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70
‘저놈에게 무슨 핑계로 접근하지?’
어떻게든 구실을 대고 접근해 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꼴불견 연회에 굳이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늑대 도살자 테온, 연회가 즐겁지 않은가?”
마침 파블로 왕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놈의 눈에는 더 이상 놀람이나 긴장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장난기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냈으니, 손봐 주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온 이들이 먼저 가 버려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군.”
내가 너스레를 떨자 파블로 왕이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올라오라.”
나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연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파블로 왕이 손을 거두기 전에 그의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대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지 몰랐는데.”
“나는 경어에 익숙하지 않을 뿐, 존중을 모르는 무뢰배는 아니다.”
적당히 둘러대며 파블로 왕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려는데, 놈이 무언가 눈치챈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놈도 나를 알아봤군…….”
“대놓고 다리를 저는데, 못 알아보면 병신이지.”
“큭큭, 내 몸에 상처를 낼 정도의 실력이니 너의 오만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세상에는 칼 한 자루로 막을 수 없는 흐름이 있다.”
파블로 왕은 내 입을 막을 자신이 있어 보였다.
물론 이놈이 지금 당장 나를 구속하거나 공격하진 못할 것이다. 이유 없이 구속하기에는 북부에서 내 명성도 만만치 않고,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싸울 수도 없을 테니.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가슴 뛰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놈은 인간이 아니다!’
동굴에서 싸울 때부터 의심했지만, 역시 파블로 왕은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파블로 왕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동안 그의 노궁혈에 미약한 진기를 주입했다.
노궁혈은 사람의 혈도 중 진기의 통행이 가장 원활한 혈도. 장력도 노궁혈을 통해 내뿜고, 흡성대법도 노궁혈을 통해 외부의 진기를 빨아들인다.
하지만 파블로 왕의 손바닥은 진기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아예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흡혈귀나 드워프처럼 혈도의 위치가 아예 다른 것이다.
‘왕이 유적에 나타난 건 정치적 이유가 있어서라고 쳐도, 설마 인간이 아니었다니!’
너무 충격적인 정보를 얻은 탓에 연회장이 번잡하게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윈스크 교구로 돌아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눈치껏 연회장에 머물다 적당한 시점에 빠져나왔다. 등 뒤로 파블로 왕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 * *
나는 왕성을 나오자마자 교회로 향하다가, 마음을 바꿔 교수대가 있는 광장에 먼저 들렀다. 늦은 밤이지만 잠들지 않고 광장을 배회하는 이가 있었다.
[테온! 이게 얼마 만이냐?]“몇 주 못 본 걸로 웬 호들갑이야?”
[흐흐, 혹시 날 잊었나 했지. 아직 부탁이 두 가지나 남았는데 말이야.]“약속은 지킬 거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영구동토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브찬친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 역시 도시에 퍼진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진실을 알게 되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보론초바 영감이 한 방 먹었군. 파블로 왕이 생각보다 교활한데? 그나저나 왕이 인간이 아니라니, 거짓말 같은 이야기네.]“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밝힐 수가 없어. 증거가 없으니까. 파블로 왕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당장 나를 공격하진 않는 것이겠지.”
[그래 봤자 습격은 시간문제 아니야? 정체를 들킨 시점에서 이미 넌 파블로 왕의 눈엣가시잖아.]“그래서 말인데, 네가 왕실에 잠입해서 파블로 왕을 감시해 줄 수 있나?”
보브찬친이 나서 준다면 들키지 않고 파블로 왕의 동태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지. 왕성이 교수대에서 좀 멀긴 하지만, 무리하면 못 할 것도 아니야.]“역시! 넌 최고의 망령이다!”
[그게 칭찬인가? 아무튼, 내가 왕성으로 가기 전에 두 번째 부탁을 먼저 들어주겠어?]보브찬친의 두 번째 부탁은 스칼렛에게 편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다 썼냐? 좋다. 전해 주지.”
보브찬친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준비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나는 교수대 옆에 앉아 그가 전하는 내용을 꼼꼼하게 받아적었다.
“네 동생들은 어떻게 됐어?”
[다행히 보론초바 영감이 실각하기 전에 윈스크 거주를 허락받았다. 스칼렛이 힘을 써 줬지. 이고르는 요즘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고 있어.]“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편지는 지금 당장 전해 주고 오마. 여기서 잠깐 기다려.”
나는 경신법을 펼쳐 스칼렛이 있는 보론초바 저택으로 날듯이 이동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스칼렛의 기묘한 경험
나는 보브찬친의 편지를 들고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저택으로 잠입했다.
저택의 경비는 허술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기사를 잃은 공작 가문은 오르샤바의 가야르도 백작 저택보다 침투하기 훨씬 쉬웠다.
-보론초바 공작 영애는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주교공 전하께서 외출을 금지했다고 들었습니다. 별채에 가두어 버렸다던가?
나는 일전에 자바니에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 곧장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첨탑처럼 세로로 긴 형태였는데, 꼭대기 층에 호화로운 방이 있었다.
창문에 바짝 붙어 천리지청술을 펼치자 안에서 하는 대화가 들렸다.
“전 이만 나가 볼게요. 푹 주무세요, 아가씨.”
“그래, 로라도 잘 자.”
시녀 로라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돌아본 스칼렛이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내 얼굴을 알아보고 침착을 되찾았다.
“늑대 도살자 테온? 아니, 드워프의 친구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냥 이름만 불러.”
“풉, 당신은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남이라면 천금을 줘서라도 얻으려 할 칭호인데…….”
스칼렛이 배시시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얇은 비단 잠옷만 입고 있었던 탓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죠? 그것도 이렇게 늦은 밤에.”
그녀가 탁상에 걸터앉아 찻주전자를 기울이며 말했다.
주전자에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들어 있었다. 찻잔을 홀짝이며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고혹적이었다.
‘보브찬친이 반할 만해.’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자세히 보니 스칼렛은 참으로 미인이었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균형미 있게 자리 잡았고, 백옥같이 흰 피부와 그에 대비되는 선명한 적발이 화려함을 더해 주었다.
“보브찬친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
여유만만하던 그녀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내가 자기와 보브찬친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죽은 보브찬친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니 그녀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받아. 그가 생전에 너에게 남긴 편지야.”
“……고마워요.”
편지를 받은 스칼렛은 곧장 읽지 못하고 소중히 품에 안았다. 마치 보브찬친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
“보브찬친과 나의 관계에 대해 어디까지 들었어요?”
“마법 스크롤에 얽힌 속사정 정도는 알고 있지.”
“보브찬친 그 사람, 생각보다 입이 가벼웠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스칼렛의 표정에는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자신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덧없이 죽어 버린 옛 연인, 아직도 그녀는 보브찬친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편지를 읽는 데 방해가 되겠군. 그럼 난 이만.”
“잠깐만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
창문으로 뛰어내리려는데 스칼렛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왕성에서 마법 스크롤을 가지고 올 때, 신기한 걸 봤어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해요.”
* * *
때는 반년 전 여름.
겔라구스 왕성에서는 파블로 왕이 개최하는 사교 파티가 한창이었다. 최고의 음식과 술이 준비되었고, 실력 있는 악단이 끊이지 않게 연주를 이어 갔다. 젊은 귀족들은 방탕하게 먹고 마시며 종종 몸을 섞기도 했다.
“머리 아파 죽겠네.”
스칼렛은 시끄러운 연회장을 벗어나 왕성의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인 그녀는 어느 파티에서든 주인공이었다.
사내들은 스칼렛의 배경과 미모에 반해 온갖 추파를 던졌고, 심지어 여인들조차 질투를 넘어 어떻게든 그녀와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중부 출신 귀족 여인들은 스칼렛과 잠자리를 원하기도 했다.
오늘도 웬 귀부인이 하인을 통해 침실로 초대하는 걸 거절하고 빠져나온 스칼렛이었다.
“소름 끼쳐.”
보수적인 북부에서 평생 살아온 그녀에게 동성애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이었다.
몸을 떨며 나지막이 투덜거린 스칼렛은 정처 없이 왕성 내부를 돌아다녔다.
왕성에서 근무하는 경비병 중 그녀를 몰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태생이 대귀족인 그녀는 왕성이건 뭐건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여긴 어디지?”
한참을 돌아다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질박하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왕성 내부와 달리 다소 음울하고 어두컴컴한 밀실이었다.
실내는 양초 서너 개로 간신히 밝혀져 있었고, 가운데에 놓인 책상에 다양한 글자와 도형이 그려진 종이 쪼가리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처음 보는 글자네.”
호기심이 동한 스칼렛은 책상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서랍에서 다량의 마법 스크롤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법에 아무런 소양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법 스크롤은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왕성에 왜 이런 게 있지? 파블로 왕이 아버님 몰래 숨겨 둔 건가?’
문득 스칼렛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왕이라도 감히 주교공 몰래 마법 스크롤을 모아 두다니, 당장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발동했다. 최근 연이은 가출로 별채에 감금당한 탓에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님께 가져다드리긴 싫고, 파블로 왕은 괘씸하고. 이걸 어쩐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스칼렛은 일단 젊은 왕을 골탕 먹이기 위해 마법 스크롤을 몽땅 챙겼다. 그녀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요즘 만나고 있는 애인 보브찬친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스칼렛이 밀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익숙한 왕성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밀실의 입구는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 *
‘입구가 사라져? 마법으로 출입구를 가려 놓았는데, 스칼렛이 우연히 생문(生門)으로 들어간 건가?’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중원의 진법과 비슷한 원리의 마법일 수도 있으니까.
“거기에 이상한 그림이 있었어요. 대강 이런 형태로…….”
스칼렛은 편지지 한 장을 펼치더니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일종의 설계도 같아 보였는데, 계속 지켜보니 지하 시설의 투시도였다.
‘이건 무너진 유적과 구조가 흡사한데?’
놀랍게도 투시도는 영구동토의 유적과 똑같았다. 다만, 싸움이 벌어졌던 지하 광장 아래에 숨겨진 시설이 더 있다는 점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