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196
치팅데이 196화
41. 메밀소바와 블루베리(2)
녹화 마무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쓰레기 줍기다.
바닥을 파고 들었던 자존감과 우울증을 이겨내고자 했던 작은 행동이 지금은 버릇처럼 혹은 일상처럼 이어지고 있다.
“으어어어. 이제 그만하자. 추워.”
백우진이 엄살을 떨었다.
“춥긴 뭐가 추워. 땀 나서 딱 좋구만.”
“형이나 많이 해.”
백우진이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겨울이라 해수욕장 오는 사람이 적나 봐. 쓰레기도 별로 없고 슬슬 들어가자.”
주지승의 말에 나와 차지찬도 쓰레기봉투를 묶어 근처 쓰레기 배출지에 버렸다.
이번 촬영은 여기까지다.
“수고하셨습니다.”
제작진과 인사를 나누고 잠시 숨을 돌리고자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망상 해수욕장에 있는 D카페인데 동해 내려올 때 종종 들렀던 곳이다.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도.”
“아아.”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 차가운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주지승과 백우진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먹겠다고 했고 나와 차지찬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선택했다.
네 사람 모두 당뇨가 있어서 카페에 오면 항상 아메리카노, 콜드브루만 주문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문득 달달한 게 먹고 싶어졌다.
“블루베리 빙수도 둘 주세요.”
계산하고 돌아서니 세 사람 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움직였는데 달달한 거 먹어줘야지.”
“맞아. 나 어지러웠어.”
단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몸에 안 좋다.
그러나 누군가 주문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먹는 것이 당뇨인이다.
다만 겨울에 무슨 빙수냐고 구박받진 않을까 싶었다.
“끄으으응!”
2층 창가에 자리잡으니 백우진이 기지개를 켰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성질 급한 차지찬이 물었다.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촬영 후에 잠깐 시간 좀 내달라고 했는데 못내 궁금했던 모양이다.
“사설이 좀 긴데. 생각나는 대로 해볼게.”
말은 제법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어디서부터 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라면 내 마음을 알아주리란 믿음이 있어서 부담없이 말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올해 초에 우리 그런 말 나눈 적 있잖아. 비만이나 당뇨환자는 스스로 관리하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다고.”
출근하면 설탕이 잔뜩 들어간 바깥음식을 먹어야 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면 진이 빠져 운동과 집안일 하기 벅차단 내용이었다.
“그래서 도시락 만들어서 팔았는데 많은 분이 도움 받았다고 하셨고. 실제로 한 끼 도와드렸다고 큰 변화는 없었겠지만.”
주지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날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인사받으니까 나쁘지 않더라고. 아니. 좋았어. 그래서 언젠가는 반찬가게 하나 내고 싶단 생각도 했고.”
알람벨이 울렸다.
“내가 갔다 올게.”
“혼자서 들겠냐?”
“있거든?”
백우진과 차지찬이 음료와 빙수를 받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자 주지승이 입을 열었다.
“찬용아, 난 너랑 같은 생각이야.”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주지승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부터 내게 회사를 함께 세우자고 말했고 창업 이야기도 꾸준히 했었다.
“응.”
차지찬과 백우진이 각각 쟁반 하나씩 들고 올라왔다.
창가에 놓으니 그림이 그럴싸하다.
냉동이 아닌 생 블루베리가 가득 얹어진 빙수는 언제 봐도 호사스럽다.
“겨울에 웬 빙순가 싶더니 이유가 있었네.”
“으으음!”
오랜만에 단 음식을 먹은 백우진이 주먹을 흔들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래서. 도시락 장사 다시 하자고?”
차지찬이 물었다.
평소에는 장난만 치면서도 이런 일에는 진지하게 다가와준다.
“응. 근데 좀 크게 하고 싶어.”
다들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날 본다.
“해봐서 알잖아. 되게 미미했다는 거.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눠주고 싶어.”
“……나눠주는 게 아니지.”
백우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형이 얼마나 크게 하고 싶은지 몰라도 규모가 커지면 예전처럼 광고로 충당되진 않을 거야. 지속 가능하려면 당연히 수익이 있어야 해. 월세, 인건비 등 지출 다 내고도.”
“맞아.”
순순히 인정했다.
“예전 일 생각해서 표현이 그렇게 됐는데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생각이야. 가능하다면 서울을 시작으로 지점도 내고 싶고.”
의도는 좋지만 그렇다고 영리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내겐 책임져야 할 직원이 있고 나 스스로도 더 큰 돈을 벌고 싶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니 주지승이 입을 벌리고 있다.
“왜 그렇게 놀래?”
“어?”
“아까 나랑 같은 생각이라며.”
“난 장사만 생각했지. 프렌차이즈화가 쉬울 리 없잖아.”
“당연히 어렵지. ……장사만 잘 된다면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백우진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뭐, 좋아. 좋은 일 하면서 돈도 벌면 좋지. 근데 예전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차지찬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만큼 일을 크게 하려면 방송이랑 사업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해. 근데 우리 도시락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유튜브 덕분이지.”
“그래. 우리 넷 모두 한창 잘 되는 방송을 포기하고 다른 일 할 만큼 바보 아니잖아.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사업했다가는 낭패만 볼 거고.”
차지찬 말이 옳다.
묵은지가 평소 강조해 왔던 것처럼 유튜브 채널은 우리의 가장 큰 힘이다.
항상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때문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 시간이 부족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당뇨식단 사업을 시작했다간 분명 그 결과가 좋지 못할 것이다.
“형 말이 맞아.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잘 생각해야지.”
“뭔 방법이 있는 모양인데.”
차지찬이 어서 말해보라며 재촉했다.
“얼마 전에 지승이 형이 회사 합치자는 얘기를 꺼냈어.”
“그랬지.”
콘텐츠 기획력이 좋은 최미카엘이 반야식경, 반찬가게 두 채널 PD로 활동하고.
대외업무에 능한 묵은지가 두 채널을 관리해 준다면 시너지가 발생할 거란 생각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왜 안 했어?”
설명을 들은 차지찬과 백우진이 되물을 정도로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다.
“그때는 아직이라 생각해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얘기했고 지승이 형도 기다려줬어. 아마 창업할 때 다시 얘기할 생각이었겠지. 그치?”
주지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지승이 형 매장으로 하자. 반야식경에 필요한 일은 나랑 은지 씨 그리고 우리 직원이 최대한 도울게. 아니. 같이할게.”
“……어차피 지승이 형 가게 차릴 건 확정이니까 그걸 우리가 도우면서 사업화하자는 말이네?”
백우진이 내 의도를 정확히 짚었다.
“응. 유튜브랑 매장 운영 동시에 하기엔 지승이 형도 힘들 테니까. 우리가 도우면서 살을 붙여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어. 형도 도움 필요했으니 내게 언질했을 테고.”
“나야 환영이지.”
주지승이 씩 웃었다.
백우진은 블루베리 빙수를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고 차지찬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빙수를 먹기 시작했는데 한 겨울에 따뜻한 실내에서 빙수를 먹는 호사스러움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반찬.”
차지찬이 불러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으로 닭가슴살 하나 만들 생각하고 있었어. 네가 구상하는 일에 전국 택배 이런 것도 있냐?”
“방금 생겼어.”
“뭐?”
“우리 같이 하는 일이잖아. 형이 하고 싶으면 하자. 도시락도 배송하고. 요즘 살아 있는 생선도 택배 거래 하는 세상인데 뭐.”
“왜 이렇게 쉽게 말해?”
“말만 쉽게 하는 거야. 막상 시작하면 어마어마할걸?”
“그걸 아는 놈이 이래?”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형보다 내가 훨씬 많이 댈 수 있을걸?”
“근데?”
“하고 싶으니까. 몇 안 되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멍하니 있던 차지찬이 피식 웃었다.
이 사람은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우려사항은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다.
하다못해 하루 운동조차 어제 많이 했으니까,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데, 날이 덥네, 아침에 샤워했는데 운동하면 땀 나잖아 등등 수많은 핑계를 댈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건강 단 하나뿐이다.
수많은 유혹과 걱정을 뿌리치고 하나의 일을 꾸준히 해왔던 차지찬이라면 내 말을 이해 못 할 리 없다.
“난 할래.”
백우진이 숟가락을 핥고는 참여의사를 밝혔다.
주지승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텅 빈 빙수 그릇과 백우진을 번갈아보며 당황한다.
“새로 배울 일이 많겠지만 노하우도 있고 무엇보다 사업성이 확인됐어.”
돈을 벌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처음부터 공장짓고 난리친다고 했으면 안 했을 텐데 마침 지승이 형이 시작한다고 하니까 믿고 맡길 수도 있잖아. 반야식경 쪽에 필요한 인력은 우리 셋에서 파견 보내는 쪽으로 해결하고. 천천히 시작하다가 살 붙이는 방식이면 가능성 있다고 봐.”
나와 주지승, 백우진의 마음은 확인했기에 차지찬을 봄으로써 마지막 확인에 들어갔다.
차지찬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되는데?”
* * *
-어우. 비려.
-아직 많이 남았어요.
-진짜 더는 못 먹겠다. 상규야, 이거 다 치워.
-안 돼요. 다 드세요.
영상 속 차지찬이 11번째 닭가슴살을 먹고 있다.
닭가슴살을 제작, 판매하고 싶다고 하길래 우선 시중에 판매 중인 모든 닭가슴살을 비교해 보라고 했다.
유튜브 콘텐츠로도 활용할 수 있을 듯했는데 역시나 리뷰 영상을 올렸다.
“찬용 씨, 달력에 없던 일정이 생겼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실수입니까?”
묵은지가 방송실로 들어왔다.
“아, 24일, 25일이요?”
“네.”
묵은지가 날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데이트하는 날이라 다른 일정 못 넣게 빈 내용으로 채웠어요.”
“……업무 캘린더에 이런 거 적어놓지 마십시오.”
“엄청 중요한 일이잖아요.”
“소아당뇨협회 활동과 강연은 끝내셨습니까?”
“그럼요. 엄청 신경 썼죠.”
“……대본은 숙지했습니까?”
“읊어볼까요?”
“그제 방송 편집본 피드백도 하셨습니까?”
“그럼요. 점심 때 보냈어요.”
“……크리스마스에도 방송해야 합니다.”
“왜요?”
“반찬가게는 항상 그랬습니다.”
“항상 그랬으니 하루 놀 수도 있죠. 이번 주 내내 하루 쉬려고 힘들게 노력했는데.”
묵은지가 가만히 서서 생각하더니 말없이 문을 밀고 나갔다.
미리 일을 다 해두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