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78
치팅데이 178화
37. 대화하는 법(1)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팔을 벌려 다가온다.
꼭 안으니 가슴팍에 대고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한다.
“찬용 씨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함부로 넘겨짚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는 올려다본다.
“그러니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성형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까?”
“따로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전했다.
“잘생겨지고 싶다. 멋있어지고 싶다. 그런 생각이에요.”
머리로만 생각하면 구체화되지 않는다.
모호한 감정과 생각을 문장으로 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라 말을 잇는데 묵은지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오래 전부터 가졌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포기했지만요. 요즘 비슷한 말을 계속 들으니 다시 떠오른 것 같아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뚱뚱했을 때 거울 보면서 들었던 생각. 무시받으면서 애써 묻어두었던 감정. 영향이 없진 않은 것 같아요.”
날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기분 잘 압니다.”
처음 보는 관계임에도 은근히 무시당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사람을 멀리하게 되었다.
사람을 외견으로 판단하는 못 배워먹은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어 나를 지켰다.
억울함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내 삶과 정신이 조금이나마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도피였다.
반면 묵은지는 스스로를 바꾸었다.
우리가 막 알아가던 시기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묵은지에게 왜 본인을 탓하냐고 틀린 건 그들이라고 말했고 묵은지는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고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눈 뒤에야 사실 나도 나를 바꾸고 싶었고, 묵은지도 그릇된 시선을 원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찬용 씨가 그러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묵은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찬용 씨는 지금 그대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가 묵은지에게 했던 말이다.
이 사람은 항상 이렇다.
문제를 직면했을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추하는 능력이 있고 상대에게 논점을 제시하는 데 익숙하다.
계약, 협상 자리에서도 그 능력이 크게 발현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효과적이다.
본인을 가혹하게 밀어붙였던 묵은지에게 건넸던 말을 이제 그녀에게 돌려받음으로써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네요.”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그녀를 바로 보고 그녀도 나를 올곧게 본다.
“저 좀 대단하긴 해요.”
“그렇습니다.”
“구독자 130만 명이 어디 쉬운 일이에요?”
“어렵습니다.”
“살도 51㎏이나 뺐어요. 그것도 일하면서.”
“대단합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렇습니다.”
“혼자서 미용실이랑 피부샵도 다녀요. 양말도 잘 신고 발톱도 혼자 깎고. 팔 뒤로 해서 손바닥도 맞닿아요.”
묵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이에 빚 없이 서울에 아파트 사고. 차도 있고. 이렇게 현명하고 예쁜 사람도 곁에 있고.”
그녀가 빙그레 웃는다.
“고마워요.”
매번 고맙고 사랑스럽다.
내 부족함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나의 장점을 바라봐주는 이 사람 덕분에.
소심하고 피해의식 있는 나도 이렇게 충만해질 수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짐을 느낀다.
* * *
한식예찬 5라운드 녹화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휴게실 자판기 앞에서 대본과 자료를 검토하는데 하임이 다가왔다.
“형.”
“어. 커피 마실래?”
“아니. 커피 마시면 차에서 못 자.”
하임이 의자를 끌어다 등받이를 앞으로 두고 앉았다.
“근데 왜 맨날 여기 있어?”
“그냥. 대기실 답답해서?”
하임이 눈을 깜빡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찬석?”
놀라 눈을 크게 뜨니 하임이 씩 웃는다.
“티 나?”
“내가 눈치가 좀 빨라. 아, 얘가 나 싫어하는구나. 쟤가 쟤랑 잘 맞는구나. 이런 거.”
세상물정 모르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렸을 적부터 연습생으로 연예계를 경험했던 탓인지 의외로 날카롭다.
자각하지 못했던 편견을 또 하나 발견했다. 반성한다.
“근데 생각해 봤어?”
“뭘?”
“병원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아. 안 할래.”
“그래?”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왜 안 한다고 하는지 안 물어보네?”
“형이 알아서 고민했겠지. 결정 내린 거에 내가 뭐라 할 거 없잖아.”
이제 막 친해지고 있지만 볼수록 괜찮은 녀석이다.
“근데 좀 아깝긴 해. 아는 사람 소개해 주면 필러 한 번 공짜로 해준다고 했거든.”
“야이씨.”
“흐항항항.”
이제는 곧잘 농담도 주고받는다.
한 번 웃고 나니 하임이 축 늘어졌다.
“피곤해?”
“응. 다음 달에 싱글 발매라 지금 엄청 바빠.”
돈가스를 먹을 때 잠깐 들었다.
분명 앨범 활동을 하지 않는 비활동 기간인데도 각종 프로그램에 쉴 틈없이 출연 중이라 쉬는 것 같지가 않다고 했다.
거기에 신곡 연습까지 더해지니 피곤할 만하다.
“근데 형은 광고 안 해?”
“나?”
“찍었는데? 최은삼 씨 매운갈비찜.”
“오~”
1년에 광고를 열댓씩 찍는 녀석이 CF 하나 촬영했다고 추켜세워 주니 민망하다.
“그거 말고. 방송에서.”
“아. 제안은 많이 받는데 이거저거 거르다 보니.”
“맞다. 형 제품 질 같은 거 많이 따지지?”
“나 믿는 사람한테 추천하는 거니까. 신경 써야지. 평판도 달렸고.”
“그럼 나는?”
“뭐가?”
“나는 어떠냐고.”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나 싱글 내면 형 방송에서 홍보 좀 해주면 안 돼?”
“엥?”
“해주라아. 해주라아.”
“아니. 내 방송에 나와서 앨범 홍보를 한다고?”
“응.”
“왜?”
“어?”
하임이 날 빤히 본다.
“너 지금 나 이해 못 하겠지.”
물었다.
“응.”
“나도 그러거든? 이해가 되게 말을 해 봐.”
“아니. 형 라방 시청자 2~3만 명이나 되던데?”
“그치?”
“유튜브 영상 조회 수도 50만은 기본으로 찍고. 엄청 메리트 있잖아. 지인 찬스로 홍보하고 싶지.”
“으음.”
“그리고 형 방송 나가면 일한다는 핑계로 놀다 올 수 있고.”
“스케줄이 그렇게 빡빡해?”
하임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 진짜 반찬가게 팬이라니까? 스튜디오도 궁금하고 종이박스 PD님도 궁금하고.”
“어…….”
“제발.”
“이거 회사랑 얘기된 거야?”
“아니. 근데 말하면 해줄걸?”
“마케팅팀 뒷목 잡는 소리하네. 다음 달이면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일정 다 짜놓았을 텐데 갑자기 되겠어?”
“허락 안 해주면 누우면 돼. 그럼 다 들어줘.”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니 하임이 씩 웃는다.
“잠도 차에서 자면서 일하는데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럼. 난 좀 떼써도 돼.”
“허.”
“왜?”
“분명 이상한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란 말이지.”
“그건 형이 더 심하지.”
“나? 내가 뭐?”
“백반토론.”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 얘기할 입장이 아니다.
“아무튼 진짜 안 돼?”
“난 좋지. 너 나오면 방송 잘 되니까. 근데 따로 계약서 써야 하나?”
다른 유튜버와 합방할 때는 편하게 놀러가는 느낌으로 해왔는데 하임의 소속사가 워낙 커서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모르겠다.
“몰라.”
“네가 모르면 어떡해.”
“잠깐만.”
하임이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한반도 반만년 역사의 도달지!”
“80만 외식업체의 최전선!”
“우리 음식! 한식의 최고수를 가립니다!”
“한식예찬!”
한식예찬 5라운드 녹화가 시작되었다.
촬영이 5주째 접어들었음에도 참가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는데.
우승권에 놓인 참가자들은 종합 우승을 위해 마음을 다잡은 느낌이고 하위권에 머문 이들은 본인의 실력을 후회 없이 보이고 싶은 듯하다.
각 참가자들의 사연을 알게 된 탓인지 나도 부담이 커졌다.
“반찬용 심사위원, 5라운드 과제는 무엇입니까?”
이번 라운드 주제 소개는 내가 맡았다.
“장입니다.”
된장, 고추장, 쌈장, 막장 같은 장 문화 또한 한식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장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한식예찬 참가자분들의 장맛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반찬용 심사위원의 말씀대로 한식하면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늘도 제한시간은 60분! 과연 한국의 장맛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한식예찬 시작합니다!”
우왕선의 외침과 함께 12명의 참가자들이 저마다 준비해 온 재료에 손을 뻗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초반에는 눈에 띄는 장면이 드물기에 장과 관련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좌왕택이 함석호 심사위원에게 우리나라 장의 특징을 물었다.
“우리나라 장은 콩을 기반으로 합니다. 메주를 쑤고 장을 만들고 갈라서 숙성하고 발효시키죠. 중국에서는 장을 가루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콩 알갱이가 남아 있도록 찧어 만드는 등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우리나라는 찧고 중국은 간다.”
“메주를 띄우고 된장과 간장을 동시에 만드는 방식도 중국, 일본과 차별되죠.”
“씨 간장 문화도요.”
오미경, 박정아 심사위원이 각각 설명을 덧붙였다.
이찬석은 오늘따라 가만히 있다.
4라운드 녹화 당시 상황과 방영된 영상에 적잖이 충격받은 듯한데 아무래도 평소처럼 행동하기 꺼려지는 모양이다.
“장 문화가 이렇게 발달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우왕선이 물었다.
모처럼 아는 내용이 나와서 곧장 입을 열었다.
“원재료인 콩이 풍부한 덕입니다.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랑 만주인데 대두 품종이 한반도에만 900개가 넘는다고 알고 있어요. 게다가 예전에는 단백질을 섭취하기 쉽지 않았는데 콩은 단백질이 풍부하니 쌀과 함께 많이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부 활동이 늘고.
특히 한식예찬 진행하면서 편집을 해왔던 경험에서 꽤나 도움을 받는다.
이 지식도 우지니어스 영상을 편집하다가 알게 된 내용이다.
“아. 그러네요. 옛날 서민들은 고기 먹기가 쉽지 않았으니 콩으로 단백질을 섭취했겠네요.”
“근데 콩 품종이 그렇게 많아요?”
패널들이 궁금한 점을 내놓으면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며 답변했고.
그렇게 20분쯤 흐르니 스튜디오에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