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17
치팅데이 117화
24. 짊어진 사람(2)
차지찬이 내게 국토 대장정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던 시기는 작년 겨울.
내가 당뇨병 판정을 받았을 때다.
워낙 큰 행사라 사업 계획 및 자금 조달에 오랫동안 공을 들였고 그 결과 WTV가 송출, 국내 최고 중 하나로 손꼽히는 콘텐츠 제작사 레터럴이 짐꾼과 협업해 제작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WTV, 짐꾼, 레터럴이 함께하는 데다 넷플릭스와도 연계가 된 만큼 인터넷 방송인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천 명이 넘는 지원자 속에서 200명을 추렸고 당연하게도 광고와 협찬이 끊이질 않았다.
총 16개 업체로부터 스폰을 받은 ‘걸어서 저 하늘까지’는 도보로 걸은 거리만큼 금액이 적립해서 사회 취약 계층에 후원한다는 내용으로 큰 화제를 모았고.
연초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이미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 얘기는 나오고 있어?”
주지승이 걱정스레 물었다.
차지찬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반응이 없다가 힘없이 말했다.
“연기하는 데 11억 들더라. 일주일 미루는 게 11억.”
“…….”
계약 변경에 따른 위약금 혹은 인건비, 장비 대여 같은 비용일 것이다.
보름 동안 스케줄을 비워났는데, 계약이 변경되어 그동안 일을 못 하는 데 발생하는 비용일 것이다.
우리 모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일주일 미룬다고 쳐. 그때는 시작할 수 있나? 아니더라고.”
항상 힘과 자신감이 넘치던 차지찬의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취소 위약금은?”
백우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다음 주까지 취소하면 20퍼센트. 일주일 전에 취소하면 50퍼센트.”
차지찬의 심정이 어떨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한 달 내내 비가 내리는 자연현상으로 취소 위기에 내몰렸는데 위약금마저 물게 생겼다.
투자 비용이야 돌려주면 된다지만.
행사를 진행하지 못하면 광고 수익을 받지도 못하니 차지찬이 들인 비용은 단 한 푼도 회수할 수 없게 된다.
그것도 수억 원이나.
“참가자들은?”
내가 묻자 차지찬이 말없이 카카오톡을 보여주었다.
7월 내내 비가 온다던데 괜찮냐고 묻는 사람, 참가가 어려울 것 같다는 사람이 족히 30명은 되어 보인다.
살피는 와중에도 두 사람에게서 연락이 더 왔다.
“큰일인데.”
주지승이 우리 마음을 대변했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가 큰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근거는 짐꾼과 차지찬이 모은 200명의 인플루언서다.
더욱이 남을 돕는 선행 이벤트라 기업으로서는 본인들을 홍보하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봤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탈자가 생겨나면 광고, 협찬 등 스폰을 자처했던 기업들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2차 참가자 모집하곤 있는데…….”
차지찬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인터넷 방송인 입장에서 보름이나 정규 방송을 못 한다는 건 엄청난 부담이다.
그럼에도 참가 희망자가 많았던 건 ‘걸어서 저 하늘까지’가 큰 행사고 본인을 어필할 수 있는 장소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보름이나 비를 맞아가며 걸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실적으로 무리고 혹여 병이라도 난다면 한 달을 통째로 날리게 되고, 특히나 소규모 방송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생계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2차 참가 희망자가 모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후우.”
우리 모두 숙연해져서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차지찬이 한숨을 쉬었다.
“만약에. 진짜 만에 하나라도 이러다 엎어지면. 그러면 애들은 어쩌지?”
애들?
의아해서 고개를 드니 주지승과 백우진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우리 간다고 애들이 정말 좋아한다고 했는데.”
가슴을 세게 얻어 맞은 듯했다.
수억, 어쩌면 그 이상의 위약금을 뱉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차지찬은 장난감과 햄버거를 약속했던 취약 계층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백우진이 화를 냈다.
“정신 차려. 지금 사람들 간 보고 있잖아. 누가 가는지 눈치 보다가 빠진다 싶으면 더 빠질 거라고. 그러다 스폰서도 빠지면? 그 상황에서 위약금 물어내면 어쩌려고 이래!”
“우진이 말이 맞아.”
나도 나섰다.
“빨리 결정해야 해. 지금도 30명이나 빠진다고 하는데 사람들끼리 얘기 나누는 순간 30명이 아니라 200명이 빠질 수도 있어.”
함께하는 일이 그렇다.
다함께 할 때는 분위기에 휩쓸려 으쌰으쌰하게 되지만, 유명한 사람, 친한 사람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면 그 역시 흐름을 타기 십상이다.
더욱이 보름 일정이다.
그 시간을 할애할 만큼 얻는 게 있어야 하는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단 계산이 서면 전원이 탈퇴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스폰까지 빠져나가면 그 흐름을 걷잡을 수 없다.
“지찬아, 네 마음 아는데 이거 빨리 접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취소해도 20퍼센트라며.”
주지승도 말렸다.
행사 시작 3주 전이라 20퍼센트로 끝나는 게 다행이긴 한데, 그조차 수억 원일 거다.
차지찬과 짐꾼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돈 수억이 나가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위약금이 늘어나기 전에 멈춰야 한다.
“……어떻게 그만 둬.”
“지찬아.”
“형!”
“찾아가기로 한 곳이 20군데야. 거기서 생활하는 애들, 어르신들 합치면 500명은 돼. 그 애들이 내 채널 들어와서 빨리 오라고 언제 오냐고 묻더라. 근데 지금 와서 내가 어떻게 그만 두냐고.”
“알아. 그래도 책임감으로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이러다 다 떠나면 취소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가서 전액 돌려줄 거야? 그럼 너 파산이야!”
주지승도 드물게 감정적으로 나섰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다음에. 다음에 하자. 어?”
한 번 목소리를 높인 주지승이 타이르듯 말했다.
“다음 언제? 미룰 수 있으면 미뤘어. 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시발 이 개같은 비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잖아!”
야속하게도 장마는 7월과 8월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기예보가 틀리더라도 이 많은 날 중 며칠이나 해가 뜰지 아무도 모른다.
“괜찮아. 분명 하려는 사람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이라도 모아서 가면 돼. 우리 도시락 할 때는 뭐 사람들이 도와줄지 알았어?”
“상황이 다르잖아.”
내가 나섰다.
“누가 보름씩이나 투자해서 메리트 없는 일을 해. 형, 이러다 진짜 큰일 나.”
“시끄러워. 안 되면 나 혼자라도 가.”
차지찬이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백우진이 붙잡으려 했지만 그 손마저 뿌리치고 나섰다.
“하아.”
주지승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찬이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을 일찍 여읜 차지찬은 조부모님 아래서 컸다.
그래서 자꾸 아이들과 어르신에게 마음이 가는 건지 싶은데, 차마 말로 꺼낼 이야기는 아닌 듯해 침묵을 지켰다.
“어휴. 저놈의 성질머리하곤.”
백우진이 돌아왔다.
“갔어?”
주지승이 물었다.
“응. 진짜 혼자서라도 갈 생각인가 봐.”
“스폰이라도 붙어 있으면 그러는 게 낫겠지만 붙어 있을 리 없잖아.”
“내 말이. 그리고 애초에 비 맞으면서 부산까지 걸어가는 게 말이 되냐고.”
백우진이 날 보다가 물었다.
“형은 어쩔 거야?”
주지승도 날 본다.
일정 때문에 이번 일에 참가하지 못한다고 했던 주지승, 백우진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함께하기로 했었다.
이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산까지 가기 위해 그동안 체력을 키우려고 노력했었다.
“지찬이한테는 안 된 일인데, 진짜 쉽지 않아. 보름이나 자리 비우면 얻는 게 있어야지.”
“보름이 뭐야. 내내 비 맞는데 몸이 멀쩡하겠어?”
“…….”
“잘 생각해. 보름 공백 생각보다 크다. 직원도 있잖아.”
주지승 말이 옳다.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수익에 타격이 가면 임금 지불할 때 부담이 생길 수 있다.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 * *
‘걸어서 저 하늘까지’.
240만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버 짐꾼이 장장 8개월에 걸쳐 준비한 국토 대장정 행사는 참가자 모집과 동시에 큰 화제를 낳았다.
하나의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1억 원의 후원액이 누적되고 부산에 도착하면 총 14억 원이 취약 계층에 기부된다는 대형 프로젝트는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 SNS, 유튜브에서 회자되다가 뉴스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한 화제성 덕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보름 동안 총 611㎞를 도보로 이동하는 무리한 일정에도 많은 이가 참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누군가는 본인을 알리기 위해, 누군가는 선의로 또 누군가는 본인의 한계를 시험하는 등 저마다의 동기를 품고 6월을 보내던 중.
7월과 8월에 장마가 유난히 길게 예측되면서 행사 진행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됨?
└그러게 비 장난 아니던데
└당연히 취소지. 하루이틀 와야지 뭔 한 달 내내 온다고 하던데.
└예상이니까 실제로는 좀 다르지 않을까?
└이거 뉴스에서 엉터리 예보라던데?1)
└뭐가 엉터리라는 거임?
└애초에 현재 과학 수준으로는 10일 정도만 예측할 수 있다고 함. 7월 내내 비 오는 게 예전 통계 자료를 근거해서 지금 적용 안 된다고 함.
└기상청 vs 마이크로소프트임?
└그럼 걸어서 저 하늘까지 그냥 진행해도 되는 거 아님?
└한두 명 가는 것도 아니고 200명이 보름이나 진행하는 행사를 그런 위험 떠안고 진행할 수 있음? 당장 한두 사람 떠나면 우르르 안 한다고 할걸?
└유튜버보다 스폰서가 문제임. 진행 안 될 수도 있는 행사에 어떤 기업이 후원을 해.
└맞네. 스폰서 빠지면 유튜버도 빠지겠네.
└유튜버 빠지면 스폰서도 빠짐.
└50퍼센트 확률이라 해도 7~8일이나 비가 오는데 정상적으로 걸을 수야 있겠음?
└맞네
└차지찬 망했네 이거 돈 꽤 들어갔을 텐데
└유튜버들 사이에서도 못 간다는 사람 많더라.
└참가 확정된 거 아니었음?
└날씨가 저런데 어떡함. 애초에 날씨 예측 못 한 짐꾼도 책임 있음.
└야외 행사 준비하는데 날씨야 당연히 알아보지. 근데 두 달 내내 비 온다는 걸 누가 예상 범주에 넣냐고.
└진짜 두 달 동안 비 계속 내림?
└모르지. 모르니까 취소해야지. 시작했다가 비 내리면 어쩌려고.
└ㅇㅇ위에 누가 말했네. 엉터리일 순 있는데 가능성이 제기된 순간부터 이미 걸어서 저 하늘까지는 접어야 하는 행사가 된 거임.
└차지찬 어떡하냐
└영상 떴음. [링크]
└누가 요약 좀.
└좀 봐라. 몇 분이나 한다고.
└참가 못 하는 사람들 이해하고 쉽지 않은 상황인 건 맞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분들을 저버릴 순 없다. 가겠다는 분들하고만 갈 거다. 참가할 분들은 토요일에 모여서 대책을 세우자. 이 말이네.
└와 이걸 간다고?
└미쳤네. 가는 사람이 있긴 하나?
└모르지. 근데 사람 안 모이면 완전 나가린데.
└방송국, 스폰서 다 발 빼겠지. 차지찬이 암만 유명해도 혼자면 화제성이 떨어지니까. 200명씩이나 되니까 진행된 일임.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차지찬과 짐꾼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광고, 협찬, PPL, 후원을 약속한 기업들은 물론, 후원을 약속한 단체와 방문을 예약한 숙박시설, 음식점에 WTV, 레터럴 등 짐꾼의 전 사원이 동분서주해도 인력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차지찬은 ‘걸어서 저 하늘까지’의 스폰서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 업체를 상대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WH전자의 김기태 실장이 차지찬에게 물었다.
“가능합니다.”
차지찬이 단호히 말했다.
“유선상으로 말씀드린 대로 참가자가 많이 이탈한 건 사실이지만 행사 진행에는 영향 없습니다.”
김기태 실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깍지를 꼈다.
“지찬 씨 의지야 알죠. 다만 다른 분들이 걱정입니다. 만약 참가자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저희로서도 지원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차지찬이 숨을 길게 내쉰 뒤 고개를 들었다.
“몇 명이면 가능하겠습니까?”
“최소한 100명은 모여야 저도 회사에 말해볼 수 있겠습니다.”
“100명.”
차지찬이 침을 삼켰다.
개인적으로 취소 의사를 밝힌 인원은 이미 140명이 넘었다.
남은 이가 60명이니 토요일까지 40명을 더 모아야 했다.
“토요일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행사장으로 가겠습니다.”
“네.”
김기태 실장을 건물 밖으로 배웅한 차지찬은 그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기를 얼마간.
차지찬이 스스로 양쪽 뺨을 쳤다.
‘정신 차려.’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는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