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68
치팅데이 168화
35. 작은 사람(1)
다음 날 아침.
인기척에 눈을 뜨니 묵은지가 외출 차림을 하고는 화장대 앞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7시가 조금 넘었다.
어제 둘 다 지쳐서 씻고 바로 잤는데 이른 시간에 어딜 가려고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은지 씨?”
“……일어나셨습니까.”
“왜 그러고 있어요?”
“마트 오픈 시간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불찰입니다.”
“네?”
그러고 보니 어제 자기 전에 아침을 각오하라고 했다.
“이따 가면 되죠.”
“요즘 이런 실수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안 하던 일이니 당연하죠. 게다가 요즘 회사 일로 바쁘잖아요.”
다가가 끌어안았다.
“그런 와중에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묵은지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는 내 얼굴을 밀어냈다.
“이 닦으십시오.”
“네.”
세안과 양치를 하고선 어제 사 두었던 케일 주스와 샌드위치를 꺼냈다.
“오뚝이에서 상품화 결정했더라고요.”
“우승자 특전 아니었습니까?”
한식예찬 최종 우승자는 창업 지원금과 함께 각종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중 시그니처 요리의 상품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 그런데 3라운드 우승 요리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따로 진행한대요.”
“잘 되었습니다. 찬용 씨에게는 상품이 많을수록 이득입니다.”
상품별로 광고비를 받기 때문이다.
하나로 예정되었던 것이 둘로 늘어났으니 두 배는 아니더라도 광고 단가를 더 받아낼 여지가 생긴 것이다.
묵은지가 그것을 놓칠 리 없다.
“촬영은 어땠습니까?”
“음. 중간에 위기가 있었는데 어찌 잘 풀렸어요.”
“위기?”
“네. 박성칠 씨가 낙지볶음을 했는데 너무 매운 거예요.”
“심사하기 난감했겠습니다.”
“네. 게다가 너무 자극적이라 뒤에 심사받는 음식까지 영향이 가더라고요.”
“경연 프로그램에 그런 해프닝은 하나둘쯤 있는 법입니다.”
표현이 서툰 묵은지만의 위로다.
“근데 이찬석이란 사람은 말투가.”
적절한 표현을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싸가지 없더라고요.”
“독설 캐릭터도 하나 있는 편이 프로그램 흥행에 도움이 됩니다.”
“제 속도 막 긁고.”
묵은지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이찬석이 찬용 씨에게 뭐라 했습니까?”
이때다 싶어서 어제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니 묵은지의 얼굴이 무서워졌다.
“잘하셨습니다. 그런 말 받아줄 필요 없습니다.”
“그렇죠? 저 잘했죠?”
“잘했습니다. 주스 더 마시겠습니까?”
“네.”
묵은지가 본인 케일 주스를 내게 나눠주었다.
“은지 씨는요?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황지석 과장과 만났습니다.”
“……누구예요?”
“보건부 사람입니다.”
당뇨병 예방 캠페인 및 소아당뇨 홍보대사 관련 일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최대한 빨리 직접 만나보길 바라서 일정을 조율 중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오전은 어떻습니까?”
오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내일 약속을 잡자고 하려다가 문득 하임이 떠올랐다.
“모레가 좋겠어요. 내일 약속이 있어요.”
묵은지가 눈을 깜빡였다.
내 일정을 관리하는 그녀가 모르는 약속이 있어서 의아한 모양이다.
“아. 하임이 같이 밥 먹자고 해서요.”
“……초코하임?”
묵은지가 이런 말장난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해서 웃음이 터졌다.
“아니요. 가수 하임이요.”
묵은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해졌습니까?”
“친해졌다기보단 일방적인 느낌이에요. 붙임성이 좋더라고요.”
“평판도 좋습니다. 되도록 친분을 이어가는 편이.”
묵은지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뭔데요.”
“찬용 씨에게 사람을 손익 따지며 만나라고 권하려 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찬용 씨에게 좋지 못한 일입니다.”
묵은지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묵은지도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다.
사실 하임 같은 유명인이라면 누구나 친분을 맺고 싶을 거다.
단순히 지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디서 말 한마디라도 꺼낼 수 있을 테고 나처럼 방송인이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거다.
하물며 하임 스스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자각하고 부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예전에는 묵은지가 항상 옳은 판단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녀 역시 평범한 사람이고 그럼에도 옳은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첫인상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다.
“어떻게 매일 그래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어떻게 매번 반하게 하냐고요.”
묵은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바라보니 이내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아무튼. 과장님 만난 뒤에는요?”
“편집과 대본 작성 등 평소와 같았습니다.”
“지승이 형한테 요리 배웠잖아요.”
“그건 비밀입니다.”
아무래도 장을 보기 전까지는 무슨 요리를 배웠는지 알 수 없겠다.
* * *
간단한 것만 사도 된다고 해서 동네 슈퍼마켓을 찾았다.
마트보다 비교적 일찍 열고 채소, 고기류도 판매하는 제법 규모 있는 곳이라 종종 찾는다.
슈퍼마켓에 들어서니 사장님 두 분이 인사해 주셨다.
묵은지는 핸드폰과 매대를 번갈아 보며 마늘, 쪽파, 새송이버섯, 버터 등을 담았다.
그 모습이 예뻐서 그저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녀가 방향을 틀어 시야가 확보되니 한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어?”
진홍색 바탕에 섬머라고 적혀 있는 초코파이다.
“이런 것도 있었나?”
올해는 장을 보러 와도 과자류는 쳐다도 보지 않아서 몰랐던 모양이다.
가까이 가니 2023년 여름한정판이라 적혀 있다.1)
여름에 나온 게 아직 판매되지 않아 재고로 남은 모양이다.
“사라져서 놀랐습니다.”
묵은지가 다가왔다.
수박맛 초코파이에 눈이 팔려서 잠시 떨어졌나 보다.
“이거 봐요. 수박맛이래요. 상상이 돼요?”
“안 됩니다.”
“그쵸?”
“먹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녀가 나와 수박 초코파이를 번갈아 보더니 단호히 나온다.
“혈당이 안정되었다고 해도 이런 제품은 금물입니다. 차지찬 씨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도넛에 미쳐서 혈당이 치솟았던 차지찬이 떠오른다.
확실히 오랜 시간 금욕적인 식단을 하다가 자극적인 음식을 입에 대면 자제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렇기야 한데.”
“어떤 이유라도 안 됩니다. 건강이 최우선입니다.”
“그게 사실 어제 송노을 작가가 귀띔해 줬거든요. 제가 요즘 살이 많이 빠져서 예전 같은 느낌이 아니라고 했대요. 당분간은 체형 유지하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변명이 신박하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정말이에요.”
“안 됩니다.”
“…….”
수박이 그려진 초코파이 상자를 보았다.
“리뷰 콘텐츠 어때요?”
“여름 한정 상품을 가을에 하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원치 않을 겁니다.”
“왜요?”
“당뇨환자가 단것을 먹으니까요.”
뭔가 비벼볼 말이 없을까 고민하니 묵은지가 다시 한번 단호히 나섰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안 됩니다.”
“맞아요.”
이제 미련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는 이것 말고 맛있는 것 천지다.
오늘은 묵은지가 요리도 해준다고 하니 아마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리라.
* * *
돌아왔더니 묵은지가 부엌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조금 걱정되지만 믿어보기로 하고 서재에서 묵은지가 정리해 둔 일정을 확인하고 급하게 답변할 업무 연락을 처리했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 주 모교에서 있을 강연 자료를 만들었는데 너무 꼰대 같지 않나 싶어 몇 번 더 수정했다.
세 시간쯤 그러고 나니 목이 말라 밖으로 나섰는데 집안에 버터향이 그득하다.
“오.”
“보면 안 됩니다.”
“봐버렸어요.”
식탁과 조리대에 식재료와 비닐 봉투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요리를 하면서 중간중간 조금씩 치워야 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요리하는 뒷모습을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냄새 엄청 좋네요.”
말을 걸면서 슬쩍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새송이버섯과 마늘, 쪽파, 간장, 굴 소스로 무엇을 만들었을지 궁금하다.
냄새도 너무 좋아서 잔뜩 기대된다.
“강의 자료 만들어 봤는데 부탁할게요.”
“벌써 만드셨습니까?”
세 시간이나 지난 줄 모르는 것 같다.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 음식 같지는 않은데 아마 익숙하지 않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 듯싶다.
“빨리했죠? 쓸 게 없더라고요.”
“강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34살 성공한 꼰대 아저씨가 하는 자랑이요.”
프라이팬에 집중하던 묵은지가 돌아섰다.
제정신이냐는 눈빛이다.
“사실이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니 피식 웃는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강연해 달라는데 솔직히 저도 모르겠거든요. 열심히 했다고 하면 다들 마찬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했다고 말하면 뭔가 뻔하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 적어 보니까.”
“보니까?”
“제 자랑이 되더라고요. 그럴 바에 제목부터 자랑이라고 하자. 거창하게 강의 같은 게 아니라.”
“그런 솔직한 모습이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하고 돌아서니 아직 장바구니에 정리하지 않은 물건이 남아 있었다.
하나씩 꺼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무엇을 사는지도 보지 말라고 해서 결제할 때도 밖에 나가 있어야 했는데 장바구니 안에 수박맛 초코파이가 한 상자 들어 있다.
화장실 청소라도 하면 하나 주려나 싶어 혼자 웃고 있는데 묵은지가 돌아섰다.
“이거 언제 샀어요?”
“제가 먹으려고 샀습니다. 눈독 들이지 마십시오.”
“그럴게요. 이거 얼려 먹으면 더 맛있다고 적혀 있어요.”
“냉동고 넣기만 하십시오. 뜯어져 있는지 확인할 겁니다.”
“네.”
웃으며 초코파이를 냉동고에 넣었다.
그러니 묵은지가 식탁 위에 오늘의 요리를 놓았다.
“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새송이버섯 겉면에는 윤기가 돌았다.
익숙지 않은 칼질로 조심스레 넣은 칼집이 인상적이고 쪽파와 마늘, 간장, 굴 소스로 만든 양념이 제법 그럴싸하다.
“드셔 보십시오.”
묵은지가 평소답지 않게 다소 긴장한 얼굴로 요리를 권했다.
“잘 먹겠습니다.”
버섯구이 하나를 통째로 입안에 넣었다.
향미로운 버터향이 간장, 굴 소스의 감칠맛과 더해져 풍미가 비강 가득해지고.
촘촘히 낸 칼집 덕에 식감이 한층 살아 오른 버섯이 놀랍도록 부드럽다.
“대박.”
너무 놀랐다.
“천재야. 은지 씨 천재였어요? 어쩜 이렇게 맛있어요?”
“괜찮습니까?”
“아니요! 괜찮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이건 진짜 완벽해요. 너무 맛있어. 진짜 천재다.”
한 입 더 먹으니 눈이 크게 떠졌다.
기쁨에 두 주먹을 위아래로 흔드니 묵은지가 미소 지으며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