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26
치팅데이 126화
26. 비울수록 차오르는 것(1)
7월 5일 아침.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안상규 PD가 다가왔다. WH 김기태 실장에게 조건 완화를 부탁하러 갔었는데 표정만 봐서는 일이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됐어?”
“괜찮대요.”
다행히 잘 받아들여진 모양이라 일행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고비 넘겼다.
“남은 건 시청잔데.”
주지승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WH가 백우진에게 자전거를 허용하더라도 시청자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다.
“괜찮아. 나한테 맡겨.”
“어쩌게?”
내가 나서자 차지찬이 물었다.
“얘 아픈 거 다들 봤잖아. 정에 호소하면 동조하는 사람도 생길 거야. 나쁜 짓하는 게 아니니까.”
좋은 일을 하고 싶으니 자전거 정도는 이해해 달라는 말을 못 받아들일 정도로 야박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여정을 시청하는 사람은 대부분 우리 뜻을 응원하고 있다.
“몇몇이 너무 쉽게 가는 거 아니냐 물을 순 있겠지. 그러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은 다음에 우진이한테도 조건을 거는 거야. 얘 말대로 백반토론에서 이긴다든가.”
“그걸로 될까?”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그냥 말하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얘랑 나 전적이 22승 4패였을걸?”
백우진이 고개를 휙 돌려 날 째려본다.
“내가 전적 들먹이며 도발하면 반응 괜찮을 거야.”
말은 ‘ㅏ’ 다르고 ‘ㅓ’ 다르다.
또 같은 말일지라도 억양이나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전달된다.
자칫 잘못하면 ‘자전거 탈 거면 전기 자전거 타지 그러냐?’, ‘차라리 오토바이 타지 그러냐?’ 같은 반응이 따라올 수 있고.
그건 이번 행사 의의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우리 스스로 목표와 조건을 명확히 하고 이번이 마지막임을 새겨야 한다.
“근데 얘가 지면 말짱 꽝 아니냐?”
차지찬이 물었다.
“내가 이겨.”
백우진이 허리를 펴며 당당히 답했다가 통증을 호소하며 상체를 수그렸다.
* * *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부먹이냐. 찍먹이냐. 한반도 반만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논쟁을 맛만 봅니다. 백반토론 일일 진행을 맡은 주지승.”
“차지찬입니다.”
7월 5일 오후 5시.
창 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주지승과 차지찬이 백반토론의 사회자가 되어 오프닝 멘트를 대신 했다.
원래도 시청자가 많은 콘텐츠지만 아침부터 베리 VS 애플로 백반 토론을 진행한다는 어그로를 끌어댄 덕분인지, 아니면 백승용차 전원의 시청자가 모인 덕인지 생방송 시청자 수가 6만 명에 이르렀다.
반년 넘게 진행한 콘텐츠임에도 이렇게 많은 시청자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된다.
└ㅋㅋㅋㅋㅋ누가 봐도 WH vs 파인애플이잖앜ㅋㅋㅋ
└WH 광고임?
└이거 백우진이 무조건 이기는 거 아님? WH 후원 받는 행사에서 설마 지겠음?
└그거 아니더라도 반찬용이 일부러 져줄 듯.
└ㅇㅇ 백우진 지금 상태 안 좋아서 자전거라도 태워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역시 시청자는 바보가 아니다.
베리폰 대 애플폰이 아닌 베리 대 애플로 상품명을 피하긴 했지만, 그것이 WH와 파인애플의 스마트폰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유일한 스폰서인 WH를 위해서라도 백우진은 질 수 없다.
또 백우진은 본인을 위해서라도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명분을 반드시 마련해야 하는데.
시청자들이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기 때문에 내가 설렁설렁할 순 없다.
미친 듯이 몰아붙여서 누가 봐도 백우진의 승리를 납득하게 해야만 조작이니 뭐니 하는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베리 vs 애플. 무엇이 더 맛있는가를 두고 두 전문가를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주지승이 오늘 주제를 언급했다.
“……이거 진짜 해?”
차지찬이 쪽대본을 보고 묻자 주지승이 차지찬의 옆구리를 찌르며 재촉했다.
차지찬이 떨떠름한 얼굴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빨빨빨간맛. 궁금해 허니. 깨물면 점점 녹아든 베리 예찬론자 백우진 위원 함께해 주셨습니다.”
골격근량이 46㎏에 달하는 근육 빵빵한 86년생 아저씨의 어색한 노래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웃기다며!”
“흐하핳핳핫핳!”
노래는 실패했지만 반응이 실감나서 웃음이 터져 버렸다.
“차지찬 해설께서는 백우진 씨를 응원하여, 백우진 씨가 오늘 우승하면 단백질이 풍부한 소고기를 저녁 식사로 먹게 됩니다. 단, 패배하면 3일 동안 단백질 섭취를 제한받게 됩니다.”
“너, 똑바로 해! 알았어?”
패배시 강제 근손실 당할 위기에 처한 차지찬이 백우진을 닦달했다.
“걱정 마.”
백우진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무겁게 한 번 끄덕였다. 반드시 이겨서 자전거를 얻겠단 의지가 보인다.
“다음은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애플 찬양자. 애플 홀릭. 애플 진영에 반찬용 위원 나와주셨습니다.”
주지승의 소개 멘트에 맞춰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흔들다가.
85년생 대머리 아저씨의 동요에 맞춘 율동에 경악하고 말았다.
오프닝 대본을 쓴 나도 이 정도로 징그럽게 소화해 낼 줄은 몰랐다.
최미카엘이 왜 주지승을 놀려 먹는 재미로 사는지 조금 이해된다.
“반찬용 위원 편에 선 주지승 해설은 반찬용 씨가 승리할 시 내일 배낭을 운송차량에 맡길 수 있으며, 패배했을 경우에는 3일 동안 면도를 못 합니다.”
차지찬이 설명을 마치자 백우진이 손을 들었다.
“질문이요.”
“네.”
“3일 동안 면도 못 하는 게 왜 벌칙이에요?”
“모근이 남아 있는 부분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주지승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차라리 민머리가 났지, 뒷머리와 옆머리만 나고 정수리와 앞머리가 비면 무척 수치스럽다고 한다.
“이해했습니다.”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두 분 이성적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토론 부탁드립니다. 백우진 위원께 먼저 발언권 드리겠습니다.”
차지찬이 백우진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우선 베리가 무엇인지 말씀드릴게요. 베리는 수분을 함유한 장과류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대표적으로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블랙베리, 블루베리 등이 있죠.”
“난잡하네요.”
“전혀요. 일단 맛있는 과일에는 베리란 이름을 붙인 거니 오히려 그만큼 맛있다고 봐야 합니다.”
시동을 걸기에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과일뿐만이 아니죠. 프레시 프리큐어의 큐어 베리. 베리베리 뮤우뮤우의 시라유키 베리. 샤이닝 스타의 베리. 디 그레이 맨의 데이샤 베리처럼 각종 만화영화에서도 베리란 이름이 붙습니다.”
“……그래서요?”
“그만큼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베리란 이름이 붙은 거죠.”
“아이들이 좋아한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좋아합니다.”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마음껏 발악하게 둔 뒤에 짓밟아야 제맛이다.
“보베리, 루네베리, 뤼드베리, 솔즈베리, 베리만. 지금 제가 언급한 분들은 모두 각자 분야에서 이름을 남겼습니다.”1)
“그 베리가 베리 맞아요?”
뭔가 Berry가 아닐 것 같아 물었지만 백우진은 콧방귀를 꼈다.
“베리라고 말하잖아요?”
“그렇게 나오시겠다?”
“괜히 태클 걸지 마세요. 이렇게 맛있는 열매, 사랑스러운 캐릭터,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겐 항상 베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즉, 그만큼 좋다는 거죠.”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우진 위원께서는 여러 사람과 열매에 이름이 붙으니 그만큼 베리가 좋다, 맛있다고 주장하시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제가 알기로 베리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한 명 있습니다.”
“누구요?”
“라브렌티 베리야.”2)
백우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누구?
└뭔 소리얔ㅋㅋㅋㅋㅋ
└미친 베리얔ㅋㅋㅋㅋㅋㅋ
└알아듣게 얘기해!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 정권에서 대숙청을 담당했고 카틴 학살의 책임자죠.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죠?”
“자, 잠깐.”
“베리가 진짜 훌륭하고 맛있고 좋은 사람과 열매에 붙는 이름이라면 베리야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어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학살범ㅋㅋㅋㅋㅋㅋ
└이거 소련이라 말 잘못 놀리면 골로 간닼ㅋㅋㅋㅋㅋㅋ
└캬 여윽시 선동과 날조!
“대답하세요! 진짜 베리가 멋지고 맛있고 좋은 이름입니까!”
“아니, 어. 어?”
고작 한 사람. 그것도 berry란 알파벳도 쓰지 않는 사람을 들먹인다고 내 주장이 설득력을 얻진 않는다.
그러나 소련, 그것도 학살범을 옹호한다는 프레임을 씌우려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난 반년간 내게 수없이 많은 모함을 받았던 백우진에게는 반드시 통한다.
“백우진 위원!”
“취소.”
백우진이 한 발 물러섰다.
“다시 생각해 보니 베리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게 멋지고 좋은 건 아닌 듯합니다.”
“그렇죠?”
“너 똑바로 안 해!”
차지찬이 버럭 소리쳤다.
“너 인마, 3일 동안 단백질 못 먹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
단백질을 섭취 못 할 위기에 처한 차지찬이 난동을 부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차지찬 발작하넼ㅋㅋㅋㅋㅋ
└아 근손실 나게 생겼는데 어떻게 침착하냐곸ㅋㅋㅋ
└이건 졌다
└아니 좀 져주라곸ㅋㅋㅋㅋ 백우진 봐주려고 하는 거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 거 없지
└빠른 서렌 좀
차지찬이 곧 주지승에 의해 진압되고 시청자들은 백우진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이 분위기를 이어서 백우진을 마구 혼내줄 생각이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우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떤다.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다.
“베리와 애플. 무엇이 더 좋은지는 사실 백우진 위원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백우진이 잔뜩 인상을 쓰고 날 노려본다.
“백우진 위원은 대학 시절 줄곧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맞습니다.”
백우진이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우지니어스의 이지혜 PD와는 대학 동창이시고요.”
“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몇 년 전, 이지혜 PD에게 백우진 씨가 교양 과목에서 B를 받아 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체 왜 우신 겁니까?”
“아니, 옛날 얘기를 왜 꺼내?”
“왜 우셨습니까?”
“성적 안 나왔으니까.”
“아니죠.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지혜 PD에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백우진 위원은 성적을 배맀다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
└베릿닼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성적 배렸다곸ㅋㅋㅋ
└뭔 말인가 했넼ㅋㅋㅋㅋㅋ
“이렇게나 베리를 싫어하시면서 대체 왜 베리를 옹호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배맀다가 그 베리가 아니잖아!”
“아니라고요?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뭘?”
“당신은 A+, 즉, 에이플. 애플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베리 편에 설 수 있죠?”
“어?”
“지금 장학금을 준 모교와 기부자들을 기만하시는 겁니까?”
└애플ㅋㅋㅋㅋㅋㅋㅋ
└에이플이 뭐?
└에이플러스 에이플 애플ㅋㅋㅋ
└ㅋㅋㅋㅋ찬소리 시작했넼ㅋㅋㅋ
└아 장학금 뱉어내라곸ㅋㅋㅋ
└애플 받아서 장학금 받았다고? 근데 베리 편 드는 거야?
“뭔 소리야!”
“어려운 시절 학비를 지원해 준 모교와 기부자들을 기만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다시 한번 몰아붙이니 녀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답하세요! 애플을 받으신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고개를 끄덕인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애플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빨리 사과, 아니, 애플하세요!”
백우진의 시선이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더니 이내 카메라를 향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면 안 되지, 인마!”
차지찬이 버럭 소리쳤다.
“이거 완전 똘갱이네? 똑바로 안 해?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흥미진진하고요
└이거 백우진이 자전거 못 타는 것보다 차지찬이 단백질 못 먹는 게 더 꿀잼 아니냨ㅋㅋㅋㅋㅋ
└차지찬 저러는 거 진짜 첨 본닼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