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 day RAW novel - Chapter 250
치팅데이 248.5화
47. 슈가맨(21)
“진심인 것 같지?”
주지승의 말에 나와 차지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리만치 우승에 집착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상금은 핑계고 사실은 이지혜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열심히 하니 됐지. 뭐.”
우리가 가장 염려한 일은 백우진의 우승이 시청자에게 어떻게 비쳐질지였다.
녀석이 평소처럼 뺀질대며 잔머리를 굴려 우승한다면 슈가맨 프로젝트의 취지에도 어긋나고 흥행에도 문제가 생길 터다.
무엇보다 백우진 개인에게 돌아갈 비난 여론도 생겨날 테니 걱정이 많았는데 지난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난 고백이 걱정인데.”
“오히려 좋지.”
차지찬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을 꺼냈다.
백우진의 고백 선언이 슈가맨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나 가볼게.”
“바빠? 차 한잔하지.”
“촬영 전까지 정리할 게 있어서.”
“그래.”
두 사람과 인사하고 내 사무실을 찾았다.
점심부터 백반따라 촬영이 예정되어 있어 그전에 쌓인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어디 보자.”
가장 시급한 일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답변이다.
여러 광고를 진행하면서 정말 다양한 제안을 받고 있는데,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꽤 들여야 한다.
“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제안서는 NBC에서 제작 예정인 해외 먹방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는 나 혼자고 알려지지 않은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흔한 설정이다.
이런 예능은 아무래도 내가 얼마나 말을 잘 풀어내는지에 따라 재미가 결정되어 부담스럽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네.”
고개를 드니 묵은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까지 답을 준다고 해서 확인차 온 듯하다.
“아직 검토 중이십니까?”
“네. 이 먹방 어떻게 생각해요?”
“단독 진행 프로그램은 리스크가 높은 만큼 리턴도 높습니다. 찬용 씨라면 훌륭히 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먹방이 워낙 많잖아요.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백반따라도 진행 중이고.”
“4분기 예정입니다. 백반따라는 3분기에 종영이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반따라 시즌2가 곧 마무리되고.
한 달 정도 쉬었다가 새로운 먹방을 시작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좀 걱정되기도 하네요.”
“익숙해질 겁니다.”
“으음.”
“저는 여러 나라 음식을 먹어볼 기회라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거절하고 싶은데 그것 때문에 망설여져요. 어지간한 음식은 다 먹어봐서 다른 나라 음식도 먹어보고 싶은데.”
“싶은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묵은지의 말은 항상 든든하다.
아무런 근거가 없어도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해볼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다음 제안서를 펼쳤다.
“드라마?”
“뚱뚱했다가 다이어트에 성공한 역할입니다. 찬용 씨 이미지와 들어맞아 제안한 모양입니다.”
“이미지는 그렇다 쳐도 연기는 자신이 없는데.”
“WTV에서 크게 투자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큰 역할은 아니라도 앞으로의 활동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큰 역할이 아닌 건 좋은데. 괜히 폐 끼치는 것 같아요.”
묵은지가 내 결정을 기다려 주었다.
“이건 거절할게요.”
“알겠습니다.”
이후 운동복 CF, 편의점 도시락 광고는 수락했다.
두 제품 모두 좋은 평을 받고 있는지라 광고를 하면 도리어 내 이미지가 좋아질 것 같았다.
“아.”
저번에 WK북스 이창수 편집장으로부터 구두로 제안받은 이야기가 문서화되었다.
“으음.”
내가 결정을 못 하고 있으니 묵은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됩니다.”
“생각 정리하는 느낌으로 써 보면 좋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습니다.”
“요즘 너무 바쁘게 사니까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근데 글재주가 워낙 없어서 고민이에요.”
“생각나는 바를 그대로 적으면 됩니다. 말을 잘하니 글도 매끄럽게 나올 겁니다.”
“으으음.”
“어려운 글보다 진솔한 글이 더 와닿는 법입니다.”
드라마를 거절할 때는 말리지 않았지만 수필은 꽤나 진심으로 권한다.
묵은지 본인이 일기를 쓰며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는 좋은 버릇을 가져서 그런 듯하다.
“네. 해볼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근데 원고를 언제까지 준다는 약속은 못 할 것 같다고 해주세요. 다른 일이 먼저라서.”
“알겠습니다.”
다음 서류를 넘겼다.
“다큐?”
마지막 제안서에는 다큐멘터리 출연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현대인과 비만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비만 인구가 늘어나는 이유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다이어트가 왜 힘든지,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 학술적으로 다룬다고 합니다.”
KBS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인데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건 해야겠네요.”
“알겠습니다.”
묵은지가 제안서를 추려서 챙겨갔다.
“오후에는 백반따라 촬영입니까?”
“네. 서울이라서 다행이지 뭐예요. 촬영도 금방 끝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집에서 봐요.”
뽀뽀하려고 일어나니 묵은지가 제안서로 내 얼굴을 막았다.
“회사입니다.”
내 사무실이고 둘뿐인데 너무 철저하다.
“참. 지혜 팀장은 어때요?”
“오늘 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꽤 사이좋게 지내서 물었는데 아직 속마음까지 터놓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지혜 팀장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우진이가 공개 고백 선언했다고 했잖아요?”
“백우진 이사의 공개 고백과 이지혜 팀장이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우진이가 지혜 팀장 좋아하니까?”
묵은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모양이다.
“몰랐어요?”
“이지혜 팀장의 일방적인 마음인 줄 알았습니다.”
이번엔 내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진짜요? 지혜 팀장도 우진이 좋아한대요?”
“본인은 부정하지만 그런 눈치였습니다.”
“둘이 서로 좋아하는데 어떻게 20년 넘게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어요?”
“이지혜 팀장은 본인이 백우진 이사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백우진이 좀 더 낫다.
아니, 어쩌면 백우진이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방식으로 고백하려는 이유가 이지혜의 둔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중간하게 마음을 표현해 봤자 눈치를 못 채니 공개적으로 말해서 쐐기를 박겠다는 마음 같다.
“어쩐지.”
묵은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백우진이 왜 저러나 싶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상금 때문에 그러진 않을 것 같고. 당뇨 판정 받고도 마음대로 살던 놈이 갑자기 슈가맨에 참가한다고 한 것도 이상하고.”
“아.”
묵은지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두 달 정도 되었을 겁니다. 탕비실에서 이지혜 팀장이 백우진 이사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을 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백우진 이사가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 했는데요?”
“합병증을 걱정했습니다. 제가 찬용 씨는 열심히 관리한다고 자랑하니 백우진 이사가 찬용 씨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백우진이 들었단 말이죠?”
“그런 듯합니다. 이제 기억납니다. 그날이 슈가맨 접수 마감일이었습니다. 백우진 이사가 참가 신청을 한 날도 같은 날이지 않습니까?”
“맞네. 맞아요. 지혜 팀장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였네요.”
모든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아무튼 그럼 두 사람 모두 서로 마음이 있는데 뭔가 꼬인 것 같네요. 지혜 팀장이 걱정해서 한 말을 우진이가 오해한 것 같고. 아.”
“뭔가 또 있습니까?”
“며칠 전에 저한테 이상한 걸 묻더라고요. 당뇨 있는 사람한테 고백받으면 싫지 않겠냐고.”
“저는 좋았습니다.”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한 번 더 뽀뽀를 시도했다가 또다시 서류 더미에 막혔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그때 대화 들었나 봐요. 그러니 저렇게 열심히지.”
“계기야 어떻게 되었든 혈당 관리를 하게 되었으니 백우진 이사에게는 잘된 일입니다.”
“그렇죠.”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 * *
주말 동안 무리한 탓에 몸살이 든 백우진은 형들을 쫓아내곤 약을 찾았다.
오늘 예정된 백반따라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교양 프로그램 게스트에 대해 알아보던 중.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지혜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백우진에게 다가가 서류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보면 알 거 아니야.”
백우진이 기세에 눌려 시선을 내렸다.
우지니어스에서 이번 주에 다룰 콘텐츠를 정리해 둔 대본이었다.
“아. 땡큐.”
백우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지혜는 잔뜩 인상을 쓴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백우진은 영문을 모른 채 당황했다.
“왜 그래?”
“뭐가?”
“왜 그렇게 씅이 나 있냐고.”
“화난 건 알아보네?”
“그니까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내가 아냐?”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이지혜의 입술이 씰룩였다.
한눈에 봐도 쉽게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 뭐! 뭔데!”
“회사에 소문 다 났더라?”
“무슨 소문?”
“너 우승하고 고백한다며.”
“…….”
백우진이 눈을 굴렸다.
공개 고백을 선언한 일로 화가 난 듯한데 대체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공개’가 문제인지 ‘고백’이 문제인지를 두고 고민한 백우진의 답은 ‘고백’이었다.
“근데?”
“제정신이야? 우지니어스, 슈가맨, 조만간 JH에서 다큐도 하잖아. 지금 연애나 할 때야?”
“바쁜 게 뭔 상관이야! 찬용이 형도 하는데!”
“찬용 이사님은 다르지!”
“뭐가 달라!”
이지혜가 잠시 시선을 피했다.
“자기 관리 다 하면서 일도 잘하잖아!”
백우진이 발끈했다.
이지혜의 말 때문에 지난 한 달 동안 더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살아왔기에 더더욱 욱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관리해! 하고 있어! 엄청 잘하고 있다고!”
“그러면 받아준대?”
“뭐?”
“걔가 살 빼고 상금 받아오면 고백 받아준대?”
이지혜가 울먹거리자 백우진이 당황했다.
“뭔 소리야?”
이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씩씩거리다가 돌아섰다.
“야.”
백우진이 손을 붙잡아 돌려세우자 이지혜가 백우진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억.”
“나쁜 자식.”