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68
“전하, 이마에서 피가……!”
“나는 괜찮다. 경들은 무사한가?”
“저희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이 대부분 빠져나오지 못했으니…….”
세속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떨궜다.
보아하니 주교공과 함께 온 후발대인 것 같은데, 유적에 진입하자마자 붕괴가 일어난 듯했다. 그래도 몇 명은 빠져나온 걸 보면 깊이 들어가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직 생존자가 있을지 모른다. 드워프를 포함한 북부의 모든 광부를 고용해 매몰된 기사들을 구하겠다. 저택으로 돌아가자.”
“예, 전하!”
그들이 몸을 돌려 윈스크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예하!”
“……?”
윈스크 교구의 생존 사제가 눈물을 흘리며 주교공에게 달려갔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늑대 도살자 테온? 그대가 왜 여기에 있지? 아까 분명 교구에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예하를 앞질러 왔다.”
“……구하러 왔다고? 유적이 붕괴한다는 걸 어떻게 미리 알았지?”
“아, 그건…….”
순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둘러댔지만, 이 냉막한 인상의 정치가도 그걸 믿어 줄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예하, 테온은 꿈을 통해 아도나이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의 꿈과 오늘 벌어진 일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맞습니다, 전하! 테온은 목숨을 걸고 우리를 먼저 탈출시켰습니다!”
다행히 성직자들이 먼저 나서서 나를 변호했다. 드워프들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내가 꿈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말에 주교공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꿈 때문에 왔다고?”
“그렇습니다, 예하. 테온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저희에게 말해 주었지요. 꿈에서 저희가 무너지는 동굴에 갇혀 있었다고요. 한데, 실제로 지하 유적이 무너졌고 저희는 내부에 갇혔었습니다. 테온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죽었겠지요.”
이미 생존자들은 완전한 내 편이 되어 있었다. 첫 만남부터 신비인을 제압하며 호감을 샀고, 이어진 신비인의 마법과 유적 붕괴, 목숨을 건 탈출까지 겪으며 동료 의식이 탄탄하게 자리 잡은 뒤였다.
“이들의 말이 모두 사실인가?”
“그렇다. 어젯밤 꿈을 통해 선명한 계시를 받았지.”
“…….”
주교공의 표정이 복잡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대놓고 거짓말로 몰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세속의 공작이지만, 동시에 북부의 신앙을 대표하는 주교이기도 했으니까.
“그대의 꿈에 대해서는 차후에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갖도록 하지. 나는 우선 윈스크로 돌아갈 생각이다. 한시라도 빨리 구조대를 편성해 매몰된 기사들을 구해야 하거든. 그대도 교구로 복귀해야 할 테니 우리와 동행하지.”
“…….”
솔직히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나는 매몰 지역을 돌아다니며 혹시 파묻혀 있을지 모르는 마정석부터 찾고 싶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내공으로 진류오행도를 펼치느라 고생한 마당이라, 내공을 향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주교공의 눈빛은 단호했고,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면서 정작 나 혼자 영구동토에 남겠다고 하면, 괜한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좋아, 함께 가자. 어차피 가는 길이 같으니까.”
결국 나는 주교공과 동행을 택했다.
행렬은 자연스럽게 세 무리로 나뉘었다. 주교공 세력, 북부정교회 생존자들, 그리고 드워프들.
나는 드워프들과 함께 행렬 뒤쪽에 자리했다.
“테온, 이거 받아.”
힘릿이 내게 독특한 물건을 내밀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크기의 짐차 모형이었는데, 장난감치고 그 만듦새가 대단히 정교했다.
“네 덕에 목숨을 두 번이나 건졌군. 넌 진정한 드워프의 친구야. 언젠가 이락고원에 갈 일이 있으면, 잿바위 부족에게 이 징표를 보여 줘. 충분한 보상을 해 줄 거야.”
“됐다. 너희 부족은 대부분 광부라며? 난 광부들에게는 딱히 받을 게 없어.”
“무슨 섭섭한 소릴! 잿바위 부족은 광산 개발로 큰돈을 만지고 있다고. 네가 찾아가면 귀한 보석을 한 아름 안겨 줄 거야.”
“나한테 필요한 건 보석 같은 게 아닌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힘릿이 관심을 보였다.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그럼 뭐가 필요한데? 특별히 원하는 게 있나?”
“혹시…….”
나는 힘릿의 귀를 잡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유적 발굴하면서 챙겨 둔 마정석 좀 있어?”
사파에서 온 용사
힘을 잃은 주교공
“마……!”
힘릿이 놀라서 되물으려 할 때 내가 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이봐 힘릿, 여기서 네가 큰 소리로 마정석을 외치면 내가 곤란하지 않겠어?”
힘릿의 눈빛이 잠깐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그의 입에서 손을 떼고 사정을 설명했다.
“난 마정석을 정화하고 그 안에 응축된 마나를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어. 뭐, 그 과정에서 내가 얻는 것도 있지만, 문제 될 건 없잖아?”
거짓이 약간 섞였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힘릿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네가 마정석으로 나쁜 짓을 할 인물도 아니니까.”
“바로 그거야. 한데, 저 벽창호 같은 성직자들은 이런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거든. 그러니 비밀로 해 달라고.”
“알겠어.”
역시 실리적인 드워프답게, 힘릿은 쉽게 납득했다.
“그래서, 마정석이 있어, 없어?”
“……이쪽으로.”
힘릿은 슬쩍 행렬 뒤로 빠졌다. 나도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행렬과 멀어졌다.
“받아.”
“오오.”
힘릿이 슬쩍 건네준 보석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황옥(黃玉)이었다. 파장을 느껴 보니 내부에 충만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이렇게 큰 걸 꼬불쳐 놨다니……. 너도 보통이 아닌 놈이구나.”
“오해는 하지 마. 국왕 전하는 우리에게 광산을 개발하라고 했을 뿐, 저렇게 위험한 마법 유적이라고 얘기한 적 없다고. 그러니 마정석을 내가 챙겨도 신의를 깨는 행동은 아니야.”
“어련하실까.”
내가 웃어넘기자 힘릿도 피식 웃었다. 어찌 보면 이것으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셈이었다.
‘내 비밀을 듣고 곧장 자기 비밀을 말해 주다니, 이런 게 드워프식 우정인가?’
혹여 혼자 비밀을 밝힌 내 마음이 불편할까 봐 힘릿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자기 비밀을 이야기한 것이다. 새삼 드워프와 친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
아우레오부터 시작해서 이 세계에 여러 인연이 생기고 있었다.
채 일 년도 머물지 않았는데, 수십 년을 살아온 중원보다 여기에 가까운 사람이 더 많아질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주교공 예하는 이제 어쩔 셈이지? 휘하의 기사를 엄청나게 잃었잖아?”
“주교공은 그들이 살아 있다고 믿더군. 구조대를 보내 구출할 생각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힘릿도, 심지어 주교공 본인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유적은 완전히 붕괴했고, 그 안에 갇힌 사람은 이미 암반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설령 바위틈에 갇혀 목숨을 건졌다 하더라도, 뒤이어 들이친 토사에 질식해 죽고 말았을 터.
‘주교공은 교회의 성기사단을 선발대로 보내고, 공작 가문의 세속 기사단을 후발대로 보냈다. 사실상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은 셈인데, 몽땅 죽어 버렸어.’
주교공뿐만 아니라 북부정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조직의 명운을 걸고 대부분의 인원을 끌고 왔는데, 갑자기 벌어진 싸움과 이어진 붕괴에 수많은 성전사와 신관이 죽었다.
‘왕실이 어부리지를 얻었군.’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 * *
보론초바 주교공은 윈스크로 돌아오자마자 구조대를 꾸렸다. 하지만 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드워프 광부들은 고용하지 못했다. 왕실에서 이미 북부의 모든 드워프 광부를 고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비극이로다. 짐이 휘하의 드워프 광부들을 내줄 테니, 생존자 구출에 힘쓰라.
왕실에서는 전령을 보내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며 드워프 광부를 지원했다. 꼴사나운 행동이었지만, 사정이 급한 주교공은 별수 없이 왕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는 동안 윈스크에는 소문이 퍼졌다.
“윈스크 교구와 북부정교회가 영구동토에 있는 옛 유적에서 몰살당했대!”
“물론 들었지. 서로 유물을 차지하려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지?”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느라 유적이 무너지는 줄도 몰랐다더군. 결국 두 종파가 모두 바위에 깔려 죽었으니, 욕심이 화를 부른 거지.”
“금지된 마법 유물을 차지하려고 성직자끼리 다투다니, 말세군, 말세야!”
사실에 교묘한 거짓이 섞인 소문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시민들은 그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군.’
저런 소문을 퍼뜨려서 이득을 얻을 사람은 국왕밖에 없었다.
이미 윈스크 교구와 북부정교회가 몰락한 상황이니, 여론만 자기편으로 만들면 북부 전체가 왕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다.
힘을 잃은 주교공이나 북부정교회에서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으니, 왜곡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그러는 와중에 의외의 수혜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유적 붕괴에서 드워프와 성직자 들을 구출한 게 늑대 도살자 테온이래!”
“꿈에서 계시를 받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삭풍을 가르며 달려갔다면서?”
“과연 순례의 수호자답군! 아니, 이젠 교회의 수호자라고 불러야 할까?”
“광부 드워프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그를 드워프의 친구로 인정했다더군.”
유적 붕괴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과 함께 나에 대한 소문도 함께 번져 갔다.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영웅이 나타나길 기대하기 마련이고, 이번에는 내가 그 주인공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내 업적을 적극적으로 떠들고 다닌 드워프들과 아우레오의 노력이 있었지만 말이다.
* * *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결국 영구동토에 파견한 구조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생존자는커녕 시체도 몇 구 찾지 못한 처참한 성과였다.
윈스크 교구에서는 숨진 성기사들과 사제들, 세속 기사들까지 한꺼번에 기리는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교회의 성직자가 대부분 죽었고, 주교공 곁을 지키는 세속 기사도 십여 명만 살아남았다.
장례를 진행할 사제도 부족해 아우레오까지 나서서 도와야 할 지경이었다.
“장례를 무사히 마쳐서 다행이네요. 윈스크 교구에 큰 시련이 닥쳤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이겨 내겠지요.”
“글쎄, 진짜 시련은 지금부터일 것 같은데.”
아우레오는 지극히 사제다운 말을 지껄였지만, 내가 보기에 윈스크 교구가 과거의 성세를 되찾기란 요원해 보였다. 야심만만한 젊은 왕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장례가 끝나자마자 왕실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겔라구스의 국왕이 왕명으로 주교공을 소환한 것이다.
* * *
왕성에 불려간 것은 보론초바 주교공만이 아니었다.
젊은 왕은 유적 붕괴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성직자들, 기사들, 북부정교회의 최고장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 잿바위 드워프들과 나까지 왕성으로 불러들였다.
동토 유적 붕괴와 관련된 모든 인물을 불러 모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