 동방군이 돌격 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권능을 되찾는 게 무엇보다 급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만사를 제쳐 두고 금빛 용부터 찾아야 했다.
‘아도나이는 내 반응을 예상했겠지? 그놈이 직접 찾아와서 정보를 줬다는 건, 내가 금빛 용을 찾아가길 바란다는 뜻인데…….’
아도나이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건 치 떨리게 싫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또한, 그가 금빛 용을 찾아 죽이는데 아도나이가 대체 무슨 이득을 얻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도통 짐작할 수가 없군. 어쨌든, 금빛 용은 죽여야 해. 하지만 아도나이의 예상대로 순순히 움직여 줄 수는 없지.’
아스칸다르는 결국 금빛 용을 찾아 죽여야 한다. 하지만 직접 나서진 않기로 했다. 그는 금빛 용을 대면하지 않고도 죽일 방법이 있다.
“검은 용이시여!”
천막이 거칠게 열리고, 테온이 날렵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용이시여! 당신의 기파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 느꼈습니다! 혹여 적의 암습이 있었던 것입니까?”
테온은 운철묵검을 뽑아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몸에서는 막대한 내력이 소용돌이치고, 눈에서는 살기가 줄줄 흘렀다.
그 믿음직한 모습에 아스칸다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암습보다 더 큰 일이 있었다. 방금 아도나이가 내게 찾아와서…….]아스칸다르는 테온에게 자세한 내막을 설명했다. 그는 자기가 약해졌다는 걸 테온에게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비록 용언마법을 상실했어도, 이미 정신지배에 걸린 테온이 갑자기 깨어나거나 하진 않는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테온이야.’
아스칸다르는 금빛 용 척살에 테온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아도나이는 분명 검은 용이 직접 나설 거라고 예상했을 터. 그 예상을 깨고 좀 더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금빛 용은 육신이 없는 반쪽짜리라고 했지? 그 정도면 테온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테온의 실력을 직접 몸으로 겪어 본 아스칸다르. 그는 테온이 사용하는 막강한 차크라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테온, 네가 단독 임무에 나서야겠다. 너의 차크라 블레이드는 영체 상태의 용도 베어 버릴 수 있으니까.]아스칸다르는 그렇게 말하며 웬 녹슨 낫을 내밀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농기구는 아스칸다르가 보유한 다양한 마법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이건 ‘혼령 수확자의 낫’이다. 지상에 숨어 있는 다양한 망령을 찾아내고, 그곳으로 공간이동을 시켜 주는 물건이지. 일시적으로 용의 영혼만 추적하도록 술식을 바꿔 줄 테니, 이걸 사용하면 금빛 용이 있는 곳으로 금방 갈 수 있을 게다.]아스칸다르의 마력이 낫을 감싸고, 낫에 담긴 마법이 약간 변했다.
[가라, 테온. 드라타레스을 찾아가서 죽이고, 나의 영광을 되찾아와라.]테온은 공손하게 낫을 받아 들고, 즉시 천막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령 수확자의 낫이 작동했고, 테온은 망설임 없이 공간이동에 몸을 맡겼다.
* * *
테온의 연인을 사칭하다 거짓말이 들통난 이자벨라.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각하는 동방에서 유유자적 관광이나 즐기고 있을 테니, 저 금빛 용의 망령은 이 자리에서 소멸시켜 버리자.”
“당신은 각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군요.”
이자벨라는 테온이 타락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두 성직자의 침중한 표정만 보고도 테온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각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자벨라의 머리칼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그녀의 살기에 반응한 용마력이 전신에서 진득하게 흘러나오고, 붉은 동공이 점점 커졌다.
“으윽…….”
그 거친 마력에 요한나가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아우레오는 요한나를 자기 등 뒤로 숨기고 대신 대답했다.
“저도 믿기 힘든 일이지만, 지금 테온은 검은 용의 정신지배에 당해 타락한 상태입니다. 검은 용은 옛 권능을 되찾았고…….”
아우레오는 앞뒤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테온과 마녀의 관계에 놀라 잠깐 정신이 없었지만,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 마녀와 테온의 관계는 다소 일방적인 것 같아. 마녀가 테온을 보고 짝사랑에 빠졌나 보군.’
이렇게 강력한 마녀가 왜 교회의 성기사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녀 간의 감정이란 게 원래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게다가 아우레오는 아직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없는 탓에, 테온과 이자벨라의 관계가 자기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 정도로 느껴지기도 했다.
‘테온을 만나서 삼자대면을 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은 아우레오는 이자벨라에게 모든 상황을 공유했다. 요한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아스칸다르가 각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가 감히……!”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이자벨라의 반응이 격했다. 폭풍 같은 살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삼각주로 날아가 동방군 진영에 마력탄을 쏟아부을 태세였다.
“당신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군요. 자, 함께 가요. 타락에 물든 각하를 구원하려면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해요.”
“으, 은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한나의 발언에 아우레오가 당황하고, 이자벨라도 흠칫 놀랐다.
성녀는 지금 마녀를 동료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이런 과감한 결단을 그녀가 독단적으로 내렸을 리는 없고, 분명 아도나이의 지침이 있었을 터다.
“아도나이가 시켰어? 마녀와 힘을 합치라고?”
“풉, 그게 중요해요? 중요한 건 각하를 구하는 것 아닌가요?”
이자벨라는 일부러 도발적인 말을 던졌지만, 요한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그 모습이 오히려 이자벨라에게 믿음을 주었다.
‘이 꼬마의 말이 맞아. 검은 용이 옛 권능을 절반이나 되찾았다면, 나 혼자 놈의 근거지로 쳐들어가 봤자 각하를 구할 수 없을 거야.’
구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 거체를 되찾은 검은 용은 마르지 않는 용마력을 가졌을 테니, 마법사로서 이자벨라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날 것이다.
“우리는 용사를 구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해요. 저와 아우레오 사제, 그리고 언……니는 서로의 약점을 채워 줄 수 있어요.”
‘언니?’
이자벨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성녀에게 언니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요한나도 말하고 보니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뭐, 좋아. 너희와 함께 갈게. 너희는 철부지 꼬마들이지만, 용을 상대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이자벨라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금빛 용의 등장으로 아스칸다르는 용언마법을 봉인당했다. 이건 아도나이가 성녀에게 직접 일러 준 내용이니 확실한 정보였다.
‘그래도 아스칸다르는 만만치 않은 상대야. 용의 거체에 무한한 용마력을 가졌고, 검은 용족 고유의 맹독 주문도 있으니까.’
테온이 정신지배에 걸려 무력화된 이상, 아스칸다르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지상에 없다.
‘얘들과 손을 잡고 역할을 분담해야 해. 나는 원거리 공격을 담당하고, 신성력이 강한 아우레오는 방어를 맡아 줘야겠군. 성녀에게는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여러 권능이 있을 테니, 돌발적으로 싸움의 흐름을 뒤집을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니 인원 구성이 제법 괜찮았다. 다만 근거리에서 아스칸다르의 눈을 어지럽히며 싸워 줄 전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딱 좋은 녀석이 있지. 제 몸 사리지 않고 아스칸다르를 들이받을 용맹한 전사가…….’
이자벨라가 품에서 작은 리자드맨 인형을 꺼냈다. 붉은색 몸통에 목이 잘린, 다소 징그럽게 생긴 인형이었다.
파팟!
이자벨라가 위치 교환 마법을 시전하자, 드라고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형 대신 나타난 지상 최강의 언데드 전사가 답답한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폈다.
“저, 저게 뭐야……?!”
“성녀 은하, 제 뒤로 오십시오!”
드라고한을 본 두 성직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비늘을 가진 용인이 목이 잘린 채 걸어오고, 손에 든 사슬 철퇴 끝에는 용 대가리가 붙어 있었다.
심지어 잘린 대가리가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고, 전신에서는 막강한 용마력과 살기가 풍겼다.
“호호, 놀랐니? 인사해. 내 개인 경호원, 드라고한이야.”
“이, 이건 서부 화룡의 사체잖아요? 오비데우스의 몸으로 대체 뭘 만든 거예요?”
요한나가 드라고한의 정체를 알아봤다. 아우레오도 마찬가지였다.
이자벨라는 깔깔 웃으며 드라고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뭐긴 뭐겠어? 목 잘린 사체로 만든 언데드이니, 당연히 듀라한이지. 걱정하지 마. 생긴 건 이래도, 내 말은 잘 듣는 녀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