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64
치팅데이 164화
34. 대단한 사람(2)
그렇게 노려보기를 얼마간.
송노을 작가가 대기실로 들어섰다.
“어…….”
“무슨 일이세요?”
내가 물으니 송노을 작가가 분위기를 살피며 녹화 관련 공지를 해주었다.
특이사항은 없었고 오뚝이 제품을 집을 때 상표를 가리지 말아 달라는 등의 사소한 일이었다.
공지를 받은 뒤에는 메이크업을 받으러 이동했고 이찬석과 마주치기 싫어 자판기 옆에서 참가자 자료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찬용이 형!”
고개를 들어보니 가수 하임이다.
얼굴에 그래픽 작업이라도 한 것마냥 잘생겼다.
“네?”
“왜 여기 있어요?”
하임이 내가 정리해 둔 자료를 힐끔 보더니 오두방정을 떤다.
“와. 뭐야? 이거 형이 정리했어요? 대박이다. 방송 준비 원래 이렇게 해?”
“…….”
“백반토론 같은 거 다 애드립인 줄 알았는데 형 진짜 노력파였구나.”
“저.”
“응.”
“……안녕하세요.”
인사할 새도 없이 말을 몰아붙여서 인사했더니 하임이 날 빤히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니 웃음을 멈추고 두 손을 내보였다.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들이댔죠? 눈치 없단 말 많이 들어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니에요. 저도 반가운데 말이 잘 안 나와서 그랬어요.”
같은 프로그램을 해도 대기실도 따로 쓰고 다 같이 모이는 자리가 없어서 접점이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인기 가수다.
“왜. 방송 오래 보다 보면 내적 친밀감 같은 거 생기잖아요. 형 방송 오래 봐서 그랬던 것 같아요.”
1라운드 녹화 때도 내 방송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발언했었다.
“정말요?”
“네. 나 되게 어필 많이 했는데?”
“연예계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한테 종종 그런다고 들어서. 팬이에요라든가 저번 작품 잘 봤어요 같이 예의로.”
“에이.”
하임이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렇기야 한데.”
“흐흫흣.”
“형은 진짜예요. 봐.”
하임이 유튜브를 켜 내게 보여주었다. 구독 버튼이 눌러져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진짜였네요.”
“하임아.”
누군가 하임을 불렀다. 매니저로 기억한다.
“아, 나 갈게요. 다음에 보면 말 놓기다.”
하임이 어딘가로 급히 향했다.
이미 반쯤 말을 놓았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나쁜 느낌은 아니라 다음에 보면 좀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
* * *
“한반도 반만년 역사의 도달지!”
“80만 외식업체의 최전선!”
“우리 음식! 한식의 최고수를 가립니다!”
“한식예찬!”
우왕선과 좌왕택의 우렁차고 명료한 오프닝 멘트와 함께 한식예찬 3라운드 녹화가 시작되었다.
지난 두 번보다는 간소화하여 출연자를 소개한 후 곧장 오늘 주제가 공개되었다.
“박정아 심사위원, 3라운드 과제는 무엇입니까?”
“매운맛입니다.”
1라운드 함석호, 2라운드 이찬석에 이어 3라운드는 박정아 심사위원이 과제를 제시했다.
중앙 스크린에 한국인이 선호하는 맛에 대한 설문자료가 제시되었다.
매운맛이 34%로 전체 1위이고 단맛이 24%로 2위 그 뒤로 신맛 19%, 쓴맛 14%, 짠맛이 9%를 차지했다.1)
짠맛이 가장 비선호된다는 사실이 놀랍고 쓴맛보다 선호도가 낮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설문조사에 뭔가 오류가 있지 않을까 싶지만 현대 한국인이 매운맛을 선호하는 현상만은 피부로 느낀다.
요즘 바깥 음식은 대부분 너무 맵다.
“제한시간은 60분! 한식예찬 시작합니다!”
우왕선의 외침과 함께 12명의 참가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된 뒤에 인터뷰를 할 생각인지 좌왕택이 패널로 나온 가수 하임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임 씨는 매운 음식 좋아한다고 하시던데요.”
“진짜 좋아해요. 매운 음식 먹으러 다니기도 했어요.”
다른 패널이 호응하며 매운맛 맛집이 하나둘 언급되었다.
신림동의 O돈가스집, 송파구의 H냉면집, 종로의 G라면집, 신사동의 U카레집 등.
먹방하면서 보고 들은 곳들이 모두 언급되었다.
“벌써부터 스튜디오에 매운 냄새가 풍기는데요. 최은삼 씨는 특이하게 양파가 잔뜩 있습니다.”
우왕선이 참가번호 3번 최은삼에게 다가갔다.
1라운드 12위, 2라운드 10위로 현재 조일상과 함께 공동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얼굴에 긴장감과 비장함이 공존한다.
“예. 영천 양파 맛을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영천이 양파로 유명한가 보죠?”
우왕선의 말에 함석호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신녕면이 양파와 마늘로 유명합니다. 다만 양파가 고온에 취약한 작물이라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의 고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리계 대부답게 어떤 지역에서 무엇이 나고 무슨 일이 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최근에는 양파보다는 마늘을 더 많이 키우죠. 영천 양파라. 글쎄요.”
이찬석의 말에 최은삼의 얼굴이 벌게졌다.
가스불이 뜨거운 탓은 아니리라.
“최은삼 씨는 갈비찜을 하시려는 것 같네요. 양파를 잔뜩 넣은 매운 갈비찜 기대됩니다.”
오미경 심사위원이 심사위원단의 평을 정리하자 우왕선이 이번에는 참가번호 4번 사대문을 찾았다.
1라운드 2위, 2라운드 1위를 차지하며 현재 종합 1위인 그가 어떤 음식을 가지고 나왔을지 궁금하다.
“사대문 씨는 고추를 빻고 있습니다. 이럴 거면 고춧가루를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왕선이 스튜디오에 나와서 고추를 빻는 사대문의 행동을 언급했다.
시간 제약이 있는 만큼 굳이 생고추를 빻아서 쓰는 게 의아하긴 하다.
박정아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건조된 고추를 빻아서 가루를 내면 향과 단맛 같은 게 날아가고 매운맛만 남습니다. 사대문 씨는 고추 본연의 맛을 살리려고 하시는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백우진이 후추 이야기를 꺼내서 편집한 적 있는데 비슷한 얘기가 나왔었다.
“후추랑 비슷한 얘기인가요? 순후추랑 통후추 차이.”
“네. 맞아요.”
“이야. 이해가 확 되네요. 신선한 재료를 쓰기 전에 빻거나 갈아서 쓰면 맛이 달라진다. 좋습니다.”
통후추는 이제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니 이해가 쉬웠던 모양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고추 맛을 활용하겠다는 사대문 씨 요리도 기대가 되고. 참가번호 7번 박성칠 씨는. 이거 캡사이신 아닌가요?”
우왕선이 악마의 피를 들어보이며 물으니 박성칠이 씩 웃는다.
“네. 제가 낙지볶음 맛있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박성칠 씨는 청주에서 낙지볶음집을 하셨죠?”
송노을 작가가 전해준 정보로는 꽤나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네. 오늘 청주를 사로잡은 성칠이네 낙지볶음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본래 매운 음식으로 장사를 했으면 맛은 검증되었다고 봐야 한다.
참가번호 박성칠의 현재 총점은 3점으로 전체 8위다.
3라운드 주제가 매운맛으로 선정되었을 때부터 본인의 특기를 살려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요량이었을 터.
내가 캡사이신 넣은 낙지볶음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 의문이나 일단은 기대해 본다.
우왕선이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소개하다가 이번에는 주지승 앞으로 다가갔다.
“이분도 강력한 우승 후보죠. 주지승 씨는 오늘 어떤 음식을 준비하셨나요?”
“마늘가리비찜입니다.”
“이야. 이름만 들어도 맛있을 것 같은데요.”
주지승의 손이 앞선 라운드에 비해 몹시 빠르다. 지금까지 마지막 심사를 노려서 간을 세게 가져갔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먼저 심사를 받을 생각인 모양이다.
양파를 빠르게 다진 뒤 가리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가리비를 믹서기에 넣고 돌리기에 식감이 아쉬울 뻔했는데, 딱 절반만 갈고 나머지 절반은 식감을 즐길 수 있게 덩어리로 썰었다.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마실 때 반은 갈아달라 하고, 반은 그대로 먹었는데 그런 느낌을 주려는 것 같다.
주지승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잘게 다진 양파와 곱게 갈아낸 가리비, 고춧가루를 넣고 함께 볶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통마늘을 왕창 넣는다.
마늘에 미친 한국인이란 말이 떠오른다.
시선을 옮겨 다른 참가자들이 어떻게 요리하는지 살폈다.
빨간 음식들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 심사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9분 정도 남은 시점에 주지승이 가장 먼저 종을 울렸다.
비슷한 시점에 참가번호 6번 육혜린과 참가번호 4번 사대문이 차례로 종을 울렸고.
이내 거의 모든 도전자가 5분 정도 남겨놓고 음식을 완성했다.
“오늘은 대단히 빠르게 음식이 완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심사는 가장 먼저 종을 울린 참가번호 12번 주지승 씨인데요. 오늘 특별히 요리를 서두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네. 아무래도 자극적인 음식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앞서 심사받는 게 유리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심사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육혜린 씨랑 사대문 씨도?”
질문받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심사 순서도 고려했다니.
과연 하나의 음식을 내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주지승이 마늘가리비찜을 나눠주었다. 색이 상당히 빨간데 마늘까지 들어 있으니 조심스럽다.
숟가락의 절반만 채워서 입에 넣었다. 다행히 매운 정도는 평범한 라면이나 김치찌개 느낌이다.
푹 익은 마늘과 가리비의 식감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마늘향과 약간의 고추향 그리고 단맛이다.
달짝지근하면서도 걸쭉한 가리비 스프에 고춧가루가 들어 있어 지루해질 틈이 없다.
양파와 가리비의 감칠맛.
마늘, 고추의 매운맛.
거기에 양파와 마늘의 은은한 단맛이 적절히 어우러지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맛있게 매운 음식이지 않나 싶다.
요란하게 매운 음식들 사이에서.
잔잔히 입맛을 돋우는 보석같은 요리.
영화 라붐이 떠오른다.
파티장에 울리는 디스코 음악.
물 한 잔 마시러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소피 마르소에게 헤드폰이 씌어지고.
그 순간 흘러 나오는 리처드 샌더슨의 달콤한 목소리.
인파와 디스코 음악으로 가득 차 있던 파티장에는 오직 알렉산드르 스털링과 소피 마르소 두 사람만이 존재하게 된다.
매콤달짝지근한 이 요리는 이곳이 촬영장인 것도 잊게 해 오직 나와 가리비찜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