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204
지상 최강의 마녀가 자신의 나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자벨라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면, 아스칸다르와 동귀어진하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
나는 문득 입꼬리가 씰룩거려 입술을 깨물었다. 본의 아니게 이 녀석들을 속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아우레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내 발등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는 이자벨라의 모습이 가엽기도 했다.
“그쯤 하시죠, 각하.”
고개를 돌려 보니, 요한나가 쀼루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 차렸잖아요. 나까지 속이려는 건 아니죠?”
“크흠…….”
어색한 헛기침에 장내의 공기가 변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사파에서 온 용사
요한나의 옆에는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드라고한이 있었다.
‘드라고한이 몸을 던져 요한나를 보호한 모양이군.’
성녀를 지키기 위한 언데드의 분투라니,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요한나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그녀의 눈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고, 긴장도 많이 떨쳐 낸 모습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나?”
“아뇨. 한낱 인간인 제가 반신(半神)이 된 각하의 마음을 어떻게 읽겠어요?”
요한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하지만 마음을 읽지 않아도, 각하가 우리 편이란 건 알 수 있죠. 제가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건 각하의 격이 신에 근접했다는 뜻이고, 그럼 더 이상 아스칸다르의 정신지배가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바로 맞혔다. 놀릴 생각은 없었는데, 우물쭈물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군.”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아우레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고, 엎드려서 울던 이자벨라가 고개를 홱 들었다.
“테온! 돌아왔군요!”
“각하?! 정말 각하예요?!”
두 사람이 내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나는 둘을 안고 토닥이며 아스칸다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 아주 수족처럼 부려 먹었더군, 아스칸다르. 그동안 재미가 좋았겠어?”
[너, 너, 너, 설마……!]아스칸다르는 내가 동료들과 느긋하게 해후를 나누는 동안에도 감히 선제공격하지 못했다. 반선이 된 나의 진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용의 옛 권능을 온전히 회복했고, 그의 격은 단순히 하나의 생물종을 넘어 신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러니 비슷한 격을 가진 존재를 곧바로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인간이 어떻게……! 너는 아도나이처럼 다른 이의 신앙을 이용한 것도 아니잖아……?!]“설명해도 넌 알아듣지 못할 게다.”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폐허가 된 요정숲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운철묵검이 화살처럼 날아와 손에 잡혔다.
“아도나이가 그러더군. 용은 인간에게 밀려 사라졌어야 할 운명이라고. 너를 비롯한 네 마리의 용은 섭리를 거스르고 있다고…….”
[교만한 아도나이의 헛소리를 믿나?! 흥, 초월적 존재가 된 줄 알았더니, 네놈도 고작 아도나이의 하수인에 불과했구나!]“나도 아도나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원래 운명이란 말을 싫어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너희 용이란 족속이 멸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아스칸다르가 한 발짝 물러서며 비늘을 바짝 세웠다. 그는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살기를 느꼈다.
“감히 나를 홀려 노예로 부리다니, 네놈이 백번을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스칸다르의 용언마법이 펼쳐졌다.
극독이 쇠사슬처럼 얽혀 사방을 휘젓고, 접촉하는 모든 것은 녹아서 형체를 잃었다. 마치 설탕으로 만든 세상에 뜨거운 물줄기를 갈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촤르르륵!
고압의 독액이 나와 일행을 덮쳤다.
나는 호신강기를 넓게 펼쳐 방어했고, 땅을 녹이던 극독도 생사경의 호신강기는 뚫지 못했다.
허공에서 흩어지는 독액 방울을 보는 아스칸다르의 표정이 황망했다.
“검은 용이여, 너의 야망은 여기까지다.”
호신강기를 거두고, 운철묵검에서 강기를 뽑아 올렸다. 오색강기를 넘어선 별빛의 강기, 삼청귀일옥강이었다.
아스칸다르가 용언으로 펼친 보호막도 반선의 검격에는 소용이 없었다.
일곱 별빛은 보호막을 통과해 계속 날아갔고, 결국 아스칸다르의 몸을 관통했다.
[악!]같은 반신의 격을 가졌어도, 아스칸다르와 내가 쌓아 온 수행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스칸다르는 타고난 능력에 의존했고, 그의 마법은 용언의 권능을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었다.
반면, 나는 한평생 무도를 탐구하며 살아왔다. 인간의 끝없는 향상심은 타고난 능력 이상의 것을 갈구했고, 그 차이가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했다.
용언으로 시전한 보호막은 도가검도의 진수인 삼청귀일옥강을 채 일 검도 받아 내지 못했다.
[내가, 내가 고작 인간에게……!]검은 용의 거체에서 생명의 기운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지상에 남은 마지막 용, 아스칸다르의 몸이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그가 동방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속이며 쌓아 온 업보에 비하면 허망할 정도로 편안한 죽음이지만, 지상의 어느 종족보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용에게는 견딜 수 없이 비참한 최후였다.
“불필요한 고통은 주지 않으마.”
[이럴 수는 없어……! 나는, 나는 지상의 신이 될 존재인데……!]아스칸다르의 마지막 말이 그의 육신과 함께 흩어졌다.
* * *
싸움이 끝났다.
용은 멸종했고, 진정한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나를 위협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무엇이 남았나.’
우연과 필연이 겹쳐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장장 삼 년.
그 길었던 모험의 끝에 무엇이 나에게 남았나.
주변을 둘러보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아우레오가 요한나를 부축하고, 이자벨라는 망가져 버린 드라고한을 쓰다듬었다.
“아우레오, 너도 이제 내 과거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웬일로 자초지종을 묻지 않는구나.”
내 말에 아우레오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 역시 성자의 영역에 발을 디딘 사제였고, 지금의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터다.
“테온이 여전히 저의 친구로 남았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요.”
친구라는 말이 문득 낯뜨겁게 느껴졌다.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한평생 사람을 멀리해 온 나에게는 낯선 말이다.
멋쩍은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자벨라에게 말을 건넸다.
“뚱보의 영혼을 회수할 셈이냐? 다른 육체를 구해서 부활시키려고?”
“……아뇨.”
이자벨라가 짧은 고민 끝에 손을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화염 마법을 시전해 오비데우스의 본체를 재로 만들었다.
“뚱보에게도 안식을 주어야겠어요.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만 보내 주어야겠지요.”
그러면서 이자벨라는 나에게 다가와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손을 주무르거나 볼을 만지기도 했다.
“뭐 하는 거야?”
“각하가 맞나 싶어서요. 아까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요?”
“지나간 이야기를 해서 뭐 하냐.”
퉁명스러운 대답에 이자벨라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각하, 다른 세계로 떠나실 건가요?]이자벨라가 텔레파시로 속삭였다.
그녀 역시 내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예전부터 의아했어요. 각하 같은 인간은 본 적이 없거든요. 외모도, 사고방식도, 가진 지식이나 사용하는 기술도…….]이자벨라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울음이 옅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실 건가요……?]그녀의 손가락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꼬물거렸다. 시선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를 이곳에 혼자 두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릴 거냐고요…….]“안 간다.”
“……!”
이자벨라의 표정이 봄날의 햇살처럼 환해졌다. 티 없는 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고향으로 가는 건 그리 급하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은 갈 방법도 없어.”
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무공이 천외천에 닿았어도 차원을 넘나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도나이와 약속까지 했고……. 게다가 나는 신선이 아니라 반선이다. 아직은 육체가 필요하단 말이지.’
아도나이나 사부가 정신체로 변해 차원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것과 달리, 나는 육신을 가진 채 차원의 벽을 넘어야 한다.
결국, 오크나 귀혈의 뱀파이어처럼 차원 이동 마법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굳이 텔레파시로 몰래 말할 필요 없다. 요한나는 이미 내 속사정을 다 알고, 아우레오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으니까.”
“헤헤, 그래요?”
이자벨라가 뒷짐을 지고 깡총깡총 뛰어서 앞질러 갔다. 마음속 무거운 짐을 덜어 낸 모습이었다.
그녀는 힘들게 몸을 가누고 있는 아우레오와 요한나를 부축하고 상처를 돌봐 주었다.
“내가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해 줄까?”
“괜찮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낫겠지요.”
두 성직자는 더 이상 이자벨라를 경계하지 않았지만, 역시 마법의 도움을 받는 건 거절했다.
“테온, 결국 그대가 검은 용을 처단했네요. 용의 시대를 완벽히 끝내 버리다니…… 인세에 다시 없을 위대한 업적입니다.”
“말 안 해도 알아, 인마.”
짓궂게 말하며 아우레오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각하,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글쎄, 일단은 중부군 주둔지로 가야겠지? 아스칸다르가 죽었으니 동방군은 곧 철수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삼각주로 가서 대교구의 군대에 합류해야겠다.”
내 대답을 들은 요한나도 얼굴이 밝아졌다.
내가 멀쩡한 모습으로 귀환해서 아스칸다르의 죽음을 전하면, 중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을 것이다.
반대로, 동방군은 단순히 사기가 떨어지는 걸 넘어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자기들이 신이라 믿었던 검은 용이 고작 이교도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각하가 참전하면 삼각주 전쟁은 곧 끝날 테고, 그다음은요?”
이자벨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녀는 나의 미래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확답을 더 듣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오덴세섬으로 돌아가야지. 영지를 오래 비워 두었으니, 돌아가면 당분간 섬의 치정에 매진할 거야. 네가 안주인 노릇을 해야 하니, 할 일이 많을 거다, 이자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