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36
치팅데이 136화
28. 비 온 뒤에(2)
“기뻐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묵은지가 태블릿 화면을 내게 보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게 보내진 광고 문의를 정리한 표였는데 항목이 46개나 된다.
가공 식품부터 음식점, 조리 도구에 심지어는 운동화에 스포츠웨어까지 다양한 상품이 소개되어 있다.
광고 대상과 광고 형태에 따라 폰트 색을 구별해 두었지만 워낙 많아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다.
“이게 다?”
“네. 기업이나 상품을 따져보고 선별했습니다.”
“세상에.”
“출발하기 전에 모두가 바보라고 했습니다. 저 또한 무모하다고 했고요.”
고개를 드니 묵은지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좋은 일에 반드시 좋은 결과가 따진 않지만 해내셨습니다.”
“얼떨떨해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종주 중에 생방송 시청자 수가 10만을 기록했습니다.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찬용 씨의 파급력을 입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백반토론, 백반따라, 도시락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큰 관심은 익숙하지 않다.
“저는 찬용 씨가 자랑스럽습니다.”
묵은지가 평소처럼 딱딱한 말투로 상냥한 말을 꺼냈다.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환경에서도 기꺼이 베푸는 따뜻한 마음이라든지 선행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본인의 성장으로 이어가는 추진력이라든지 모두 자랑스럽습니다.”
“은지 씨.”
“가끔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궤변을 늘어놓나 싶기도 하지만 그런 발상력조차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흐하핳. 그래요?”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해도 좀 대단한 것 같아요.”
“대단합니다.”
“아, 민망하다. 오늘 너무 띄워 주는 거 아니에요?”
“찬용 씨에게 배웠습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
“그리고 오늘 하나 더 배웠습니다.”
“뭔데요?”
“타인을 칭찬하는 일도 기쁩니다.”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만큼 감격스럽다.
“저도 은지 씨한테 배운 거 있어요.”
“무엇입니까?”
“전에도 얘기했지만 전 사람하고 거리를 두고 살았어요.”
“봉사활동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쓰레기를 줍는다든지 기부를 한다든지.”
“저도 그게 사회와 저를 연결하는 끈처럼 여겼는데 아니더라고요.”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관계였다.
묵은지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피했던 거죠. 말해봤자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근데 은지 씨는 달랐어요. 불의에 맞서고 소중한 걸 지키고 어려움을 헤쳐나갔어요.”
뚱뚱한 사람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에 우리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대처했다.
나는 그들을 멀리했고.
묵은지는 그 또한 감수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며 본인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녀가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와 김서진을 상대하는 방식이나 다 끝난 상황에서도 WH를 설득하는 태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되었을 때 수년간 본인을 지탱했던 신념을 접고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결단력 그리고 이런 내게도 배울 점을 찾아 본인에게 적용하는 포옹력을 경험하면서.
그녀가 단순히 남의 시선만 의식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상처받기 무서워서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선행을 하면서 자기만족했던 나와는 달리.
묵은지는 자신을 위협하거나 궁지로 모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그런 은지 씨가 멋졌어요.”
“…….”
“이번에 은지 씨 생각 정말 많이 했어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자고. 이겨내자고.”
“그래서 어땠습니까?”
“혼자서 좋은 일 하는 것도 괜찮았지만 직접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고. 오히려 이번 여행에선 좋은 사람만 만났어요.”
세상에 어찌 나쁜 사람, 상처 주는 사람만 있을까.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간 겪은 일들로 스스로의 세계를 너무나 좁혔다.
“은지 씨 덕분이에요.”
“찬용 씨와 대화하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기분입니다.”
“특별해요.”
“……방금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요?”
“친구 분들도 구독자 분들도 함께였잖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다.
“찬용 씨의 이런 좋은 모습에 이끌렸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정말 친구나 동료 한 사람 없이 지냈던 저조차 그랬으니까요.”
* * *
일정을 마무리하는 쫑파티를 가졌다.
백승용차와 직원 모두 해운대 G식당에 모였는데 차지찬 말로는 부산에서 낙곱새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매운 정도를 고를 수 있어서 맵찔이인 나와 묵은지, 백우진, 이지혜 PD가 한 테이블에 앉았고.
변태인 차지찬, 안상규, 주지승, 최미카엘이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했다.
밑반찬은 양배추 샐러드, 콩나물, 부추무침, 김가루로 단출한데 메인인 낙곱새는 낙지, 곱창, 새우와 각종 야채가 가득 담겨 나왔다.
밥을 대접에 주는 걸 보니 아마도 이걸 다 넣어서 비벼 먹는 음식인 모양이다.
문득 고개를 드니 주지승은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차지찬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들고 있으며 백우진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
백우진이 날 슬쩍 보고는 물었다.
“형은 안 피곤해?”
“피곤하지.”
“근데 멀쩡해 보이네.”
“밥 먹잖아.”
눈을 끔뻑끔뻑 하더니 이내 납득한 듯 슬그머니 일어났다.
“나 며칠은 쉴까 봐.”
“어우. 나도 그러려고. 나이 먹으니 회복이 더디네.”
주지승이 공감했다.
“형 고향 간댔지?”
차지찬이 주지승에게 물었다.
“어.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그러고 보니 주지승 고향이 어딘지 모른다.
“어디야?”
“단양.”
“마늘?”
“어? 알아?”
주지승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알지. 마늘떡갈비, 마늘만두, 통마늘 치킨, 마늘빵. 아, 쏘가리도 맛있지.”
“……단양하면 시멘트 아니었어?”
듣고 있던 백우진이 끼어들었다.
“시멘트도 유명하고 마늘도 유명하고. 요샌 관광으로 먹고 살아.”
“흐응.”
“찬용이는 동해, 지찬이는 진주였고. 우진이는?”
“순천.”
“꼬막?”
꼬막하면 고흥과 순천인데 대학생 때 답사 다니며 먹어본 기억이 있다.
“아, 단감도 맛있다고 하던데.”
“그래? 순천 감이 유명해?”
주지승이 물었다.
“그렇긴 한데.”
백우진이 날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구례.”
“구례하면 밀이지. 밤이랑 포도도 유명하고.”
“청도.”
“청도는 미나리지. 미나리 삼겹살 먹어 봤어?”
“아, 맛있지.”
고개를 들고 멍하니 있던 차지찬이 반응했다. 반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미나리 삼겹살이다.
“양양.”
“양양은 버섯이지. 표고, 느타리, 송이 다 맛있어.”
“이 형 이상해.”
“끄흐흐흣.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
“오랜 먹방 탐방의 결과야.”
여기저기 먹방 찍으러 다니다 보니 기억에 남는 음식들이 있다.
“어디 가면 웬지 그 지역 특산물 먹어보고 싶지 않아?”
“그치. 기왕이면 그쪽이 좋지.”
“알 것 같아. 뭔가 여행 왔다는 느낌이 드니까.”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낙곱새가 다 익었다. 국자와 묵은지의 대접을 챙겨 낙곱새를 덜어주었다.
백우진과 이지혜 몫도 나눠주려 하는데 백우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본다.
“왜.”
“…….”
“네 것도 퍼주잖아.”
“이상해.”
“뭐가?”
“형이 이렇게 친절할 리 없는데. 은지 씨만 챙겨주기 민망하니까 우리 것도 해주는 거지?”
“찬용 씨에게 그런 눈치는 없습니다. 본인 몫을 더 많이 챙기려는 것뿐입니다.”
“크흡!”
묵은지의 말에 물을 마시던 주지승이 사레들렸고 차지찬과 백우진은 입을 떡 벌렸다.
“아하하핫! 은지 씨 너무 웃긴다.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어요?”
이지혜 PD가 묵은지에게 물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에이. 남자친구 편들어 주려는 거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40% 정도는 묵은지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과 혼자만 챙기면 눈치 보이니 다른 사람 몫도 나눠주려는 의도였지만.
60% 정도는 양념 소스를 독점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이런 음식을 나눠 먹게 되면 마지막 순번이 그릇을 털게 되는데, 곱창이나 낙지, 새우는 공평하게 나누더라도 양념만은 마지막이 챙겨갈 수 있다.
역시 묵은지.
완벽하진 않지만 내 의도를 읽어냈다.
“의도가 없진 않습니다.”
“아하핫! 은지 씨 진짜 재밌다.”
낙곱새 비빔밥을 한 입 크게 먹었다.
씹을 때마다 쫀쫀한 낙지와 쫄깃한 곱창, 탱글탱글한 새우살이 번갈아 느껴지는데 비슷한 듯하면서도 저마다 특징이 느껴진다.
마치 목관 5중주 느낌이다.
곱창이 바순처럼 무게감 있게 노래를 시작하면 낙지가 오보에처럼 층을 이루며 새우살이 호른처럼 통통 튄다.
그 사이마다 콩나물과 부추가 플루트와 클라리넷처럼 아삭한 식감을 더해주니 이건 정말이지 완벽한 조합이다.
부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신성한 식사 시간에 핸드폰을 볼 여유 따윈 없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어 박상철 PD 이름을 보고 말았다.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네, 형.”
-고생했다. 영상 봤어.
“아유. 많이 했죠.”
-그런 것치곤 목소리 괜찮은데?
“밥 먹고 있었거든요.”
-하하하하! 못 말린다. 그럼 지금 다 같이 있는 거야?
“네. 저만 잠깐 나왔어요.”
-잘됐네. 좋은 소식 있어서 빨리 말해주고 싶었지.
“좋은 소식이요?”
-시즌2 토요일 오후 10시 확정이다.
토요일 오후 10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대다.
과거 토요일은 오후 6시~8시, 일요일은 오후 5시~8시가 주말 예능의 황금시간대였지만 최근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시간대는 오후 8시부터 11시 사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과거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던 대형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떨어지고.
예전에는 10시에 시작하던 드라마가 지금은 9시로 이동하며, 8시 뉴스, 9시 드라마, 10시 예능 순으로 편성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중에서도 금요일과 토요일은 가장자리 싸움이 치열한데 토요일 오후 10시라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 할 수 있다.
묵은지가 말하길.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의 홍성일 대표가 힘을 써 준다고 했는데, 그게 통했던 모양이다.
“대박.”
-그치? 푹 쉬고 다음 주 중에 자리 한번 갖자. 주지승 씨랑 지찬이도 같이.
“어? 설마.”
-음. 네 사람이 같이하면 좋을 것 같아.
도시락, 국토대장정에 이어 TV 프로그램까지 같이하게 생겼다.
“네. 얘기해 둘게요.”
-그래도 되고. 어차피 따로 연락할 거야. 그럼 나중에 얘기하자.
“네.”
-아차차. 그리고 연락받았는지 모르겠는데 너 고정 하나 생길 것 같더라?
“고정?”
-WTV에서 한식 경연대회 열 예정인데 거기 심사위원 후보에 네 이름 들어 있더라고.
“예?”
-잘해 봐. 축하한다.
전화가 끊겼다.
스마트폰을 멀뚱히 보는데, 이렇게 좋은 일이 겹겹이 일어나도 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