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05
치팅데이 105화
22. 으쌰으쌰(6)
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지?
분명 오늘 쉬기로 했던 묵은지가 태연히 손을 씻고 있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니 유리문 뒤로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눈만 빼꼼 내밀고 있다.
“오늘도 닭볶음탕입니까?”
묵은지가 생닭을 보며 물었다.
“아, 네.”
어색하다.
내 말을 어디까지 들었는지 몰라 답답하다. 혹시나 좋아한단 말을 들었더라면 앞으로 묵은지는 어떻게 봐야 좋을지 알 수 없다.
“오늘 쉬기로 했잖아요.”
“일이 많은데 혼자 쉴 수 없었습니다. 세 분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묵은지가 물어 고개를 돌리니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얼굴을 숨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을 열었다.
“뭐 해! 시간 없다며!”
“어떻게 됐어?”
“얘기했어?”
“시끄러워! 빨리 들어와!”
헛소리를 해대길래 다 잡아 끌어들이니 눈치를 보며 일하기 시작한다.
오늘 메인 메뉴는 닭볶음탕.
반찬은 고사리, 무생채, 취나물이고 국물로 미역 냉국, 사이드로 미니 돈가스를 준비했다.
주지승과 차지찬은 생닭 손질을 시작했고 나물과 국 담당인 나는 백우진에게 냄비에 물을 받아 달라 했다.
고사리는 질겨서 푹 삶아야 하는데, 양이 워낙 많아서 한 번에 될지 모르겠다.
고사리를 반쯤 채운 큰 냄비를 불에 올렸다.
“근데 또 닭볶음탕해도 되나?”
“닭이 비싸서 많이 샀어. 싸게 해준대서.”
차지찬이 묻고 백우진이 답했다.
“그럼 찜닭 하면 되잖아.”
“찜닭은 콜라 안 넣으면 맛이 없더라.”
주지승의 말에 나도 차지찬도 백우진도 묵은지도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있는데 차지찬이 또 의견을 냈다.
“저번 주 토요일 반응 보니까 뼈가 남아서 불편했다던데?‘
“그래도 뼈 있는 게 맛있지.”
주지승이 답했다.
“순살이 비싸.”
백우진이 뼈 있는 고기를 쓰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치. 생닭 잡아다 쓰는데 순살은 사치지.”
주지승이 생닭을 토막내며 말했다.
“왜 순살이 더 비싸지? 가공이 들어가서 그런가?”
“응. 사실 나도 순살이 더 좋아서 사고 싶었는데 찬용이 형이 순살 쓸 거면 가슴살은 빼라고 해서 그냥 생닭 샀어.”
정육된 다리살만 사려니까 원가가 너무 올라가 버리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생닭을 손질하기로 했다.
“가슴살을 왜 빼?”
차지찬이 내게 따졌다.
“그딴 걸 누가 좋아해.”
“여기. 나 있잖아.”
차지찬이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형이나 많이 잡숴. 밖에 나가서 물어 봐라. 순살 치킨 시켰는데 퍽퍽살만 오면 기분 좋냐고.”
“내가 좋아한다고. 내가. 이거 건강 도시락이잖아.”
“단백질만 챙기면 되지 꼭 닭가슴살 먹으란 법은 없잖아.”
“그건 맞아.”
주지승이 날 지지했다.
차지찬은 쇠질 동지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백질은 다른 음식으로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닭가슴살은 어떻게 해도 맛이 없어. 콜라에 넣어 먹어도 맛없어.”
“…….”
이번에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냄비 뚜껑을 열었다.
푹 삶아진 고사리를 채로 꺼내 찬물로 씻어내고 천에 넓게 깔아 수분을 제거했다.
프라이팬을 달궈 고사리와 식용유를 넣고 볶기 시작하니 좋은 향이 올라왔다.
“냄새 좋다.”
“그지?”
“나 원래 고사리 쳐다도 안 봤는데.”
“나도.”
백우진이 준 다진 마늘과 대파, 국간장을 살짝 넣고 볶다가 들기름을 두르고 불을 강불로 올렸다.
가볍게 섞어준다는 느낌으로 볶아낸 뒤 깨를 뿌려주고 마무리했다.
“지승이 형, 맛 좀 봐 줘.”
“어.”
젓가락으로 고사리를 집어 주지승에게 먹여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굿.”
“괜찮아?”
“잘했네. 진짜 이젠 팔아도 되겠는데?”
“팔고 있었어.”
주지승이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젠 팔아도 되겠다.”
“…….”
그동안 내 요리가 그렇게 엉망이었나 싶어 좌절하던 차 백우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사장님. 지금 오면 된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무생채 가지러 오래?”
백우진이 통화를 마치자 주지승이 물었다.
무생채를 담으려니 시간이 너무 없고 품도 많이 들어 근처 반찬집에 대량으로 의뢰했는데 시간에 맞춰 만들어 준 듯하다.
“어. 찬용이 형, 나랑 나갔다 오자.”
“그래.”
“잠깐.”
차지찬이 백우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얘 시킬 일 있으니까 찬용이가 다녀와라.”
“그 많은 걸 나 혼자 가져오라고?”
“은지 PD가 도와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죠?”
차지찬이 묵은지를 보며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어색했는데 단 둘이 있게 되면 버틸 수 없다.
“아니야. 아니에요. 혼자 갔다 올게요. PD님 여기 계세요.”
“촬영도 해야 하니 함께 가겠습니다.”
“안 해도 돼요.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휴가였잖아요. 이 사람들도 다 동의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아요.”
“오신 김에 도와주시면 감사하지. 둘이 다녀오면 되겠구만.”
주지승까지 난리다.
“아니, 내가 간다니까?”
“넌 제발 좀 닥쳐.”
차지찬이 또 백우진의 입을 막았다.
요새 저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
“아니에요. PD님 다녀올게요. 여기 계세요.”
대화가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매장을 나섰다.
* * *
도망치듯 매장을 떠난 반찬용을 보고선 주지승과 차지찬이 고개를 저었다.
도와주려 해도 정작 본인이 저리도 눈치가 없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휴. 저 등신.’
차지찬이 감자를 깎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 진짜 나한테 요즘 왜 그래?”
백우진이 차지찬에게 따졌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입 막고. 힘만 세면 다야?”
“귀여운 네가 참아.”
“응.”
주지승이 끼어들자 백우진이 냉큼 차지찬 옆에 쪼그려 앉아 씻은 당근을 큼직큼직하게 썰었다.
“너무 크지 않냐?”
“닭볶음탕에 넣는 건 큰 게 좋더라.”
“그건 그렇지.”
“우진 씨.”
묵은지에게 불린 백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네?”
“드릴 말이 있습니다.”
백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묵은지가 본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이요?”
“실은 어제 대표님께 들었습니다. 우진 씨가 대표님께 절 그만 괴롭히라고 하셨다고.”
“아.”
백우진이 아차 싶어 눈치를 보니 주지승과 차지찬이 식칼과 필러를 들어 보이며 말조심하라고 협박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우진 씨가 걱정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설명을 드려도 믿지 않으신다 해서 따로 말씀드립니다.”
“아하항. 저는 그냥 혹시나 싶어서 그랬죠. 찬용이 형이 워낙 눈치가 없으니까.”
“아닙니다. 대표님께서는 정말 많이 배려해 주십니다.”
“정말요?”
“네.”
“다행이네요. 제가 괜한 얘기를 했나 봐요.”
백우진이 주지승과 차지찬의 눈치를 보며 말하니 묵은지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닙니다. 사귄다고 해서 두 분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참견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해를 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묵은지의 발언에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말문을 잊었다.
정적이 흐르다 차지찬이 채칼을 떨어뜨리면서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네?”
“무슨 말을 나누는지 관여하지 않겠다고.”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그거 말고요.”
백우진이 손을 흔들며 물었다.
“아.”
묵은지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묵은지가 백우진을 살피다 몸을 틀어 주지승, 차지찬을 확인했다.
주지승은 미니 돈가스가 타는지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고, 필러로 감자 껍질을 벗기던 차지찬은 감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반찬용에게 사람들이 설명을 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묵은지는 태연히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로 눈치를 봤다.
‘어떻게 된 거야?’
‘몰라.’
* * *
평소의 2배나 되는 분량을 준비하다 보니 정말 눈 코 뜰 새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 속으로 나는 고사리 볶는 기계다, 냉국 만드는 기계다를 외우게 되었다.
“으아아아.”
“아이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탄식이 들려온다.
점심 한창 때의 주방은 현대인의 전쟁터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야, 따라 와.”
차지찬이 손을 잡고 끌었다.
저항할 힘도 없어 흐느적거리며 끌려가니 주지승과 백우진이 매장 뒤편에 모여 있었다.
“……나 돈 뺏기는 거야?”
“헛소리 말고 사실대로 불어. 은지 PD랑 무슨 사이야?”
차지찬이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부담스러워서 상체를 뒤로 빼니 주지승과 백우진도 다가왔다.
“무슨 사이긴. 사업 파트너지.”
“근데 왭.”
차지찬이 날 다그치려 하자 백우진이 그의 입을 막았다.
좋은 시도였지만 녀석이 힘에서 이길 리 없다.
“뭐야!”
“쉿! 쉿!”
백우진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고 주지승과 차지찬을 이끌어 나와 거리를 두었다.
“왜! 뭐!”
“그냥 두자.”
“그냥 두긴 뭘 그만 둬. 지금 제일 재밌구만.”
“내가 보니까 지금 저 형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알려줘야지.”
“그러니까 가만있어야지.”
딴에는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것 같은데 다 들린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저 멍충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은지 씨만 생각한다는 게 말이 돼?”
주지승과 차지찬이 날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없긴 하지.”
“은지 씨는 휴가도 반납하면서 같이 있으려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 멍청이가 괘씸하지 않냐고.”
주지승과 차지찬이 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지켜 보자고. 저 형은 마음고생 좀 해야 해.”
“그래도.”
“사람 마음 다 흔들어놓고 본인만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져서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다.
“무슨 얘기하는지는 몰라도 나 멍청이란 소리 들을 만큼은 아닌데?”
저들끼리 속닥이는 게 슬슬 불쾌해져 따지니 이젠 아예 어깨동무를 하고 속닥인다.
“아, 뭔데? 응?”
다가가니 옹기종기 모여있던 인간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잰걸음으로 도망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