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25
치팅데이 125화
25. 걷다(5)
우물우물 씹더니 남은 도넛을 한 입에 털어놓곤 또 말없이 턱을 움직였다.
눈을 보니 우리를 보는 게 아니라 온 신경을 올드패션 도넛에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내 경험상 맛있다고 난리블루스를 추는 것보다 저 상태가 위험하다.
아니나 다를까.
일어서더니 똑같은 걸 하나 더 사 왔다.
“대회 준비한다더니 괜찮겠어?”
주지승이 차지찬에게 물었다.
차지찬이 올해 초부터 준비했던 대회가 9월로 예정되어 있다.
이벤트성 대회라곤 해도 미국에서 세계 각지의 유명 보디빌더들이 많이 참가하는 자리라 줄곧 기대했었다.
“하나쯤이야.”
차지찬이 망설임 없이 봉투를 뜯었다.
* * *
셋째 날은 동탄에서 아침을 맞이했고 다음 날 새벽 2시쯤 안성에 도착했다.
어제 비가 워낙 많이 내린 데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겹쳐 일행 모두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따로 인사 없이 각자 방을 찾았다.
외장 배터리부터 충전해 놓고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묵은지가 5분 전에 카톡을 보냈었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네.
“안 자고 있었어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피곤해요. 슬슬 힘에 부치네요.”
-어서 씻고 주무십시오.
“조금만 더 얘기해요.”
고작 며칠 못 봤을 뿐인데 보고 싶다.
오늘 밥은 잘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그런 일상이 듣고 싶다.
“저녁은 잘 먹었어요?”
-알아서 잘하고 있습니다. 어서 씻고 주무십시오.
“…….”
아마 오늘 도착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날 배려하고 싶을 거다.
“보고 싶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네?”
-방송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말 잇지 말고 어서 주무십시오.
뭔가 묘하게 오기가 생긴다.
“네. 저도 사랑해요.”
-…….
아무 반응이 없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빨리 잘게요.”
-……사랑해요.
“흐흐흫흣.”
-왜 웃습니까?
“좋아서요. 너무 늦게까지 모니터링 안 해도 돼요. 오늘 너무 고생했어요. 잘 자요.”
통화를 마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니 고역이다. 어찌저찌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우니 당장 내일이 걱정이다.
오랫동안 운동을 했던 주지승과 차지찬은 아직 체력이 남은 듯하지만.
나는 꽤 지쳤고 백우진은 거의 빈사상태였다.
어제와 그제 발에 잡힌 물집이 더욱 커졌고 허리에 통증을 호소해서 과연 이대로 함께하는 게 옳은 일인가 싶다.
깜빡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으음.”
분명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아침 알림이 울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오전 8시.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던 모양이다.
세수도 안 한 채 아침 먹으러 침대를 나섰는데 발이 쓰리다.
“아.”
어제 기미가 좀 보이더니 결국 물집이 잡히고 말았다.
백우진이 준 파우더를 꼼꼼히 발랐음에도 결국 물집이 생기는 걸 막을 순 없었나 보다.
소독된 바늘로 살짝 터뜨리고 연고를 바른 뒤 물집용 밴드를 붙였다.
숙소 식당에 아무도 없다.
어제 정말 힘들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식판과 수저를 챙겨 음식을 담고 있으니 주지승이 내려왔다.
“잘 잤어?”
“어우. 기절했다. 기절했어.”
“나도.”
주지승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진이 괜찮나?”
“그러니까. 오늘 병원 데려가야 할 것 같아.”
“음.”
음식 종류가 많지 않은 단촐한 뷔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흑미밥에 소시지, 계란 스크럼블, 돼지불고기, 김치, 숙주나물, 토스트 등 구비는 갖춰 두었다.
이것저것 담아 자리를 잡으니 차지찬이 하얀 봉투를 든 채 숙소로 들어왔다.
“어?”
“여.”
차지찬이 나와 주지승이 앉은 식탁에 자리했다.
“편의점 갔다 왔어?”
봉투에 편의점 마크가 그려져 있다.
“어.”
차지찬이 봉투에서 도넛을 꺼냈다.
한두 개도 아니고 8개나 있어서 나도 주지승도 깜짝 놀랐다.
“와, 어제 계속 생각나대?”
“이 형 큰일 났네. 그니까 빵은 시작을 말아야 해.”
“알아. 인마. 근데 오래 걸으려면 에너지 보충도 해야 해. 그래야 근손실 안 생겨.”
“……진짜야?”
주지승에게 물었다.
“응. 오래 걸으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잖아. 우리처럼 며칠 동안 하루 10시간 가까이 걸으면 근육이나 지방에서 끌어다 쓰니 어쩔 수 없어. 그나마 줄이려면 잘 먹는 수밖에.”
“그럼 대회에 영향 가는 거 아니야?”
“괜찮아.”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어. 맞아. 이건 도저히 못 참겠더라.”
차지찬이 새 도넛을 꺼냈다.
어이가 없다.
“우리 묵었던 숙소 전부 헬스장 있던 거 알았어?”
주지승이 물었다.
“몰랐어.”
“거기서 얘 새벽마다 운동하더라. 일부러 헬스장 있는 호텔만 잡은 것 같아.”
주지승이 고개를 저으며 미역국을 떠먹었다.
“이 와중에?”
깜짝 놀라 되물으니 차지찬이 입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평소처럼은 안 하지. 그냥 가볍게.”
미친 인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광기다.
“우진이 오네.”
주지승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백우진이 다리를 끌며 다가왔다.
어깨가 축 쳐지고 눈은 반쯤 감은 상태로 음식을 받아 오는데,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
“야.”
차지찬이 백우진을 불렀다.
“고집 부리지 말고 올라가.”
백우진은 대답 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너 이러다 진짜 일 나. 운동도 안 하던 놈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한 거야. 돌아가.”
묵묵히 듣고 있던 백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거 나도.”
도넛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안 돼.”
“하나만.”
차지찬이 고개를 젓자 백우진이 다시 고개를 박고 밥을 먹었다.
“우진아, 너 진짜 괜찮겠어?”
“너 허리도 아프다며.”
나와 주지승이 한 마디씩 거드니 백우진이 짜증을 냈다.
“아, 진짜! 괜찮다니까!”
“안 괜찮아. 너.”
내 말에 백우진이 가만히 있다가 이마를 짚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그만하라고.”
“방송 때문이면 너 혼자서도 잘 하잖아.”
“…….”
분하겠지만 현실이다.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을 악천후 속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대로 지쳐서 면역력이 떨어진다면 또 무슨 병을 얻을지 모른다.
그런 모든 우려 사항을 제외하고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운동과 담을 쌓고 산 백우진에게는 충분히 벅찬 일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게 아까워서 그러면 잘 생각해. 우리 아직 반도 못 갔어.”
“그러니까. 애초에 출발을 하지 말았어야지.”
백우진이 고집을 부렸다.
“우진아.”
“애들 봤는데 어떻게 그만두냐고.”
타이르려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웃음이 터졌다.
“뭐가 웃겨.”
“아니. 지찬이 형하고 똑같아서.”
백우진이 인상을 썼다.
“이야. 백우진, 이제야 형 맘을 좀 이해해 주네.”
“웃기지 마. 진짜. 짜증나.”
“병원 들르자. 너 발이랑 허리는 좀 봐야겠어.”
주지승이 말하자 백우진이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녁.
숙소에 도착해서 각자 짐을 풀고 차지찬 방에 모이기로 했다.
백우진에게는 쉬라고 하고 셋만 모였는데, 주지승을 기다리며 스마트폰으로 시청자 수를 확인하니 20,000여 명이 접속해 있다.
보통 저녁 시간이 되면 다른 방송들이 시작해서 오후에 사람이 가장 많고 밤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왔다.
└뭐임?
└웬일로 다 모였대
└백우진 괜찮아?
└지금 ㅇㄷ?
└아까 병원 간 건 괜찮음?
시청자들이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는데, 군말 없이 곧장 상황설명을 하는 게 좋을 듯싶다.
“내가 얘기할까?”
주지승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물어보니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충북 진천이고 알려드릴 게 있어서 모였어요. 방송 쭉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우진이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오전에 병원을 다녀왔는데 도움이 안 되었다.
누적된 피로와 물집 같은 경우는 휴식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 상태로 10시간을 내리 걸었으니 백우진이 쓰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저희도 많이 설득해 봤는데 우진이 의지가 너무 확고하더라고요. 도움 기다리시는 분들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다고. 그 마음 저나 지승이 형, 지찬이 형이 모르는 게 아니라서 더는 말 못 했고. 대신 내일 하루는 쉬기로 했어요. 내일 쉬어 보고 그래도 상태가 안 좋으면 돌아가는 걸로 얘기했습니다.”
└많이 안 좋나 보네
└헐
└계속 무리하는 것 같긴 하더라.
└그럼 WH 후원은 어떻게 되는 거임?
└4일이나 비 맞으며 걸었으니
└어떻게 아픈 거임?
“WH 후원 문제는 지금 얘기 나누는 중이라 당장 말씀드리긴 어려워요. 결정되는 게 있으면 곧장 말씀드릴게요.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방송을 끝냈다.
“WH에서 뭐래?”
“상규가 얘기하곤 있는데 안 좋아 보이더라. 원래 그만두려던 거 김기태 실장이 나서서 진행한 건데 조건 무시하면서까지 해주긴 난감한가 봐.”
김기태 실장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된다.
“WH보다 이게 더 큰 문제야.”
주지승이 스마트폰을 보였다.
그동안 응원 일색이었던 여러 커뮤니티에서 부정적인 반응이 몇몇 올라오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평소 운동도 안 하던 사람이 국토대장정 하는 것도 무린데 비까지 오니 그게 되나
└한다고 해놓고 빠지면 WH랑 보육원은 뭐가 돼
수많은 응원과 걱정 속에 어떻게 이런 글만 유독 눈에 띄는지 모를 일이다.
차지찬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를 삭히고 나는 답답함에 한숨만 내쉬었다.
“……우진이 계속 할 것 같지?”
“걔 성격에 이런 글 보면 가만있겠어?”
주지승이 묻자 차지찬이 답했다.
확실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정도 많다.
악플을 단 사람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도움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포기하진 않을 녀석이다.
“형! 열어 봐!”
백우진 목소리다.
“쉬라니까 뭐 하러.”
문을 여니 백우진이 자전거를 잡고 있다.
“나 이거 타고 갈래.”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자전거?”
주지승, 차지찬이 나와서 자전거를 살폈다. 자전거는 잘 모르지만 기어 같은 게 있는 평범한 자전거 같다.
“이거 타면 갈 수 있겠어?”
“못 할 게 뭐야?”
주지승의 질문에 백우진이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이걸 WH가 받아들이겠냐? 시청자들은?”
“납득하게 해야지.”
“무슨 수로.”
“내일 하루 쉬니까 분위기 좀 만들어 줘. 백반토론 베리폰 vs 애플폰 하자.”
베리폰은 WH 그룹의 스마트폰이고 애플폰은 파인애플사의 스마트폰 명이다.
“내가 베리폰 입장에서 토론에서 이기면 WH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걸?”
백우진의 말대로 WH로서는 잃을 게 없다.
강력한 경쟁사의 스마트폰보다 WH의 베리폰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해 주는 것만으로도 홍보가 될 테니, 백우진이 토론에서 이긴다면 조건 완화 정도야 가볍게 들어줄 수 있다.
시청자들 반응은 조금 갈리겠지만.
아무 이유 없이 자전거를 타게 해주는 것보단 뭔가를 해내야 허락한다는 점에서 이해받을 구석이 없진 않다.
다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았다.
“니가 날 어떻게 이겨.”
“……응?”
백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재밌게 웃기고 적당히 지면 되잖아.”
차지찬이 말했다.
“시청자들 상대로 사기 치라고? 난 그렇겐 못 해.”
백우진이 눈을 깜빡인다.
“할 거면 해. 근데 봐주는 거 없어.”
“봐달라고 말도 안 했어!”
백우진이 빽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